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곡차곡 쌓인 상자를 테이프로 마감하는 소리가 요란하다.

나는 멀찍이 서서 물건을 포장하는 후루야 레이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널찍하고 단단한 등이었다. 짐 정리는 혼자서도 충분하다며 나를 제쳐 두고 바지런히 움직인 지 한 시간째. 그가 마지막 상자에 테이프를 붙이기 무섭게 손바닥을 탁탁 털었다. 가뜩이나 텅 빈 거실에 반향이 유독 크게 울렸다.

“짐은 이게 전부?”

“응. 네 짐은 내일 중으로 부칠게.”

“왜. 오늘도 바빠?”

“아니. 힘들어서 좀 쉬려고.”

그가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푸념을 늘어놓았다. 허리를 한껏 젖혀 과장된 스트레칭도 잊지 않는다. 부드럽게 접힌 눈매가 꼭 아무로 토오루를 연상케 했다. 이 남자는 아직껏 연기 중인 걸까.

“그러게 나도 같이하겠다니까.”

“됐어. 뭐 하러 이런 잡일까지 해.”

“마무리까지 제대로 하고 싶어서 그러지. 그게 부인 된 도리 아니겠어?”

내가 팔짱을 끼고 능청스레 시시덕거렸다. 그는 피식 웃더니 적당히 쌓아 올린 상자에 되는대로 걸터앉았다. 마냥 장난스럽던 눈매가 조금 진지해졌다.

“감사 표시는 정식으로 또 하겠지만, 미리 고마워. 내 생각보다 훨씬 잘해 줬어.”

“……그래.”

그토록 바라던 칭찬을 받았는데 어째 입안이 씁쓰레했다.

아마, 이 경우에 ‘잘한다’란 곧 ‘공사 구별을 잘한다’는 의미라는 걸 알기에.

오늘은 아무로 토오루와 나, 아무로 시호가 부부로 행세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석 달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한 지붕 아래에서 생활하기에는 지나치게 긴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 함께하는 시간의 밀도란 현저히 낮아서 체감상 그리 길지는 않았다. ‘후루야 레이’는 워낙 바빠 집을 비울 때가 많았다.

가짜 부부 행세에 협력해 달라는 부탁을 처음 받았을 때는 잠시 고민했다. 아니, 의심했다. 그가 나를 시험한다고 생각했다. 나조차 알 수 없어 모호하기만 한 감정을 누구보다 기민하게 잡아채고는 나를 시험에 들게 한다고. 그래서 섣불리 거절할 수 없었다. 단칼에 거절했다간 이 복잡미묘한 감정을, 어쩌면 연정을, 두 손 들어 시인하는 꼴이었다. 

사실 부탁을 받아들인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내가 거절할 그의 옆자리를 다른 여자가 차지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질척대는 마음이 벌써 그런 계산까지 마쳤다고 알고서는 적잖이 절망했다. 그러나 체념은 자책보다 빨랐다. 더는 깊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다. 부부 행세를 무사히 끝마치면 적어도 우리 사이에 분명한 선이 그어질 테니까.

부부라는 미명 아래 닿고, 스치고, 접촉하고, 밀착하는 모든 행위는 오늘부로 끝났다. 되도록 감정은 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노력한다고 될 일은 아닐 테지만 적어도 잘한다고 칭찬받은 이상 아주 형편없지는 않았겠지. 그러니까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잠시간 받아 온 애정에 현혹되지 않고 도리어 이 시간을 깔끔히 도려낸 듯 사무적으로 굴면 그만이었다.

“짐 정리도 얼추 끝났고. 점심 먹으러 나갈래?”

“나야 괜찮지만…….”

“나도 괜찮아.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남편인 그는 언제나 부인의 의사를 존중했다. 그 점이 우스웠다. 후루야 레이는 제 의견을 관철하는 데에만 혈안인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지금 나름의 이상적인 남편을 흉내 내는 것일까.

일본에 목숨을 바친 이 남자도 먼 훗날 결혼이란 걸 해서, 제 부인을 끔찍이 아끼게 될까.

“아무거나 상관없어. 당신 먹고 싶은 걸로.”

“아아, 그래?”

그가 나른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가에 장난기가 다분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를 좁혀 온다. 금세 가까워진 거리는 손가락의 마디보다 짧았다. 어두운 피부의 기다란 손가락이 앞머리를 가지런히 갈라놓았다.

“침대를 제일 마지막에 치울 걸 그랬네.”

미간에 절로 주름이 잡혔다.

예상했다는 듯 그가 엄지로 미간을 꾹꾹 눌러 마사지했다. 다 알면서 도발하는 의도가 명백해서 한숨을 삼켰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 이거야?”

이 역할극. 나는 손가락을 의식하지 않는 척 또박또박 내뱉었다. 엄지는 어느새 눈썹을 따라 관자놀이를 거쳐 귓바퀴를 쓰다듬었다. 내가 어느 부위에 약한지 진작에 파악을 끝낸 그의 명민함이 야속하다.

“끝나면 어떻게 되는데요?”

귓전에 파고드는 담담한 중저음의 존댓말.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원래 내게 존댓말을 쓴다는 걸. 고작 말투 하나로 시계를 거꾸로 돌린 듯 기시감이 찾아왔다. 시공간이 기이하게 뒤틀려 순식간에 석 달 전으로 돌아간다. 후루야 레이는 내가 미야노 가의 차녀라는 이유만으로 너그러이 굴었으나 꼬박꼬박 경어는 잊지 않는 남자였다. 그런 빈틈없는 태도가 언제나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

알 수 없는 다정함에 고삐를 조이던 존대가 사라진 자리에는 허물없는 온기와 애정만이 남았다. 처음에는 낯설고 거북했지만 인간이란 결국 적응의 동물. 모르는 사이에 달콤함에 취하고 또 길들어버린 나 자신이 꼴사나웠다. 그가 다시금 예의를 갖춘대서 이렇듯 배신감에 가까운 서운함이 들다니.

“……어떻게 되긴. 다시 전으로 돌아가는 거지.”

귓불을 살살 매만지는 손가락은 여전히. 내 표정과 시선과 목소리의 떨림을 관찰하는 눈빛은 냉철히.

당신의 테스트를 통과할 만한 대답이었을까? 나는 애써 무정함을 가장하며 숨을 고른다. 그는 한동안 내 귓불을 어루만지며 침묵했다. 마지막 관문인 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싶은 모양이라고 속으로만 냉소했다. 냉소하는 와중에도 입안은 바짝바짝 타들어 말라갔다.

왜 이 남자 앞에서는 꼭 숙제를 검사받는 학생처럼 굴게 될까. 나는 귀에서 멀어지는 그의 손가락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참 잘했어요, 양각으로 새겨진 도장이라도 찍어 주듯이 그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시험을 통과했다는 해방감에 나는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참 잘한 대답이었을까, 아니면 그리 나쁘지 않은 대답이었을까. 그의 채점 기준을 알 수 없기에 질문은 영원히 미제로 남겠지만.

그래도 그의 잣대를 아예 거스르지만 않았다면 그걸로 족했다. 사랑을 체념하기는 익숙했고 그 대신 비뚤어진 인정 욕구가 보상 심리로 작용했다. 무엇이 됐든 그의 곁에 남아 이용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후루야 레이가 나를 쓸 만한 인간으로 인정해 준다면. 나는 언제까지고 이 마음을 죽이고 도려낼 자신이 있었다.


***


왜 저렇게까지 할까.

태연한 얼굴로, 허나 뒤돌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몰골로 USB를 건네는 미야노 시호를 볼 때마다 생각했다. 처음에는 천재 과학자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다며 감탄했고 그다음은 강박에 가까운 성과에서 비정상적인 집착을 감지했다.

아무리 번거로운 일을 던져 줘도 간당간당하게 마감 기한을 준수하는 꼴이 퍽 흥미로워서 한번은 고약한 장난을 쳐 본 적도 있다. 마감일을 이틀이나 당겨 부탁하고는 천연덕스럽게 급한 척을 했다. 날짜가 다가오면 어련히 죽을상을 하고서는 양해를 구하겠지 싶었는데, 그녀는 변함없이 태연한 얼굴로 나타나 결과물을 들이밀었다.

감정을 극구 드러내지 않으며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눈 밑에 드리운 다크서클은 물론 숨기지 못했다. 며칠이나 안 잤습니까. 뒤로 켕기는 마음을 억누르며 부러 딱딱하게 질문하면 그녀가 눈초리를 치켜세웠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잔뜩 쉰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섞여 있어서 주춤했다. 적당히 기회를 엿보다 실은 질 나쁜 장난이었다고 실토할 생각도 조금은 있었는데, 깔끔히 무산됐다.

그게 왜 나 때문인데?

하도 황당해서 입 밖으로 튀어 나갈 뻔했다. 그녀는 이미 뒤돌아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멀어지고 있었다.

겉보기에 내가 요청하고 그녀가 작업하는 형편이니 자칫 우리 관계는 수직 관계로 비치기 쉽다. 하지만 그녀는 어디까지나 경시청 소속의 과수연 연구원. 우리 둘은 소속된 기관부터 달랐다. 나는 뻔뻔히도 우리 사이의 복잡하고도 얄팍한 인연을 구실 삼아 급한 분석을 부탁하는 것이지만. 그녀에게는 마땅히 거절할 권리가 있으며 제 일정에 맞춰 편의를 도모할 자격 또한 있었다.

즉 저렇게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죽자 사자 내 기대에 부응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왜 저렇게까지 할까. 본인 나름의 완벽주의와 같은 성향 탓이라면 오히려 납득이 갔다. 하지만 콕 집어 당신 때문이라고 눈을 흘기는 데는 마땅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후루야 레이니까 어떻게든 일을 성사해 보인다? 우스운 난센스였다. 주어를 쿠도 신이치로 바꾸면 참인 명제일지도 모르겠다. 설마 내가 그런 황송한 지위를 누릴까.

“당신, 정말 급할 때만 나 찾는 거 맞아? 이젠 아예 일거리만 생기면 습관적으로 불러내는 느낌인데.”

적당히 조경으로 다듬어진 경시청 건물 밖.

그녀가 흰 가운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툴툴거리며 걸어 나왔다. 말은 저렇게 해도 호출만 했다 하면 재깍재깍 나타나는 모습이 재밌어서라도 더 찾게 된다. 말해 봤자 긁어 부스럼이라 입은 다물겠지만.

하나 더 보태자면, 근무 시간에만 볼 수 있는 옷차림도 그녀를 갑작스레 불러내는 소소한 이유다. 흰 가운을 맵시 있게 걸친 미야노 시호는 썩 아름답다. 오늘같이 날씨가 화창한 날이면 순백의 가운에 부딪혀 반사되는 햇살에 눈앞이 다 아찔했다. 그럴 때면 나는 언제나 그녀가 누구의 딸인지를 되새긴다.

일전에 지나가는 말로 흰 가운을 걸친 모습이 엘레나 선생님과 닮았다고 했더니 그녀는 대번에 볼을 붉혔다. 기뻐하리라고 예상했지만 우물쭈물 쑥스러운 태도까지 예상하진 못해서 덩달아 나도 어색한 기운에 물들었다. 엄마와 닮았다는 소리가 그렇게까지 파괴력을 지녔나 싶어 그 후로 웬만하면 입 밖에는 꺼내지 않는다.

“네. 엄청 급하니까 출발합시다.”

“뭐? 어딜.”

“카레가 좋아요, 라멘이 좋아요?”

그녀가 맥이 탁 풀린 얼굴로 나를 흘겼다. 나름대로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 나왔건만 용건이 고작 점심 권유라니 어이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점심을 같이하자고 솔직히 말했다면 말끔히 무시당했을 것이다. 타인을 경계하고 지레 벽을 치는 그녀는 경찰 조직 내에서 낯을 가리기로 유명한 모양이지만, 그녀를 다루기는 의외로 쉽다. 그저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에 몰아넣으면 그만이었다.

“왜요. 벌써 점심 먹었어요?”

“그건 아니지만…….”

“그럼 뭐가 문제예요. 따라와요.”

그대로 뒤돌아 바로 옆 건물인 경찰청의 주차장을 향했다. 내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쉬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하릴없이 꽁무니를 쫓는 그녀의 모습이 보지 않아도 눈에 훤했다. 거봐. 다루기가 이렇게 쉬운데.

그러나 다섯 걸음을 걸어도 뒤에서 구두 굽 소리가 들리지 않는 점은 의아했다. 오늘따라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러실까. 이런 식으로 같이 밥 먹는 일이 한두 번도 아닌데 그녀는 때마다 곤란해하며 꼭 불편한 티를 냈다. 이미 그녀가 하이바라 아이일 적부터 받아 온 취급이라 이쪽은 아무런 타격도 없지만.

“뭐 해요? 안 오고.”

“……아무것도 아냐.”

말을 내뱉기 전에 두어 번 달싹인 입술에서는 망설임이 묻어났다. 나중에 요령껏 캐물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내 걸음에 맞추려 다급해지는 발소리가 뒤에서 들려 왔다. 어쩔 수 없이 입꼬리가 곡선을 그렸다.

속으로 갈등이 끊이지 않는지, 그녀는 내가 열어 준 조수석 문 앞에서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다 슬쩍 주위를 살피고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차에 올라탄다. 일련의 행동이 이제는 우습기까지 했다. 그렇게까지 고민되면 그냥 거절하면 될 텐데. 가끔은 그녀가 너무 휘둘리기 쉬운 사람이라서 겁난다. 그녀는 자각도 없이 내 안의 가학성을 건드리고는 했다.

“있잖아, 그거 알아?”

모르는 척 차를 말없이 몰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뭘요?”

“당신이랑 나… 사이에 소문, 말이야.”

“소문?”

혼혈인 그녀는 화려한 외모 때문에라도 뭇시선이 몰리기 십상이었다. 게다가 나이까지 어리니 이런저런 가십에 곧잘 휘말렸다. 어쩌다 경시청에 들렀다가 그녀의 이름이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광경을 맞닥뜨린 적도 많다. 그러나 가십이래도 오늘은 미야노 씨가 무슨 옷을 입었다든가 웬일로 활짝 웃었다든가 하는 깜찍한 수준의 입담이었다. 가뜩이나 적은 말수는 신비주의를 부추겨 어느덧 그녀는 경시청 내의 연예인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녀 개인을 둘러싼 소문이라면 모를까, 그녀와 나 사이의 소문이 무엇인지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비공식적으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에 흥밋거리랄 만한 소재는 없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행여 그 조직과 관련된 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순간 등 근육이 뻣뻣해졌다.

“들은 적 없어? 당신이랑 나랑, ……사귄다는 소문.”

설명하기도 껄끄러운 듯 그녀가 말에 공백을 두었다. 덩달아 내 미간에도 주름이 깊게 팼다. 너무 뻔하디뻔해서 후보에도 올려 두지 않은 답변이었다.

누구와 누가 사귄다더라, 그것도 몰래 사귄다더라, 며칠 전에 언제 어디서 함께인 모습이 목격됐다더라. 일차원적인 수준의 지긋지긋한 관심과 눈길은 이제 넌덜머리가 났다. 그녀 못지않게 나도 이국적인 외모를 지닌 탓에 오랫동안 편견 어린 시선을 달고 살았다. 편견이란 진화조차 하지 않아서 내 몸과 마음이 자라나는 동안 여전히 밑바닥에 머물렀다. 편견대로라면 나는 이미 수십, 수백 명의 여자와 뒹굴었다.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쓰는 타입이었나? 시호 씨.”

“나는 상관없어. 그냥, 당신한테 폐라도 끼칠까 봐 그러지.”

그 와중에 본인이 민폐 덩어리라는 인식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나약함이 그녀다웠다. 어째 대화를 나눌수록 점점 짜증이 치밀었다.

“그럴 일 없으니까 별것도 아닌 말들에 신경 쓰지 말아요.”

가짜 신분으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할 때도 이런 종류의 말썽이 있었다. 다만 당시에 함께 일하던 동료는 자기가 무슨 피해라도 겪지 않을까 아등바등했다는 점이 다르지만. 보통은 그런 반응이 정상적이다. 나보다 남을 염려하는 미야노 시호는 뒤틀려 있다. 언뜻 이타적으로 보여도 한 꺼풀만 벗겨내면 뼛속 깊은 이기심에 지나지 않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경우에라도, 절대로 나를 버리지 말아 달라는.

“남들이 뭐라든 우리만 아니면 되는 거잖아요?”

그런 점에서 나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조직의 베르무트든 포와로의 에노모토 아즈사든 잠입 수사의 일환으로 만난 여성 파트너들은 내게 일말의 이성적 호감도 보이지 않았다. 연애 사정만큼 일을 그르치는 장애물도 없다. 그들 덕분에 나는 깔끔하고 또 담백하게 일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건 경시청의 미야노 시호 역시 마찬가지겠지.

“어차피 공사 구별도 못 하는 인간들이 남들도 다 자기 같은 줄 알고 이러쿵저러쿵 입 놀리는 거죠.”

경멸을 숨기지 못하고 필요 이상으로 빈정거렸다. 문득 자각하고 조수석 쪽을 곁눈질하면 굉장한 장면이 잡혔다. 운전 중이라서 금방 고개를 돌려야 했지만 잔상은 충격을 담고 이어졌다.

“그래도 쓸데없는 오해를 키울 필요는 없잖아. 이렇게 둘이서만 밥을 먹는다든가, 적어도…….”

너는 대체 왜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지?

“차 문 같은 건 안 열어 줘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왜 남 눈치를 보면서 행동해야 하는데요?”

게다가 쓸데없이 오해하는 사람은 명백히 미야노 시호 본인이다. 남 핑계를 대지만 결국 자기가 오해하기 싫은 것뿐이다. 막연히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좌절하고, 낙심하고, 상처받기는 손 쓸 도리 없이 괴롭다는 조용한 절규. 세상만사 관심 없다는 듯 구는 주제에 알량한 애정에도 금세 희망을 거는 작태가 지겨우면서도 안쓰러웠다. 저러니 자살 시도를 하고서도 여태 살아남았겠지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시호 씨 본인이 싫다고 말하지 않는 이상.”

그리고 너는 싫다고 말하지 않겠지. 차라리 딱 잘라 거절할 수 있는 여자였다면 이야기가 쉬웠을 텐데.

“도착했어요.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요.”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마치고 시동을 껐다.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이 의아한지 그녀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소 서둘러서 차 밖을 나섰다. 보닛 쪽을 빙 돌아 보란 듯이 조수석 문을 열어 주면 그녀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당신도 진짜 고집불통이야.”

“그것참 황송하네요.”

과장된 몸짓으로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한 번. 여세를 몰아 정중히 손짓하며 식당까지 에스코트하자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체념하고 순응하는 태도가 도리어 일을 얼마나 번거롭게 만들지는 꿈에도 모르고.

“……카레 아니면 라멘이라고 하지 않았어?”

도착한 식당 앞에서 그녀가 아연한 기색으로 물었다. 예정대로라면 카레지만 미안하게도 이야기가 달라졌다. 다만 이 시간대에 붐비지 않는 데다 분위기 있는 식당을 찾으려니 장소가 생각보다 으리으리해졌을 뿐.

“실은 시호 씨한테 급하게 부탁할 일 있다는 거, 진짜예요.”

“뭐?”

“자자, 갑시다.”

손가락 두 개를 펼쳐 점원에게 두 사람이라고 알렸다. 점원의 안내를 받으며 테이블을 향하는 동안 그녀가 속삭이듯 불만을 쏟아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말 좀 바꾸지 말아 줄래?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해?”

“아무래도 라멘이나 카레로는 회유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말해 두겠는데, 비싼 밥 얻어먹는다고 아무 부탁이나 들어줄 생각은 없어.”

“글쎄. 어떨까요.”

테이블은 접시와 커트러리로 단정히 세팅되어 있었다. 한발 앞서 의자를 빼 주자 그녀가 질색하며 자리에 앉았다. 냅킨을 소리 내어 펼치고는 조잡하게 허벅지에 올려놓는다.

“그래서? 대체 또 얼마나 터무니없는 부탁을 하시려고?”

“그건 식사 다 해서 배부르고 기분 좋을 때 얘기하죠.”

비싼 거 많이 먹어 둬요. 내가 메뉴판을 건네며 싱긋 웃었다. 그녀는 언짢음을 숨기지도 않고 메뉴판을 낚아챘다. 저렇듯 까칠하게 굴어도 끝내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는 걸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

그게 아무리, 나와 잠시 부부가 되어 달라는 터무니없는 부탁이라 해도.

아니 어쩌면, 잠시 부부가 되어 달라는 터무니없는 부탁이기 때문에.

너는 이런저런 계산으로 머리를 굴리다 마지못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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