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좋게도 야근이 없는 날이었다. 파리에 위치한 주 프랑스 독일대사관의 공사참사관 야콥 루트비히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는 오후 여섯 시가 되자 짐을 다 챙겨 자리에서 일어난다. 얼마 전에 상당히 중대한 의전을 치루고 힘이 다 빠져 있던 참이라 칼퇴근 후 숙소에서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집이라고 느끼는 독일을 떠나 프랑스에 구한 집은 아무리 오래 지내도 숙소라는 느낌밖에는 들지 않았지만, 앞으로 1년 반 정도만 더 버티면 다시 본이든 베를린이든 본부로 돌아갈 수 있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고 버텨나가야만 했다. 애초에 외교관의 길을 선택한 것도 본인이었고 말이다.

펠릭스는 라디오 소리를 키운다. 102.3 MHz의 주파수는 펠릭스가 퇴근하는 시각보다 살짝 늦은 여섯 시 반에 시작하는 'cinéma romantique' 의 시작시간이었다. 프랑스의 유명 성우 루이 엑토르 베를리오즈가-펠릭스는 애니메이션이나 더빙된 외화는 잘 보지 않았기 때문에 베를리오즈는 라디오 진행자로 훨씬 익숙했다-진행하는 영화를 주로 하지만 드라마, 애니메이션, 뮤지컬 등도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교양프로그램이었다. 물론 분류는 교양으로 되어 있지만 내용이 교양일 뿐, 사실 베를리오즈라는 사람의 입담을 보면 교양이 아니라 예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신랄하고 날카로운 비평, 유머러스하면서도 의표를 찌르는 한줄평론, 테마에 맞는 선정과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내용요약이 유익한 프로그램이었다. 펠릭스는 처음에 베를리오즈가 너무 말이 가볍고, 진심으로 예술을 좋아하는 게 맞긴 한지 의심했으나 듣고 있으면 겉으로만 유머러스하게 말할 뿐 실제로는 누구보다 깊이 탐구하는 자세가 되어 있는 전문 평론가의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드뷔시의 피아노 트리오가 중후반부로 치닫고 있었다. 차의 시계는 오후 여섯 시 17분 정도를 가리키고 있었고, 꽉 막히는 교통 탓에 아마 5구에 있는 숙소까지는 앞으로 10분이 넘게 걸릴 것으로 보였다.

아마 지금쯤 파리의 많은 시민들이 펠릭스와 똑같이 102.3 MHz로 채널을 돌렸을 것이다. 베를리오즈는 주로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들고 왔는데-물론 작년 혁명 기념일같이 특별한 날의 경우에는 전쟁, 혁명, 자유 등과 같은 주제로 진행한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매체는 사랑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으니 사랑이 많이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그 가운데 나오는 사연에 대한 조언이 놀라울 정도로 해결방안이었던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가끔 파리에서 만난 친구들의 사연이 나오기도 했다. 베를리오즈의 방송은 당연히 펠릭스가 파리로 오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것이었으며, 독일에도 가지고 가고 싶은 몇 안 되는 것이었다. 거기에 성우라서 그런지 몰라도 기본적으로 목소리가 듣기 편안하고, 펠릭스가 좋아하는 톤이라는 것은 살짝 추가적인 이유지만 영향을 끼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집에 들어오고 불을 켠 뒤, 펠릭스는 신발만 벗은 채 침대에 벌러덩 뒤로 드러눕는다. 내일도 또 아침부터 출근이라고 생각하니 죽을맛이었다. 독일인들보다 상대적으로 시간약속에 덜 깐깐한 프랑스인들은 조금 늦게 출근해도 뭐라 욕하지 않을까? 아니, 공무원이니까 아마 똑같을 것이다. 펠릭스는 한숨을 쉬고 코트를 허물처럼 벗어 옷걸이에 걸어둔 뒤 손을 씻고 라디오 튜닝 컨트롤러의 주파수를 102.3MHz로 맞춘다. 빈티지한 갈색 나무의 느낌이 마음에 들어 괜히 라디오를 한 번 더 쓸어보고, 펠릭스는 답답한 정장을 벗고 스웨터에 청바지로 갈아입는다. 익숙한 멘트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사람은 어디까지 저지를 수 있을까요? 이탈리아의 작곡가 루제로 레온카발로가 작곡한 오페라 '팔리아치' 는 젊은 아내의 부정에 화가 난 광대가 실제로 공연 도중 아내를 죽이며 막을 내립니다. 물론 가상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가상의 이야기겠지만, 오페라 또한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는 하나의 창구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섬칫하면서도 카니오의 마음에 또 공감이 안 가지는 않는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은 인류에게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요."

사랑을 위해 어디까지 저지를 수 있을까. 글쎄. 펠릭스 자신은 사실 사랑에 제대로 빠져본 적도 없고, 사랑을 위해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애초 자신과 처지가 너무 크게 다른 사람과는 사랑에 빠지지도 않을 것 같으니 드라마틱한 일을 할 리도 없다. 펠릭스는 커피를 내리고 하얀 소파의 푹신한 감각에 젖어든다.

"시네마 로만티크, 이 시대의 로맨티스트 루이 엑토르 베를리오즈와 함께하는 여행을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베를리오즈의 목소리에는 사람을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끌고들어가는 힘이 있었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사람들이 매일매일 사랑에 빠질 것 같았고, 눈을 다시 한 번 더 감았다가 뜨면 비탄에 잠긴 주인공이 기적적으로 회생할 것 같았다. 진한 커피향이 코를 간질이며 맴돈다. 펠릭스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옆에 놓아두었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을 집어든다. 첫 번째 아리아가 흘러나온다. 풍부한 테너의 아리아가 흘러나온다. 

"오늘의 첫곡으로 '팔리아치'에서 카니오가 부르는 아리아, '의상을 입어라' 보내드렸습니다. #0116으로 늘 그렇듯이 똑같이 사연받고 있고요, 끝자리 1234번님-1234가 진짜 존재하는 뒷자리였어요? '비탄에 잠긴 목소리가 너무 아름답네요. 울고 싶은데도 어쩔 수 없이 미소를 지어야만 하는 그 심정...어딘가 저도 공감이 가서 더 슬프네요ㅠㅠ' 라고 보내주셨습니다. 자, 워밍업 했으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볼까요? 오늘 소개드릴 영화는 '용의자 x의 헌신' 입니다. 이미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 소설로 접한 분들도 많이 있으실 텐데요..."

펠릭스는 고개를 끄덕인다. 본인은 추리소설에는 별 흥미가 없었지만 자극적인 걸 좋아하는 레베카는 이 작가는 어떻게 이렇게 글을 순식간에 써내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계속해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구해읽었었고, 그 때문에 펠릭스도 '한 권만 읽어봐' 라는 이야기와 함께 억지로 읽었던 책이 '용의자 x의 헌신' 이었다. 캐릭터들이 다들 죄다 천재인 바람에 본인은 이야기를 절반도 따라갈 수 없었지만...

알료샤가 승방으로 들어가는 장면까지 읽고 펠릭스는 잠시 책을 덮는다. 지금까지 읽은 부분의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한 번 정리를 해야 했다. 러시아 소설들은 원래 스토리보다는 그 속에 있는 사상에 집중하면서 읽어야 하는 것이었으니까.

"탐정으로 나온 캐릭터는 시리즈물로 계속 출현하는 캐릭터기 때문에 작가의 전작을 읽어보는 것이 캐릭터에 대한 흥미를 높이는 데는 더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느껴져 저도 직접 해당 탐정 캐릭터가 나오는 갈릴레오 시리즈를 다 읽어봤는데, 전반적으로 퀄리티가 준수하니까 한번 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펠릭스는 볼륨을 살짝 키운다. 이제 정말 중요한 시간이 찾아오고 있었다. 사연 소개 시간이었다.

"오늘의 주제 '사랑 때문에 어디까지 해봤니?' 로 많은 분들이 사연 벌써 보내주셨는데요, 몇 개 골라서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추첨된 분들께는 도서상품권 만원권이 발송되고요, 전화연결이 될 경우에 특별한 추가상품이 더 기다리고 있으니 방송 끝날 때까지 언제나처럼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제가 관심 못 받아서 죽은 귀신이 씌인 거 알고 계시잖아요?"

나왔다, 베를리오즈 전매특허. 확실히 그런 감이 있긴 하지만 그 관심을 좋아하는 부분조차도 루이 엑토르 베를리오즈가 DJ로서 인기를 끄는 매력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남들의 사랑이 어떻게 이어졌거나 망했는지 듣는 건 늘 재미있는 일이었기에, 펠릭스는 빠른 프랑스어에 귀를 기울인다.

"#2742님 보내주신 사연입니다. 전교 꼴등이었는데 좋아하는 여자애가 1등을 하면 사귀어 준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이번 기말고사에서 엄청 열심히 공부했답니다! 1등까진 못했지만, 그래도 어떻게 어떻게 전교 50등까지 왔답니다! 축하해주세요, 다음 시험에서는 꼭 전교 1등 할 거니까요."

나도 저랬던 적이 있던가? 없었다. 애초에 전교 5등 아래로 내려가 본 기억이 없었다.

"공부해서 전교 50등이면 애초에 2742님께서 할 수 있던데 안 하고 있던 거긴 하죠. 하지만 그만큼이나 본인 안에 충분한 잠재성이 가득했다는 소리가 되겠네요? 본인도 깨닫지 못하고 있던 잠재력을 깨닫게 해준 짝사랑녀에게 감사해야겠습니다. 다음 시험에서는 더 큰 잠재력 발휘하셔서 꼭 사랑을 얻어내시기를 바랄게요."

칭찬인지 욕인지 구분이 안 간다, 싶어도 자세히 들어보면 전부 덕담이다. 어쩐지 베를리오즈는 나쁜 사람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펠릭스는 파리의 야경을 바라보다가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친다. 발을 싸늘하게 훑던 가을바람이 잦아든다.

라디오가 살짝 지직거린다. 다음에는 조금 더 음질이 좋은 걸로 살까, 라고 고민하다가 펠릭스는 그 노이즈도 라디오의 멋에 포함된다는 생각에 스스로에게 고개를 젓는다. 그 아날로그적인 감성과, 몇십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따뜻한 느낌. 홀로 외지에 나와 있어도 외지의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뭉클해질 수 있다는, 자신도 이곳의 일원이라는 생각이 정말 따뜻하게 다가왔다. 

"#7853님께서는 식당에서 한 번 스쳐지나갔던 사람이 첫사랑이셨군요. 그래서 계속 그 횟집에 들렀지요, 어느새 주인 아저씨랑도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었고, 늘 저랑 같은 거 드시는 것 같은데 하면서 자연스럽게 접근했답니다. 그 사람도 회를 좋아하는 제가 특이하다고 생각했는지, 회를 좋아한다는 것 하나만으로 자기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먹은 회 이야기를 해주었고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답니다. 그런데 이건 제 남편에게는 비밀이지만-결혼하셨군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이제 고생길 시작이겠지만 최소한 외롭지는 않은 고생길이겠네요, 저는 사실 회를 못 먹는답니다. 아-못 먹는 회를 사랑 때문에 끝까지 드셨군요! 남편 분은 지금도 7853님께서 회를 잘 드시는 줄 알고 계신다니, 이 방송 혹시 7853님 남편분께서 듣고 계신다면 조용히 모르는 척 해주는 눈치 정도는 있으시겠지요? 그리고 맨 끝에 제 이야기를 물어보셨네요. 그러면 원래는 오늘의 영화 토크가 준비되어 있던 자리를 살짝 틀어서 제 이야기를...해도 괜찮을까요?"

그거 궁금하네. 하긴 저 사람도 첫사랑이 있었을 테고, 딱 보이는 것만 봐도 베를리오즈라는 사람의 사랑은 열정밖에 없는 뜨거운 사랑이었을 것 같았다. 그런 일이라면 정말 무슨 짓이든지 했을 것 같아서 펠릭스도 궁금해진다. 사람들의 반응이 엄청나게 뜨거운 모양이었는지, 베를리오즈가 웃으며 반응을 보다가 입을 연다.

"뭐, 소개하려던 건 B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오만과 편견' 이었는데, 워낙에 유명해서 아마 다들 무슨 내용인지 알고 있을 것 같으니 구태여 이야기하지는 않도록 하겠습니다. 츤데레 남주의 원조가 나오며 사랑을 위해서 정말 경악스러운 일까지 했다! 라는 것만 말씀드리고 그럼 제 이야기를 좀 해보도록 하지요. 첫사랑 이야기는 많이 해 봤지만 아마 이 이야기는 방송이랑 여기 통틀어서 처음 하는 것 같은데, 제 생에서 제일 제가 평소 안 할 짓을 하게 만들었던 건...첫사랑...은 아니고 두 번째 사랑이었네요."

펠릭스는 다 마신 커피 잔을 헹군다. 라디오 너머에서 베를리오즈의 낮은 목소리가 평상시보다 부드럽고 작게 울린다.

"제일 중요한 부분만 이야기하자면, 이 프로그램을 시작한 것 자체가 제가 좋아했던 애 때문이었네요. 나이는 저보다 두 살이 어렸는데, 워낙에 똑똑해서 무려 2년 수업을 건너뛰어 들었다는 것부터 대단한 애라고 생각을 했죠. 당시 다니던 학교에 걔가 아마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왔던 것 같아요, 독일에서 온 애였는데... 음, 더 이상 하면 신상 털리겠다. 얼마나 걔가 예뻤는지도 위고가 앙졸라를 묘사하는 마냥 길게길게 풀어쓰고 싶지만 제게 주어진 시간은 1부 끝날 때까지밖에 안되니까요."

베를리오즈라면 제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세 시간, 네 시간이고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펠릭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1년 반이 지나가기 전에 방청객으로 신청하면 한 번 정도는 베를리오즈의 쇼에 가 볼 수 있을까? 휴가를 하루 정도 내 보면...

역시 공무원으로서 그런 짓은 무리지. 시간 내기 어렵겠다. 펠릭스는 다시 소파에 앉아 라디오에 귀를 기울인다.

"라디오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애였죠. 작은 라디오를 가지고 다니면서 어디를 갈 일이 있을 때마다 듣고 있었어요. 그 때 들었던 주파수가 102.3MHz였지요. 역시 독일어를 쓰지 않는 곳에서는 이방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그래도 라디오를 듣고 있으면 외지에서도 결국 사람은 살아가고 있고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이야기해줬지요. 딱히 저랑 더 친하거나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아니, 저를 싫어했으면 좀 싫어했으려나? 한번은 걔가 계단에서 굴렀었거든요. 왼쪽은 무릎부터 거의 종아리 앞쪽까지 쫙. 다 찢어져 있었고 오른쪽도 무릎에 심하게 멍이 들었었어요. 그래서 손을 잡아주면서 일으켜세웠는데, 요 조동아리가-청취자분들께서는 좋아하시는 요 조동아리 말이죠-또 탈이어서, 걔가 아파서 울락말락 하고 있었는데 거기다가 대고 '신성모독은 내가 했는데 네가 대신 넘어져서 어떡해?' 라고 했던 거예요."

펠릭스는 휴대폰 스크롤을 내리던 손을 멈춘다. 베를리오즈는 자신이 좋아하던 애가 자신을 가끔 걷어차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면서 손을 치웠던 이야기를 계속한다.

"확실히 제가 생각을 해도 그 상황에서 하면 안 되는 말이었지요. 뭐라고 해야 하나. 흠, 진짜, 철이 없던 건지 센스가 없던 건지."

펠릭스는 구글 드라이브를 열어서 오래 전의 사진을 본다. 무릎이 다 까져서 붕대를 칭칭 감은 펠릭스가 당시의 반 친구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린 펠릭스의 손에는 작은 휴대용 라디오가 들려 있다.

"독일로 돌아가기야 했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프랑스에 한 번 놀러오면 방송을 들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방송을 계속 하고 있지요. 딱히 찾겠다는 욕심은 아니죠. 지금도 보고 싶긴 해도. 분명히 멋있게 자랐겠죠. 똑부러지고, 착하고, 곧고, 다정하고. 그런 애였거든요. 뭘 하고 있으려나, 사회복지사 같은 거라도 하고 있을지 몰라요. 아니면 의사가 되었을지도. 그것도 아니라면 선생님도 잘 어울리겠네요. 지금도 라디오를 좋아할까요? 고풍스러운 걸 언제나 좋아했지만 이제는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걸 듣고 있다면, 그 때 미안했다고 이야기해주고 싶고... 그 때 정말 오랜 시간 동안, 진심을 다해서 좋아했다고 전해주고 싶어서. 아, 좋아했다는 너무 가볍지요? '사랑했다' 가 훨씬 정확한 표현이겠네요."

펠릭스는 구글에 '루이 엑토르 베를리오즈' 를 검색해보고, 다녔던 학교의 이름을 화면 위로 쓰다듬어본다.

자신이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해 보았다. 하지만 그 사랑이 이렇게까지 열렬하고,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을 것이었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사랑 때문에 어디까지 해 봤냐고?

펠릭스는 문자 탭을 연다.

"라디오에는 이상하게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있어요. 이상하게 라디오가 그렇게 옛날 기술이 아니었을 때도 라디오에는 언제나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있었지요. 사람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고, 분명히 전파 너머라서 느껴지지 않을 사람 냄새가 느껴지곤 해요. 그래서 지금이라면 TV에서 그 애가 저를 볼 확률이 더 높은데도, 목소리만 들리는 성우가 되었고, 목소리만 전해지는 라디오 방송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자, 그럼 이쯤에서 전화연결 가볼까요? #0750님, '오늘 하루 수고하셨어요. 길고 긴 하루를 보내셨을 베를리오즈 씨께도 위로 문자 보내드리고 싶네요!' 라고 보내주셨네요. 사실 별로 길진 않았죠. 오늘도 열두시까지 퍼질러 자다가 왔으니까. 자, 그럼 전화연결 가봅니다. 룰은 언제나랑 똑같이 다섯 번 울렸는데도 받지 않으면 패스."

-글자보다는 목소리가 좋지 않아요? 당신도 엉망진창인 자기 글씨보다는 이제 막 변성기가 오긴 했어도 그 목소리가 더 맘에 들잖아요.

펠릭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울리는 휴대전화를 받는다.

"네, 전화연결되었습니다! 0750님, 반가워요."

라디오의 소리와 휴대전화의 소리가 이중으로 울린다. 펠릭스는 잠시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저기요?"

당신, 멋지게 컸네요. 오늘 내가 프랑스에 있지 않았고 오늘 내가 102.3 MHz의 FM방송을 여섯 시 반에 틀지 않았더라면, 방금 당신이 끝자리 0750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랬어요.

사랑을 위해서 너무 무모한 짓을 했어요. 무모한 만큼의 보상이 따라주기야 하겠지만요.

"0750님?"

전파 너머로 베를리오즈의 혼란스러움이 전해진다. 여기서 한 번 더 망설이면 우리 연은 거기서 끊기겠지.

펠릭스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다.

"당신 미워한 적 없어요. 단 한 번도."

펠릭스는 낼 수 있는 한 부드럽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하고, 연결을 그대로 끊는다. 라디오 뒤편으로 침묵이 한참 이어지더니 베를리오즈가 '나 만 번만 전화해보면 그 중에 하나는 펠릭스인 거지? 만 번이면 되는 거지? 한 번에 5초 잡아도 열네시간이면 돼! 말리지 마!' 라며 괴성을 지르고, 광고가 시작된다. 펠릭스는 작은 미소를 짓는다.

길고 긴 하루를 보낸 당신에게 위로를 보내요. 이상, '시네마 로만티크'의 코너 속 코너 '리얼리티 로만티크' DJ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였습니다.

클래식 작곡가 RPF/RPS 연성을 합니다. 간혹 작곡가 관련 개인적 사담+ 작곡가 편지 자료+ 작곡가 TMI 자료 등등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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