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밍 타임 15




정국에게 선약이 있어 조금 늦을 것 같지만 꼭 만나자는 답장을 보냈다. 어차피 스폰서와 세 번까지는 그냥 만나기로만 한 터라 오늘도 식사만 가볍게 하고 금방 헤어질 생각이었다. 정국은 그럼 카페에서 만나자고 했다. 학교 근처는 아니고 집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조용한 카페였다. 알았다고 답한 지민은 학교에 들렀다가 약속 장소로 향했다. 날씨가 꽤 더워졌는데도 몸이 으슬으슬하고 추웠다. 남자와 단둘이 룸에서 식사하는 동안에도 추워서 에어컨을 꺼달라고 해야 할 정도였다.


“어디 아프세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히트사이클 전날은 너무 위험도가 높았다. 역시 다른 날 만나자고 하는 게 나았을지도 몰랐다. 철저한 을의 입장으로 거절하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할 일은 빨리해버리고 끝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더군다나 지금껏 억제제만 먹으면 금방 괜찮아졌기에 안일했다. 그러나 오늘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다. 지민은 실수하지 않기 위해 더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실수로 페로몬이라도 흘렸다가는 끝장이었다. 보통 억제제를 먹으면 페로몬 수치가 확 낮아져서 흘릴 확률이 적긴 한데, 알파가 작정하고 페로몬을 풀면 견디기 힘들 수도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남자가 잠깐 나간 사이 지민은 억제제를 꺼내 먹었다. 돌아온 남자가 이만 나가자고 했다. 일어서던 지민이 휘청거렸다. 놀란 남자가 지민의 팔을 잡아 줬다. 반사적으로 뿌리친 지민이 멈칫했다. 그러나 몇 발짝 가지 않아 지민은 혼절하고 말았다.


지민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세 시간이 지난 후였다. 1인 병실에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무렵 남자와 의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의사는 억제제를 과복용해서 기절한 것 같다고 했다. 지민은 절대 과용하지 않았고 평소 히트사이클 전날 먹던 대로 1일 3회를 먹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지민이 다니는 병원이 아니었고 남자도 있어서 지민은 선뜻 제 상태를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이미 실신한 사이 검사했다면 거짓말도 소용없을 것 같긴 했다. 남자가 눈치를 챘는지 잠깐 나가 있겠다고 했다. 지민은 자신이 형질 변화를 겪고 있다고 간단하게 말했다. 의사는 그럼 형질이 자리 잡기 전에는 억제제 자체가 잘 듣지 않으니 약보다는 알파와의 성관계를 통해 푸는 것이 좋겠다고 알려 줬다. 어떤 의사가 보든 지금 지민의 상태에서는 알파와 섹스하는 게 최고의 처방인 모양이었다.


의사가 나간 후 지민은 휴대폰을 찾았다. 동그라미와 약속한 게 8시였다. 지금은 10시가 넘었다. 급히 가방을 열어 휴대폰을 꺼내자 부재중 전화 1통과 메시지 하나가 있었다. 지민이 선약이 있다고 했기 때문에 방해하지 않으려고 우직하게 기다린 모양이었다. 9시 반쯤 전화하고 바로 메시지를 보낸 듯했다.


카페 문 닫는대서 집에 가 있을게요. 집에서 봐요.


한 시간 반이나 기다렸을 정국을 생각하자 손이 떨렸다. 떨리는 손으로 지금 가겠다고 답장하자 곧바로 정국에게서 답이 왔다. 네. 한 글자였지만 애타게 기다렸다는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


남자가 들어왔다. 지민은 급히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했다. 남자와 지민이 병원 로비를 나왔다. 지민의 차는 식당에 그대로 주차되어 있다고 했다. 택시를 잡으려는데 남자의 운전기사가 먼저 왔다. 태워 주겠다는 것이었다. 지민은 거절했지만 남자가 할 말이 있다며 타라고 했다. 지민도 마음이 급한 상황이라 남자와 같이 뒷좌석에 앉았다. 가는 동안 남자가 입을 달싹이는 것을 느낀 지민은 아무래도 의사에게 제 상태를 전해 들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재벌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자신이 제대로 사람 취급도 받기 힘든 오메가라 그런 건지 몰라도 형질 변화 중인 것까지 아무렇게나 알려지는 게 서글펐다.


계속 창밖을 보다 보니 집 앞에 도착했다. 지민은 왠지 스폰서가 할 말을 아낀 듯한 기분이 들었다. 히트사이클 직전의 오메가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보내 주는 것도 이상했다. 내리기 전 남자가 말했다. 다음에 만날 때는 호텔이라고. 지민이 대답하지 않는 사이 운전기사가 먼저 내려서 문을 열어 주었다.


지민이 걸어가는 동시에 차는 떠났다. 입구로 들어가려던 지민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정국이 서 있었다. 놀란 지민이 움찔하며 가방을 떨어뜨렸다. 집에 가 있겠다고 해서 당연히 집 안에 있을 줄 알았지 이렇게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천천히 허리를 숙인 정국이 바닥으로 떨어진 가방을 주웠다. 그러고는 올라가자는 듯이 쳐다봤다. 어두워서 정국의 눈빛이 잘 보이지 않았다. 먼저 올라가라고 뜻인 건지 정국이 계속 서 있어서 지민은 할 수 없이 계단을 올랐다. 정국은 지민의 뒷모습을 보며 지금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것을 대충 눈치챘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오자마자 정국이 물었다. 지민이 사정을 설명하려는데 이미 마음이 상한 정국은 말할 틈도 주지 않았다.


“저 남자와 있었어요? 지금까지?”

“정국아. 그게..”

“형이 약속 깰 사람이 아닌 거 알아요. 그래도 대체..”


뭘 하고 있었기에 두 시간 넘게 연락조차 없었던 건지 모르겠다. 심지어 정국이 한 시간 반을 기다리다 못해 전화하고 메시지를 남기고도 30분이나 더 지나서 답을 해왔다. 그 시간 동안 대체 왜 연락하지 못한 건지 정국은 불안했다. 이유가 듣고 싶었지만 막상 듣는 것도 두려웠다.


“그 남자 계속 만날 거예요?”


얼마 전 드라이브를 했을 때도 차마 묻지 못했던 말이었다. 공연 마지막 날 지민과 그 남자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본 이후부터 정국은 내내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러나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상처받은 것 같은 정국의 눈동자를 보던 지민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미 무용단이 후원을 받았으니 이제 남은 건 대가라는 이름으로 치러질 저의 희생이었다. 스폰서가 얼마나 저를 오래 원할지는 모르겠지만 지민도 받은 만큼만 해주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지민은 더 비참해지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저는 오메가라서 괜찮다고, 그렇게 해도 된다고 스스로 위로하려 했었다. 애써 섹스 정도는 연인이 아니라도 할 수 있는 거라며 억지 세뇌를 하려 애쓴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나아진 것처럼 느끼고 싶었다.


계속 만날 거냐고 묻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정국은 오늘 처음 그 남자를 본 게 아닌 것 같았다. 지민이 혹시 전에도 본 적 있냐고 물었다. 정국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마지막 날 공연을 보러 갔다가 함께 있는 모습을 봤다고 말이다. 


“약속 못 지킨 건 미안해. 할 말 있다고 했지. 해.”


지민이 말을 돌렸다. 들킨 것이 미안했고 사실대로 말하기가 싫어서였다. 상황이 저를 그렇게 몰고 갔지만 그런 제의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정국이 알면 실망할 것 같았다. 몸이 나른해서 어서 씻고 침대에 눕고 싶기도 했다. 쌀쌀맞게 굴고 싶진 않았는데 정국을 피하려는 마음에 무심코 그랬다.


“내일 힛싸 예정일이잖아요. 몸은 괜찮아요?”

“괜찮아.”


방금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지만 지민은 거짓말을 했다. 제 몸 하나 못 챙기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컨트롤할 수 없는 페로몬 문제여서 어쩔 수 없는데도 제 몸이 제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짜증이 났다. 지민이 길게 내려온 앞머리를 쓸어내렸다. 일방적으로 약속을 깼는데도 몸 걱정부터 해주는 정국을 보자 더 미안해졌다. 정국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입술을 뗐다.


“그 남자 왜 만나요. 안 만나면 안 돼요?”

“...정국아.”

“사귈 거예요? 아니, 벌써 사귀는 거예요?”

“단장님께 소개받았어.”


이미 정국이 그날 본 이상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물론 사실이란, 소개받은 것에 한정되어 있었다. 후원 같은 건 어린 정국이 알 필요 없는 어두운 것이었다.


지민은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저번부터 계속 말하려고 했지만 못했던 말이었다. 이 기회에 정국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게 나을 듯했다. 더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고 할 생각이었다. 그래야 서로 착각하고 있는 이 미묘한 감정이 더 싹을 틔우기 전에 잘라낼 수 있을 테니까.


“앞으로 더 만나 보려고.”


이어진 지민의 말에 정국은 지금까지의 예상이 다 맞았음에 절망했다. 비관적인 상상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이제 지민이 저를 끊어내려고 한다는 것까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할 말 더 없으면 먼저 씻을게. 오늘 너무 피곤해.”


지민은 이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오늘 할 말이 있다던 정국의 카톡에 마음이 두근거렸던 것도 사실이었다. 뭐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뭔가가 일어날 것만 같은 두근거림이었다. 몸이 저절로 느꼈던 예감을 무시한 지민이 욕실로 걸어갔다.


정국은 묘하게 걸음이 불편해 보이는 지민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 뒤따라 들어올 때도 느꼈다.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 남자와 오랜 시간을 같이 있었다고 생각하자 자꾸 상상하고 싶지 않은 것이 상상되려고 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정국은 자신이 알파와 거리를 유지하라고 했지 베타에 대해서는 일러두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차피 돌려 말한 거였고 결국 나 말고 다른 남자는 만나지 말라는 뜻이었지만 지민이라면 표면적인 의미의 약속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베타는 만나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만난다는 남자, 베타예요..?”

“...이젠 우성 발현 때까지 네가 안 도와줘도 돼.”

“베타가 알파 맛을 안 오메가를 만족시켜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사람 알파야. 미안해. 약속 못 지켜서. 그러니까 우리 이제 그만하자.”


알파라는 말에 정국은 눈앞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며칠간 많은 생각을 했고, 지민이 그 남자와 잘해 보려고 하는 것을 느끼면서도 고백하려고 했었다. 다만 이 관계마저 깨져 버리고 영영 못 보게 될까 봐 자꾸 고백을 주저하게 되었다. 그래도 더는 미루지 않고 오늘은 고백하고 싶었다. 지민을 만나면 형을 좋아한다고, 진지하게 연애하고 싶다고 고백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차였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이제 그만하자는 말부터 들은 정국은 참담했다. 


정국의 표정을 본 지민은 죄책감을 느꼈다. 히트사이클이 터진 건 정말 어쩔 수 없었다지만 둘의 사이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게 애초부터 잘못 같았다. 시작하기 전에 접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시작해 버린 건지도 몰랐다.


“좋아해요.”


정국의 말에 지민이 저도 모르게 손을 뒤로 뻗어 벽을 짚었다. 은연중에 혹시 정국이 저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정확히는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던 지민이었다. 어느새 약간 유사 연애하듯 굴면서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스폰서라는 존재가 나타난 후 지민은 현실에 던져졌다. 정국과 제가 하고 있던 연애 놀음이 꿈같은 것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저는 깨어났지만 아직 깨어나지 못한 것 같은 정국을 보던 지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형이 나 안 좋아해도 괜찮아요. 지금 당장 좋아해 달라고 안 할게.”

“정국아. 그게 무슨...”

“그냥.. 그만하자고 하지 마요.”


어른이 된 동그라미는 더는 울지 않았지만 지금은 울고 싶었다. 여기서 울었다가는 키즈 카페 울보 일진 취급을 받을 것 같아서 정국이 눈에 힘을 주며 참아냈다. 그만하자는 지민의 말에 제멋대로 입에서 좋아한다는 말이 튀어 나가 버렸다. 오늘 고백하려 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할 생각은 아니었다. 준비했더라도 지금은 준비하지 못한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2년 전에도 지민의 곁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돌아서야만 했었다. 지금도 충분한 어른이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젠 그렇게 물러서기 싫었다.


지민이 비틀거리다가 벽에 기댔다. 힘들어 보이는 지민을 본 정국이 손을 뻗으려다 소심하게 내렸다. 혼란스러워진 지민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그러고는 정국이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을 내뱉었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미안하다며 거절하는 지민을 본 정국의 표정이 절망으로 물들어 갔다. 지민이 도망치듯 욕실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힘이 없어서 문에 기대어 있다가 스르르 주저앉았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지민의 머릿속에 정국과 있었던 일이 차례로 떠올랐다. 태어나던 순간부터, 저를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20년이라는 세월이 있었다. 동거가 아니었다면 이런 관계가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해봤을 사이였다. 형 동생 이상의 뭔가 특별한 사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정국이 그랬었다. 뭐가 되면 어떡할 거냐고. 그때 지민은 알파이자 스무 살인 정국에게는 이 관계가 매우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뭐가 되었다가 깨질 것부터 생각하는 게 저도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귀다 헤어져서 원수 비슷한 사이가 되는 것보다 그냥 오래오래 알고 지내며 가끔 밥 정도는 같이 먹을 수 있는 그런 사이가 좋았다. 저번에도 자신이 정국을 좋아하는 건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는데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던 지민이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또 생각해 보았다.


스폰서가 없었더라도 당장 정국의 마음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직 느린 지민에게는 선뜻 정국의 마음을 받아줄 용기가 없었다. 사귀는 건 무리라고, 밀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 마음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마음이 가는 대로 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 스폰서가 등장하기 전까지였다. 지민은 무용단에 오랜 부채감이 있었다. 게다가 이미 후원을 받았으니 못 하겠다고 할 수는 없게 되었다. 지민이 눈을 감았다. 정국에게 사실은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차마 상상할 수 없었다. 왜 그런 바보 같은 제안을 받아들인 거냐고 하려나. 어쩔 수 없었다. 기억이 없는 2년 전에 자신은 남은 공연을 전부 펑크 냈고, 긴 시간 단장과 단원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었다. 이런 사정을 설명해도 아마 정국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착하고 올곧을 것 같은 동그라미는 이런 부정한 행동을 한 저에게 실망할지도 몰랐다.


“하아...”


차라리 실망하도록 내버려 두는 게 나을지도 모르는데, 제 이런 부끄러운 상황을 정국이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정국이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샤워를 마쳤다. 욕실에서 나온 지민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정국을 볼 수 있었다.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외면하기에는 너무 시리고 아픈 눈이었다.


“정국아.”

“포기가 안 돼요.”

“........”

“나 차인 건데, 그거 아는데... 포기 못 하겠어요.”


지민은 정국의 마음이 제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깊고 견고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 마음의 깊이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깊어 보였다.


“그 사람이랑 사귀는 거 아니라면서. 나랑 더 만나요. 그럼 그 사람도 만나고 나도 만나.”


생각지도 못한 정국의 결론에 지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 생각해 보지도 못한 답이라 말문이 막힌 것이었다. 포기를 못 하겠다는 것이 단순 치기 어린 나이에서 오는 패배감 때문인 걸까? 둘 다 만나 보라는 충격적인 말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정국은 지민이 저보다 어른 남자를 소개받아 잘해 보려고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는 그다지 현실적인 사람이 아닌데 스물아홉 살의 지민은 달랐다. 그래서 그럼 저도 그 남자도 만나 보라고 했다. 그 남자가 지민을 물질적으로는 더 풍족하게 해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제 사랑에 비할 수는 없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좋아해 온 마음인데, 간직해 온 사랑인데 이대로 빼앗기지 않을 거였다.


찬찬히 정국의 말을 되짚던 지민이 이마를 짚었다. 속사정을 모르면서 둘 다 만나라고 한다는 것은 저더러 양다리를 걸치라는 뜻이었고, 정국 본인이 기꺼이 둘 중 하나가 되겠다는 뜻이었다.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어?”


속으로만 생각하려던 것이 지민의 입 밖으로 나와 버렸다. 


“이유요? 이유... 하나뿐이잖아요.”


길지 않은, 또는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 온 정국에게 사랑은 하나뿐이었다. 또한 저의 오메가는 박지민 하나뿐이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포기가 안 된다. 쉽게 접을 마음이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 솔직히 처음엔 기억도 못 하는 지민을 원망하기도 하고 저만 좋아하는 것이 싫어서 안 좋아하겠다고 다짐도 해봤다.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며 치열한 사춘기를 보내왔다. 그래도 서울까지 온 이유 역시 단 하나뿐이었다. 예상치 못하게 섹스부터 하게 됐지만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정국은 동글동글 굴러가고 있던 계획에 잠시 변수가 생긴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지민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지민은 살면서 남자에게 고백받은 적도 꽤 많았고 그만큼 거절도 많이 해봤다. 거절한 상대에게 이런 기분을 느껴본 건 처음이었다. 순간 지민의 페로몬이 탁 풀렸다. 히트사이클 예정일을 앞둔 터라 저절로 나온 것이었다. 어쩌면 두근거림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진동하는 페로몬 향에 정국이 흠칫했다. 당황한 지민은 해명부터 했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오늘 약도 먹고, 링거도 맞았는데.”

“링거요?”


당황해서 지민이 손을 젓자 셔츠 소매가 살짝 흘러내렸다. 링거를 꽂았던 자국에 밴드를 붙여 둔 게 보였다. 아까는 미처 못 봤던 거다. 정국이 지민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당황해서 실토한 지민이 눈을 피했다.


“병원 다녀오느라 늦었어...”

“억제제 효과 없었어요?”


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의 아니게 또 페로몬으로 유혹한 셈이 된 것 같아서 민망했다. 성큼 걸어온 정국이 지민의 얇은 허리에 팔을 두르며 키스했다. 순식간에 입술이 벌어지며 혀와 함께 정국의 페로몬이 밀려들어 왔다. 몸이 뜨거워졌다. 지민은 실수할 것만 같아서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입술이 잠깐 떨어지자마자 지민이 뒤로 물러섰다. 죄책감 때문이었다.


“이럴 때마다 내가 너 이용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안 좋아... 너무 미안해...”

“이용해도 괜찮아요. 내가 동의한 거잖아.”

“아니.. 너 왜 그래..? 요즘 갑자기.. 왜 그래...”


정국이 얼마나 오랜 시간 저를 마음에 품어 왔는지 모르는 지민으로서는 극우성 알파인 정국이 저에게 이렇게까지 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심하게 당황한 지민이 버벅거렸다. 이따금 정국이 묘한 말을 하기도 했었지만 오늘은 더욱더 당황하게 하는 종류였다. 정국이 동그란 눈을 한번 깜박였다. 그야 이제 자신은 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지민이 뒤로 물러나면 앞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가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고백하면 차일까 봐 못 했는데 이젠 고백 안 해도 차이게 생긴 판이라 정말 이판사판이었다. 속마음을 다 까발리고 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다. 전에는 이런 노골적인 말을 하면 창피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해보니까 별것 아니다 싶다. 이전까지는 마음을 숨기기에 급급했다면 이젠 드러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니까 괜찮아요.”


지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고 정국은 또 조그만 기대를 품었다. 예전이었다면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 앞섰겠지만 지금까지 지민과 지내온 시간을 떠올리면 다시 버틸 수 있었다. 돌아섰던 건 열여덟 살 때 한 번이면 충분하다. 정국은 이제 감추지 않고 드러낼 생각이었다. 나를 사랑해 달라고.









대학 교직원 회식에 참석한 지민은 술을 많이 마셨다. 잠시나마 저를 힘들게 만드는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그러나 잊기는커녕 자꾸 또렷하게 한 사람의 얼굴만 떠올랐다. 어제 고백을 들은 이후 지민은 내내 정국을 생각했다. 아침에 스폰서로부터 몸은 좀 괜찮냐는 연락이 왔지만 연락이 없었으면 남자는 떠올릴 일도 없었다. 


이번 달의 히트사이클 예정일은 무사히 지나갔다. 정국과 몸을 섞진 않았지만 링거를 맞아서인지 버틸 만했다. 낮부터는 쌩쌩해서 학교 강의도 하고 회식도 갈 수 있었다. 어제 정국은 정 힘들면 저에게 의존하라고 했다. 지민이 괜찮다는 말로 거절했다. 고백까지 받았는데 받아 주지도 못할 거면서 그럴 수는 없었다.


회식 후 술에 잔뜩 취한 지민이 현관에서 신발을 벗다가 엎어졌다. 당분간은 더 조심해야 했는데 오늘 같은 기분으로는 안 마시고 버틸 재간이 없었다. 무릎을 찧은 지민이 잠시 앉아서 제 무릎을 만지다가 주변을 둘러봤다. 분명 제집인데 낯설었다.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거실을 본 지민이 정국을 불렀다.


“정국아~ 정국아아~!”


술김에 마구 정국을 불렀지만 들려오는 답은 없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지민이 벌컥 정국의 방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었다. 지민이 홱 뒤돌아봤다. 혹시 뒤에서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거실 형광등만 켜져 있었을 뿐 집은 휑했다.


실망한 지민이 정국의 방으로 들어갔다. 집에 없는 게 왠지 서운했다. 잔뜩 취한 무거운 몸을 이끌고 들어간 지민은 평소 정국이 사용하는 접이식 매트리스 침대를 펴기 시작했다. 그저 취해서 하는 행동이었다. 딱히 생각 없이 몸만 움직였다. 침대를 펼친 지민이 그 위로 털썩 쓰러지듯 누웠다. 베개와 이불까지 끌어오자 더욱 포근해졌다.


익숙한 향이 느껴졌다. 꼭 제 오메가 향과 비슷했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다우니 어도러블 향기에 지민은 점차 더 나른하게 눈이 감겼다. 상큼한 섬유유연제 향기에 정국의 페로몬 향이 미세하게 섞여 있었다. 가을의 초입이 떠오르는 향이었다. 정국이 태어나던 날 느꼈던 냄새였다.


“정국이 냄새애... 좋아......”


몸도 마음도 다 편해지는 느낌에 지민이 이불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정국의 체향에 안정을 찾은 지민은 그대로 잠이 들었다.


한편 상만과 술을 마시고 한밤중에 들어온 정국은 지민의 신발을 보곤 안심했다. 집에 온 모양이었다. 지민의 방문 앞을 서성이던 정국이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살그머니 열어 봤다가 안 자고 있으면 낭패였다. 허락 없이 함부로 문을 벌컥 여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아직 넘을 수 없는 경계란 게 있었으니까. 한숨을 쉰 정국이 샤워 후 제 방문을 열었다. 무드등이 켜진 방 안에는 지민이 잠들어 있었다.


정국은 정작 제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서서 지민을 바라봤다. 아직 저는 넘지 못한 경계를 또 넘어 들어와 버린 지민이 귀엽고 조금은 밉기도 했다. 진짜 미운 건 아닌데 그래도 저를 안 좋아해서 약간은 미웠다. 조심스러운 저와 달리 매번 이렇게 훅 들어오는 건 지민이었다. 오늘도 멋대로 침범해 놓고 쿨쿨 잘 자고 있었다.


이러면 내가 또 착각하고 싶어지잖아. 정국이 발을 내디뎠다. 술에 취해 처음부터 무드등 불빛에 의지해서 움직였던 듯 이불이나 베개 위치가 엉망진창이었다. 되는대로 끌어안고 자는 지민을 보던 정국이 좁은 침대에 같이 누웠다. 비좁아서 저절로 지민을 뒤에서 안을 수밖에 없었다. 슬쩍 지민의 목덜미에 코를 박으니 정국이 가장 좋아하는 향이 났다. 이대로 각인해 버리고 싶다는 충동까지 들 정도였다. 무방비한 모습에 살짝 몸에 힘이 들어갔지만 지금 지민을 마음껏 껴안고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눈을 감은 정국이 억지로 잠을 청했다.










잠에서 깬 지민은 제 몸을 감싸고 있는 단단한 팔을 느끼곤 눈을 떴다. 낯선 벽과 천장은 아니었지만 상황이 낯설었다. 왜 여기서 자고 있는지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짚어 본 지민은 술에 취해 정국의 방에 들어와 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땐 분명 정국이 없었는데 지민이 잠든 사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지민은 조용히 일어나서 방을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그것도 쉽지 않을 듯했다. 벽 안쪽인 데다 제 움직임에 정국이 잠에서 깰 것 같았다. 좁은 매트리스 침대에 옆으로 누워서 잔 터라 몸이 뻐근했다. 잘 땐 모르고 잤지만 깨니까 불편해서 찌뿌둥한 몸을 좀 펴고 싶었다. 그리고 왠지... 뒤에서 뭔가가 찌르는 것 같기도 하고.......


지민이 눈을 깜박였다. 제 엉덩이를 툭툭 건드리는 성기가 느껴진 지민은 정국이 잠에서 깬 것을 눈치챘다. 지민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정국이 더 지민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으음... 잠결에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려는 어색한 연기에 지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어처구니없긴 한데 귀엽기도 했다.


“정국아.”

“흐음..”

“자꾸 뭐가 닿아...”


지민의 어깨에 얼굴을 묻던 정국이 멈칫했다. 정국도 잠은 진작 깼다. 다만 이렇게 더 있고 싶어서 가만히 있었던 것뿐이었다. 자는 척 연기해 봤지만 벌써 들킨 것 같았다. 정국이 지민을 안고 있던 팔에서 힘을 빼자 지민이 휙 돌아누웠다. 지민도 한쪽으로만 누워 있어서 왼쪽 어깨가 저리는 바람에 그렇게 한 건데, 막상 돌아보자 얼굴이 가까워서 속으로 조금 놀랐다. 이러다 서로 성기가 맞닿을 것 같아서 지민이 슬금슬금 엉덩이만 뒤로 뺐다. 


정국의 동그란 눈동자가 고요하게 지민을 향했다. 정직한 시선을 받은 지민은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정국이 지내는 방에 단둘이 누워 있는 건 처음이었다. 제집이지만 왠지 정국의 품에 있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잘 잤어요?”

“응.. 너는?”

“저는 못 잤죠. 형 때문에.”

“어?”


정국은 왜 못 잤는지 더 설명하지 않았지만 지민은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의미를 모를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았다. 잠깐 놀란 것도 잠시 지민은 부끄러워서 눈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불룩해진 것 같은 정국의 성기가 보여서 더 당황했다. 


“안 돼...”

“뭐가 안 돼요?”


당황한 지민이 저도 모르게 안 된다고 했다가 민망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좋아하면 너랑 못 한댔잖아...”


지민이 술집에서 다른 알파를 만난 날, 무척 화가 났던 정국에게 지민은 만약 네가 날 좋아하면 너와 섹스는 못 한다고 했었다. 둘 다 사랑이란 감정이 없다는 전제하에 섹스하는 알파와 오메가였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정국의 마음을 안 이상 지민은 더는 정국과 섹스할 수 없게 되었다. 


정국이 눈동자를 굴렸다. 아침이기도 하고 살짝 흥분한 것도 맞다. 그래도 당장 할 생각이야 없었다. 전혀 없었다고는 말 못 하지만 말이다. 이번에도 또 앞서 나간 지민이 하면 안 된다고 미리 못을 박자 아쉬웠다. 나만 좋아해서 못 하는 거라면, 형도 나 좋아하면 되잖아.


“형은 왜 나 안 좋아해요?”


어젯밤 술을 많이 마셔서 살짝 부은 지민을 보며 정국이 말했다. 그러는 정국의 얼굴도 살짝 부었고 잠도 덜 깬 상태였다. 잠결에 솔직한 속마음을 내비친 정국이 동그란 얼굴을 지민에게 들이밀었다. 동그라미가 더 가까워지자 지민이 입술 끝에 힘을 줬다.


자기를 왜 안 좋아하냐고 물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지극히 알파다운 사고방식 같았다. 지민은 정국의 말이 귀여워서 살짝 웃었다.


“진짜 궁금해서 그래요. 내가 어떻게 해야 형이 날 좋아해요?”


생각해 보면 여태껏 나를 사랑해 달라고 속으로 외치기만 했지 사랑받아 보려고 애쓴 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기본적으로 알파라는 자존감이 있었고, 어릴 때는 울보였지만 더 멋진 사람으로 성장할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꼭 지민보다 키도 덩치도 더 큰 알파가 되어 지민이 저를 좋아하게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약간의 자신감은 있었지만 지민이 도통 저에게 관심이 없어서 사실 좌절한 적이 한번 두 번이 아니었더랬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사랑해 주기만을 바랐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잘 몰랐던 것 같다.


지민이 살며시 손을 들어 정국의 뺨을 쓰다듬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저도 꼭 지금이 꿈결 같아서 무심코 손이 움직였다. 지민의 손이 닿자 정국이 숨을 멈추곤 눈만 동그랗게 떴다.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정국은 굳이 어떤 행동을 하고 애쓰지 않아도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지민은 정국을 사람으로, 동생으로서 좋아했고 때론 그 이상인 것 같을 때도 있었다. 어쩌면 한번 인정하면 알게 될 마음인지도 모를 것을 지민은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민이 말한 의미와 달리 정국은 오히려 사랑받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처럼 들려서 서운했다. 정국이 멈칫한 사이 지민이 몸을 일으켰다. 오늘 보강이 있었다. 토요일인데 무용과 보강이 있다는 말에 정국은 따라 일어났다. 지민이 쳐다보자 정국이 한쪽으로만 자서 뻑뻑해진 어깨를 돌리며 대꾸했다.


“저도 수영하러 가려구요.”


지민이 위 부근을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성으로 발현하게 된 이후 생활이 엉망이었다. 평소였다면 강의 전날 이렇게 과음하지 않았을 거다. 예측할 수 없었던 사건이 자꾸 일어나는 바람에 마음고생이 심했다.


방을 나가려던 지민은 어젯밤에는 못 봤던 꽃병을 봤다. 그저께부터 있었던 거지만 어젯밤엔 취해서 잘 몰랐다. 호랑이꽃이 꽃병에 가득 꽂혀 있었다. 정국은 고백하기로 한 날 호랑이꽃으로만 된 꽃다발을 준비했었다. 꽃은 결국 전해 주지 못하고 말았지만 얼결에 마음은 전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고백이라도 해서 다행이었다.


지민은 생각보다 정국이 저 꽃에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방을 나왔다. 씻고 정국과 가벼운 아침을 먹은 후 학교에 갔다. 정국도 함께였다. 토요일이라지만 학생들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기에 정국은 걸어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정국은 교내 수영장으로, 지민은 운전해서 무용과 강의실로 향했다. 보충 강의 시간보다 더 일찍 간 지민이 스트레칭하며 몸을 풀었다.


평소처럼 강의가 진행됐다. 이따금 수영하고 있을 정국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강의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강의가 끝나갈 무렵 지민은 정국이 아직도 수영장에 있을까 생각했다. 두 시간 가까이 흘렀으니 돌아갔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쨌든 같이 와서 같이 가는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강의를 마친 지민은 날이 상당히 더워졌다고 생각했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무용을 지도하는 것만으로 이 정도로 땀이 나지 않는데 이상했다. 얼핏 창밖을 쳐다본 지민은 아침과 달리 날씨가 많이 흐려져 있는 것을 봤다. 흐리다고 생각하자마자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은 차가 있어서 괜찮지만 정국이 우산을 챙기지 않았을 것 같았다. 수영장 쪽으로 향하던 지민은 갑자기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아까부터 자꾸 더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쩍 손을 들어 뺨을 만져 보자 뜨거웠다. 열이 나는 건가..? 오히려 비 때문에 바깥 온도는 더 내려간 것 같은데 의아했다. 일정한 빗소리와 비 오는 날 특유의 냄새가 예민하게 느껴졌다. 잠시 멈춰 섰던 지민이 다시 복도를 걸었다. 조금 멀리서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 자신이 걸음을 멈췄을 때 발걸음 소리가 같이 끊겼던 것 같았다. 기분 나쁜 느낌에 지민이 살짝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걸어오던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꼭 저를 뒤쫓아 오는 것만 같아 불쾌했다. 지민이 정국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학교면 같이 집에 가자고 할 생각이었다.


-여보세요.

“어, 정국아. 혹시..”


혹시 학교냐고 물으려던 지민은 조금 먼 거리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남자가 저를 향해 뛰어왔다. 놀란 지민이 몸을 돌리는데 바로 옆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또 다른 남자가 뛰어나와 지민을 덮쳤다. 지민이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반동에 휴대폰을 놓쳤다. 날아간 휴대폰은 손을 뻗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다.


지민은 깨달았다. 급성 히트사이클이 왔다는 것을 말이다. 저를 향해 달려오는 남학생도, 사무실에서 나온 조교도 모두 알파였다. 처음엔 그저 열이 오르는 거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저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페로몬이 터진 모양이었다. 


저를 덮친 조교와 눈이 마주친 지민은 그의 눈에 씐 욕구를 읽었다. 지금 저들에게 저는 교수가 아닌 한낱 오메가에 불과했다. 그것도 히트사이클이 터져 페로몬을 줄줄 흘리는 오메가였다. 오메가가 먼저 저를 안아 달라고 페로몬을 흘리고 있으니 이대로 지민이 범해진다고 해도 알파와 오메가의 세계에서는 크게 문제 될 일이 아니었다.


눈이 돌아버린 알파가 페로몬을 뿜었다. 반사 작용으로 지민은 몸이 떨렸지만 이를 악물고 남자의 고간을 걷어찼다. 덮쳐지면서 같이 넘어진 상태라 다리 위치가 딱 그쯤이었다. 조교가 고통스러워하는 사이 몸을 빼낸 지민이 앞으로 달렸다. 또 다른 알파가 페로몬을 뻗치며 저를 잡으려고 달려오고 있었다. 이대로는 금방 잡힐 거였다. 지금 저는 결국 상대가 누구든 간에 알파의 페로몬에 반응할 수밖에 없는 히트사이클의 오메가일 뿐이었다. 


교직원용 탈의실 문을 연 지민이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때마침 보이기도 했고, 강의실은 앞뒤 문이 두 개라 들어가서 잠그는 동안에 다른 쪽 문이 열리겠지만 탈의실은 문이 하나였다. 그러나 문이 하나라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었다. 어느새 달려온 알파들이 문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부서질 것처럼 문고리를 잡고 흔들어댔다.


지민이 주저앉았다. 속옷이 흠뻑 젖었다. 액이 울컥 터져 나오는 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페로몬도 엄청나게 흘러나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알파들이 미쳐 날뛸 만했다. 토요일이라 사람은 적겠지만 운 나쁘게도 벌써 두 명의 알파를 맞닥뜨렸다. 여기까지 오며 제가 흘린 페로몬이 아직 복도에 남아 있을 것 같았다.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꺼낸 지민이 억제제를 급하게 삼켰다. 발현 중이라는 진단을 받고 우려하던 상황이 두 달 동안 없었는데 하필 지금이었다.


쾅쾅쾅! 지민이 몸을 웅크렸다. 몸이 덜덜 떨려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밖에서 계속 문을 열라고 소리치는 게 들렸다. 온갖 저급한 말이 쏟아졌다. 너 같이 천박한 오메가는 금방 따먹어 주겠다는 말을 들은 지민이 울음을 터뜨렸다. 너무 무서웠다. 저들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멀쩡한 상황이면 몰라도 지민 역시 히트사이클로 꼼짝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저 알파들에게 당하다가 종국에는 페로몬에 의해 흥분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지민은 두려워서 계속 울기만 했다. 모르는 알파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 손에 핏기가 없어질 만큼 주먹을 쥐었다. 


정국이 보고 싶었다. 정국에게 너무 미안해서 이 순간에 떠올리는 것조차 미안했지만 지금 생각나는 건 정국의 얼굴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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