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장을 보면 익숙한 무늬가 있다. 느릿느릿, 이어지는 패턴을 따라 시선을 미끄러뜨리노라면 영원히 그것만을 응시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페인트로 덮인 천장은 발자국 하나 없는 눈밭처럼 희디희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잔무늬가 있었다. 원래 있던 것이 덧칠로 흐려진 것인지, 아니면 페인트칠을 미숙하게 한 것인지 모르게 희미하다. 천장 전체를 덮은 무늬는 빼곡하고 촘촘해 시간을 죽이고 싶을 때 멍하니 응시하기 최적이어서, 토르는 취미 아닌 취미를 보유하게 되었다.



소파에 누운 발끝이 까딱였고, 배 위로 깍지껴 놓인 손가락도 흔들렸다. 의미 없이 흔들리는 발과 손가락처럼 그의 눈도 목적 없이 천장을 헤맸다. 무늬의 한끝에서 시작해 구석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가, 이번에는 아래로 갔다가, 올라왔다가, 멎었다가. 다른 사람이 본다면 당장에 한심하다며 비난할 광경이 이어진다. 그러나 여기는 토르의 집이었고, 토르만 있는 집이었고, 토르에게 말을 건넬 사람은 없었기에, 침묵으로 가득 찬 답답한 행위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 푸른 시선이 천장 중앙에 고정되었다.



“…….”



무늬는 전체를 아우르며 펴져 있었지만, 중앙의 것이 제일 선명하고 독특했다. 의미 없는 선의 교집합처럼 보이는 그것은 이국의 문양 같기도 하여, 만약 저것이 기호라면 무슨 뜻을 담고 있을지에 관한 상상할 거리마저 제공했다. 토르가 제일 선호하는 공상은 저것이 외계의 문자이며 먼 우주 밖에서 미지의 존재가 제게 신호를 보낸다는 것이었다. 우습고 바보 같은 상상이지만 그것에 잠겨 있는 건 퍽 즐거웠다.



토르가 눈에 힘을 주고 천장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하면 저 흐리멍텅한 것들이 정말 글자로 변하기라도 할 것처럼.



그리고 그때,


“야옹.”


부유하려던 정신이 다시 모였다. 이 집 안에서 나한테 잔소리할 생물이 있긴 있었군. 토르는 손깍지를 풀어 오른손이 바닥에 닿도록 축 늘어뜨렸다. 영특한 고양이는 바로 몸짓에 담긴 뜻을 읽어내어 다가왔다. 가벼운 발은 소리를 내지 않아 고양이가 어디까지 왔는지 짐작하지 못하게 했지만, 토르는 작은 동물이 금세 제게 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그의 확신대로 손을 내린 지 일 분도 되지 않아 따뜻함이 닿았다. 보송보송한 털이 한차례 손을 쓸고 지나간 뒤에는 까슬까슬하고 축축한 것도 와 닿았다. 토르가 피식 웃었다. 고양이가 손을 핥고 있다.



“난 그루밍이 필요하지 않아.”



고양이 혀에는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다. 토르는 잔잔하게 웃으며 끈질기게 타액을 묻혀대는 고양이를 밀어내고 쓰다듬었다. 야옹. 불만스러운 울음이 뒤따랐지만 단정한 손끝이 귀 사이를 부드럽게 긁자 가르랑거림만이 남는다. 귀가 납작해지도록 세게 머리를 쓰다듬은 뒤, 토르가 그대로 고양이를 안아 제 위로 옮겼다.



이 작은 검은 고양이는 토르의 다리와 현관문에 집착하는 것과 다르게 가구 위를 정복하는 데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식탁 위나 찬장도 그러했지만, 소파에 오르지 않는 건 참 의외였다. 가벼운 점프 한 번이면 등받이까지 날아오를 것 같으면서도 고양이는 늘 소파 아래에 얌전히 앉아 있기만 했다. 그러다 토르가 이렇게 소파에 누워 있을 때만 다가와 목을 떠는 거였다. 야옹. 아, 그것은 틀림없는 명령이었다. 자신을 당장 위로 옮기라는.



토르는 작은 고양이의 가냘픈 명령을 늘 순순히 들어주었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또 어떻게 피를 볼지 모를 일이었다. 쓰다듬을 수 있는 범위를 알아냈던 것처럼, 이 요구를 과연 몇 번까지 무시할 수 있을지, 몇 번 못 들은 척을 해야 발톱이 날아올지 궁금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고양이가 휘두른 발톱은 피만 많이 불렀지 별로 아프지 않았다-, 이것을 위해 근처를 맴도는 슬픈 야옹거림을 죽 무시하기란 불가했다.



판판한 배 위에 우뚝 선 고양이가 터를 다지듯 복근을 몇 차례 꾹꾹 눌러보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앞발을 내밀고 납작 엎드린 자세로, 꼬리만 세워 살랑거리며 토르와 눈을 마주친다. 털 색만큼이나 까만 동공이 크게 확대되어 있었는데, 토르는 무엇이 고양이를 흥분시킨 건지 알지 못했다. 야옹. 입을 벌려 우는 고양이가 또 제게 뭔가 재촉하는 듯해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자 동공이 훅 좁아진다. 아. 이게 아니야? 토르는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고양이의 가늘어진 동공은 바늘처럼 뾰족했다. 단검의 날 부분과도 비슷하다. 날 찌르고 싶은 거라면 그러지 말라고 부탁하겠어. 깨무는 것도 안 돼. 토르는 짐짓 엄하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는데, 고양이가 귀를 젖히며 알아듣는 것처럼 반응했다. 부루퉁한 얼굴로 고개를 휙 돌리는 것이다. 그 모습에 한 번 더 커다란 웃음소리가 나왔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때,


“음?”


토르가 고양이의 옆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더 정확하게는, 고양이의 눈을.


푸르렀다. 다만 자신의 눈에 있는 푸름과 다른 푸르름이다. 초목의 색이 선명하고도 짙다. 잔잔하고, 맑고, 반짝이는 녹색. 말간 녹색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너, 눈이 초록색이구나.”



토르가 중얼거렸다.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처럼 명치 끝이 아릿해지는 기분이 찾아왔다. 목을 거듭 가다듬어야 했다. 그는 마른세수하며 뺨을 거칠게 문질렀다. 살짝 튼 손이 얼굴에 닿자 까슬까슬하다.



“젠장.”



토르는 머리를 쥐고 혀를 찼다. 고양이가 그렇게나 불평을 늘어놓은 데에도 이유가 있군. 어떻게 지금까지 이 녀석의 눈이 무슨 색인지도 몰랐지? 신음인지 침음인지 애매한 소리가 입술 끝에서 떨어졌다.



토르의 끙 소리가 관심을 끌었는지, 고양이가 고개를 돌려 다시 그를 정면으로 보게 되었다. 날카로운 동공과 뾰족한 눈빛으로 이쪽을 관찰하는 고양이의 눈은 다시 확인해도 녹색이다. 방금 돋아난 떡잎처럼 연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곧고, 동시에 우거진 숲의 한낮을 담은 듯 짙은 녹색. 촉촉한 녹색 눈이 토르를 본다. 그 시선은 마치 사실을 이제 알았느냐며 저를 책망하는 것 같다. 토르는 볼을 긁으며 고양이를 토닥거렸다.



“내가 훌륭한 주인이 되지 못한다는 건 알겠군.”



고양이가 토르의 말을 받았다. “야옹.” 토르의 말에 깊이 동의하는 것처럼 들렸다. 토르는 이마를 짚고 상황이 주는 당혹스러움과 우스움에 실소했다.


“어떻게 이걸 지금까지 몰랐지?”

“야옹.”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이번에는 이런 것처럼 들렸다.


“처음 봤을 때는 분명히……”



토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고양이 발이 배를 꾹꾹 누르는 박자에 따라 그의 기억이 뒤로 감겼다. 얄팍한 추억이 머릿속을 스친다. 갑자기 툭 튀어나온 까만 고양이가 있었고, 차마 쫓아낼 수가 없어 거두었지. 경험해보니 그 고양이는 외모와 다르게 성격이 나빴고. 토르는 감았던 눈을 떴다. 눈꺼풀에 추라도 달린 것처럼 몹시 무거웠다.



“…….”



그게 끝이었다. 믿을 수 없군. 정말? 잇새로 실바람보다 못한 숨이 샜다. 인상 깊은 새까만 털에 홀려서 그랬을까. 털이 까맣다는 것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었다. 토르는 깊이 침묵했다. 이치에 맞지 않았다. 고양이와 대치하며 손가락을 물린 게 몇 번이고, 이마를 톡톡 두드린 건 또 몇 번이고, 눈싸움을 한 건 또 몇 번인가. 발치에 앉아 고개를 젖히고 저를 올려다보는 고양이가 눈에 선했다. 심지어 오늘 아침에도 현관에서 다투었는데.


그런데도 지금껏 눈이 무슨 색인지 의식하지 못했다니.



토르는 고양이를 힐끔 쳐다보았다. 털 난 생물은 제 아래 깔린 사람이 당혹에 휩싸이든 말든 개의치 않는 것 같다. 심드렁하고 나른한 태도에 변함이 없다. 콧바람을 분 고양이가 그를 베개 삼아 드러누웠다.



“야옹.”



한 번 나직이 울었다가 입도 다문다. 짤막한 울음에는 분노가 녹아있지 않았고, 도리어 맞닿은 살을 통해 골골거림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토르의 훤칠한 이마에 주름이 졌다.


고양이는 즐거워하고 있었다. 왜?


“넌 정말 혼란스럽구나. 문제로 가득해.” 토르가 말했다.


그러자 가르랑거림이 더 커졌다. 모터가 돌아가는 듯한 커다란 울림이 고양이를 비롯해 토르까지 진동케 했다. 뭐가 마음에 든 거지. 토르는 진실로 이해할 수 없었다.



열심히 골골거리는 고양이는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토르는 행복해하는 고양이를 괜히 건드렸다가 손에 구멍이 뚫리는 것 대신 배 위의 묵직함을 감당하기로 했다. 손을 머리 뒤로 해 편히 누운 자세를 취했다. 익숙한 스산함이 다가온다. 멍하니 의미 없는 시간을 천장에 허비할 때마다 느껴졌던 스산함. 마치 그림자처럼 몸 아래에서 스멀거리고 발목을 움켜쥐려 하고 빼앗으려 하는 스산함. 가을의 건조함으로 갈라지는 바람에 올라탄 스산함.



사고마저 갇혀 부스러지려던 찰나, 몸을 울리는 고양이의 골골거리는 소리가 토르를 다른 쪽으로 이끌었다. 기분 좋은 한숨과 함께 토르의 눈이 감겼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훅 다가와 그를 바닥 없는 늪으로 빠뜨렸지만, 토르는 악몽에 잠기지 않았다. 귓전을 맴도는 속삭임도, 여러 목소리도 다가오지 못했다. 무겁지 않은 고양이의 존재가 그를 단단히 매어두는 것 같았다. 깊은 바다로 떠내려가지 않게 하는 닻처럼. 그는 저도 모르는 새 까무룩 정신을 놓고 말았고, 놀랍게도 악몽은 찾아오지 않았다. 오롯이 평화로운 잠은 참 오랜만이었다. 기억할 수 없는 머나먼 과거에나 주어졌던 것이었다.



그러나 안락함은 짧았다. 얌전히 감겼던 토르의 눈꺼풀이 마구 요동쳤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고, 모습을 감추었지만 사라지지 않은 선명한 어둠이 토르를 흔들었다. 눈꺼풀에서 손끝, 입술로 불붙듯 경련이 퍼졌다. 곧, 커다란 허덕임과 함께 그가 눈을 떴다.



“헉, 으윽.”



누군가에게 잔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몸이 이렇게 쑤실 수가 있나. 지끈거리는 두통마저 잇따랐다. 토르가 신음하며 눈을 거칠게 문질렀다. 깨어났지만 그를 덮쳤던 경련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눈두덩을 누르고 마른 입술을 쓰는 손이 잘게 떨린다. 초점이 돌아오지 않아 흐린 눈에 검은 덩어리가 잡혔다. 급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 쪽으로 덩어리가 다가온다. 꾹. 발을 내밀어 누른다.



“네가 날 깨운 건 아니겠지?”



정신을 차린 토르가 침을 삼킨 뒤 물었다. 고집 센 고양이가 배 위에서의 휴식에 질린 모양이었다. 본디 그렇게 태어난 것처럼 자연스럽게 몸을 말고 가르랑거리던 것에서 벗어나, 다리에 힘을 주고 서 있다. 가늘어 보이기만 하는 네 다리가 탄탄하게 몸을 받친다. 토르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배와 가슴이 흔들리는데도 불구하고 꼿꼿하게 펴진 네 개의 검은 다리와 덩달아 꼿꼿하게 솟은 꼬리는 휩쓸리지 않으며 곧음을 유지했다. 토르는 멍하니 생각했다. 고양이에겐 잘 깨물고 잘 화내는 것 말고도 재주가 하나 더 있었다. 균형 잡기.



그가 자는 내내 이러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금세 적응한 건지. 고양이는 아주 익숙한 것처럼 균형을 잡으며 서 있다. 토르가 신기해하며 고양이를 계속 살폈다. 갸름한 초록의 눈동자가 관찰에 응답하여, 투명하고 곧은 시선이 또 바르게 날아온다. 불쾌한 것은 아닌데 묘하게 불편해지는 그 시선.



“고양이는 원래 눈빛이 이런가.”



토르는 혼잣말을 했다. 고양이의 시선은 그의 얼굴에, 눈에 고정되어 있었다. 눈을 굴려 천장을 응시해도, 구석의 그늘진 곳을 응시해도 벗어나지 않고 따라붙었다. 입이 바싹 말랐다. 순간, 고양이와 멀리 떨어지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만 내려가는 게 좋겠어.”



그 말간 눈을 보면 안아서 바닥으로 내리는 것이 불가할 것만 같아서, 토르는 고양이를 보지 않으며 손을 뻗었다. 작은 고양이는 직접 내려주지 않으면 절대 먼저 비키지 않았다.



“…….”



부드럽고 따뜻한 털이 손을 간질였다. 토르는 두 손으로 고양이의 몸통을 감쌌다. 여유롭게 잡혔다. 여전히 그의 고양이는 작았다.



“야옹.”



고양이가 그를 불렀다. 열심히 버티던 고집은 어디로 사라져버렸을까. 고양이는 순순히 몸이 잡히도록 놔두었다. 심기가 틀어지면 쌩하니 튀어나가고 바지에 구멍을 내고 손가락을 깨물면서, 토르가 몸을 잡아 드는데도 반항하지 않았다. 토르는 천천히 고양이를 들었다. 손바닥에 고양이의 무게가 턱없는 무거움으로 달라붙었다. 여기에 있음을 알리는 심장박동. 팔에 와 닿는 작은 숨결, 호흡.



“야옹.”


울음소리.


“젠장.” 


괜한 욕설이 또 튀어나왔다. 쳐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작은 생명체를 냅다 치우기란 불가능했다.



토르는 다시 고양이를 보았다. 고양이는 여전히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시선이 그대로다. 가늘어진 동공과 눈동자의 경계가 또렷하고, 눈의 색이 또렷하고, 마음 깊은 곳을 울렁이게 하는 눈빛이 또렷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눈이었다. 어쩌면, 그만을.



“…….”



토르는 손을 풀고 고양이를 내려놓았다. 살짝 들렸던 앞발이 다시 그의 가슴을 눌렀다. 고양이는 눈을 깜빡이며 토르의 가슴 중앙에 대고 발을 눌러댄다. 토르가 머리를 마구 긁었다. 혼란스러웠다. 고양이를 치우고 싶다고 느낀 것도, 고양이를 가까이 보고 싶다고 느낀 것도. 두피를 괴롭히는 것을 포기한 그가 피부가 쓸리도록 마른세수를 했다. 굳은살이 뺨을 따갑게 했다.



그 모습을 지그시 응시하던 고양이가 자세를 풀었다. 배 위에 엉덩이를 대고 털썩 앉더니 보란 듯이 세수를 한다. 토르가 긴장을 풀고 피식 웃었다. 속이 꼬이고 두통이 다시 머리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약을 털어 넣어도 두통은 쉽게 가시지 않을 것이고, 그래도 안 먹는 것보다야 먹는 것이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지만……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이 와중에도 귀여운 녀석을 지켜보고 싶어졌다. 어차피 아플 거라면 그냥 이대로 있는 게 나쁘진 않을 것이다. 토르가 한숨을 쉬었다. 새어나가는 숨이 떨린 것이 느껴진 걸까. 고양이가 세수를 멈추었다. 눈을 크게 뜨고는 한심하다는 기색을 섞는다.



“먀옹.”



그러더니 가슴을 타고 올라와 토르의 턱을 툭툭 두드린다. 먕. 또 울기까지. 느닷없는 상황에 토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고양이가 제게 정신 차리라고 말을 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전조 없는 소나기처럼 우르르 쏟아진 웃음소리는 고양이에게 집중적으로 내렸고, 얼굴 앞에서 고스란히 이를 맞은 고양이가 귀를 젖히고 털을 세웠다. 탐탁지 않은 눈으로 흰 이를 드러내며 웃는 토르를 노려본다. 더 크게 웃자 쉭쉭거리기까지 했는데, 그것이 토르를 더 웃게 했다.



조용하던 공간을 웃음이 틈 없이 채웠다. 배가 당길 정도로 웃어대고 있으니, 토르의 온몸이 흔들렸고 고양이도 이 너울에 휘말렸다.



고양이가 꾸르렁대더니 꼬리까지 부풀렸다. 위협하는 육식동물의 모습으로 한껏 날카로워진 녹색 눈이 불만을 가득 담는다. 토르는 눈물을 닦으며 고양이와 눈을 맞췄고 미소로써 화답했다. 물론, 그런 것으로 화난 고양이의 성은 수그러지지 않았다. 목에서 한 번 더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난다. 하지만 토르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눈싸움을 계속했다. 이상하게도, 피로도 두통도 밀려나 있었다.



인간이 시작한 눈싸움에 고양이도 금세 참전했다. 움찔하지도 않으며 이쪽을 노려본다. 질 수는 없었으므로, 토르는 성을 다해 눈에 힘을 주었다. 피식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에 눈이 감기려는 것도 억지로 붙들었다. 둘의 공방은 제법 오래 이어졌다. 눈이 뻑뻑해지면서 이물감이 아릿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지금 이 상황이 몹시 우습다는 자각을 하면서도 토르는 지고 싶지 않았다. 고양이를 상대로 뭘 열심히 하느냐 묻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음. 그래도.



어긋나지 않고 이어진 시선은 흔들림 없이 유지되었고, 토르는 다시 궁금해졌다. 눈앞의 녹색에 대해서. 선명한 녹색이야말로 검은색보다 배는 개성적이다. 그런데 저는 왜 이 눈을 처음 보는 것 같을까. 왜 새삼스럽고 낯설까. 왜 이전에 고양이의 눈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분명 보았는데도 마치 그것만을 의식하지 못했던 것처럼. 잠들기 전의 의혹이 한층 혼란스러워져 빙빙 돌았다. 아무리 궁리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건 같았다.



“냥.”



길게 이어지는 승부가 끝났다. 갑자기 고양이가 앞발로 뺨을 때렸다. 토르는 반사적으로 눈을 깜빡이고 말았고, 함정에 빠졌다는 걸 알아차렸을 즈음에는 만족스러운 울음이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건 반칙이잖아! 사기꾼 같으니.”



심각하지 않은 어조로 타박하자 고양이가 목을 울리며 만족스러움을 표시한다. 비난을 던져도 좋아하다니. 이 녀석은 정말 이상했다. 어이가 없어진 토르가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시늉을 하려다가 슬쩍 턱 아래로 손을 내렸다. 아, 여지없이 하악질이 튀어나왔다.



풀리지 않는 것을 오래 붙잡고 있으면 머리만 아플 뿐이다. 토르는 고양이를 둘러싼 이상한 것들에 관하여 쓸데없이 긴 고찰을 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하지 않는 게 편할 것이다. 그가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기울어지는 상체에 고양이가 발톱을 세웠다. 옷을 쥐어뜯는다. 바지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거야? 토르는 한탄했다. 작은 발에 걸린 티셔츠가 고무줄처럼 죽 늘어났다. 흰 티에 남은 구멍 자국은 몹시 선명할 것이다.



“쉬이. 그만 나를 놔 줘.”



토르는 이번에야말로 고양이를 들어 바닥으로 내렸다. 침묵의 시효가 지났는지 고양이가 쉬지 않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잘 때만 평화롭구나. 너는 정말 시끄러워. 이런저런 의미로. 토르는 기지개를 켜며 찌뿌둥함을 털어내려고 노력했다. 기지개로도 꿉꿉함이 해소되지 않자 아예 일어나 허리도 비틀었다. 뚜두둑하는 소리가 크게도 났다.


거실 한 가운데에서 몸을 비트는 행위는 고양이에게 재미있게 보인 것 같다. 발 옆에 다가온 고양이가 조용히 그를 구경했다. 그새 마음이 바뀌었나. 만져달라는 거야? 토르가 손을 뻗자 머리를 들이밀며 환영한다. 변덕스럽기는.



“오늘은 그래도 너, 기분이 좋은가 보구나. 첫날 같잖아.”



토르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정말로 아무런 비난할 의도나 다른 어두운 것을 담은 말이 아니었는데, 말의 높낮이나 톤이 문제였을지. 고양이는 바로 찬바람 부는 태도가 되었다. 토르의 손을 꼬리로 찰싹 때리더니 종종거리는 발로 구석을 향해 간다. 토르는 목적 없이 허공에 떠 있는 손을 거두며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겠는가. 그가 고양이의 사고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어깨도 휘휘 돌려보고, 등을 몇 번 두들긴 토르는 자신이 소파에서 시간을 너무 죽였다는 걸 인식했다.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해치워야 했다. 그는 고양이의 밥그릇과 물그릇을 채워주고, 어질러져 있던 부엌을 치우고, 닦았다. 컵 하나까지 깨끗하게 닦자 홀가분했다. 거실로 나오니 구석에 앉아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고양이가 말을 건다.



“야옹.”


토르가 씩 웃었다.


“거긴 완전히 네 지정석이 됐구나. 뭐가 마음에 든 거야?”



검은 고양이라서 구석을 좋아하나. 우습지도 않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 됐어. 토르는 그대로 침실로 들어가려 했다. 문고리를 잡으며 곧 닥칠 방해에 바짝 긴장해 있는데, 발톱이나 이빨이 아닌 어떤 소리가 그의 뒤꿈치를 붙잡았다. 벅벅거리는 이질적인 소리. 나무를 긁어대는 소리였다. 메마르고 거친 신음과 비슷한 것. 이건 아마…… 토르는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다. 어깨너머를 확인하자 열심히 발톱을 가는 고양이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 구석 자리에서, 몸을 쭉 늘리고.



오, 이런. 토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스름에 젖은 책장이 무자비하게 난도질당하고 있었다. 당황한 그가 문고리를 놓고 테러를 저지하기 위해 거실로 입성했다. 다급함이 발을 재촉해 몇 걸음 만에 거리가 좁아졌다. 짙은 고동색의 원목 책장 옆은 이미 고양이 발이 닿는 높이까지 죽죽 줄이 그어져 있었다. 한두 번 할퀴었다고 남을 흔적이 아니었다. 한숨이 났다. 자려고 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들리던 긁는 소리는 침실 문만을 대상으로 한 게 아니었던 듯하다. 또 다른 화풀이 대상이 있었다니. 이 부근에서 자주 어슬렁거리던 것도 연관되어 있겠군. 그냥 구석에 앉는 것 자체를 좋아한다고 여겼는데 아니었어. 토르가 주름진 미간을 문지르며 발톱 갈기에 열중한 고양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도 벽은 안 건드려서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하는 건가? 응? 이 책장은 또 무슨 짓을 해서 네 희생양이 된 거냐? 고양아.”

“야옹.”


고개를 뒤로 젖힌 고양이가 토르를 보고 울었다. 순진무구한 표정이 ‘내 잘못이란 건 없어’를 말하는 것 같다. 그렇게 쳐다봐도 안 통해. 그는 부러 눈을 굴리며 고양이의 귀여운 얼굴을 피했다. 녹색 눈과 까만 동공, 동그랗게 확장된 눈과 발톱을 쏙 감툰 보송보송한 발은 무척 귀여웠으나…… 온통 거스러미가 일어난 책장을 그렇게 단순히 넘길 수는 없었다. 맨질거리는 토르의 눈높이 쪽과 달리 고양이의 실력이 제대로 발휘된 아래쪽은 사포질하기 전 단계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엉망이었다는 뜻이다.



박박 잘도 긁어 놨군. 토르는 손을 내려 책장을 쓸어 보았다. 저를 쓰다듬으려는 줄 알았는지 고양이가 손을 톡톡 때렸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펀치는 가렵지도 않았다.



“이걸 어쩐다.”



한탄이 무겁게 바닥을 적셨다. 계속 건드리면 잔가시가 박힐 것 같아, 토르는 까칠한 표면에서 얼른 손을 떼었다. 그의 발이 무심코 옆으로 움직였다. 책장 옆면과 아래 앉은 고양이만 보이던 시야에 선반과 선반 위의 책들이 들어온다.



책이…… 이렇게 많았었나. 


토르가 밭은 숨을 들이쉬었다.



빽빽한 책들이 눈을 찔렀다. 여유나 넉넉함 없이, 끼워 넣기도 힘들도록 가득하다. 뽑아 제자리에 도로 넣는 데만 해도 근력을 사용해야만 할 것처럼, 책장과 책이 맞물려 있다. 한 권의 책이 제 두께와 무게로 옆 책을 압박하고, 그 옆 책이 옆 옆 책을 누른다. 토르가 다급히 책장을 위아래로 훑었다. 여섯 줄의 선반 위는 책 하나 빠짐없이 정확하게 같은 모습이었다. 애초에 책을 넣어 책장을 짠 것같이, 책이 책장의 일부인 것같이.



책은 한 권 한 권이 두꺼웠고, 책등에 아무런 표시도 없었다. 무언가를 나타내야 하는 자리임에도 새카맣기만 했다. 제목이나, 저자, 하다못해 무늬라도 들어가 있어야 했는데, 그의 책장을 채운 책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토르의 숨이 조금 더 급해졌다. 꼭 맞춘 것처럼 칸칸이 들어찬 무늬 없는 책, 거실 구석에 자연스레 자리하고 있던 책장, 늘 이쪽으로 향하던 고양이와 알아차리지 못했던 자신. 아니, 아니었다. 책장은 분명 거실의 일부였다. 분명…… 본 적이 있었다. 언제? 그게 언제지?



현기증이 일었다. 정신이 멍해진다. 선반에 체중을 기대는 꼴로 토르가 눈을 두어 번 감았다가 떴다. 부유하려는 머릿속으로 흔들거리는 생각들이 스쳤다. 난 두꺼운 책을 좋아하지 않는데. 너무 두꺼우면 펼치기도 싫고, 내용상으로도 호흡이 길어 지루하고. 아니, 애초에 책과 나는……. 손가락이 벌벌 떨렸다.



현기증이 더 크게 밀려왔다. 몸이 휘청였다. 토르는 어금니를 악물고 턱을 바짝 당기고 입 안의 여린 살을 깨물며 버텼다. 쿵쾅대는 가슴을 내리누르려 노력했다. 그리고, 쉽게 잠잠해지지 않은 이 기이한 긴장 속에서, 그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비장해 보이기까지 하는 한 책의 전열과 손이 가까워진다. 거리가 좁아진다. 움직이지 못할 책의 정렬 쪽으로. 못 박힌 듯 그곳에 자리한 종이와 페이지 쪽으로, 어떠한 위협도 가하지 못할 책에 불과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두려움을 선사하는 물건 쪽으로.



검지와 중지가 잔뜩 움츠려진 상태로 전진했다. 먼저 도달한 검지가 손톱을 세워 딱딱한 책등을 두드린다. 그것이 평범한 책이며 진실로 구속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간을 보는 것처럼. 손톱과 하드커버가 만나자 단단하면서 차가운 소리가 선반으로 튀어나왔다. 짧은소리는 선반 너머의 허공으로 날아오르지 못했고, 뒤이어 다른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토르는 안심하며 –무엇에 긴장해야만 했던 거지?- 책등을 문질렀다. 방금 두드린 책등부터, 그 옆, 그 옆의 옆, 그 옆의 옆…… 한 권씩 이동하며 그 선반 줄의 모든 책등을 만졌다. 줄의 모든 책은 같은 질감이었다. 손을 들어 위쪽 선반을 만져 보았다. 그 줄의 책도 모두 같은 느낌이었다. 아래 칸도, 그 아래 칸도, 그 아래 칸도, 맨 밑의 칸도. 모두 같았다. 같은 색과 두께, 같은 느낌.



어떻게 이럴 수 있지? 토르는 황급히 손을 물렸고, 새카만 책들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알지 못한 상태가 이어졌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알 수 없는 책을 굳이 확인하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한 현상을 맞닥뜨리게 된 지금은…….



“야옹.”



고양이가 발 사이에 앉아 있었다. 토르를 이쪽으로 잡아끌었던 발톱 손질이 끝난 모양이다. 고양이가 느릿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통통한 꼬리가 부드럽게 살랑거린다. 토르가 속삭였다.



“너…….”



말은 완성되지 못했다. 머릿속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정리되지 않은 생각에 어떻게 손을 대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토르는 고양이의 진녹색 눈을 응시하기만 했다. 낯설지 않고, 피하고 싶으면서도 계속 바라보고 싶은 눈동자를. 급하던 맥박이 차차 가라앉았다. 현기증이 물러간다. 토르가 입술을 씹었다.


고양이가 한 번 더 울었다.


“야옹.”


토르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책장 두 번째 줄의 정중앙으로 손을 뻗었다. 책 상부를 잡고 힘을 주었지만 탄탄하게 붙잡힌 책은 쉽게 나오려 하지 않았고, 그는 양손을 사용해야 했다. 한 손으로는 양옆의 책을 누르고, 다른 손으로 커버가 만든 틈새에 손가락을 걸어 잡아당겼다. 생각보다도 뻑뻑했다. 안간힘을 써도 아주 조금 빠져나오는 것에 그친다. 손가락이 미끄러지고, 희게 질린 손끝이 아렸다. 하지만 토르는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힘겹게 책을 거머쥐었고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앞표지와 뒤표지도 검었다.



“제목도 없고.”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토르는 괜스레 페이지가 펄럭이도록 했다. 책 두께에 비례해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길다. 묘했다. 손끝을 간질이는 까슬한 커버, 시간을 머금어 끝부분이 바랜 페이지들, 장이 넘어가는 단순한 움직임이 끄집어낸 오래된 종이 냄새.



책은 촉각과 후각과 시각으로 다가왔다. 토르가 마른침을 삼켰다. 아, 미각도 추가다. 혀로 종이 맛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팔락팔락 넘어가던 것이 멎었다. 토르는 대충 아무 곳이나 잡아 펼쳤다. 시선을 고정했다.



“아.”



긴장이 눈 녹듯 사라졌다. 뭔가 싶었는데, 아무것도 아니었잖아? 머쓱해진 토르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책에 실려있는 것은 이야기였다. 그가 아는 이야기. 알다 뿐인가, 그가 아는 모든 이야기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다른 선반 줄의 책도 뽑아 보았다. 흠. 이것도 아는 이야기였다. 토르는 뺨을 긁적였다. 정말 괜히 긴장했군. 맥이 탁 풀렸다. 그러나 찜찜함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의 공간에 눌러앉은 책장이 완벽하게 미스터리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환영할 일이었지만, 이에 관한 구체적인 기억이 없다는 건 정말 이상했다. 토르는 책을 옆구리에 끼고 팔을 꼬았다.



“으음.”



그는 차근차근 머릿속을 뒤졌다. 푸른 눈동자가 살짝 흐릿해지며 현재 아닌 과거로 이동한다. 사소한 것에 신경 쓰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그 시기 자신은 주위를 둘러보지 않았고, 그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도 파악하지 못한 채 앞만 보며 나아갔다. 그것이 무슨 일을 초래하는지도 모르고……. 이 책장이 그때 들어왔다면 인식하지 못할 법도 했다. 토르가 책을 다시 펼쳤다. 알게 되어 다행이었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읽어 볼까. 분명 재미있을 것이다.



토르가 책을 책장에 꽂아 넣으려다 멈칫했다. 어차피 금방 읽을 거, 소파에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지금껏 보이지 않는 것처럼 숨겨져 있던 책장에 도로 넣었다가는 또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공상에 잔웃음이 샜다.



“야옹.”

“슬프지만 이건 네 장난감이 아니야. 그냥 책이지.” 토르가 단조롭게 말했다.



소파에 책을 올린 토르는 고양이가 또 그를 살금살금 따라왔다는 걸 알았다.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토르가 뭘 하는지 관찰하고 있다.



“정말 그냥 책이야. 넌 읽지도 못해. 고양아.”

“야옹.”

“네가 글을 읽을 줄 아는 고양이라면 물론, 이야기는 달라지겠지.”


토르가 고양이를 보며 눈을 찡긋했다. 고양이가 화난 표정을 지었다. 아니면, 질렸다는 얼굴?


“궁금하면 다음에 들려주기라도 할게. 자, 그럼, 소파와 책장을 얌전히 내버려 둬. 제발. 알겠지?”



고양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때맞추어 커다랗게 콧방귀를 뀌었는데, 토르는 검은 고양이가 정말로 말을 알아듣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 고양이는 때때로 영특한 수준이 아니었다. 고양이가 종종 사람의 머리 꼭대기에서 논다는 평을 듣기는 한다지만, 이 검은 털의 고양이는 그보다 좀 더……. 토르가 수염을 문질렀다. 아무튼, 그는 지금 평균 이상으로 똑똑한 고양이의 관심을 돌려야만 했다. 토르가 입술을 모아 날카로운 휘파람을 불었다. 쫑긋, 고양이 귀가 반응한다.



“지금 조금 들려줄까?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흥미진진해. 모험을 떠나기로 한 주인공이 있었지.”



고양이의 눈이 반짝거렸다. 물 먹은 나뭇잎처럼 초롱초롱하게 빛난다. 토르는 또 한 번 의심해야 했다. 정말 이 얘기를 듣고 싶어 하는 거야? 고양이가? 그는 얼굴로 떠오르려는 의아함을 능숙하게 목 뒤로 삼켰다. 내려놓았던 책을 다시 손에 쥐자 고양이의 눈이 더욱 동그래졌다. 토르는 표지를 열어 책을 넘기는 시늉을 했고, 고양이를 소파 위로 올렸다. 얌전하게 손을 받아들인 고양이가 토르의 팔에 뺨을 비빈다.



음.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이 이런 것일까. 토르는 억지로 미소를 유지했다. 머리에서부터 등을 슥슥 만져준 뒤 엉덩이를 살짝 누르자 덥석 소파에 앉는다. 이렇게까지 말을 잘 듣다니. 책에서 고양이가 좋아하는 냄새라도 나나. 토르는 어디를 읽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며 책에 집중하는 척을 했다. 빼곡하게 쌓인 글자에 눈을 고정했다가, 게슴츠레하게 뜨고 고양이를 탐색했다가, 도로 단어와 문장을 보는체하다가. 평소라면 진작에 성을 냈을 고양이는 꼬리만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 눈이 가늘어진다.



“바로 여기야.” 토르는 드디어 적당한 것을 찾아낸 것처럼 밝게 말했다. “얼음 세계로의 모험! 이게 정말 멋진 부분이지.”


고양이의 눈이 더 가늘어지며 거의 감겼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자, 그럼…….”


토르가 팔걸이 부분에 책을 내려놓았다.


“잘 자.”



그는 말이 온전히 떨어지기도 전에 침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고양이가 눈을 치켜떴지만, 시야에는 펼쳐진 책만 있을 뿐, 이를 읽어야 하는 사람은 없었다. 고양이는 소파 등받이로 기어올라 황망하게 닫힌 침실 문을 바라보았고, 씨근대며 작은 가슴팍을 격렬하게 떨다 원망의 울음을 터트렸다.


문 안쪽에서는 토르가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오, 이게 정말 통했어.








희끄무레한 어둠이 집을 서늘하게 했다. 닫힌 문 안에서 작게 들리던 웃음소리마저 그친지 오래다. 온 집안에는 적막이 흘렀다. 고양이는 계속 그 자리에 앉아 책을 바라보고 있었다. 책은 페이지가 위로 부풀었을 뿐 토르가 펼쳐놓고 들어간 그대로였다. 그때 고양이의 귓가에 적막을 깨는 것이 잡혔다. 억눌린 신음. 녹색 눈이 문 쪽을 흘낏한다.



“…….”



시선은 잠시였다. 흥미를 잃은 고양이가 재차 고개를 돌리고 책에 몰두했다. 아예 가까이 다가가 앞발로 툭툭 건드리기까지 한다. 말랑한 발바닥이 페이지를 누르고, 뒤이어 발톱이 튀어나와 종이를 긁는다. 정확하게 한 방향 –오른쪽 페이지 하단-을 괴롭히는 그 모습은, 인간으로 따지자면 다음 장으로 페이지를 넘기고자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털이 복슬복슬한 발과 동그란 발바닥은 얇은 종잇장을 제대로 잡아 넘길 수 없었다. 거듭되는 시도는 책을 점점 뒤로 물러나게 했고, 곧 침실에서 들려오던 앓는 소리보다 배는 크고 묵직한 소음이 느슨하던 공기를 깨뜨렸다.



책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고양이는 소파 위에서 고개를 숙여 팔락팔락 넘어가는 페이지를 쳐다보았다. 발톱 자국이 남은 페이지부터, 휘리릭 넘어가는 다음 장, 그 다음 장, 그 다음 장…….



전부 백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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