아주 예전에 썼던 글인데 완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그저 리무스 시점으로 3권을 보고 싶단 생각으로 이어진 연작 정도로 봐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주체할 수 없을 것 같던 검은색의 곱슬 머리카락은 그의 성격을 외모적으로 가장 잘 대변해주는 신체 주요 특징 중 하나였다. 머리털에 비교하자면 더할 나위 없이 성격을 말 해 줄 것 같은 다른 이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항상 적당히 손으로 넘겨버려도 차분하게 가라앉는 검은 머리, 웃을 때 마다 반달처럼 휘어지던 익살스런 눈매 아래로 쭉 뻗은 콧날과 짓궂은 미소, 그리고 언젠가 말했던 그 한마디가 떠올라 그는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가끔 생각하는데 말야, 프롱스.’

‘응?’

‘네가 동물로 변신한 모습이 망아지였어야 했다고 봐.’

 

‘뭐 임마?!’ 곧바로 이어져 온 장난스런 주먹질과 웃음이 떠오른다. 밤마다 곰팡내 나는 습하고 차가운 침대의 시트 위에서 눈을 감기 전 늘 생각하게 되는 기억의 단편이기도 했다. 그는 먼지가 들어간 듯 따가운 눈동자를 깜빡거렸다. 눈을 감으면 저 먼 곳 어딘가에서 감싸쥐고 있던 소중한 빛망울이 툭툭 터지듯 밀려올라오곤 했다. 빗물처럼 모여서 웅덩이가 되어 준다. 그 아지랑이같은 표면 위에 어린날의 모습들이 하나하나 거울에 비추어진 선명한 윤곽으로 자신을 보며 스쳐 지나갔다.

그 웃음과 장난 속에 분명 그는 그들과 함께였다. 평생이 가도록 지워버리지 못할 저주의 일생을 단지 한 달에 한번 뿐인 고통으로 만들어버렸다. 마치 그 나머지 시간들이 축복과 기쁨의 연속으로 물감 칠이 되어있는 것 처럼. 아주 오래전에 선으로 그어버린 정확한 윤곽을 거짓말 처럼 가려주었던.

제각기 저마다 향내와 빛깔을 가지고 머물러 주었다. 아니면 그 자신이 그 향내와 빛에 이끌려 함께 했는지도 몰랐다. 눈을 뜨면 그날 아침의 투명했던 햇살에 맞추어 다시금 빛망울들이 올라오곤 했다. 그렇게 하루 치의 빛을 다 하면 그 다음날에 또다시 망울져 피어 올라왔다.

그는 다시 한번 눈을 깜빡였다. 웅덩이는 연기처럼 부서지고 안개처럼 뭉클하게 피어오르다가 사라졌다.

 

한 손을 들어 두 눈덩이를 손등으로 누르기 시작했다. 지끈거렸던 두통도 이 한 손의 압박과 함께 베개 밑으로 묻혔으면 했다. 눅눅한 이불엔 온기마저도 없었다. 억지로라도 따뜻함을 긁어 모으려는 듯 그는 이불을 감싸 쥐고 웅크렸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이불로 틀어 막듯 가리워진 두 눈의 안쪽에선 세 덩이의 그림자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살랑거리는 꼬리, 바람에 흩날리던 검정 털빛, 참으로 길었던 목, 우람했던 그 뿔, 짧고 통통했던 몸집, 긴 꼬리. 습했던 베갯머리가 기어코는 다시 축축해지고 있었다. 아무도 찾아 오지 않는 허름한 집의 한 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침대 끄트머리에서 그는 소리 죽여 울었다.

하필이면 왜 너희였을까, 하필이면 왜 네가, 하필이면 왜 너를.

침묵으로 감추어진 눈물은 곧 흐느낌이 되었고 흐느낌은 곧 소리 없는 오열이 되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코가 매워지고 가슴에 경련이 와 딸꾹질이 오기 일보 직전이 될 즈음에야 그는 몸을 일으켰다. 어두운 방안으로 방금 막 구름에서 벗어난 달빛이 드리워졌다. 방금 일어난 그의 부스스한 연갈빛 머리칼이 달빛을 받고 바스러질 듯한 서리마냥 비추어졌다. 그는 눈물이 마르지 않은 부은 눈으로 창문을 바라보았다. 싸늘한 늦가을의 날씨 속에 그가 숨을 쉬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은 입가에서 망울져 사라지는 하얀 입김 뿐이었다. 군데 군데 거미줄이 쳐지고 금이 가고 먼지가 끼인 창 밖 너머 칠흑의 하늘 위엔 불안정한 달이 걸려있었다. 만월이 며칠 남지 않았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방금 무너질 듯 숨죽여 운 사람이 아닌 듯이, 굳은 표정으로 그는 심호흡을 했다. 늘 있는 일이고 앞으로도 계속 될 일일 것이다. 행복 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 잠시 잊고 지냈던 숙명이 더 가깝게 다가온 것일 뿐이다. 이제 곧 이 불안정함도 무뎌지고 평온하게 받아 들이게 될 때가 올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초연하게 기다리고 기대하지 않으면 될 것이다. 원래부터 이래야 했던 것이다. 그나마 조금 운이 좋았고 조금 행복했던 시간이 있을 뿐이다. 잠깐 빛나고 사그러들 성냥 같은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한 단어, 한 마디를 마음속으로 되풀이 했다. 그러니까 슬퍼할 겨를이 없다. 내가 슬픈 것은 나의 친구들 때문일 뿐 내 운명 때문이 아니다. 저주 받은 피에 동정 같은 자위 따윈 가질 수 없지.

 

그는 뻐근한 어깨를 조금 돌리고 창가 옆에 놓인 탁자로 갔다. 촛대에 그저 되는 데로 꽂힌 초에 지팡이로 가볍게 불을 밝히고 낡아 헤진 책을 폈다. 오늘 밤은 잠 들기엔 무리일 듯 했다. 보름이 가깝게 다가올 수록 늘 그랬던 일이다. 익숙한 일. 이제는 이 혼자 뿐인 어둠에 익숙해 질 필요가 있었다. 이제서야 비로소 익숙해질 기회가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자세마저 편안하게 잡고 깊숙히 의자에 몸을 묻은 채 독서를 시작했다.


잡식성 독거 오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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