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새벽잠이 없는 누군가가 이른 잠을 깨어 산을 바라보았다면, 우거진 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희고 푸른 천의 빛깔을 우연히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멀리서 보면 깃발이 굼실거리며 움직이는 듯도 했으나, 그 정체는 사실 사람이 사람을 업은 채 걸어가는 것이었다.

동이 텄다고 해도 아직 산길은 어둑했다. 푸르스름한 안개 사이로 저만치 보이는 이타도리 저택을 이따금 곁눈질하면서 이타도리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등에 업힌 후시구로는 얕은 잠이라도 든 건지 조용했다. 잠든 거라면 깨우지 않게 가능한 조용히 가고 싶었는데, 마른 나뭇가지와 썩어가는 낙엽 따위를 밟을 때마다 발밑에서 버석버석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신경을 쓰다가 그만 굵은 나무뿌리를 못 보고 잘못 밟고 말았다. 넘어질 정도는 아니었으나 몸이 한 차례 휘청한 바람에 이타도리는 더럭 식은땀이 났다.

“미안, 후시구로. 놀랐어?”

후시구로를 고쳐 업으면서 이타도리가 나직하게 물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질문과는 영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타도리, 너 말이야.”

새벽 공기처럼 서늘하고 침착한 목소리. 이제 더는 동요의 기미가 비치지 않는 음성이 이타도리의 귀에 낯익었다.

“……정말로 내가 안 돌아오면 어쩔 작정이었어?”

그 순간 이타도리의 발이 주춤, 멈추었다. 허나 이타도리가 멈추지 않았더라도 그 질문이 들은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 것임을 후시구로가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이타도리는 대답을 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후시구로도 후시구로대로 피할 수는 없었다.

스스로의 의지로 나섰고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었던 곳이다. 그럼에도 이대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누군가는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최소한 후시구로 메구미란 사람은 그럴 수가 없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가면을 쓰고 사는 건 그간 츠미키를 대했던 나날만으로 충분하다. 이타도리 유지를 상대하면서까지 그런 가면을 써야 한다면, 그 집에선 더는 하루도 버틸 수 없을 것이다.

후시구로 메구미는 세상이 자신의 바람과 무관하게 돌아가는 것까지는 견딜 수 있었다. 제 힘, 아니 본래 인간의 힘으로 어찌해볼 수 있는 영역이란 얼마 존재하지 않는다. 태어나는 순간 부여받는 생로병사의 굴레 속에서, 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제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체념하는 것. 그것이 후시구로 메구미가 인지한 삶의 본질이었다. 저나 츠미키뿐만이 아니라 의지와 관계없이 태어나 버린 모든 것들이 겪는 현실. 그래서 후시구로는 저로선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어찌할 수 없는 방향으로 틀어져 버릴 때마다 그저 이만 악물었다. 익숙해질 때까지 모질게 참고 또 참는 것만이 허락된 게 인생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껏 겪어 왔던 틀어짐은 이토록 찰나에 몰아치지는 않았다. 세상 만물이 모두 천천히 변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지만 이 모든 걸 한순간에 받아들이는 건 아무리 후시구로라도 불가능했다. 이를 악물 말미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면 더욱 그랬다. 억지로 버티자면 버틸 수도 있겠지만 반드시 한계는 온다. 오히려 억지로 버티지 않았을 때보다 더 빨리 올 것이다. 그렇기에 일찌감치 금이 가지 않으려면, 아주 조금이라도 그럴 만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여지, 최소한의 변명이 필요했다. 후시구로는 이타도리가 무슨 말을 내뱉어서라도 자신을 납득시켜 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후시구로는 입 밖으로 꺼낸 질문을 물리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한결 더 직설적으로 묻기로 마음먹었다.

“솔직하게…… 내가 안 돌아오기를 바랐어?”

쉽사리 걸음을 내딛지 못하던 이타도리가 성급히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숨은 쉽게 도로 나오지 못했다. 금방 나올 수 있는 대답이 아니라는 걸 후시구로도 알았다. 그래서 재촉은 하지 않았다.

 

―그대로 거기에 머물러도, 난 괜찮아.

그리 오래전에 내뱉은 것도 아닌 말이 이타도리의 머릿속에서 생생히 되풀이되었다. 그와 동시에, 그 말을 들은 순간 후시구로가 지었던 표정이 이타도리의 눈앞에 선명히 떠올랐다.

설령 내가 널 위해 내 전부를 걸었다고 해도, 그때 내뱉은 말을 무슨 수로 변명할 수 있을까.

“……아니.”

마침내, 이타도리가 대답했다. 공교롭게도 후시구로가 등에 업혀 있어 서로 표정을 확인할 수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후시구로는 유감스럽게 여길지도 모르지만 이쪽으로선 운이 좋았다. 후시구로의 차가운 표정은 감당할 수 있어도, 울 것 같은 제 표정을 숨기는 건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째서 말이란 꺼내고 나면 두 번 다시는 주워담을 수 없을까. 어째서 어떤 말은 들은 사람뿐만이 아니라 뱉은 사람의 가슴까지 가차 없이 난도질할까. 말을 잇기에 앞서 이타도리는 기침을 했다. 잠겨드는 목을 숨기기 위해서다. 후시구로는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리고만 있었다.

“……미안해.”

가장 먼저 꺼내야 할 말은, 역시 이것이라고 생각했다.

“미안해.”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이타도리는 목구멍까지 치민 것을 내뱉지도 삼키지도 못하고 서슴서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이전처럼 시원스럽게 보폭을 떼지는 못했다. 발밑을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온통 어룽거리는 시야로는 후시구로를 업은 채 성큼성큼 나아갈 수가 없었다.

마른 낙엽은 단속적으로 떨어지는 물기를 소리도 없이 재빨리 빨아들여 흔적을 지웠다. 후시구로는 말없이 이타도리의 등에 얼굴을 묻고만 있었다. 사과를 듣게 될 것이라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듣고자 했던 답은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자꾸만 이어졌다.

 

미안해.

입 밖으로도 마음속으로도 그 말만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끝내 가야 할 길을 찾았다 하더라도 그전까지 헤맨 여정을 없던 것으로 할 수는 없었다. 그 여정까지가 모두 길을 찾는 과정이었을지언정 자기 손으로 저지른 착오마저 필요한 행위였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물며 그것이 누군가에게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았다면.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멀어지던 후시구로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 얼굴을 보고도 태연할 수 있었다면 거짓말이었다. 내딛는 걸음 아래가 속절없이 무너져내릴 것만 같았지만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몸을 돌렸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희미하게, 이것이 차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이타도리에게 최악의 다른 말은 언제나 스쿠나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스쿠나가 그러하기에 후시구로 메구미가 상정하는 최악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설령 후시구로가 아닌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기 마련일 것이다. 일개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이 저주의 근원 이상으로 더 큰 최악이 당도하기는 쉽지 않을 테니까. 스쿠나가 존재하는 한 이 집안의 사람들은 누구도 끝내 평온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스쿠나의 영향을 피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사안이다, 라고 이타도리는 결론을 내렸다. 문제는 그 대안이 최악에 대비되는 최선으로 존재하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타도리라고 갑작스레 찾아온 낯선 사람들이 달갑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우선은 그 손을 맞잡기로 다짐한 건 그것이 적어도 최악은 아닐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최악만 아니라면, 솔직히 말해 그것이 차악에 불과할 뿐이라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후시구로만 해도 최악만은 피하고 보자는 생각으로 내 신부가 되어준 거니까, 이게 그보다는 나은 길이라면 이해해 주겠지. 지금 돌이켜 보면 성급한 감이 명백했는데도 이타도리의 판단은 너무도 쉽게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스쿠나의 위해 앞에서 더는 후시구로를 방치해 둘 수 없다는 조바심이 그러한 판단에 한몫했으리라.

한데 결과적으로, 그것은 이타도리에게 있어 나쁘지 않은 방향이 되었다. 후시구로를 잠시 시야에서 멀리 두자 머리가 좀 더 냉정하게 돌아갔고,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처음부터 무엇을 바라고 있었는지 명료하게 되새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곁에 후시구로가 있었다면 이토록 단호히 결정을 내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후시구로라면 분명 자기 처지는 생각지도 않고 말리려 들었을 테니까. 무슨 수를 써서도.

그래, 어찌 됐건 이타도리는 목적을 이뤘다. 후시구로가 아무리 화를 내고 멱살을 붙잡아 흔들어도 피할 수 없는 결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타도리로서도 하나의 질문 앞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것이, 후시구로에게도 오롯이 나쁘지 않은 방향이었는가― 라는.

이타도리 유지는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미안해, 내가 진작에…….”

……내가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면, 네가 위험을 무릅쓰고 젠인에 갈 일도 없었을 텐데.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도 없는 후회를, 이타도리는 꾸역꾸역 삼켰다.

후시구로가 무슨 심정으로 집을 떠나야 했는지 나는 죽을 때까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거다. 그곳이 후시구로에게 어떤 곳인지 털끝만큼도 헤아려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면서도 멋대로 후시구로가 이해해 주기만을 바랐다. 후시구로를 신부로 데려온 건 다름아닌 나인 주제에, 내 손을 떠나보내면서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지레짐작했다. 적어도 이게 최악은 아닐 테니까 받아들이라는 억지를 밑바탕에 깐 채로. 후시구로가 그것을 몰랐을 리 없다. 후시구로는 언제나 나보다 머리가 좋았으니까. 그러니까 못박아 두는 거다. 이건 결코 어물쩍 넘어갈 일이 아니라고. 내가 저지른 짓을 외면하지 말라고. 너는 한때나마 내가 젠인에서 무슨 짓을 당하든 눈감으려 했다고. 이제 와 나를 도로 데려간다 해서 그 사실이 바뀌는 건 아니라고.

그래, 나는―.

 

이타도리가 숨을 들이킨 순간, 불현듯 목에 둘러져 있던 후시구로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아냐, 이타도리.”

후시구로가 입을 열었다.

이타도리는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든, 그것까진 아니야.”

읊조리듯 담담하게 내뱉은 후시구로는, 이타도리가 걸음을 멈춘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어처구니없을 만큼 쉽게 풀려버린 팔을 뒤로하고 후시구로는 이타도리의 등에서 내려 땅을 디뎠다. 그러나 이타도리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방금까지 지탱하고 있던 무게가 사라진 걸 모를 리 없을 텐데도,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후시구로는 차마 등을 돌려 이쪽을 보지도 못하는 그 심정을 얼마간 이해했다. 그래서 상대의 몸을 억지로 돌리는 대신 두어 발짝 나아가 이타도리의 앞에 섰다. 허나 기어코 마주선 뒤에도 얼굴을 마주보지는 못했다. 굳이 고개를 들거나 내리지 않아도 늘 같은 선에 있었던 눈높이, 그것이 지금은 도무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타도리의 시선이 못처럼 땅에 처박힌 탓에.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고개에서, 간신히 한 단어만이 흘러나와 쏟아졌다.

“……미안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미안…….”

그대로 영영 들지 못할 것만 같은 이타도리의 고개를 향해, 후시구로는 손을 뻗었다. 그 손이 망설임 없이 이타도리의 얼굴을 들게 했다. ‘미안해’를 쏟아내느라 반쯤 벌어진 입술. 그 입술 위로 후시구로는 주저하지 않고 자기의 입술을 겹쳤다.

이타도리가 입을 맞추는 것 외의 다른 행위를 위해 혀와 입술을 움직이려는 것을 후시구로는 용납하지 않았다. 깨어진 독의 틈새로 넘치는 물처럼 하릴없이 흘러나오려던 사과는 하나도 빠짐없이 후시구로의 어금니 사이로 갈리고 으깨져 사라졌다. 이따금 입술을 깨물어 오는 앞니와 서툴게 얽히는 혀만이 전부. 그 입맞춤에 무의미한 음절 따위가 끼어들 수는 없었다.

영원 같은 찰나였다. 마침내 입술이 떨어졌을 때 눈높이는 도로 맞춰져 있었다. 이슬이 걷혀가는 산속에서 후시구로는 이타도리의 눈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혼인하기 전에도 그 후로도, 이토록 오랜 시간 이타도리를 응시한 것은 처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오랜 응시 동안 이타도리의 눈동자에 스민 고통이 조금도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후시구로의 심장에 싸한 통증을 불렀다.

우리는 어째서, 서로가 서로를 누구보다 위하려는데도 점점 더 고통스러워지는 걸까.

어디서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그 원인을 밝힐 수 있는지 나는 모른다. 괴로움을 참아가며 거슬러 올라간들 까닭을 알아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도 없다. 그렇다면, 이타도리. 그렇다면 나는 이제부터…….

 

“……이타도리.”

침묵 끝에 후시구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으나 위압적이지는 않았다.

“후시구로, 내가…….”

“됐어. 별말 안 해도 돼. 미안하다는 말은 이제 충분해. 그러고도 변명까지 할 필요는 없어.”

“그렇지만―.”

“잘 들어, 이타도리.”

후시구로가 숨을 들이켰다.

 

이타도리, 네가 모르는 게 하나 있다.

나는 처음부터 너를 단죄할 생각으로 물어본 게 아니야. 저지른 잘못을 추궁받은 아이처럼 엉엉 우는 너를 보고 싶었던 게 아니야. 아니 애당초, 나부터가 너를 추궁할 수 있을 만큼 떳떳한 인간이 아니야.

누구보다 이타적인, 스쿠나의 정반대,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하고 진실되며 그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선. 그것이 내 앞에 있는 이타도리 유지란 존재. 그리고 나는 그런 너를 오로지 내 걱정 하나 덜 목적으로 이용했던 인간이다.

그러니 난 널 단죄할 수 없어. 단죄는커녕 내겐 널 판가름할 자격 자체가 없어. 그래도 이것만은 말해 둬야 하기에, 너에게 기어코 확인을 얻어낼 수밖에 없었을 따름이야. 네가 사실은 내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말만이, 이제부터 내가 할 말의 유일한 동아줄이 될 테니까.

너는 들어야 해. 내가 대관절 무슨 생각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는 너의 말을 듣고서도 돌아왔는지.

 

“착각하지 마, 이타도리. 네가 잘못했다고 몰아세우려는 게 아냐. 미안하다는 말을 들었으면 됐어. 아니라는 말을 들었으면 정말 그걸로 됐어. 굳이 더 무슨 말을 해야겠다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해. 이다음부턴 절대 나를 혼자 놔두지 않겠다고만 해.”

이타도리는 무어라 입을 벙긋거리다가, 안색이 창백해진 채 그만 아주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 몸짓만으로 후시구로는 이타도리가 스쿠나와 무슨 구속을 맺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부터 전할 말은 명백했다. 이타도리가 자신이 모르는 사이 무슨 짓을 했어도 이 결심을 바꿀 수는 없다. 이타도리는 언제나 제 말을 잘 들어주었지만, 이번에는 다른 때보다 더욱 귀담아들어 주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부탁이 아니라 선언이니까.

 

“이타도리, 나는…… 이제 더 이상 최악을 면하는 길만 찾아다니면서 살진 않겠어.”

후시구로가 말했다.

“그게 결국 너를 떠나서 널 다시 볼 일 없을 거라고 단념하며 살아가는 길일 뿐이라,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길을 택하진 않겠어. 설령 그러는 게 네가 피하려 하는 최악이라 해도.”

이타도리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러나 후시구로는 이타도리가 나설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나는 본래도 이기적인 인간이야. 결국 내 주변의 안위를 우선으로 생각해. 그래서 네가 지긋지긋한 흙집을 떠날 기회를 주자마자 마다하지도 않고 잡았지. 그런 주제에 어중간하게 네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고 하다가 줏대 없이 젠인까지 가서 이 지경이 됐어. 그렇다면 나는 이제, 철저히 이기적으로 살겠어. 어떻게 해도 후회가 남을 거라면 적어도 네 곁에서 후회하겠어. 네가 말려도 소용없어. 나는 네 옆에 있을 거니까.”

“후시구로, 그건……!”

“네가 신부가 되어달라고 했던 작자는 바로 이런 인간이야. 너는 이런 날 감당해야 해. 네가 내민 손이니까 잡은 나를 놓지 마. 후회할 거라면 너도 마찬가지로 내 옆에서 해. 나는 오로지 그 생각으로 너한테 돌아왔어. 나를 네 곁에 두고, 널 내 옆에 두려고.”

늘 숨이 턱 끝까지 찬 채 쫓기는 기분이었지. 들어서는 길목마다 하나같이 막다른 길이었다. 눈앞을 가로막은 벽은 높고 두터웠고 내 힘으론 두드려 봤자 금도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보단 낮은 벽이 있으리라고 이를 악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벽을 넘어선 곳에 무엇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게 내가 바라는 것이리라고 상상하며 버텼다.

하지만 이제는 됐다. 무슨 벽이 날 가로막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끝도 없이 헤매더라도 네가 내 옆에서 같이 헤매 준다면 그걸로 됐다. 땀에 젖은 네 이마를 훔쳐 주고 이따금 같이 다리쉼을 하고 손을 잡는 채 걷는다면, 나는 평생을 지옥의 밑바닥에서 헤매더라도 상관없다.

“……그러니까 이타도리, 나를…….”

설마하니 제정신으로, 이런 말을 뻔뻔스럽게 입에 담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그러나 입술은 닫히지 않았다. 모든 조음 기관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매끄럽게 음절을 빚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던 것처럼, 그 말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나를, 끝까지 책임져.”

후시구로는 시선을 떨어뜨려 이타도리의 손을 찾았다. 그러자, 이타도리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였다. 아니 잘 살펴보니 손뿐만이 아니라 어깨와 호흡과 몸의 심지 전체가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후시구로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 떨림을 눌러 주려는 듯, 그대로 이타도리의 손을 잡아 힘을 주었다. 마디가 굵고 단단한 손. 힘든 일이라곤 할 필요도 없는데, 자진해서 일을 찾아다녀 저와 크게 다를 바도 없이 굳은살이 밴 손바닥과 손가락이 그의 손안에 가득 찼다.

―하루의 절반 동안 이 손이 내 목을 졸라도, 나머지 절반 동안 이 손이 나를 붙잡아 준다면.

“더 이상 다른 누구한테라도 날 떠맡길 생각하지 마.”

후시구로는 이타도리의 손을 끌어당겨, 자기의 뺨에 천천히 올렸다.

“이 손으로 나를 마지까지 책임지는 거야.”

이타도리의 손이 흠칫 뒤로 물러나려는 것을 후시구로가 저지했다. 이 손이 마음만 먹으면 금방 자신을 뿌리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있는 힘을 다해 붙잡고 놓지 않았다. 그러자 급격히 올라갔다가 떨면서 내려앉는 어깨. 이타도리는 이를 악문 채 울고 있었다. 그것이 후회 때문인지 아닌지 후시구로는 알 수 없었다. 이타도리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는 – 혹은 못하는 – 게 어찌할 바를 몰라서인지, 아니면 도저히 약속할 수 없기 때문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답이 어떻든 바뀌는 건 없었다. 이타도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네가 내 신랑이니까. 이미 엎질러진 물이더라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더라도,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해.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고, 우리가 혼인한 이상 너는 결단코 이 마음을 저버려선 안 돼.

“만약…… 이타도리, 만약.”

이타도리의 손으로 자기의 뺨을 천천히 문지르면서, 후시구로는 희미하게 웃었다.

나를 책임진다는 건 처음뿐만이 아니라 끝도 지켜봐야 한다는 뜻이라는 걸, 너라면 모르지 않겠지.

“만일 괴로워서든 혹은 다른 이유로든 나를 더 이상 책임질 수 없겠거든…… 그땐 이 손으로.”

―나를 죽여.

마지막 말은, 소리 대신 모양이 되어 이타도리의 망막 속에 새겨졌다.

 

이타도리는 소리도 없이 계속 울었다. 좀처럼 우는 일이 없는 이타도리였는데, 그 몸 안이 전부 짠물로 채워진 건 아닐까 싶을 만큼 끊임없이 우느라 몇 번은 숨마저 헐떡였다. 도저히 그럴 수는 없다고 말하려는 듯 몇 번이나 고개를 흔들고, 후시구로에게 잡힌 손을 연신 빼려고 하고, 흠뻑 젖은 얼굴을 흠뻑 젖은 소매로 훔치며 새빨갛게 부은 눈으로 무언가를 호소하는 모습은 가엾기 그지없었지만, 그러나 후시구로는 그 어느 것도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단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뿐이라고, 후시구로는 이타도리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생각했다. 그 생각을 굳이 입 밖으로 내어 전하진 않았으나 말에 실어 보내지 않아도 이타도리가 알아주기를 바랐다. 물론 이타도리가 쉽사리 이쪽의 생각을 받아들이려 하진 않을 것이다. 오랜 저항의 시간. 하지만 이 고집 세고 나밖에 모르는 녀석이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후시구로는 끈기 있게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계는 왔다. 그건 들어줄 수 없다고 정직하게 맞서기엔, 이타도리는 제 신부에게 진즉 심장을 내어준 뒤였으므로. 끝내, 이타도리는 후시구로에게 잡힌 손을 빼지 못했다. 빼려고 하면 얼마든지 뺄 수 있는 손이었는데도 그러지 못했다. 후시구로의 소망은 다시 이타도리에게 지옥이었고 이타도리는 그 지옥을 피하기 위해 이미 자신의 전부를 걸었지만,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까지고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신부에게 이타도리는 결국 이 말밖에는 꺼내놓을 수 없었다.

“……응, 나 힘낼게.”

사정없이 떨리고 울음이 섞인 목소리였으나 분명한 긍정의 응답이었다. 후시구로가 용납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 듣고자 했던 더할 나위 없는 정답. 후시구로의 얼굴에 고요히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가장 아끼는 사람에게도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미소였다. 이타도리는 자신이 그 미소에 미소로 응수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연한 살을 마구 저미는 후회와 통한의 골짜기에 빠지더라도, 결국 마주보는 이에게 지어줄 수 있는 표정이란 이뿐인 것이다.

눈물 속에서 건져 낸 단 하나의 환한 빛. 이타도리가 자신에게 모든 걸 걸었듯, 그 웃음에 후시구로도 모든 것을 걸었다.




정말 거의 다 왔습니다. 다음 편으로 일단 이야기의 큰 줄기는 마무리지을 것 같습니다. 그전에 먼저 도리 생일글을 완성해야 하지만…;;


쓰고 싶은 것을 쓰는 사람

미르덱스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