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가요?”

“…….”

“혹시 도망?”

세현은 그저 입을 다문 채 눈앞의 상대를 갑갑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몇 번을 봐도 강태경이 맞다는 사실에 걷잡을 수 없게 착잡해지는 것은 물론, 머릿속마저 엉켜 돌았다.

하필 걸려도 얘한테….

태경은 여러모로 유명했다. 입학 당시부터 그랬다. 철학과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외모가 일단 가장 첫번째였고, 그 다음은 꼴통 같으면서도 의외로 개차반이 아닌 성적으로. 처음 입학 당시 뭐 저런 신기한 애가 들어왔냐고 입을 모아 웅성거리던 사람들에게 어느 순간 태경은 호감을 사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분명 자신의 외모를 한껏 활용할 줄 아는 뻔뻔함 덕분일 거라 세현은 자신의 코 앞에서 눈웃음 짓고 있는 상대를 보며 생각을 했다.

“쫄기는.”

다소 빈정거리는 말투에 세현의 미간은 찌푸려졌고, 태경은 그 모습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소문 안 내요.”

태경이 붙잡고 있던 세현의 손목을 살며시 놓아주자마자 세현의 입에서는 한숨부터 터져 나왔다. 완전히 침대에서 일어난 태경의 나체가 세현의 한숨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태경은 세현을 등지고 서서 쭉 기지개를 켰다. 쭉 뻗어 보기 좋은 몸의 근육이 햇빛 아래 뽐내듯 움직였다. 세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뻐근한 목 언저리를 잡고 두어 번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던 태경이 고개만 돌려 세현을 쳐다봤다. 골치 아픈 듯 얼굴을 구기고 있는 세현과 눈이 마주치자 태경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자주 봐요, 조교님.”

그 말과 함께 태경은 욕실로 사라졌다. 그리고 태경이 눈앞에서 사라지자마자 세현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

2학년 과대 옆에 서 있는 태경은 대놓고 흥미롭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세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픽 웃기까지 하는 게 꽤 노골적이었다. 세현은 난감하면서도 한편으론 짜증스러운 복잡한 심정으로 태경의 시선을 외면하기 바빴다.

“어, 그래…. 너희 학년 애들한테 잘 공지해주고.”

용건이 끝난 세현이 고개를 돌리자, 그만 가보겠다며 2학년 과대가 인사를 건넸다. 그 옆에 서 있던 태경은 곁눈질하던 세현과 눈이 마주치자 씩 웃어 보였다. 어딘지 도발하는 시선을 피한 세현이 입술을 씹었다. 곧이어 기다란 손가락이 파티션 윗부분을 툭툭 두드리는 소리에 세현이 고개를 들었다. 길쭉한 손가락마다 끼워진 굵직한 반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고, 거기서 시선을 더 들어 올리자 예상대로 태경의 얼굴이 보였다. 제 친구인 2학년 과대는 이미 가고 없는데 이 자식은 왜 아직 여기 있을까. 세현의 그러한 생각을 읽어 내기라도 한 듯 태경은 바람 빠지듯 웃었다. 시원하게 뻗어 올라간 태경의 입매는 꽤 매력적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세현에게는 그저 불편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바빠요?”

아예 파티션 위에 팔을 걸쳐 올리고 자리를 잡은 태경의 물음에 세현은 한숨부터 나왔다. 태경이 가볍게 손을 움직일 때마다 손목에 찬 여러 개의 팔찌가 위아래로 움직이며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세현은 태경의 손목을 보며 정신없다고 느꼈다. 굵은 은색 메탈 팔찌와 얇은 끈으로 된 여러 개의 팔찌, 거기에 시계까지. 귀에는 피어싱, 손가락에는 반지, 손목에는 팔찌로 가득했다. 제 몸에 빈틈이라고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기세인 화려한 착장. 태경은 지나치게 화려한 놈이었고, 그래서 늘 눈에 띄는 놈이었다. 세현은 하필 그런 놈과 엮인 것이었다.

“나 할 말 있는데.”

“…나중에 해.”

“나중에 언제요?”

“…….”

“많이 바쁜가 보네.”

“…….”

“조교님, 배 안 고파요?”

“…….”

“근데 아까 왜 먼저 갔어요?”

“…….”

“와. 너무하네. 대답 안 해 줄 거예요?”

파티션에 늘어지듯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운 태경이 곧 학과 사무실을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끈질기게 굴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순순히 물러서는 게 의외로 불안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려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세현은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갈증으로 인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까 술은 적당히 마셨어야죠.”

막 학과사무실을 나오자마자 등 뒤에서 예고도 없이 튀어나온 목소리가 세현을 붙잡아 세웠다. 관자놀이 부근을 꾹 누르고 있던 세현은 깊게 눈을 감았다 떴다. 목소리의 주인을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뻔했기 때문이다.

“또 너냐.”

“왜요? 그럼 다른 누구 기다리고 계셨나?”

“…….”

“그래도 그렇지 표정 너무 한 거 아니에요?”

“…….”

“나 조교님 주려고 이것도 사왔는데?”

“…….”

“아, 팔 떨어지겠네.”

태경은 세현에게 바로 앞 자판기에서 뽑아온 음료수 캔을 내밀었다. 입가에 걸친 태경의 가벼운 미소가 영 못미더웠다. 태경은 세현이 음료수를 받아갈 때까지 길을 막고 서 있을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이 태경이 내미는 음료수 캔을 세현이 마지못해 받으려고 할 때였다.

“아 참, 조교님. 그거 알아요?”

“…….”

“어제 자면서 유영환 교수님 이름 부르던데.”

세현은 그대로 굳어 태경을 올려다봤다. 말 그대로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단지 성적 취향을 들킨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손끝이 차가웠다. 세현은 애써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고 했으나 이미 그의 얼굴에 깃든 동요를 알아차린 태경이 가볍게 소리 내 웃었다.

“뭘 그렇게 놀래요.”

“지금 무슨….”

“나는 조교님이 교수님한테 너무 시달려서 그런가 했지.”

“…….”

“꿈에 나올 정도로.”

태경의 시선은 천천히 세현의 얼굴을 살폈다. 미세한 변화라도 놓칠 수 없다는 듯 집요한 시선에 세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태경의 말투는 가벼웠으나 어딘지 의미심장했다. 세현은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경이 가볍게 웃으면서 허리를 숙여 세현에게로 다가갔다. 세현이 움찔 뒤로 한발 물러섰다. 태경의 얼굴이 어느새 세현의 귓가에 가까이 닿았다.

“아니면 혹시 둘이 사귀나?”

태경이 세현의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어딘지 즐거운 듯한 목소리였다. 세현의 발아래로 떨어진 시선이 불안하게 바닥을 돌아다녔다.

“근데 유영환 교수님 재혼하시지 않았나?”

“…….”

“어디 가서 그런 실수하지 말라고 미리 얘기해주는 거예요.”

태경은 친절하게 세현의 손에 음료수 캔을 쥐어주며 “시원할 때 마셔요. 목말라 보이는데.” 속삭이고서 멀어졌다. 얼핏 듣기엔 친절한 목소리였지만, 세현은 손바닥에서부터 감싸오는 한기에 눈을 꽉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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