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때 그쪽 공기는 좀 달라? 공기는 모두가 공유하는 공평한 자원이라지만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아니다. 일반인들이 사람 급 나누면 천박해 보인다고 욕먹지만, 연예인들의 등급은 고기보다 더 세세하게 매겨진다. S급부터 등급도 매겨지지 않는 최하위까지.. 그걸로 캐스팅이며 광고 몸값이며 다 정해지는데 어떻게 급을 안 나눌 수가 있겠어?





잠깐 일등 자리에 앉았던 소속사 동생이 머쓱한 얼굴로 내려와 옆자리에 앉았다. ‘진짜 1등도 아니고 그냥 의자인데 심장이 막 쪼그라드는 거 같아요’ 1등부터 101등까지 칼같이 순위가 새겨진 의자들을 돌아봤다. 뭉뚱그려 알파벳으로 묶는 등급이 차라리 인간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노골적인 줄 세우기에 가슴이 꽉 막힌 거 같다가도 어쩌면 나도.. 하는 기대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이 프로그램 출연자들은 조울증 안 걸리는 게 더 이상할 거야.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나간다는 걸 엄마가 이모한테 말했는지 열 살 차이 나는 사촌 형이 밥 먹자고 불러냈다. ‘나도 원하는 직무는 아니지만 이 업계에서 일하는 걸로 어느 정도는 만족하고 있어. 승연이 너 노래도 만들고 한다며. 꼭 아이돌을 해야겠냐? ‘ 그때 뼈저리게 느꼈지. 이건 일반인들한테는 죽어도 이해시킬 수 없는 감정이라고. 사실 다른 길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야. 해외 활동이 막히고 혼자 한국에 남아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을 때... 정말 뭐든 했다. 곡도 쓰고 커버 영상도 찍고, 방송도 하고, m사 래퍼 오디션까지 봤다. 그렇게 바쁘게 살다가도 문득 답답해서 토하고 싶은 기분이 들 때마다 타투를 했다. 적어도 살갗에 바늘이 박히는 그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도 안 들어서. 사실 하면서도 알고 있었어. 몸에 그림 좀 그린다고 해갈될 그런 종류가 아니라는 걸.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나왔습니다.’ 사전 인터뷰를 따는 작가와 피디의 표정이 심드렁했다. 백 한명 중 반은 이 비슷한 소리를 했겠지. 하지만 마지막이 같지는 않다. 백한 명 인생이 다 제각각인데 어떻게 끝이 같을 수 있겠어. 누구는 1등이 되고, 누구는 탈락한다. 이건 필연이다.





합숙소에 들어가기 전에 짬을 내서 이전 시즌 방송을 돌려봤다. 예능처럼 한두 회 볼 때랑은 달리 각 잡고 시청했더니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게 보였다. 간절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누구도 일찍 탈락하고 싶지는 않을 거다. 독기로 가득 찬 연습생들의 눈을 보면 어쩐지 질리는 기분이 들었고, 그들은 어김없이 탈락했다. 떨어질지도 몰라... 연습생들이 저마다의 불안과 걱정을 토해내는 장면에서는 결국 티비를 껐다. 대중이 보고 싶어 하는 건 데뷔하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도, 보는 사람까지 힘 빠지게 하는 우울한 멘트도 아니다. 열심히는 하되 욕심은 없는, 피 말리는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유쾌한 사람이 되기로 했다.





처음 봤을 때는 저렇게 생겨야 아이돌 하나 싶었는데 은근 수더분한 성격이라 좀 놀랐다. 연습실 구석에 떨어진 트레이닝복을 누가 집어 들고 ‘이거 우석이 형 거 아니에요?’ 물으면 어 고마워. 하고 받아 들고는 발 옆에 대충 투척. 깔끔하게 치우고 살 것처럼 생겨서는 되게 잘 어지르고 다닌다. 사실 B등급이 썩 만족스럽지는 않다. 좀 더 잘 해서 A반을 갔으면 주목받을 기회가 더 있었겠지 싶어서. 완전 잘 하는 것도, 그렇다고 못하는 것도 아닌 B는 어쩐지 좀 애매하잖아... 나도 애매하게 끝나버리는 건 아닐까 겁이 나. 스스로를 좀먹는 생각이 들 때마다 아무나 붙잡고 장난을 쳤다. 처음에는 ‘저한테 왜 이래요’하는 얼굴로 얼떨떨하게 받아 주던 연습생들이 이젠 ‘저 형 좀 또라이야.’ 한다. 기분이 나쁘지도 좋지도 않다.





물 좀! 목도 좀 말랐고 장난 반으로 제일 가까이 있던 김우석한테 손을 내밀었더니 되게 열심히 받아준다. 오버하면서 마시다가 질질 흘렸는데 나중에 보니까 걔가 바닥 다 닦고 있었다. 말은 별로 없는 거 같은데 가만히 보면 여기저기 다 끼어있다. 얼굴 반은 가리는 동그란 안경이 콧잔등에 걸려 있는데 올릴 생각이 없나 보다. 올려주고 싶다. 볼 때마다 거슬려... 그 생각을 한 스무 번쯤 했을 때 공식적인 연습이 끝났다. 아직 안무 못 딴 애들은 좀 더 남아서 하고 대부분은 방에 돌아가기로 했다. 쪼그만 뒷모습이 제일 먼저 멀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안경은 올렸으려나... 뒷모습으로는 알 수가 없고, 따라잡아서 같이 걷기에는 명분도 없고 의지도 없다.





아직 좀 쌀쌀하네. 걷었던 맨투맨 소매를 내리고 비니를 고쳐 썼다. 방금까지 웃고 떠들었는데 잠깐 혼자가 되니까 또 축 가라앉았다. 곧 레벨 재조정을 할 거고 단체 무대를 찍을 거고, 그 뒤로는 여러 평가 무대를 준비하겠지. 앞으로 뭘 할지는 알지만, 내가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대책 없이 막막한 기분. 발밑이 쑥 쑥 꺼지는 거 같아. 걔도 지금 이만큼 힘들까? 두서없이 김우석이 떠올랐다. 힘들었던 걸로 치면 걔가 일 등일 텐데. 얼마나 불행했는지로 경쟁하자는 건 아니지만... 암튼 난 명함도 못 내밀 듯.





배틀 평가 조가 결정됐다. 선택 당하는 입장이라 가만히 있었는데 막상 모여 보니 밸런스가 괜찮은 거 같았다. 기특해서 동현이 뒤통수를 몇 번 쓰다듬어 줬는데 그때마다 질색을 한다. 생긴 거랑 다르게 귀여움 받는 거 질색하는 상남자 스타일이란 말이지. 연습은 순조로웠다. 안무 따는 것도 금방. 동선 짜는 것도 금방. 세진이가 좀 힘들어 하는 것 빼고는 별문제도 없었다. 그마저도 본인이 죽어라 연습하는 게 보여서 다들 열심히 도왔다. 하도 연습을 했더니 최소 다섯 가지는 넘는 곡이 동시에 틀려 있는데도 우리 곡만 귀에 때려 박힌다. 쿵쿵 울리는 연습실 바닥에 얼굴 대고 자는 것도 가능할 만큼 지쳤을 때가 돼서야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정말 다들 절박하구나. 하는 걸 여기서 또 실감.





사실 그러면 안 되는데 연습용 태블릿으로 제일 많이 하는 게 커뮤니티 눈팅이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미자 애들이 하나 둘 모여서 뭘 열심히 보길래 나도 보자며 다가갔더니 시훈이 표정이 좀 미묘하다.




“ 아, 형은 안 보는 게 나을 거 같은데... ”


“ 에이, 뭔데? 또 엽사 올라왔어? ”




뭘 봤길래 분위기가 이래. 넘겨받은 태블릿 화면을 무심하게 내리다 멈칫했다. 댓글이 사백 개가 넘는 게시물 제목에 내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첨부된 이미지랑 동영상을 다 재생해서 보고 마지막 댓글까지 읽고 새로 고침 했더니 그 새 밑에 스무 개는 더 달린 것 같았다. 솔직히 진짜 웃을 기분 아니었는데 어린애들이 눈치 보는 게 느껴져서 억지로 웃어주고 방음실에 들어왔다. 아주 거짓말은 아닌데 곧이곧대로 수긍하기에는 억울한 기분. ‘그때랑 지금은 달라요‘ 소리쳐도 과거는 달라지지 않는다. 손에 쥔 게 다 부질없이 느껴져. 숨넘어갈 때까지 연습해봤자 소용이 있을까? 한창 연습할 시간에 틀어박혀서 민폐 끼치고 싶지는 않은데... 내가 남들을 생각해 줘봤자 남들이 날 생각해줄까? 삐뚜름한 마음이 고개를 든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방음실 문이 느리게 열렸다. 누가 총대를 메고 데리러 온 거겠지.



김우석이었다.



“ 물 줘? ”


“ ..... ”




대답 없이 손을 내밀었더니 비장하게 물병을 수직으로 꽂아주는 거. 허. 솔직히 좀 어이없어서 웃었다. 돌아오는 건 ‘울다가 웃으면 거기 털 나는데.’ 하는 심상한 대답. 좀 억울해서 ‘안 울었어’ 그랬는데 꽉 막힌 게 영락없이 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 사람은 누구나 변해. ”


“ ..... ”


“ 너가 그때랑 지금이 다른 것처럼... 지금 떠드는 사람들도 나중엔 다를 거야. ”



아. 진짜 울게 생겼다. 발음은 또 왜 그렇게 좋아서... 크게 말하지도 않았는데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더니 바닥에 눈물이 그대로 후두둑 떨어졌다. 얼굴은 안 보여도 등 움찔움찔하는 건 다 보이겠지. 이제 어디에 뭐 난다고 놀려도 할 말 없게 생겼다.



“ 적당히 울고. ”


“ .... ”


“ 대책 없이 울면 목 메어. 너 메인보컬이잖아. 노래는 누가 부를래? ”



다정한 위로로 시작해도 마무리는 프로페셔널한 지적. 무방비하게 눈물을 쏟게 했다가 또 쏙 들어가게 만드는 마법. 똑같은 사람인데 왜 이렇게 새로워? 난 볼 때마다 네가 신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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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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