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라도 마주치지 않았으면 했는데. 우연히 널 마주쳤을 때. 모순적이게도 나는 네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잘 살길 바랐지만. 네가 어떻게 살고 있나 늘 궁금했었고. 내가 없는 곳에서 평범한 사랑을 하며 잘 지내길 바랐지만. 네가 정말 사랑을 하고 있을까 늘 불안했었어. 널 떠난 건 난데. 난 여전히 너를 그리워하고. 너의 부재를 견디지 못하고 있어.



네가 없는 곳으로 도망친 나를 끊임없이 탓하고. 후회하고. 그러다 단념하고. 화가 나고. 억울하고. 그러다 단념하고. 독하게 굴지 않았다면 나는 널 붙잡고 밤새 원망했겠지. 나는 네가 싫어 떠난 게 아니라고. 나도 너무 아프고 힘들다고. 마음이 문드러지도록 상처받았고. 뼈가 부서지도록 꾹 참고 있다고. 그럼 넌 아마 평생을 자책하겠지. 네가 닮은 그 사람을 원망하면서. 내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며 평생. 평생. 사랑이 아닌 죄책감을 갖고 내 옆에 남아 있겠지.



그래서 도망쳤어.

나를 향한 게 사랑이 아니라. 죄책감이 되어버릴까 봐. 그 사랑이 결국엔, 평생 갚아야 할 숙제가 될까 봐.

그래서. 그래서 도망쳤어. 널 원망하기 싫어서. 그 사람을 원망하기 싫어서. 그냥. 나 하나 무너지면 그만이니까. 나 하나 무너지는 게 네가 무너지는 것보다 훨씬 나으니까.


끝까지. 나를 향한 게. 사랑이었으면 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지금도. 여전히. 겁이 나.

널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만나게 된다면. 언젠가 너에게 다 털어놓고 싶어질까 봐. 다 쏟아내고 싶어질까 봐. 그래서 네가 상처받고. 그래서 네가 미안해하고. 그래서 네가. 아파할까 봐. 그래서 겁이 나.


그래서. 또다시.

도망치고 싶어져.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해서.



그날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100이 과하다면, 90이어도 좋아 








2023년








'네가 가라고 해도 안 갈 생각이었는데. 네 뒷모습 보니까. 눈물이 나.'


'미안. 오늘은 같이 못 먹겠다. 나 먼저 갈게.'







자꾸 신경이 쓰여. 시간이 지나면 그 아이에게 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면 그날 역시. 그 아이에겐 희미해질 줄 알았는데. 다 내 착각이었어. 여전히 그 애를 아프게 하고 있다니 마음이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어. 더 차갑게 굴어야겠다 다짐하다가도, 꼭 상처받은 눈으로 쳐다보면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는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차갑게 굴어야 하는데. 더 밀어내야 하는데. 그렇게 밀리고 밀리다 결국, 낭떠러지로 뚝 떨어지게 될까 봐. 다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질까 봐. 아무것도 못 하겠어.








"대리님. 무슨 고민 있으세요?"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뭔데요. 아침부터 계속 표정이 안 좋으시던데. 여자친구분이랑 싸웠어요?"



"나 연애 안 하는 거 잘 알면서 두 번 죽이시네."



"장난, 장난. 뭔데요. 아침부터 쭉 이 표정이었어요. 왜요. 다 말해봐요."



"..."



"얼른요. 저 지금 월루 하고 싶어요."









"그... 제 이야기는 아닌데. 그러니까. 제 친구 이야기거든요. 제일 친한 친구."








































[야. 나 다 와 간다. 들어가서 먼저 시키고 있어. 화채 이런 거 시키면 죽는다 ㅎ]






원래는 회사 근처에서 밥 먹고 바로 집에 들어갈 계획이었는데. 속도 더부룩하고. 종일 명치 끝이 답답한 게. 오늘은 술을 먹어야 할 것 같아. 체했나. 그렇다기엔 아침도 거르고 점심도 가볍게 먹었는데. 아무래도... 그 아이 때문인 것 같아. 일하는 내내 집중도 못 하고. 바보같이 생각에 잠겨 안 하던 실수까지 했으니. 누가 봐도 그 아이 때문이잖아.


전정국을 다시 만난 이후로 내 생활은 완전히 엉망이 됐어. 자주 어떤 생각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하기도 하고. 밥을 먹다가도 그 애 생각에 빠져 숟가락을 놓은 적도 많아. 누군가 날 부르는 소리도 자주 듣지 못하고. 어떤 일을 하려다가도 까맣게 잊고 또다시 그 애의 생각에 빠져버린 적도 많았지.










'답이 딱 보이는 고민이네요.'




'네?'




'아직도 사랑하고 있잖아요.'




'그런 거 같아요. 제 친구는 그 사람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대요.'




'아니, 친구분 말고요. 다시 만났다던 그 사람. 그 사람이 아직도 대리님 친구분 좋아하고 계세요.'




'... 아닐 거예요. 헤어지자고 하고 도망치듯 떠나버렸는데. 어떻게 그래요. 그냥 억울해서 그런 거 같아요. 이유도 모르고 헤어졌으니까. 그 이유를 듣고 싶어서겠죠.'




'보통 착각을 많이 하죠. 내가 정말 좋아해서 이러는 걸까. 아니면 억울해서 이러는 걸까. 근데 그 사람은 아니에요. 단지 억울해서. 지난날이 그리워서. 그랬다면 그날 대리님 친구분 집에서 나가지 않았겠죠. 그냥 같이 있었겠죠. 같이 있으면서 순간의 감정이나 달랬겠죠.'



'...'






'근데 눈물 나서 못 있겠다고 했다면서요.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안 잊힌다면서요. 그게 사랑이에요. 아직도 사랑하니까 더 다가가지 못하는 거고. 그곳에 더 있다가는 그동안 참았던 말이 나올 거 같아서. 그래서 도망친 거예요. 사랑 아니면 그동안 그분의 행동은 설명이 안 돼요.'















"뭔 생각을 그렇게 해. 으, 쌀쌀하다. 뭐 시켰냐. 설마 화채는 아니지?"




"오, 유정수. 빨리 왔네. 앉아. 너 좋아하는 걸로 시켰어."





유일하게 정국과 지민의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람. 둘이 만났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좀 있지만. 자세한 연애사. 그러니까. 둘이 왜 헤어졌는지. 어떤 이유로 지민이 도망쳤는지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초등학교 때부터 쭉 붙어 다닌 정수뿐이야.



정수는 그래. 둘이 잘 만나고 있을 땐 가끔 셋이서 술도 먹고 그랬는데. 헤어진 이후로는 몇 번 정국에게서 연락이 와도 받질 않았어. 다 아니까. 얘가 어떤 마음으로 도망쳤는지 잘 아니까. 얼마나 상처받고 얼마나 아파했는지 잘 아니까. 정국의 연락이 그다지 반갑진 않았겠지. 물론 어떤 마음으로 연락했는지도 잘 알아. 궁금하니까. 도대체 왜 헤어졌는지 정수는 다 알고 있을 것 같으니까. 그래서 안 받았어. 목소리라도 들으면 다 말할 것 같아서. 솔직하게 다 터놓을 것 같아서. 그래서 안 받았어. 지금 당장은 힘들어도 시간이 다 지나면 자연스레 잊힐 테니까.










"...믿는다. 야. 근데 웬일로 먼저 보자는 말을 하냐. 얼굴 좀 보자 해도 싫다 싫다 하더니."




"그냥. 오랜만에 얘기 좀 하자고. 술 뭐 마실래?"




"소주. 추우니까 소주 당겨."




"저희 소주 1병 주세요."




"야, 박지민. 너 진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 없어."




"거짓말 티 난다. 뭔데. 회사? 아니면. 가족?"




"주문하신 화채 세트, 소주 1병 드릴게요. 맛있게 드세요."






아, 미친놈아. 화채 아니라며. 아니란 말은 안 했어. 너 좋아하는 걸로 시켰다 했지. 술집에서 화채 시키는 놈은 진짜 너밖에 없을 거다. 그래서 세트 시켰잖아. 너 좋아하는 치킨도 나왔네. 너 닭다리 좋아하잖아. 다 먹어. 내가 양보할게. 아. 말을 존나 잘해. 아무튼. 이건 됐고.






"뭔데. 무슨 일인데. 그때 그 부장? 아니면 박지호 또 사고 쳤어?"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일단 마시자."




누가 봐도 무슨 일 있는 표정을 하고선 물어도 대답도 안 하고. 찝찝하게. 술잔을 부딪쳐도. 술을 목구멍으로 털어 넘겨도. 시선은 지민에게서 떨어지질 않아. 근데 더 물어보지 못하겠어. 박지민을 안 지도 벌써 20년이 다 되어가니까. 얘가 어떤 기분인지. 어떤 기분일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다 알잖아. 근데 오늘 표정은. 그냥. 더 물어보질 못하겠어. 딱 그때. 나 전정국이랑 헤어졌어. 그래. 그날이랑 비슷하거든.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술잔만 부딪혀. 그렇게 한 병. 그렇게 또 한 병. 마지막 잔을 비우고 숨을 탁 내뱉으며 지민이 말해. 담백하지만 흔들리는 목소리로.








"정국이를. 다시 만났어. 정수야. 내가. 내가 전정국을."






'나 전정국이랑 헤어졌어.'






"다시 만났어."






'죽을 것 같다는 게 딱. 딱 이런 기분이구나...'





"만나면 안 되는데. 우연이라도 절대 만나지 말자 빌고 빌었는데."






'걔 안 보고... 어떻게 살아... 나 어떻게 살아...'








"다시 만났어. 다시. 다시 정국이가. 내 앞에 나타났어."





5년 전. 무릎에 얼굴을 묻고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울었던 지민은. 아주 덤덤하고 담담하게. 전정국 이야기를 꺼내. 그날 이후로 일부러 꺼내지 않았던 이름이었는데. 5년이 지난 오늘 지민은 전정국 이름을 말하며 아무 표정 없이 정수를 쳐다봐. 담담해지기까지 5년이나 걸렸는데. 겨우 이름을 꺼내기까지 5년이나. 걸렸는데. 왜 하필. 왜 하필 만나게 된 걸까.








"그때 만났구나. 결혼식장에서."




"만나는 사람 있더라."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나한테 명함을 주고 갔어. 연락하라고."




"했어? 박지민. 너 설마 전정국한테 연락했어?"




"안 하려고 했었어. 하면 안 된다고 밤새 다짐했어. 그런데. 잘 안 돼. 정국이한테는 그 다짐이 안 먹혀."




"5년 동안 너 어떻게 살았냐. 네가 5년 동안 얼마나 힘들었냐고. 잊었어? 그 새끼 얼굴 보니까 그게 다 잊혀?"




"아니. 얼굴 볼 때마다 불쑥불쑥 올라와. 억울해서 눈물이 먼저 나와. 그게 어떻게 잊히니. 하루에도 수십 번 떠오르는 그날을 어떻게 잊어. 근데. 그걸 넘어. 전정국 얼굴 보는데. 희미해진 줄 알았던 감정이. 내 억울함. 상처. 그걸 다 넘어. 어쩔 수가 없어. 다짐했던 게 한순간에 사라져버려."




"... 하. 그래서 뭐 어쩌려고. 만나는 사람 있다며."




"뭐 할 생각 없어. 아무것도 안 할 거야."




"아무것도 안 할 거면 강하게 내쳤어야지."




"그럴 거야... 그럴 건데. 그냥 잠깐이라도 더 보고 싶었어. 어차피 떠날 거 아는데. 옆에 있는 그 사람이랑 결혼도 하고 잘 살 거란 거 다 아는데."




"..."




"막상 보니까 아무것도 못 하겠어."




"결국 상처받는 건 너야. 네가 방금 말했잖아. 어차피 떠날 사람이라고."




"..."




"둘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지. 아는데. 네가 그런 상처까지 숨겨가면서 전정국 보는 거 난 반대야. 나 그럴 수 있잖아. 5년 동안 옆에서 너 힘든 거 다 봤는데. 내가 이 정도는 말해줄 수 있는 거잖아."




"그렇지. 알지. 다 알지. 정수 네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나도 다 알지. 그런데. 내 앞에서 우는데. 정국이가. 내 앞에서 울먹이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그냥 다 놓고. 도망가고 싶었어.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아무 생각 없이 같이 있고 싶다. 무작정 그런 생각이 들었어."




"왜 우는데. 그 새끼가 네 앞에서 울 일이 왜 있냐고. 그래. 물론 전정국 잘못은 아니지. 그래도 이건 아니지. 만나는 사람 있다며. 그 사람한테도 너한테도 예의 없는 거잖아. 그냥 너 하나 잡고 흔들겠다는 거잖아. 걔가 알면 안 되는 이유가 뭔데. 왜 너만 5년 동안 힘들어야 하는데."




"정국이도 나 때문에 힘들었어. 그런데 굳이. 그 말까지 하고 싶진 않아. 그럼 걘 평생 자책할 거야. 자책만 하다가. 우리 사이에 남는 건. 추억도 그리움도 아무것도 없을 거야. 그냥 죄책감. 딱 그 하나만 남아서. 정국인 날 떠올릴 때마다 미안함만 느끼겠지. 죽어도 싫어. 차라리 그냥 나 혼자 힘든 게 나아."




"... 참 열심이다, 너도. 끝난 지가 언젠데. 이미 지나간 사람인데. 참 열심히도 지킨다. 그래서 너한테 남는 게 뭔데. 그렇게까지 희생하면서까지 지키고 싶은 이유가 뭔데."




"... 3년."




"..."




"정국이랑 헤어진 지 5년이나 지났는데. 난 걔랑 함께했던 3년이 너무 소중해. 그래서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 잊고 싶지가 않아. 그래서 지키고 싶어. 나도 변했고. 걔도 변했지만. 그 3년만큼은 변하지 않게 지키고 싶어. 그 시간까지 망가지면 어떻게 살아. 정국이 없는 5년을 내가 어떻게 버텼는데. 지난 시간 꺼내 가면서 하루하루 간신히 버텼어."




그 3년으로 나는. 5년을 버텼어. 그래서 안 돼.

앞으로 더 버티려면. 난 그 3년. 꼭 지켜야 돼.


그러니까 그 애는. 몰랐으면 좋겠어. 평생.








"너는 참..."




정수는 그래. 5년 전 그날도. 5년이 지난 오늘도. 왜 전정국 때문에 이렇게 힘든 길을 가려고 하는지. 차라리 다 터놓고 옆에 남지 그랬니. 차라리 다 터놓고 지금이라도 붙잡지 그랬니. 함께한 3년도 부족해 헤어져 있는 5년까지 사랑할 거면서. 다 버려서까지 지켜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 또. 또 이렇게.




"짜증 나게 내 앞에서 울지 마라. 그때랑 똑같이 굴 거면. 다시 도망쳐. 네가 지키고 싶은 거 지키면서. 그냥 도망치라고."




전정국 하나 때문에 울어버리는데.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인지. 잘 모르겠어. 잘 마시는 것도 아니면서. 애써 잊어보려 무리하게 마시는 지민을 보니 정수는 답답하기도 하고. 짜증 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해. 이렇게까지 지키고 싶은 사람. 나를 버려가면서까지 사랑하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으니까.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어떤 기분일까. 얘처럼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날까. 지민이 이러는 게 이해가 안 되면서도 신기해. 조금은 부럽기까지. 그래. 사랑한다면 얘처럼 사랑해야지.





"...나도 나를 잘... 모르겠어. 그때처럼 도망치는 게 맞는 건데. 근데. 얘를 보면. 못 떠나겠어.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고... 만나는 사람 있으니까. 이러면 안 되는 거 알거든. 나쁜 일인 거 다 아는데. 다 아는데... 무슨 이유를 대서라도 같이 있고 싶어. 그러면 안 되는데..."




다짐과 자책을 반복하다 결국,






"아 이 새끼 진짜..."






테이블에 쿵. 머리를 박아.


























얼굴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한참을 쫓겼어. 잡히지 않으려 죽을힘을 다해 뛰었는데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아.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걸까. 어디까지 도망쳐야 하는 걸까. 막다른 길에 다다르자 망설임 없이 낭떠러지로 뛰어내렸어. 쫓기는 동안은 잡히지 않으려 힘껏 달렸는데. 죽기 싫어 열심히 달렸는데. 다 놓고 뛰어내리니 마음이 편해. 다 끝이다. 다 끝났다. 뛰어내리는 그 순간에도 나는 그 애가 떠올랐어. 마지막을 함께하듯. 땅으로 떨어지는 내내 그 애가 눈앞에 아른거렸어. 그래서 괜찮았어. 두렵지 않았어. 죽는 순간까지 그 애를 품을 수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어. 그렇게 서서히. 몸이 느려지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손끝이 굳으며. 탁.





"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손끝이 차갑게 식는 기분과 함께 눈을 떴어. 익숙한 천장. 익숙한 냄새. 깨질 듯한 머리와 울렁거리는 속. 꿈이었구나. 그제야 긴장이 풀려. 가쁜 호흡이 느려지고. 살짝 올라간 어깨에도 자연스럽게 힘이 풀려. 내가 이럴까 봐 술을 안 마시는 건데. 어제는 오랜만에 정수를 만나서 그런지 미친 듯이 마셨던 것 같아. 내가 아무리 먹고 취해도 챙겨줄 누군가가 있으니까. 그렇게 방심하다가 이 꼴이 난 거지만.




양말도 벗어놨고. 이불도 잘 덮은 걸로 봐서 정수가 집까지 데려다준 것 같아. 유정수. 또 난리 났겠네. 협탁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드니 배터리가 10%밖에 없어. 어차피 전화 올 곳도 없고. 충전기를 찾으려다 그냥 정수에게 전화를 걸어. 자는가. 오후 1시가 훨씬 넘은 시간인데. 반복되는 수화음만 들릴 뿐 받지를 않아. 운동 갔나. 설마 어제 내가 꼬장 부려서 화난 거 아니야? 아, 모르겠다. 부재중 보면 다시 전화하겠지.





"..."





술 먹고 난 다음 날이면 이상하게 기분이 찝찝해. 속도 울렁거리고 머리도 지끈거리고.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행동을 했는지. 실수한 건 없는지. 그런 생각을 하다 하루가 그냥 흘러가 버리니까. 술 먹은 다음 날은 종일 기분이 찝찝해. 취하고 싶지 않아서 간신히 버텼는데. 어디서부터 필름이 끊겼는지 그것조차 기억이 안 나.



완전히 깬 상태가 아니라 그냥 좀 더 잘까 싶었는데. 닫힌 방문을 보니 문득 그날이 떠올라. 그 애가 여기까지 데려다줬던 그날. 나만 사는 이 집에 그 애가 왔던 날. 대화 하나 눈빛 하나가 지난날과 다름없던 그날. 울먹이며 네가 도망쳤던 그날. 문득 그날이 떠올라.


너는 그날 왜 그렇게 도망쳤을까. 헤어진 이유를 몰라 억울했던 걸까. 그저 지난 시간이 그리워서였을까. 아니면. 아니면 정말...








'보통 착각을 많이 하죠. 내가 정말 좋아해서 이러는 걸까. 아니면 억울해서 이러는 걸까. 근데 그 사람은 아니에요. 단지 억울해서. 지난날이 그리워서. 그랬다면 그날 대리님 친구분 집에서 나가지 않았겠죠. 그냥 같이 있었겠죠. 같이 있으면서 순간의 감정이나 달랬겠죠.'




'근데 눈물 나서 못 있겠다고 했다면서요.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안 잊힌다면서요. 그게 사랑이에요. 아직도 사랑하니까 더 다가가지 못하는 거고. 그곳에 더 있다가는 그동안 참았던 말이 나올 거 같아서. 그래서 도망친 거예요. 사랑 아니면 그동안 그분의 행동은 설명이 안 돼요.'






아직 날 사랑해서 그랬던 걸까.




모르겠어. 그 애를 떠올리면 떨려서 죽을 것 같은데. 그 애는 혼자가 아니잖아. 그것만 생각하면 와르르 무너져. 온몸에 힘이 빠지고. 나 혼자 착각 속에서 열심히 헤엄치는 기분이 들어서. 아무것도 못 하겠어. 그래. 아주 잠깐 그렇게 생각한 적은 있어. 단순히 억울해서 이러는 건 아니라고. 어쩌면 이 아이도 날 그리워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어쩌면 이 아이도. 나처럼. 떨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래.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있었어. 그런데. 그럴 리가 없잖아. 결혼까지 할지도 모르는 사람이 있는데. 5년 전에 헤어진 나를 아직도 사랑할 리가 없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 날 아직도 사랑할 리가 없어.






'전정국'





창에 번호를 띄우고. 몇 번을 좌절하고. 다짐하다. 조심스럽게 메시지 버튼을 눌러. 더 이상 도망치기만 하고 싶지 않아. 부딪히고 싶어. 이 애가 나를 맴도는 이유. 그 이유를 직접 듣고 싶어. 그게 날 완전히 좌절시킬 수도 있지만. 그래서 겁은 나지만. 이렇게라도 해야겠어. 그래야 단념하고 떠날 수 있을 것 같아. 애매하게 이 애를 마주하기엔 난 여전히 그 애를 사랑하고 있어서. 애매하게 사랑할 자신이 없어서. 들어야겠어. 결국엔 무너지겠지만. 차라리 네 앞에서 무너지겠다고.







[내일 잠깐 볼 수 있을까? 할 말이 있어]

[듣고 싶은 말도 있고]





전송 버튼을 누르고 힘없이 휴대폰을 침대에 던져. 하. 이게 뭐라고 이렇게 떨리는 걸까. 꼭 죽음을 다짐한 사람처럼. 힘이 다 빠진 채로 천장만 바라보는데. 이상하게 심장은 거세게 뛰어. 쿵. 쿵쿵. 쿵.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귓가에 크게 울려. 뭐가 이렇게 겁이 나는 걸까. 이미 헤어졌는데.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닌데. 네 옆엔 이미 다른 사람이 있는데. 너의 입에서 그 어떤 말이 나와도 지금과 달라질 건 하나도 없는데. 난 도대체 뭐가 무서워서 이러는 걸까.



어쩌면. 내가 바라는 말이. 있을지도.













그런데 이상해.







[문자 읽으면 답장해줘. 기다릴게]








주말이라 많이 바쁜 걸까. 아니면 그 사람과 같이 있는 걸까. 5시간이 지나도 그 애는 답이 없어. 혹시 같이 있어서 그러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니 이상하게 마음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어. 그래. 그냥 내일 연락하자. 출근해서 연락해 보자. 그래. 지금은... 답장하지 못하는 상황이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많이 바빠? 연락이 없네]







하루가 지나도.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이후...'








또 하루가 지나도.









[혹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이거 보면 꼭 연락해줘. 기다릴게]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그 애는. 여전히. 연락이 없어.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이상하게 심장이 빠르게 뛰고. 이상하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그 아이가. 꼭.


사라진 것 같다고.



































에 필 로 그


















"나 분명 말했다. 다리에 힘 안 주면 길바닥에 버리고 간다고."




"... 그래... 내가 다 잘못했다... 내가... 내가 그러는 게 아니었지..."




"아. 진짜. 정신 안 차리냐? 무거워 죽겠다고."




"...후... 그래... 내가..."




"하. 넘어진다고. 다리에 힘. 힘. 조금만 더 걸어가면 되니까. 정신 차려라. 뒤통수 맞기 싫으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으면 허구한 날 박지민 뒤치다꺼리만 하고 있는 건지. 진짜 딱 한 대만 때리고 싶어. 술 취해서 모르지 않을까? 딱 한 대 정도는 기억 못 하지 않을까?



토할 거 같다는 말에 집이랑 한참 떨어진 곳에 택시를 세웠는데. 이거 그냥 습관적으로. 토할 거 같다. 아. 속이 울렁거려. 이러고 있잖아... 집까지 가려면 한참인데. 얘를 어떻게 끌고 가냐. 맞춰준다고 오랜만에 술도 마셨는데. 그냥 길바닥에 버리고 가고 싶은 기분이야.





"아, 안 되겠다. 넌 진짜... 내일 일어나면 밥 사라. 한우. 한우 이하 취급 안 한다."




무거운 놈 질질 끌고 가느니 쪽팔려도 업고 가는 게 낫지. 힘 빼라. 무겁다고. 그렇게 술 취한 지민을 업고 집까지 걸어가는 정수. 아까보다 편안한지 큰 반항 없이 조용해졌어. 야. 자냐. 하도 조용해서 자는지 물어보니 아무 대답이 없어. 그래. 차라리 이 시간만큼이라도 아무 생각 없이 푹 잤으면. 잠깐이라도 전정국 잊고 편하게 잤으면 좋겠어.




박지민을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그러다 다시 고개를 저어. 결국, 헤어지면 온전히 살아가지도 못할 텐데. 차라리 지금처럼 사랑 없이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 사랑을 하고 싶다가도 할 수 없게끔 만드는. 사실은 사랑을 하고 싶다가도 얘처럼 사랑할 자신이 없어서 시작도 전에 포기하게 되는.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한참을 걸었나.

익숙한 골목과 편의점. 익숙한 나무와 익숙한 벤치. 손목이 뻐근하고 시큰거리는 무릎에 걸음이 느려지는 그 순간,







"... 정국아..."




자는 줄 알았던 박지민이 뒤척이며 그 이름을 말해. 아주 익숙하고 당연하게. 꼭 어제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불렀다는 듯.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나 전정국 아니다."





거의 다 왔는데. 몇 걸음만 가면 박지민 집인데. 이상하게 발이 느려져.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조금만 더 가면. 끝인데.






"... 보고 싶었어."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로 보고 싶었다 말하는 박지민 때문에.





"다시 만나서... 내가... 얼마나... 좋았는데."





그러다 어깨로 뚝 떨어지는 눈물 때문에.






"힘들었어... 도망치고 나서... 지금까지 계속... 힘들었어... 그리고..."







집 앞에서 우릴 쳐다보는. 그 애 때문에.








"야, 박지민. 조용히 해. 더 말하지 마."



"아직도... 사랑하고 있어..."






닿으면 안 될 그 고백 때문에.

완전히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어.









"오랜만이다. 정수야."





그 애는 너의 고백을 들었는지. 꼭 너처럼 떨리는 목소리를 하며 내게 말해. 다 들었으면서 모르는 척. 다 들었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오랜만이네. 다시 만났다는 이야긴 들었어."




"..."




"방금 한 말은 못 들은 걸로 해줘. 얘 취해서 그래."




"..."




"그럼 들어갈게. 너도 얼ㄹ..."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그 한마디 듣자고 5년을 기다렸는데. 어떻게 못 들은 척해."





꼭 원망이라도 하는 듯. 어딘가 원망할 구석이라도 찾는 듯. 내게 말해.






"왜? 도대체 네가 왜 그 말이 듣고 싶었는데."




"지민이 들어. 일단 눕히고 나와서 얘기 좀 하자."




"너랑 할 얘기 없어. 내가 너랑 알고 지냈던 건. 단순해. 네가 박지민이랑 만나는 사이였으니까."




"..."



"그런데 지금은 아니잖아. 너랑 나 사이에 나눌 말이 있어?"




"왜 없어. 네가 그렇게 내 연락을 피했는데. 분명 뭔가 있는데. 분명 이유가 있는데. 박지민도 너도. 아무 말 안 해주잖아. 뭘 알아야 내가 뭐라도 하는데. 진짜 엿 같아. 왜 다 피하기만 해. 왜. 사람 바보 만들어. 너랑 나 사이에 나눌 말이 없다고? 아니. 있어. 너는 말해야 해. 네가 진짜 박지민 친구라면. 네가 진짜 쟤를 위한다면. 나한테 다 말해줘야 해."






정수는 지민의 다리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줘. 쟤도 박지민만큼이나 힘들었구나. 쟤도. 5년을 그렇게 살았구나. 지금도. 흔들리지 않으려 간신히 버티고 있구나. 그래. 이게 다 도대체 누굴 위한 일인데. 박지민을 위한 일도 아니고. 전정국을 위한 일도 아니잖아. 이곳에서 누구 하나 행복한 사람이 없는데. 도대체 누굴 위해 이렇게 희생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알겠어."




그래서 내가 하려고.




"기다려. 들어갔다 나올게."





박지민이 전하지 못한 말.

5년을 감추고 피했던 말.





"그리고 다 말해줄게."





내가. 전할게.

그냥 내가 나쁜 놈 할게.






"다 듣고도 사랑할 자신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다시 마주할 우리를 기다리며. 오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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