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구독하기 시작한 《연화일보》와 류가 직접 물어 온 주변 소문에 따르면, 튜헨이 잡혀간 지 보름째인데도 불구하고 예상대로 신성 기사단은 별 소득을 얻지 못하였다.

 

그야 그럴 것이다. 튜헨 화백과 사쟌은 ‘그믐’이라는 특정 장소를 통하여 계약을 맺은 게 아니라 사쟌이 직접 대상을 물색하였으므로 신성 기사들이 추적할 만한 경로가 따로 없을 테다.

 

이렇듯 대신관과 신성 기사단을 위시한 원결교 신전은 앞으로도 수많은 실패를 경험하게 되리라.

 

 

“리칸, 지난주에 네가 알아본 그 건물 있잖아. 제과점 모퉁이 돌면 나오는 골목 끝에 있다던 그 빈 건물. 그거 다니케 씨가 계약해주기로 했는데…….”

 

 

원결교 신전이 예견된 실패를 겪든 말든 미르엘라는 이전 고용주였던 다니케를 통하여 돌봄 기관 설립 건을 조금씩 진행하기 시작했다. 신전 보육원에 버려졌다가 무슨 사달이 날지 모르는 마인 신생아뿐만 아니라 보호자라곤 어머니밖에 없는 마인 아이들까지 자연스럽게 끌어들여 마왕의 보호 아래서 교육할 기관 말이다.

 

어차피 미르엘라의 바람대로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마인은 억울하게 방락자로 오해받아 잡혀가지 않을 테지만, 각자 마인들만의 정보와 지식을 공유할 연락망 또는 인맥을 구축하여 후세대에 넘겨줄 수 있게끔. 미르엘라의 육체가 한줌 흙이 되고 나면 또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마왕의 부재를 견뎌내야 하는 자들을 위하여.

 

우선 어버이가 일을 하는 동안만 일시적으로 아이를 맡아주는 기관을 칭하는 이름조차 없어서 그것부터 지었다. 마왕과 마인 둘이 머리를 맞대어 겨우겨우 결정한 명칭은 ‘어린이집’이다. ‘어린아이들의 또 다른 집’이라는 의미가 포함되면 좋겠다는 의견을 낸 류의 공이 컸다.

 

어머니마저 없어 매일 하루 종일 돌보아주어야 하는 마인 고아들을 위한 보육원을 따로 만들어야 하나 싶었다만 구태여 그러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어린이집에서 받아들이려는 아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아비가 없으며 그깟 친어버이 하나쯤 없다고 흠은 아니니까. 물론 양육자 또는 보호자가 없으면 어린아이가 생존하기 어렵다는 점은 흠이지만. 그래서 이런 돌봄 기관을 세우려는 것 아니겠는가. 만일 어버이의 부재를 트집 삼아 괴롭히는 자가 있다면 그자를 따끔히 가르치면 될 일이다.

 

일생 무연고였던 미르엘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시 고민해보니까 내가 살아있는 때라면 어떻게든 해결하겠지만 만약 내가 죽은 뒤에 어린이집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그 피해가 고스란히 다니케 씨나 그 주위 사람들한테 갈 것 같더라고.”

 

 

오늘따라 손님이 없어 한가한 ‘그믐’의 주인은 다니케에게 보낼 답장을 써 내려갔다. 하여간 대책 없는 녀석들 때문에 애꿎은 인간들만 고생한다고 투덜거리면서.

 

리칸은 이어질 말이 짐작된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고 류는 상대가 말을 끝마칠 때까지는 얌전히 입 다무는 게 상책이라는 교훈을 잘 따르고 있다.

 

인맥은 바로 이럴 때 써먹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는 언제고, 미르엘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래서 그냥 공증인 세워서 내 명의로 하려고. 미리 손을 써두긴 했지만 이왕이면 나랑 공적으로 엮이지 않는 편이 여러모로 낫겠지.”

 

 

명의를 변경하거나 사후에 넘겨주는 것은 일단 어린이집을 한번 운영해보고 나서 판단할 문제였다. 미르엘라는 물론이고 이 라카이튼 제국 전체가 어린이집은 처음이니까. 그러므로 이로 인해 발생할 결과가 좋든 나쁘든 전부 미르엘라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이 우주를 움직이는 것이 오직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할지언정 그들이 자신의 책임도 아닌 일을 부당하게 감수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스스로의 의지로 내린 선택에 따른 책임. 그것을 중요하다 여겨, 악마와의 계약자를 구태여 막지 않기로 한 미르엘라이므로.

 

 

“미르엘라 님이 바라는 대로 하세요. 저는 그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리칸은 꼭 뮈엘 같은 소리를 했고, 꿀사탕 한 알을 입에 물고 있던 류는 어물어물한 발음으로 누나의 말을 거든다.

 

 

“맞아요. 나서지 않겠다고 하시면서도 충분히 신경 써주고 계시잖아요. 분명 잘 될 거예요!”

“추켜세울 필요 없어. 딱 돈만 대려다가 이름까지만 더한 거니까.”

 

 

미르엘라는 편지지를 고이 접어 봉투에 넣은 뒤 류에게 건넸다. 류는 주근깨 박힌 콧등을 찡긋거리며 미소 짓더니 밖으로 나섰다.

 

 

“참, 그래서 애들 돌봐줄 사람들은 구했고?”

 

 

어린이집의 일선 업무를 맡을 인력은 리칸과 류가 자란 마인 공동체에서 뽑기로 했기에 리칸도 며칠간 꽤 바쁘게 편지를 돌려야 했더랬다. 어차피 미르엘라 대에서 새로운 마인이 태어나는 시기는 아주 빨라봐야 내년 늦봄이겠으나 미리 연락을 취해두는 편이 여러모로 낫다.

 

 

“네. 아마 지금 당장 오라 해도 달려올 겁니다.”

 

 

물론 그들은 수도 라쿠스가 아니라 타 지역에 모여 살고 있는지라 나중에 마차를 보내 데려올 예정이다. 그러니 리칸의 말은 농담이었다. 반쯤은 진담 같지만.

 

 

“아이 돌보는 솜씨야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워낙 서로서로 도와야 하는 처지이다 보니 다들 내 집 네 집 상관 않고 한둘쯤 업어 키웠으니까요.”

 

 

리칸의 낯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미르엘라는 고향을 추억하는 듯 보이는 리칸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잠자코 턱을 괴어 리칸과 류가 함께 자란 마을을 상상해보았다.

 

사실 미르엘라에 비하여 유독 별다른 삶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공통점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다 똑같은 평민이었고 애당초 사람 사는 거야 다 거기서 거기니까. 더구나 그들은 톄무하브와 참으로 서먹한 사이이지 않던가.

 

단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다녀왔어요! 참, 리칸, 오는 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아니, 글쎄…….”

 

 

미르엘라는 저들처럼 사랑하는 친구나 가족 따위를 만들지 못했다는 점이겠다. 과연 이런 조악한 변명이 통할지는 모르겠으나, 여태껏 세상과 분리되어 있는 듯한 고립감에만 집중하느라 타인을 진심으로 대한 적이 없었다.

 

사랑이란, 사람이란, 어찌하여 이다지도 어려운지.

 

한바탕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동생과 그런 동생을 성가셔하면서도 마냥 무시하지 않는 누나를 바라보며, 아직도 사람이 덜 된 듯싶은 마왕 하나가 맥없이 웃고 만다.

 

그래도 이제 모든 악마의 주인으로서 그 기묘한 괴리감의 근원을 알게 되었으니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추측해볼 뿐이었다. 이미 저 닮은 듯 다른 의남매를 그럭저럭 좋아하게 되었듯이.

 

 

“저는 어떻습니까. 천하께서 그럭저럭 좋아하게 된 사람 중에 이 미천한 넋도 있는지요?”

 

 

그런데 미르엘라가 여느 때처럼 뮈엘과 밤중에 술잔을 기울이며 오늘 했던 생각을 털어놓았더니만 이 요망한 악마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이렇게 묻는 게 아닌가.

 

결국 미르엘라는 달큰한 과실주를 마시다 말고 코웃음 치듯 헛숨을 뱉었다.

 

 

“너? 밉진 않아.”

 

 

좋아하지도 않는단 뜻이었다. 지나치게 오래 살아 약아빠진 악마는 그 속뜻을 능히 이해했는지 입꼬리를 더욱 끌어올려 웃었다.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저 작위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하는 동시에 불길한 위화감을 느껴 본능적으로 경계할 것이다. 핏빛 아가리를 활짝 벌린 장미에는 언제나 날카로운 이빨이 있는 법이니.

 

진정 미르엘라의 대답이 몹시 흡족하여 저토록 매혹적으로 웃지는 않았으리라. 그를 알면서도 위험한 넋의 주인은 이렇게 한가로이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내가 너라는 사람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모양이지.”

 

 

미르엘라가 마치 자조하듯 허심탄회하게 중얼거렸다. 목 뒤로 넘어가는 술의 뒷맛이 씁쓰레하다.

 

아무리 뮈엘이 충성스럽고, 아무리 미르엘라가 그보다 강할지라도, 뮈엘은 나름 악마 중의 악마이건만. 그런 존재 앞에서 태평하게 술이나 홀짝일 수 있다니.

 

 

“그렇습니까.”

 

 

하지만 여전히 어여쁘되 아까보다 훨씬 편안해 보이는 미소를 보고 있자니, 마냥 기분 나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미르엘라도 마주 웃어 보였다.

 

뮈엘이 어느새 텅 비어버린 잔을 느릿하게 채워주었다. 충실한 악마의 검붉은 눈 같기도 하고 어느 신성 기사의 검보랏빛 눈 같기도 한 포도주의 표면에 잔뜩 억눌린 은빛 달이 맺힌다.

 

 

“곧 그믐이군요.”

 

 

창문 너머로 밤하늘을 힐끗 내다본 악마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번엔 손님이 오겠습니다.”

“그래?”

 

 

뜻밖의 이야기에 미르엘라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취기가 올라 공연히 기분이 좋아진 탓도 있었다.

 

 

“너한테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는지는 미처 몰랐는데. 늙은이의 혜안 같은 건가?”

“이맘때면 슬슬 올 때도 되었지요. 천하께서 ‘그믐’의 주인이 되신 지 어언 두 달이 지났으니 말입니다.”

 

 

이전 마왕을 모신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연륜이겠거니 짐작하며, 악한 것들의 지배자가 등받이에 나른하게 기대어 배부른 악마처럼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떤 손님일까 하고 무심코 기대해본다. 장사꾼이 무슨 수로 아직 오지도 않은 손님을 가릴 수야 있겠냐마는.

 

 

“그 화가처럼 흥미로운 용건을 가진 손님이면 좋겠다.”

 

 

신의 이름으로써 탄압될 만한 백일몽을 그리기 위하여 기꺼이 악마의 손을 잡다니. 이 얼마나 낭만적인 꿈인가.

 

 

“어린 악마들이 퍼뜨린 소문을 잘못 이해해서 살인 청부하러 오면 이쪽도 난감하잖아.”

 

 

애당초 타인을 해치려 자신의 무언가를 팔 결심까지 해야 하는 삶을 감히 가늠해보자니 애석하기도 하고.

 

 

“그런 얼뜨기는 기억을 지워 돌려보내면 그만이니 천하께선 애써 괘념치 않으셔도 됩니다.”

 

 

말하는 투를 듣자 하니 정말 심부름꾼을 원하는 자들이 찾아오긴 하는 모양이었다.

 

미르엘라의 미간이 보일 듯 말 듯 아주 약하게 구겨진다. 악마의 힘조차 빌리지 않고 스스로 사람을 해치는 자와, 악마와 계약하고 나서야 사람을 죽일 실행력을 얻는 자와, 그저 돈으로 청부업자를 부려 사람을 죽이는 자를 생각했다. 그리고 주제넘게 저울질해보았다.

 

이윽고 이쪽저쪽 정신없이 기울다가 종국에는 고장 나 못 쓰게 된 저울만 남았다. 괜히 꿈자리만 뒤숭숭하게끔.

 

미르엘라가 흘러내린 머리를 대충 뒤로 쓸어 넘기며 침대로 향했다. 만취하지는 않았으나 아예 제정신인 상태도 아니었기에 걸음이 조금씩 엇나갔다.

 

그리고 뮈엘은 비틀거리는 주인을 구태여 붙잡아 부축하지 않는다.

 

미르엘라는 몽롱한 와중에도 그 거리를 깨닫고 꽤 만족스러워 했다. 그가 그어둔 선이었으므로.

 

 

“뮈엘, 이만 가도 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악마는 기척 없이 스르륵 일어나 미르엘라에게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마치 사랑해 마지않는 피붙이를 대하듯 혹은 극진히 아끼는 공예품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악하지 않은 꿈을 꾸시길.”

 

 

그렇게 마왕은 눈을 감고 편안한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악마의 목소리로 듣기에는 부적절한 인사라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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