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천!아스타리온과 스폰!타브/더지의 로맨스 엔딩 이후
 *이 글과 일부 세계관을 공유하지만 별도의 글로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C/W: 자해, 자살 기도, 파트너 간의 가정폭력, 잔인함 등에 대한 묘사 및 암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타브의 아이덴티티는 일부러 모호하게 처리했습니다.
 *본편 강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괴물이 괴물이 아니게 될 때는 언제지?

- 케이틀린 실, "여기서부터 시작해" 中




6.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만큼 지리멸렬한 것이 또 있을까마는, 그리고 물을 이가 과연 있겠냐마는, 타브는 만일 자서전을 쓰게 된다면 그 문장이야말로 완벽하게 어울리리라 생각했다. 저와 아스타리온 사이의 복잡한 나선형 이야기를 다루는 챕터에 말이다. 또한 훌륭한 변명의 서두가 되기도 하겠지.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타브는 삼악신의 선택받은 자들과 네더브레인에 대적하는 여정 동안 자신이 최선을 다했음을 자부했다.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은 구하고자 했고, 베풀 수 있는 관용은 모두 베풀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타브는 무리의 썩 나쁜 리더는 아니었다. 모두가 그의 의견에 찬성한 건 아니더라도 그의 달변(그 표현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개개인마다 차등을 두자)에 고집을 꺾었다.


그랬던 자신이, 칠천 명의 목숨을 바쳐 자신을 이보다 더한 존재로 만들어달라는 연인의 요구는 차마 져버리지 못했다. 사랑에 급급해서.


(이리 와. 우린 할 수 있어.)


돌이켜보면 타브는 자신이 그런 선택을 내린 이유가 순수한 사랑보다는 아스타리온의 것과 흡사한 두려움에 기반했음을 부정치 못했다. 무서웠던 것이다. 아스타리온의 열망을 거부한다면 그가 자신을 버릴까봐. 서로를 알게 된지 얼마 안 되는 기간 따위는 둘 사이의 불타는 욕정과 애욕과 사랑에 아무런 장애도 되지 못했다. 상대의 머릿속을 훤히 꿰뚫어볼 수 있는 외계 올챙이가 머릿속에 박혀 있는데 고작 시간 단위를 따지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더군다나 그 올챙이 때문에 당장 마인드 플레이어로 변해버릴 지도 모르는 난국 속에서는 더더욱.


모순적이게도 바로 그 연결 때문에 타브는 아스타리온의 갈망도 자신의 것처럼 인지할 수 있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새카만 무저갱같은 그 욕망은 타브에게 미지의 공포를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이대로 한 번만 찔러넣으면 네놈에게서 자유로워질 수 있어. 다신 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겠지.)
 (하지만 네가 시작한 의식을 대신 끝낸다면? 앞으로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거야. 영원히.)


제 존재와 사랑만으로는 아스타리온의 그 깊이 모를 공허를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타브는 한치의 의심 없이 확신했다. 자기자신과 둘 사이의 감정을 신뢰하지 못한 미욱한 연인은 그 공백을 무고한 목숨들을 바침으로서 대신 메우고자 했다. 그 번제는 타브가 아스타리온에게 일생 동안 표현할 수 있을 가장 큰 사랑의 맹세이자 운명이 그에게 안긴 고통에 대한 대속이었다.


동료들의 지탄과 죽어가는 희생물들의 비명, 공포 어린 연인의 경외 속에서 아스타리온은 기어이 승천했다. 한때 무리에서 가장 낮은 서열의 첫 번째 스폰에 불과했던 그는 그토록 바라던 힘을 거머쥐었다.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지.'


타브는 상념에 젖었다. 사람은 누구나 깨닫는 게 늦다고 하더니, 과연 그러했다. 그 모든 일이 지나고서야 타브는 빙산의 일각을 파악할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인한 무지였다. 뱀파이어 승천체가 되어 적어도 칼날 해안 서부에서는 맞수가 없어졌음에도 아스타리온은 언제나 표독스럽게 타브를 지키고자 했다. 잠재적인 적들로부터, 그리고 타브 자신으로부터.


그 보호욕인지 독점욕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연인의 욕망 앞에서 타브는, 늘 그러했듯, 무력하게 져버렸다. 양보와 항복, 사랑과 굴종은 타브에게 있어 이제 분간하는 것이 무의미했다. 공포를 탐욕으로 도금한 제 흡혈귀 연인과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아닐 수 없었다.


"타브, 자기. 식사 시간이야."


암막 커튼으로 일체의 빛이 차단된 저택 남쪽 안채에서 책을 읽던 타브는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 변함없을 그의 연인이 손수 은쟁반에 금잔을 받쳐 들고 눈 앞에 서 있었다.


출렁이는 잔 안의 피에서는 절로 군침을 돌게 하는 비린내가 풍겼지만 타브에게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 손으로 피를 마시려드는 기미가 없었다. 순혈도 아닌 일개 스폰 치고는 놀라운 자제력이었다.


하긴, 그런 자제력이 있었으니 삼악신과 네더브레인의 유혹을 뿌리치고 '옳은 일'을 한 것이겠지만. 아깝게도. 혀를 차며 아스타리온은 타브의 턱을 받쳐 고개를 들게 했다.


타브는 아스타리온의 눈에서 다양한 감정을 읽었다. 언제부터인가 아스타리온은 타브 앞에서 무엇도 숨기지 않았다. 탐욕, 분노, 답답함, 짜증, 욕망. 걱정과 애욕, 그리고 우월감 서린 희열도.


한때는 그에게 제발 정신차리라고 울며 매달리던 때가 있었다. 승천한 아스타리온이 아무 죄악감 없이 저지르는 악행을 지탄하며 더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며 발버둥치고, 도망치려 하고, 맞서 싸우던 때가 있었다. 그러면 아스타리온은 아이 다루듯 타브를 어르고 달래고 회유하고 혼냈다.


그럼에도 타브가 반항을 멈추지 않자, 아스타리온은 역정을 내며 - 혹은 기다렸다는 듯 - 그를 순수한 뱀파이어로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깨버렸다. 언제든 제어하고, 감시하며, 통제할 수 있는 존재로 방치했다.


결국 역사는 되풀이된 셈이었다. 네더브레인이 뇌에 박힌 기생충으로 휘하의 마인드 플레이어들을 지배했듯, 카사도어가 그 밑의 뱀파이어들을 노예로 부렸듯이. 그리고 이제는


(이 배은망덕하고 간악한 것……)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실랑이를 벌였는지 몰랐다. 말 안 듣는 반려이자 스폰을 아스타리온이 '정당히 벌한' 적도 셀 수 없었다.


그러나 결국 시간은 아스타리온의 편이었다.


낙숫물에 바위가 뚫리듯 타브의 반항은 점점 줄어들었고, 이제 그는 인형처럼 유순해져 아스타리온이 만들어준 안락한 새장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어보였다. 죽어서라도 탈출하겠다며 자해를 일삼는 반려를 개처럼 꽁꽁 묶어두거나 지하에 가둬둘 필요가 없어진 것만으로도 아스타리온은 흡족해 했다.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


관성적인 타브의 거부에 아스타리온은 미간을 찡그렸다. 여상스러운 어조의 협박이 되돌아왔다.


"그러지 말고. 내가 자길 또 묶어놓고 입에 억지로 피를 쳐넣어야 해?"


이제는 언급하는 것이 터부시되는 아스타리온의 과거사 속에서 그 자신이 카사도어에게 비슷한 꼴로 고문당한 적이 있으리라는 사실은 자명했다. 굳이 그 얘기를 꺼내 아스타리온을 자극하는 대신 타브는 침묵을 지켰고, 아스타리온은 혀를 차며 여전히 타브의 턱을 그러잡은 채 금잔을 들어올렸다.


"응석부리는 것도 귀엽지만 자꾸 이러면 아예 키스로 먹여버리는 수가 있어, 내 사랑."


다정히 속삭이는 말이 벨벳에 싸인 강철에 불과하다는 것은 타브도 이미 잘 알았다. 조금이라도 심기에 거슬린다면 그는 타브의 사지를 옭아매길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체념한 타브는 순순히 손을 뻗었고, 아스타리온은 저으기 만족하며 그 손에 잔을 쥐어주었다. 타브가 잔의 내용물을 남김없이 다 마신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아스타리온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착하다. 늘 이렇게 고분고분하면 사슬도 필요없잖아."


타브는 무심코 자신의 손목을 흘끗 바라보았다. 흉터는 남아 있지 않았지만 아스타리온이 한 번 그의 손발을 차꼬와 족쇄로 옭아매고 옴싹달싹하지 못하게 고정시킨 채 관 속에 가둬둔 적이 있었다.


정확히 얼마나 오래 갇혀 있었는지 타브는 아직도 알지 못했다. 풀려난 후에도 수년은 폐쇄 공포증으로 괴로웠다는 것만 기억났다. 그때의 비좁고 써늘한 직육면체 감옥에 비하면 남쪽 안채는 궁궐이나 다름없었다.


타브가 순종적으로 눈을 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아스타리온은 그의 뺨을 한 번 쓸어주고는 자리를 떠났다.


한때는 아스타리온도 보이지 않는 족쇄에 얽매인 채 그 무게에 괴로워했다. 그 모습을 보다못한 타브는 그 속박을 끊어주고자 했다. 하지만 아스타리온은 풀어진 자신의 사슬을 버리는 대신 타브의 목에 묶었다. 그리고 그 스스로는 자유로워졌다고 자위했다.


그 사슬의 끝은 주인임을 자처하는 아스타리온에게 여전히 매달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보, 사랑, 항복, 굴종. 모든 것은 같았으며 아무 의미도 없었다. 타브는 눈을 감았다. 적어도 지금 제 두 손목은 무엇으로도 묶여 있지 않았고, 배가 부르자 곧 잠이 찾아왔다.



5.


발더스 게이트 하부 도시 서쪽에 위치한 한 대저택에는 유령이 산다는 소문이 있었다.


기실 저택이라기보단 성이라 불려야 할 마땅할 그 어마어마한 대저택은 과거엔 실제로 무슨 궁전이라고 불리기도 했다는 모양이었다. 상부 도시에서 하부 도시 성벽에 걸치는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그 사유지는, 그러나 이제 새 주인이 된 지 오래인 엘프 주인의 성을 따 안쿠닌 고택이라 불렸다. 스스로를 자르 가문의 후계자라 공표한 외인이 유산을 이어받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법한 자르 가문의 생존자도 없었던 데다가, 그런 사소한 사항들을 걸고 넘어질 도시의 행정가들은 절대다수가 공습 와중에 죽어버렸으므로 상속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유령이 출몰한다는 소문에 대해서는, 글쎄―그런 대저택에서 일하도록 선택받을 만큼 영민한 이들은 행여나 누가 진상을 캐물어도 조가비마냥 입을 꾹 다물었다. 그들의 침묵에서는 하나같이 단순한 상여금만으로는 살 수 없는 현묘한 충절마저 느껴졌기에, 입방아 찧길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안쿠닌 공이 사람을 부리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쑥덕거렸다.


문제의 아스타리온 안쿠닌 공은 발더스 게이트를 마인드 플레이어 대침공으로부터 구했던 영웅 중 한 명이었다. 정확히 그가 언제부터 귀족 경칭을 얻게 된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했다. 그 시기를 명확히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으니 아마 도시를 구한 공로로 받은 것이 아닌가 그럴싸하게 짐작만 할 뿐이었다.


일리시드 침공 사태에서 도시를 구했던 모험가들은 대부분 포상을 사양하고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겸손은 뭇 영웅의 미덕이라지만, 절대 다수의 시민들은 대참사 뒤에 따라붙는 불안한 수습기 동안 구원자가 한 명이라도 더 도시에 남아 파수꾼 역할을 해주자 크게 안도했으며, 그를 칭송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유령과 관련된 낭설보다 조금 더 그럴싸한 또다른 소문으로는 안쿠닌 공이 혼자 정착한 게 아니라는 풍문이었다. 듣기로는 일리시드 침공 사태에서 그와 함께 어깨를 맞대고 싸운 전우 중 한 명이자 연인이라고 했는데, 정작 그 사람을 직접 봤다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대참사 당시야, 뭐, 대참사가 진행중이었으니 누구도 사람 얼굴을 자세히 볼 틈은 없었을 것이다. 발더스 게이트의 대영웅이 사태 종결 후에도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데에 이유는 또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고. 심각한 부상을 입어 장기간 칩거 중이라든가, 유명세와 인민의 열광이 지겨워 숨어버렸다든가, 아예 비밀리에 도시를 빠져나갔다든가 하는 온갖 사실무근의 침소봉대가 난무했으나, 정작 영웅이 머무른다는 저택의 주인인 안쿠닌 공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결국 사람들이 흥미를 잃고 돌아서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발더인들은 재건과 부활에 익숙했다. 몇 번이나 부러진 뼈가 더욱 단단하게 붙듯이 그들은 영웅들의 제멋대로인 출연과 홀연한 실종에 달관해 있었다. 이번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령 이야기도, 도시를 구한 모험가들의 후일담도 시들해져갔다. 발더인의 입 신문지는 사라진 영웅의 행방 대신 도시 지하에서 발견된 바알 신전 소탕 작전과 티플링 정착민들이 새로 개업한 노상 카페의 아몬드 케이크를 홍보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며 또 하나의 역사는 전설이 되었다.


굳게 닫힌 대저택 안, 서로 뒤엉켜 한덩어리가 된 쥐가 새겨진 양문 뒤에서 아스타리온은 그제야 만족스럽게 웃었다. 어딘지 관록마저 느껴지는 인내심을 갖고, 마치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아주 잘 알았던 사람처럼.




4.


"여태까지 몇 명이나 해쳤지?"


아스타리온의 품에 안긴 채 타브는 물었다.


사실 누가 누굴 안고 안겼다고 하기도 애매한 형국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가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도 모를 정도로 진탕 사랑을 나눈 뒤 팔다리가 뒤엉켜 누워 있었다.


타브는 문득 카사도어의 양문에 새겨진 쥐들의 비문을 떠올렸다. 피아가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 모르게 얽히고설켜 하나의 괴물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동물들. 오싹하니 소름이 돋았다. 그는 아스타리온의 품에서 벗어나고 싶어 머무적거렸지만, 낌새를 챈 승천체의 팔이 더욱 옥죄어왔다.


"이제와서 후회한다고는 하지 마, 자기."

"그런 거 아냐."


너무 늦었다는 건 타브가 아무리 어리석어도 알았다. 그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들 앞으로 쌓인 혈겁의 부채가 얼마인지.


아스타리온은 흐음, 하며 생각하는 시늉을 했다. 두 사람이 누운 곳은 타브가 갇혀 지내는 남쪽 안채가 아닌 아스타리온의 거대한 침실이었다. 밤이 되어 활짝 열 수 있었던 커튼 아래 달빛이 그의 창백한 어깨와 잇자국 남은 목덜미를 희게 비췄다.


그 한 쌍의 작은 구멍을 손끝으로 누르고 싶은 충동을 삼키며 타브는 가만히 대답을 기다렸다. 아스타리온은 그의 질문을 그냥 무시할 때도 많았지만, 자신의 능력을 자랑할 수 있는 상수가 계산에 포함되는 답변이라면 결코 무르지 않을 것이다.


"……모르겠는데. 일일히 세어본 적도 없고."


타브는 실망하지 않았다. 이미 예상한 대답이었으므로. 하지만 그 침묵을 도리어 이상하게 생각한 아스타리온이 눈썹을 찌푸렸다.


"전처럼 매도하지 않네? 화내거나 울지도 않고, 괴물이라고 하지도 않고."

"네가 괴물이면 난 뭐가 되겠어."

"정말로 철들었네, 자기."


무심한 타브의 대답이 되려 마음에 들었는지 아스타리온은 다시 그의 뒷덜미를 감싸고 부드럽게 키스해왔다. 타브는 피하지 않았다. 눈을 반쯤 뜨고 있다가 아스타리온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눈꺼풀을 닫았다. 농밀하면서도 질척하게 젖은 소리가 침묵 속에 간간히 울렸다.



3.


간만에 저택에서 열린 대연회에서 주최자인 안쿠닌 부부는 누구보다도 눈부시게 빛났다.


참석자들 중에선 타브가 아는 얼굴이 거의 없었기에, 그는 아스타리온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대화의 대부분은 어차피 아스타리온이 주도하고 이끌었으므로 상관없었다. 샹들리에가 너무 눈부셔서 타브는 파티 내내 눈을 내리깔고 사람들의 얼굴을 거의 마주보지 않았다. 침묵이 미덕이라는 점에서 아스타리온의 배우자 노릇은 와인을 따르고 음식을 나르는 저택 하인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명성에 걸맞게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꾸며진 홀 안에서 끝없이 나오는 미주와 산해진미는 이 저명한 부부의 부와 명성을 다시금 증명해주는 장치였다. 사람들은 그 관대함을 칭송하고, 흑적색으로 색을 맞춰 차려입은 두 사람의 요요한 아름다움을, 아스타리온이 고르고 골라 타브에게 두르고 입혀준 워터딥산 고급 비단옷과 아스카틀라에서 수입한 귀금속에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은 아스타리온을 적이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기분이 퍽 좋았는지 파티 내내 은은한 미소를 입가에서 지우지 않았고, 타브는 곁눈질로 그 미소를 가만히 관찰했다. 그가 남쪽 안채에서 아무도 모르고 보낸 시간 동안 아스타리온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대강이라도 짐작하려는 것처럼.


"안쿠닌 씨는 처음 뵙는 것 같군요. 그동안 많이 편찮으셨다고 들었어요."


간혹 이렇게 말을 걸며 다가오는 이들이 있기도 했다. 아하, 그런 '설정'이었군. 그러면 타브는 사전 의논 없이도 아스타리온이 미리 정해놓은 시나리오대로 입을 맞춰 유순하게 대답했다.


"그간 건강이 안 좋아 요양을 해야 했거든요. 하지만 제 남편 덕분에 많이 좋아졌답니다. 그 기념으로 이이가 이렇게 연회를 열어주기까지 했고요."

"어머나, 사랑의 힘이란 위대하군요!"

"부러워요. 저도 안쿠닌 공 같은 분과 결혼하고 싶네요."

"안쿠닌 씨는 배우자를 참 잘 만나셨습니다."


진심인지 아닌지 모를 공치사와 칭찬이 포도주처럼 쏟아졌다. 타브는 별 감흥이 없었다. 그보다는 - 아무리 두문불출했었다고는 해도 - 저를 알아보는 이들이 없다는 데서 위화감을 느꼈다. 정말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새삼 체감할 수 있었다.


혹시나 싶어 타브는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아직 머릿속에 희미하게 기억으로 남은 얼굴들은 보이지 않았다. 섀도하트나 게일, 윌. 카를라크와 레이젤. 자헤이라, 민스크, 할신, 민타라. 그러고보니 이제 그들 중에선 누가 남았을까. 이미 수명이 다되거나 불운한 이유로 세상을 떠난 이들도 있을까.


옛 동료들을 이제야 떠올렸다는 사실에 타브는 끼쳐오는 전율을 억눌렀다. 잔을 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


"이런, 자기. 역시 몸이 많이 안 좋은 거야?"


어느 사이 아스타리온이 곁에 와 있었다. 타브는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허리를 다정히 감싸는 팔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 파트너가 아무래도 오늘 무리를 한 모양입니다. 손님들께는 죄송하지만 나머지 연회는 저 하나만으로 만족해주십사 부탁드리는 수밖에 없겠군요."


매끄러운 말씨에 사람들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고 탄복하기 바빴다. 어쩜, 다정한 부군이셔라! 안쿠닌 씨의 빠른 쾌유를 바랍니다. 배우자분이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시는데 당연히 좋아지시겠죠. 비슷한 맥락의 말이 연달아 들려왔지만 하인에게 이끌려 남쪽 안채로 돌아가는 타브에겐 들리지 않았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너무 밝게 느껴지는 샹들리에의 조명 아래서 아스타리온은 역설적이게도 그 누구보다도 빛났다. 마치 지상에 추락한 작은 별처럼.



2.


"윌에게서 새로 온 소식은 없었어?"

"무슨 소리야, 자기. 윌 손자가 죽은 지가 언젠데."

"참, 그랬지. 게일도 그럼 더 이상 없겠네……섀도하트는? 레이젤은?"

"섀도하트는 자기 부모님 옆에 묻혔지. 레이젤은 정복 전쟁을 떠난 뒤 소식이 끊겼어."

"카를라크가 지옥으로 떠난 것까진 기억나. 아직도 거기 있을까?"

"위더스의 파티 이후로 본 적이 없으니 아마도 그렇겠지. 아니면 거기서 죽었던가."

"민타라……할신……자헤이라와 민스크는……."

"쉿, 내 사랑. 좀 더 마셔. 식사를 충분히 해야 쓸데없는 잡생각이 안 들지."

"쓸데없지 않아. 우리 친구들이라고."

"친구? 마지막으로 그치들을 본 게 언제였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잘도 친구라고 부르는군."

"난 아직 너랑도 같이 있잖아, 안 그래?"

"닥쳐."

"읍. 윽, ……끄흑……"

"옳지. 마저 마셔, 쭉."

"……."

"그래. 입이 꽉 차 있으면 적어도 바보같은 소리는 더 못할 테니."



1.


타브는 자신의 옷장 깊숙한 곳에 접어두었던 비단 셔츠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다소 어폐가 있는 표현이지만 '숨겼다'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지도 모른다. 이런 낡고 닳은 옷을 본다면 아스타리온이 분명 질색을 하며 갖다버리게 할 테니.


설령 몇 번을 손수 기워입으며 아꼈던 셔츠라 하더라도 말이다.


아니, 오히려 어쩌면 그렇기에 더더욱.


손가락 사이로 문질러보는 천은 삭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부드러웠다. 직물보다는 모래에 가까울 정도였다. 게다가 어찌나 꼼꼼하게 바느질을 했는지 실로 꿰맨 흔적들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찾기도 힘들었다. 색이 바래지만 않았어도 아직 입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셔츠 밑단을 뒤집자 섬세하게 자수로 놓인 글귀가 보였다.


자두 따위에 만족하고마는 가을의 농부란 통탄스러울 지어다.


아스타리온다운 문장이었다. 웃던 것도 잠시, 타브의 짧은 홍소는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맞아. 고작 자두 따위에 만족할 이유는 없지."


아스타리온도 필경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밑바닥보다 더한 밑바닥에서 그의 양분이 되어준 쥐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폭력과 착취 속에서 살아남으려 폭력과 착취를 반복한 뱀파이어 스폰 아스타리온이라면 분명 그랬겠지.


그리고 타브는 그런 아스타리온을 그저 사랑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모든 신들의 이름에 맹세코 정말이었다. 그가 밤에 악몽을 꾸지 않도록, 시야의 가장자리에 보이는 그림자마다 흠칫하며 놀라지 않도록 끝없는 갈증 속에서 잠깐의 유예가 되어주고 싶었다. 그가 태양의 존재도 부재도 원망하지 않아도 될 이유가 되어주고 싶었다.


아스타리온은 선택하고 선택하고 또 선택해서 지금 그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되풀이되는 굴레의 반복이었다. 그가 내린 '선택'에는 타브도 포함되어 있으리라는 생각은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아스타리온은 타브를 택했고, 지금의 아스타리온을 완성시킨 것은 타브였다. 


"네가 스스로에게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선택을 내렸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스타리온은 타브에게 여전히 끝없는 사랑을 속삭이지만, 거기엔 긍지도 존중도 신의도 없었다. 이제 둘에게 과거는 언급하는 것이 금지된 기아스geas에 불과했다. 깊은 구석에 숨겨두었던 이 셔츠처럼.


그저 하염없이 통탄스러울 뿐이었다.



0.


돌바닥을 구르는 카사도어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내는 이는, 당연하겠지만, 아무도 없었다.


"손 치워라, 벌레야!"


일전에 치른 전투에도 카사도어는 기적적으로 멀끔한 모습을 유지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오히려 궁지에 몰린 처지를 강조할 뿐이었다. 허둥거리며 어떻게든 여유로운 척 굽어보는 태도를 유지하려 애를 쓸 수록 그의 살 길은 시시각각 좁아져가고 있었다.


"하! 지금 땅바닥을 구르는 게 어느 쪽이지?"


아스타리온의 말이 끝나자마자 카사도어의 시선은 바닥에 뒹구는 우아한 모양새의 단검으로 향했다. 손을 뻗을까 했지만 뒤에 버티고 선 타브와 일행의 존재에 섣불리 행동을 취하지 못하는 사이, 아스타리온이 먼저 그것을 집어들었다.


"이대로 한 번만 찔러넣으면 네놈에게서 자유로워질 수 있어. 다신 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겠지."


아스타리온이 이를 악물었다. 200년간 지옥을 선사한 자에게 복수를 앞둔 것 치고는 금방이라도 피눈물을 흘릴 것처럼 설움에 겨운 목소리였다. 뼛속까지 새겨져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수모와 고통을 떠올리니 단검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카사도어가 일순간 비굴하게 아스타리온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가 염려하는 공격은 당장 벌어지지 않았다. 다만 스폰의 얼굴에 잔혹한 미소가 떠오를 뿐이었다.


"하지만 네가 시작한 의식을 대신 끝낸다면? 앞으로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거야. 영원히."


실소가 카사도어에게서 터져나왔다. 뱀파이어 로드는 기회를 잡았다는 듯 마음껏 조롱을 퍼부었다.


"날 천치로 아느냐? 남이 진언을 읊고 내 초월자의 자리를 찬탈하게 내버려 둘 성싶으냐?"


내가 네 몸에 새긴 룬은 너와 칠천 명의 영혼 전체를 의식에 결속한다. 의식을 완료하면 널 포함해 흉터를 가진 자들 전부가 제물로 바쳐지지.


너는 그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처음부터 넌 소모품으로 만들어졌어.


"나는 네가 만든 물건 그 이상의 존재야!"


아스타리온의 시선이 저에게 향한 순간, 타브는 무심코 그가 자신을 보지 않기를 바랐다. 그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기를, 최악과 차악 중에서 필요악을 고르게 만들지 않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심연을 들여다보되 괴물만은 되지 않기를.


그러나 신들은 한 번도 타브의 기도를 들어준 적이 없었고, 그의 연인은 그가 가장 두려워하던 방식으로 그의 바람을 배신했다.


"날 도와줘, 타브."


그리고 타브는, 어리석게도, 한 번도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를 외면할 수 있었던 적이 없었다.


"제발."


타브는 두려움 배인 탐욕에 시야가 좁아진 연인을 도저히 비난할 수 없었다. 그의 공포엔 근거가 없다며 매도할 수도 없었다. 그러기엔 그의 공포의 근원에는 바로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저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스타리온이 괴물이 되고자 한다면, 저 또한 기꺼이 괴물이 되리라. 그리함으로서 둘의 운명을 한데 묶으리라. 어리석은 행보가 지핀 불이 언젠가 둘 모두를 불살라 재로 돌려보낼 때까지.


그것이 괴물과 우자가 서로를 사랑하는―사랑할 수 밖에 없는―유일무이한 방식이었다.


"……그래."


타브는 대답했다.


이것이 그의 선택이었다.






*인용한 시는 케이틀린 실의 '여기서부터 시작해' (Caitlyn Siehl - Start Here) 입니다.


먼저 그를 불에서 끄집어내고
 탄내를 잊어버리길 바라.
 원랜 천사였던 그를, 저들은
 빛으로부터 끌어내려 굶주린 뭔가로 만들었지,
 손이 떨리지 않을 때면
 그 손이 왜 있는지 잊어버리고 마는 무언가로.
 그가 너무도 많은 걸 잃어버리는 걸 넌 지켜봐야 할 거야
 왜냐면 그를 처음으로 가진 건 너였고, 넌 그를 지킬 수 있다면
 세상이 스스로의 목을 부러뜨리게 내버려둘 테니까.
 먼저 그의 턱에서 피를 닦아주고
 이해하는 척 해.
 너 자신에게 계속 말해
 "난 널 버리지 않을게, 난 널 버리지 않을게"
 잠이 들어 모든 것이
 붉지 않은 세상의 꿈을 꿀 때까지.
 괴물이 괴물이 아니게 될 때는 언제지?
 오, 네가 그 괴물을 사랑할 때지.
 오, 네가 그 괴물에게 자장가를 불러줄 때지.
 손바닥을 위로 들어.
 그 손을 앞으로 내밀고 그가
 첫 말을 배우듯 기도하는 걸 봐.
 먼저 그를 또 한 번의 화재에서 끄집어내고
 바닥에서 주운 조각들을
 하나하나 끼워맞춰.
 용서할 건 너무도 많지만 넌
 잊는 방법을 모르지.
 괴물이 괴물이 아니게 될 때는 언제지?
 오, 괴물이 괴물이 되어버린 이유가 바로 너일 때지.
 여기 네 보잘 것 없는 제물이 있어,
 박살나고 부서진 채,
 이 버려진 교회의 문 앞에.
 그는 이 세상이 스스로를 뒤집어버리는 걸 막기 위해 왔고,
 넌 그를 사랑해, 정말로,
 그러니 넌 그가 그렇게 하게 두지 않을 거야.
 그에게 이게 최선이라고 말해.
 이게 왜 부족한 지 이해하는 척 해.


*쓰면서 들은 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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