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귀를 한 게 아니라 포산산인에 의해 미래를 알게 된 어린 위무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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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서안 위에 엎드려 바로 지척에서 울려 퍼지는 맑은 선율을 듣고 있던 위무선은 문득 노곤한 단잠을 떨치고 눈을 떴다. 고아한 묵빛을 머금은 칠현금 위를 가볍게 짚고, 이내 떨어져 나갔다가 다시금 잔잔한 파문을 만들어내는 손끝이 붉게 젖어있었다. 이른 꽃물이 들었다 여기기엔 심장 어딘가가 아릿했고 핏물이라 생각기엔 온 신경줄을 날카롭게 갈아세우던 쇳내가 느껴지질 않으니, 저것 아마 아직은 터지지 않았으나 곧이어 흐를 상처라.


무심결에 뻗어 맞잡은 손은 직전에 내리누르던 현만큼이나 잘게 떨렸다. …위영? 그러한 부름을 무시하고 남망기의 손을 제 목전까지 끌고 온 위무선은 겉으로 보기엔 백묵을 깎은 듯 곱고 단정한 손가락 사이사이에 박인 굳은살을 부드럽게 쓸고 고금 현의 두께만큼 깊이 패인 검붉은 멍 자욱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남잠이 연화오에 머무른 지 오늘로 며칠 째더라.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밤낮으로 연주를 멈추지 않았으니 아무리 단련된 수사의 손이라 해도 버텨낼 리 만무했다. 남잠. 누창 밖의 새소리에도 묻힐 조용한 부름에도 남망기는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세심하게 동조했다.



“왜 항상 고금만 연주하고 있어?”

“…….”



위무선은 남망기의 침묵에서 익숙한 여백을 느꼈다. 언제나 사흘, 길면 이레의 간격을 두고 날아오던 편지를 기다리던 때와 꼭 닮은 정적. 무얼 해야 할지 몰라서. 그래서,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에라도 전력을 다하고자.


아. 이마저도 너와 나의 처음이구나.


더이상 남망기와 서투름을 나누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위무선은 손을 놓아주고 말갛게 웃었다. 남잠. 나 이제 괜찮아. 그러니까, 우리 이만 다른 걸 하자. 차게 식은 악력에서 놓여난 손은 허공을 부유하다 붉은 옷자락 아래에 드러난 손목을 짚었다. 겨우 안정된 금단이 놀라지 않도록 세심하게 조절하여 흘려 넣은 영류가 균열이 잔뜩 낀 예민한 몸을 한 바퀴 돌고 어느 하나 터지고 갈라진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고금을 치운 남망기는 그러고도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다 겨우 물었다. 넌, 뭐가 하고 싶어.


참으로 어리석고 느린 깨우침이지만, 위무선은 그 순간에야 이번엔 제가 주인 된 이의 입장이고 남망기가 손님인 것을 알아챘다. 고소에 수학을 갔을 적엔 남망기가 저를 이끌어 주었지만 이번엔 자신이 남망기에게 무언가를 허락하고 권할 수 있는 위치라고.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하여도 위무선은 제 삶 속에서 무엇을 소유하여 주인으로서 누려본 경험이 일천한, 다가오는 봄을 맞이하여 이제 마악 열여덟이 된 소년에 불과하여.


고개만 들어 둘러본 방 안은 정갈하고 고풍스럽되 별달리 내세울 것이 없었다. 있는 것이라곤 강염리와 강징이 꺾어와 장식해준 꽃과 강풍면이 가져다준 책, 그리고 우자연이 만들어 준 옷들로 가득 찬 커다란 옷장 하나 정도. 침상 곁에 걸린 휘장이 미풍에 팔락이는 것을 멀거니 바라보던 위무선은 그 일상의 배경 속에서 홀로 낯선 정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필연처럼 마주친 금빛 동공엔 잔물결조차 일지 않아 그 평온에 덩달아 가슴 속이 고요해졌다.


엎드려 있던 서안에서 몸을 일으킨 위무선은 열린 창 아래로 가서 앉았다. 부르지 않아도 옷자락 사박이는 소리가 뒤따르고 이윽고 나란히 앉는 몸과 어깨가 맞닿았다. 미끄러지듯 그께로 기댄 위무선은 습관처럼 남망기의 손을 찾았다. 너르고 풍성한 옷자락 아래에 숨었던 타인의 손이 기다렸다는 듯이 마중했다.


남망기는 원체 과묵한 성격이고 저는 몸이 고단하여 큰 소리를 내기 어려우니 서로의 얼굴이 가까운 게 다행이었다. 여전한 속삭임으로 위무선은 남망기에게 운심부지처로 돌아가는 날짜를 물었다. 진작에 들었던 기한이건만 무엇이 그리 달갑잖은지 정수리가 햇볕 아래 따끈하게 달아오를 때까지 고집스레 고개를 돌리고 있던 남망기는 마지못한 목소리로 이틀 뒤, 하고 알려주었다.


위무선은 남망기의 목소리가 빚어낸 이틀 뒤의 연화오를 상상했다. 사일射日의 전쟁이 끝난 후 세상은 한 차례 하늘과 땅이 뒤엎어졌지만 연화오의 작은 귀퉁이, 자신의 방까진 그 여파가 미치지 못해 언제나 고즈넉한 단란이 흘렀더랬다. 일광 따스한 창밖에 새소리 낭랑하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들은 정겹고 반가운 얼굴뿐인, 지금에 이르러서도 믿기지 않는 절대적인 평온.


그러나 이제 이곳에도 변화가 이는구나. 오늘의 달이 뜨고 내일의 태양이 지면, 그 다음 하늘의 달은 저 혼자서 보아야 할 것이라고. 밤의 장막을 들추고 고개를 내밀 달은 천혜로 자비로워 운몽의 호수에도, 고소의 산등성이에도 평등히 떠오를 테지만 내민 손을 겹쳐 잡아줄 온기가 없음이 다만 외로울 따름이라.


이따금 운몽에 손님이 찾아오면 그에 맞는 인물이 마중해 차를 대접하고 담소를 나누곤 했는데, 이미 나란히 앉은 마당에 차를 우리겠다고 일어나는 것도 우습고 둘 모두 말주변마저 좋지 못하니 모처럼 객을 맞이한 주인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우자연의 당당함과 강염리의 상냥함을 번갈아 떠올리던 위무선은 얼마 못 가 제 주제엔 어려운 일이라 포기하곤 남망기의 귓가로 입술을 조금 더 바짝 붙였다. 운심부지처로 돌아가거든, 또 편지 해. 제 가슴팍 위로 쏟아진 위무선의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머리끈을 정리해 넘겨주던 남망기는 그 말엔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응. 드물게도 한 마디가 더 붙은 대답이었다. 꼭 할게.



“고금 연주는 당분간 하지 마.”

“…왜?”

“네가 아픈 게 싫어.”



이번에도 응, 하는 짧은 대답만 돌아올 줄 알았더니 남망기는 뜻밖에 ‘나도.’ 하고 단번에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말을 내놓았다. 지나치게 붙어있어 잘 보이지 않는 하얀 얼굴로 눈을 흘겼던 위무선은 두세 번 속으로 곱씹은 다음에야 봄바람에 누웠다 일어서는 풀꽃처럼 가볍게 웃었다. 남잠, 나 이제 안 아파.


군자君子의 얼굴을 하고도 종종 알 수 없는 치기에 사로잡히는 친우는 모른 척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버렸지만 얽힌 손에 걸린 무게는 한결같아 위무선은 불안해하지도, 초조해하지도 않고 보드라운 백의 위에 제 뺨만 몇 번 부비다 이내 꿈결 속으로 안겨들었다.

 

연화蓮花가 피지 않은 운몽엔 서늘한 단목향이 대신하여 공백을 채우고 있었다.







 

52.

남망기가 운심부지처로 돌아간 뒤의 일상은, 위무선은 고작해야 막연한 외로움을 동무 삼아 잠들 것이라 어림했지만 현실은 늘 그랬듯이 단 한 번이라도 녹록히 굴어주는 법이 없었다. 고운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마다 흰 붕대를 감은 남망기가 어검 해서 떠나간 직후부터 기이한 허전함이 또아리를 튼 가슴을 그저 사람 하나가 난 자리라 그럴 것이다 가벼이 여긴 게 잘못이었을까. 종전 이후 처음으로 고소에서 날아온 서찰을 받아든 위무선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지독한 공허에 짓눌려 한참을 서안 위에 머리를 박고 엎어져 있어야만 했다.


비록 기억 속의 운심부지처보다야 훨씬 피해가 적었고 장서각도 무사히 지켜냈지만 기산의 직접적인 습격을 받았던 만큼 고소 남씨의 손해는 만만찮은 크기였다. 하여, 무너진 건물을 다시 세우고 죽은 이들의 장례를 치르며 그 밖에도 복구와 재건을 위해 여러모로 힘쓰고 있다는 당연한 전언의 어디에 이다지도 끔찍한 무력감을 불러일으킬 요소가 있었단 말인가.


풀벌레 우는 소리가 멀었다. 누창을 열고 하늘을 우러러도 손톱달 하나 찾을 수 없는 삭월朔月의 밤에, 위무선은 내도록 끊어진 바늘이며 부서진 칼날 따위의 형태로 조각된 죄책과 진력을 주워 삼켰다. 방문을 열고 소리쳐 부른다면 그 비명에 응답하여 달려올 이가 적어도 넷은 되는 요활寥闊한 처마의 아래에 놓인 게 제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것만 같았다.


번번히 뜨인 두 눈에서 흐르지 못하는 눈물이 하물며 빠끔이며 벌린 입에선들 터질까. 몇 번이고 허공을 삼켜낸 위무선은 서안 위에 늘어진 손을 그러쥐었다. 무엇도 잡을 것이 없어 깊이, 깊이, 더는 파고들 자리가 없는 곳까지 웅크린 손이 기어이 손바닥 안에 매서운 상처를 새겼다. 쓰라린 통증이 감각을 일깨우고 이성을 흔들었다. 깜박이며 점멸하는 혹한의 고독 속에서 위무선은 내밀한 의문을 건져 올렸다.



이제 내가 무엇을 더 할 수 있지?



지키고 싶었던 건 전부 다 지켜낸 것 같았다.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전부 바꿔낸 것 같았다. 남은 건 제 선천의 역량을 죄 쏟아부어 간신히 최선의 형태로 잡아둔 이들에게 더이상 불순한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 그리고 그들이 오롯한 자청으로 예정된 행복을 향해 갈 수 있기를 빌어주는 것뿐인데,

 

그렇다면, 그 빛으로 나아가는 여정에─ 내 남은 역할은 무엇인가.

 

내 삶의 의미는, 목적은, 이유는,

이제 다 끝난 게 아닌가.

 

놓을 수 없어 애걸하며 버텨왔던 갈망. 허물을 저지르지 않고도 떠맡은 업보. 감히 안주할 수 없었던 심란하여 더욱 서러운 다정. 그 모두가, 마침내 오늘에 이르러 각자에게 합당한 결말을 맞았노라고. 위무선은 이미 뒤처진 세상 속에 홀로 못 박혀 붙들린 시간으로 남은 제게 주어진 유일한 의미를 곱씹었다.

끝났구나. 이제는 정말로, 다 끝났구나.


끝나버렸구나.





차게 식은 나뭇결에 뺨을 기대고 누운 채 어렴풋한 균열의 소리를 들었다. 기약 없는 영원을 향해 흘러가야 할 시간이 파열되고 비틀린 간극 속에 우묵하게 고여 들고 퇴적된 단층에 갇힌 자유들은 너절한 백골처럼 희게 썩어, 그 지독한 시취에 뇌가 하얗게 타들어 가는 듯했다. 이것은 이치에 반하는 일. 반드시 대가가 따르는 외도外道. 흐르지 못하는 미래는 현재를 거쳐 종래엔 과거에 머무를 뿐이니.

 

그러니, 지금 발 딛고 선 이 자리가.

아마도 나의 종착이 될 것이라고.

 







 

53.

등 뒤에서 따라오는 의원의 숨소리가 가파르게 차오르는 것을 들으면서도 강징은 이를 악물고 앞만 보며 걸었다. 얻은 것만큼이나 잃은 것도 많아 비록 큰 연회는 열지 못하더라도 흔한 자축 한 번조차 없이 또다시 울적한 근심이 내려앉은 연화오의 기구한 처지가 답답하고도 열화가 치밀어 남의 사정을 살펴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남망기 때문인가?


불현듯 그런 생각을 떠올린 강징은 금세 세차게 고개를 내저어 사특한 상념을 떨쳐버렸다. 설마하니 위무선이 남망기가 떠났다고 이토록 깊은 시름에 잠길까. 게다가 본격적으로 제 사형이 이상해지기 시작한 시기는 남망기가 떠난 직후가 아니라 그로부터 보름 정도가 지난 무렵이었으니 그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은 적었다.


위무선이 조용한 게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기에 다들 여상스레 넘겨버린 게 잘못이었다. 가끔 멍하게 넋을 놓고 생각에 빠져든 모습을 보아도 아직 사일지정의 여파를 다 흘려보내지 못해 그러겠거니 여겼다. 


그래선 안 되었는데. 그렇게 홀로 침잠해 들어가도록 놔두어선 안 되는 일이었는데. 맞물린 어금니 사이에서 까드득 갈리는 소리가 났다. 단정하게 틀어 올려 관으로 고정한 머리카락이 헝클어지도록 머리를 마구 헤집은 강징은 위무선의 방문 앞에 당도해서야 간신히 감정을 가라앉히고 문을 열어 의원을 들여보냈다.


제가 진찰해야 하는 환자가 운몽의 하나뿐인 대사형이자 천지에 소문 자자한 소년 수사라는 사실에 놀랐던 의원은 곧이어 구태여 손을 내밀어 이마를 만져보지 않아도 뜨끈한 열기가 느껴지는 고열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미리 와서 앉아있던 강풍면은 속이 타는지 식지도 않은 찻물만 연신 들이켰다.


일상이 바빠 섬세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사이, 언젠가부터 종일 생각에 잠겨있던 위무선은 점차 입맛을 잃고 끼니를 거르더니 기어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몸이 조금 괜찮은 날엔 달리 수련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연무장을 거닐었고 달밤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연화호까지 가서 앉아있다 오는 일도 허다했다.


처음엔 또 말 못 할 고민이 생겼나 싶어 일부러 위무선이 좋아하는 음식을 챙겨주고 나란히 산책을 하며 말을 붙이려 애쓰던 운몽의 식구들은 끝내 위무선이 열이 올라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된 뒤에야 심각성을 깨달았다. 이것은 노력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 치료법을 찾아야 하는 일이라고.


의원이 맥을 짚기 위해 흰 침의를 걷어내고 위무선의 손목을 잡는 순간 강풍면은 강건했던 시선을 힘없이 아래로 떨궜다. 벌써 몇 번째나 보게 된 익숙한 장면이었다. 아홉 살 아이 시절에서 열여덟의 소년이 되기까지 꼬박 구 년을 함께 살았건만, 저 애 아직도 나를 의지하지 못하여 홀로 고단해 하는가. 차게 식은 수건이 이마를 훔치는 감각에 겨우 눈을 뜬 위무선을 강징이 부축해 앉혔다. 일단 눈을 떴으니 뭐라도 먹여야 했다. 어제 낮에 쓰러진 이후 여태껏 속이 빈 채였으니.


건더기 없이 멀겋게 만든 죽을 느릿하게 떠먹던 위무선은 금단을 맺은 수사가 열이 오르고 기력이 쇠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라는 의원의 말에 얼핏 뇌리를 스친 생각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면, 포산산인께서 그러셨었지. 천제께서 부디 나 하나만은 봐주길 바란다고. 깨달음의 순간은 매번 일말의 의문도, 여지도 없는 명징함으로 찾아와서, 위무선은 폐부 깊숙한 곳에 잠들었던 작은 숨결을 뱉었다. 조금만 더 기운이 있었더라면 헛웃음의 형태를 띠고 있었을 탄식이었다.


그렇다면 천제께서 허락하신 내 여정이,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비틀림이, 균열이, 

나의 삶이.


여기까지였나, 하고.


분에 넘치는 구역질이 올라와 죽 그릇을 밀어내자 강징이 묽게 우려낸 차를 건넸다. 그것으로 입만 헹궈낸 위무선은 다시금 이불 속에 파묻혀 혼곤하게 잠을 청했다. 온몸의 뼈마디가 욱신거리고 숨을 쉴 때마다 심장이 덜컥여 앉아있는 것조차 버거웠다. 일어서기 위해 사지에 힘을 주어도 머리부터 섣부른 속죄를 청하는 양 바닥으로 처박혀서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열이 들끓어 눈앞이 붉게 명멸하다가도 때론 곤두박질치듯 오한에 몸을 떨어야 하니, 혈관을 타고 도는 게 피가 아니라 조각난 얼음 파편이라도 되는 것 같단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잠시 뒤척이며 끙끙 앓던 위무선이 까무러치듯 잠에 빠져든 후 의원의 처방을 들으며 이불자락을 정돈해주던 강징은 무심코 포단 아래로 튀어나온 위무선의 손을 붙잡았다. 손아귀에 스치는 감촉이 깔끄러워 당위처럼 그리로 시선이 쏠렸다. 의식을 잃은 병자의 손은 시든 국화처럼 앙상하게 흔들렸다. 제대로 된 수련을 하는 걸 본 기억이 없음에도 저와 비슷한 자리에 굳은살이 박이고 물집 자국이 남은 손이었다.


그 순간 강징은 누군가가 뒤통수를 한 대 후려갈긴 것만 같은 충격에 미끄러지듯 침상 곁에 주저앉았다. 살이 밀리고 까져 도톰하게 부어오른 채로 아물어 생긴 흉. 물집이 터져 푹 패인 자리. 붓을 잡는 모양대로 도드라진 마디. 활시위에 짓눌려 갈린 상처. 


다른 무엇도 아닌 그저 부단한 노력의 증거.

피땀 흘려 살아온 삶의 흔적.


풀린 초점으로 멍하게 바라본 원망스런 이의 얼굴은 열에 들떠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열기가 맞잡은 손을 통해 옮아온 양 심장이 끓어올랐다. 세상의 부당 앞에 아우성쳤다.


이렇게 노력했는데. 이렇게까지 애썼는데.

왜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일 다 지나간 지금,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야 할 이는 광명에 짓눌린 눈송이처럼 시들고 있는지.

 







 

54.

운몽 수사의 안내를 받아 연화오로 들어가던 남망기는 청석을 깐 바닥에 드리운 제 그림자를 보고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운몽의 여름은 이르게 찾아오는구나. 그러나 제게 글자로는 전하지 못할 여름의 운몽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던 이는 지금 곁에 없었기에 멈추었던 만큼 나아가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예의와 범절보단 다급함밖에 느껴지지 않았던 서찰에서 반은 짐작을 했지만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남은 반은 서글픔을 넘어 미비한 분노의 영역에까지 발을 들여놓았다. 식은땀이 맺힌 이마를 한 번 짚어보고 이어 이불 아래로 손을 넣어 손목을 잡은 남망기는 이내 힘없는 손길로 잡았던 것을 놓았다. 살펴본들 무엇하랴. 내 눈으로 보고 있는 게 현실인 것을.


번민으로 갉아 먹힌 심신엔 고금을 내려놓을 만큼의 여유도 없어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기원의 고백을 삼키듯 두 손으로 간절히 붙든 이의 체온이 여느 때와는 달리 차갑지 않았으나 그마저도 안도스럽진 못했다. 어느새 지은 죄 없이도 속죄하는 법을 배운 남망기는 위무선을 흉내 내듯 눈을 감고 나직이 속삭였다.


위영, 나 여기 있어. 다시 돌아왔어.


네가 한동안 고금을 연주하지 말라고 해서 운심부지처로 돌아간 이후 오랫동안 현을 누르지 않았어. 그때 짓물렀던 손은 사흘 만에 다 나았어. 고소의 약은 아주 뛰어나서, 설령 칼에 찔린 상처라 할지라도 작은 흉도 남기지 않고 말끔하게 치료할 수 있어. 다음엔 네게도 가져다줄게. 너는 네 몸을 잘 돌보지 않아 상처를 뒤늦게 발견하는 일이 잦으니 그게 도움이 될 거야.


어검을 해서 오는 동안, 연화호를 지났어. 아직 연꽃은 피지 않았지만 넓은 호수를 가득히 채운 푸른 연잎들은 그것만으로도 장관이더라. 네가 운몽의 여름은 몹시 더워서 힘겹지만 그럼에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계절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알 것만 같아.


불꽃을 닮은 홍련이 가득한 호수는 대단히 아름답겠지. 네가 내게 보여주고 싶다고 말할 법도 해.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 너의 자랑이 될 만한 풍경일 거야.

 

위영.

 

나, 여기 있어.

네 곁에 있어.

 

머리 위로 내리쬐는 해는 높고, 불어오는 바람은 뜨거운 여름의 운몽에 내가 왔어.

글자로는 전하지 못할 풍경을 내게 보여주기로 했잖아. 다음번에 내가 운몽에 오는 날엔, 나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미리 생각해 두겠다고 했었잖아. 너는 이 땅의 주인이고, 나는 너를 찾아온 손님이니 나를 기쁘게 맞이해 주겠다고. 그렇게 말했었잖아.


네가 아픈 게 싫어. 네가 힘들어하는 게 싫다. 네가 내 짓무른 손끝을 보고 안타까워했듯이 나 역시 너와 같은 마음인데. 이제는 다 괜찮다고 했었으면서 또 무엇이 너를 괴롭게 한 것인지.


단 한 번이라도 뒤를 돌아보았더라면

설령 어디에서라도 기꺼이 달려가 손을 내밀어주었을 것을.





강하게 움켜쥔 메마른 손가락들이 흡사 나뭇가지와 같아 알 수 없는 공포가 솟았다. 위무선은, 꼭 나무가 되려는 것만 같았다. 걷는 것을 멈춘 발은 땅에 묻혀 뿌리가 되리라. 인과에 매몰된 육신은 속이 빈 줄기가 되리라. 두 손 높이 들어 올려 바람결에 널어두고, 이따금 아침의 찬란과 저녁의 자애가 가지 끝에 걸리면 그것으로 양분 삼아 하루를 버티어내는 삶. 부족함이 넘치고 무엇 하나 기꺼운 것이 없을 텐데도 이 사람은 감히 그러한 생애에 만족이라는 이름을 붙일 것 같아 두려움은 죄 자신의 몫이었다.


남망기는 그 어느 때의 강징과 같이 이 끝을 사리물며 위무선의 손을 놓았다. 고금을 감싼 흰 천을 풀어내고 무릎 위에 얹은 뒤 일곱 개의 현을 한 번씩 튕겨 음이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점검했다. 내단과 영력에 손상이 간 것이 아니라 단지 기력을 잃었을 뿐이라 연주하는 곡조도 이전과는 달라야만 했다. 운심부지처를 원상으로 되돌리는 동안에도 금서실의 악보집까지 뒤적이며 새로운 곡을 배우기 위해 노력했던 이유는 이러한 상황을 예상한 것은 아니었으나, 어쩌면 무의식의 저편에서는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하늘로 날아오른 자신에게 손을 흔들어주던 그림자는 그러고도 아주 오랫동안 연화오의 정문 앞에 서 있었다. 마치 자신이 돌아가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모른다는 듯이.


안식하지 못하는 육신은 언젠가 붕괴하기 마련이라.


남망기는 정신을 산란케 만드는 여러 생각을 단번에 옆으로 밀쳐내고 호흡을 가다듬은 뒤 첫 음을 짚었다. 세밀히 조절해서 실어 보낸 영력은 잠든 이를 깨우지 않고 부드럽게 몸에 스몄다. 고소의 둘째 공자가 청을 받아들여 운몽을 방문했다는 연락에 외업에서 급히 돌아온 강풍면은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고 바깥에서 그 소리를 듣다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본디 마음이 가는 곳에 몸이 가고, 몸이 움직인 곳에 뜻이 따른다고 했다. 음률 하나하나에 깃든 뜻이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라 차마 방해할 수가 없었다.

 







 

55.


“남잠. 나,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다음 수를 놓을 자리를 대신 짚어주려고 했던 남망기는 한발 늦게 그게 바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란 것을 눈치채고 쥐었던 돌을 전부 놓았다. 맞은편에 앉아 백돌을 굴리고 있던 위무선의 시선이 나무판 위를 빗겨 좀 더 먼 곳에 닿아있었다. 


두 번째로 방문한 연화오에서 남망기는 뜻밖의 사실을 깨달았다. 위무선은, 운몽 강씨의 사람들과 자주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먼저 말을 거는 일은 극히 드물었고 어쩌다 입을 열어도 일상의 평범한 안부에 불과할 뿐 제 속내를 드러내는 말은 엄격하게 삼갔다.


고소 수학시절에 다리를 다쳤을 때, 그리고 사일지정의 전장에서 운몽 사람들이 위무선을 대하는 태도가 아주 정성스러워 조금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반면 제 앞에선 그 억누른 심중이 제법 빈번하게 튀어나오는 것 같으니 이를 달가워해야 할지, 안쓰럽게 여겨야 할지.


남망기는 바둑판을 치우고 위무선의 손에서도 돌을 빼내 정돈했다. 손목을 잡고 이끌자 마른 육신은 가볍게 따라와 침상 위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았다. 혹시 덥지 않도록 창을 열어 바람을 들이고 거슬리지 않게 휘장까지 치워낸 후에야 남망기는 조심스럽게 위무선의 손에 제 손가락을 얽었다. 그간의 경험에 의하자면 재촉을 하는 것보다 그가 원하는 만큼, 그리고 원하는 지점까지 스스로 이야기를 토해내도록 기다려주는 편이 나았다.


위무선은 남망기가 운몽에 초청되어 온 지 칠주야가 지나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고 휘청이는 걸음이나마 연화오의 여기저기를 거닐었다. 하루는 배를 빌려 약속했던 호수 나들이를 하기도 했다. 위무선은 노를 저을 힘이 없고 남망기는 노를 젓는 일에 서툴러 기껏 호수 중앙까지 가 놓고도 노를 놓치는 바람에 남망기가 위무선을 안은 채 어검 해서 돌아온 뒤론 강징도 그사이에 섞여들었으나, 위무선이 강징의 앞에선 말을 아낀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론 일부러 방 안에서 소일거리를 하며 보냈다. 남망기에겐 여름의 운몽을 구경하는 것보다 위무선이 감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일이 더 중했기에.


어렴풋이 핏기가 도는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호흡이 가늘게 떨렸다. 묵묵한 기다림의 끝에 마침내 막힌 둑을 터트리듯 꽉 막힌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목줄이 졸린 사냥감처럼 허덕이는 음성이 못내 갈급하고도 어릿했다. 내가, 할 일이 없어, 남잠. 여기서 내가 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



하고 싶었던 일은 전부 했어. 이루고 싶었던 것을 다 이루어냈어. 이런저런 거창한 수식어를 붙일 필요도 없이 이로써 내 생은 성공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로 마무리가 된 거겠지. 그 사실이 정말 기뻐. 아주 행복해. 더 바랄 여한이 없을 것만 같아.

 

그래서, 정말로 여한이 사라져버렸나 봐.


내일의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다음 날의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내가 아는 나는 여기까지인데. 더 나아갈 앞길이 없는데. 나는, 당연히. 이 자리가 내 종말점일 줄로만 알았어. 여기가 최종으로 도달할 수 있을 미래일 것이라고. 이 뒤는 내게 허락되지 않았을 거라고. 그래서 무엇도 생각해 두지 않았어.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는데.

 

그런데 내게도 남은 생이 있다고? 더 가야 할 길이 있다고?

지금 내 발 딛고 선 자리가, 나의 무덤이 아니라고?

 

어떻게 내게 그럴 수 있을까.

어째서, 내게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구는 걸까.

 

세상의 자비란 참으로 불합리해서 간절히 바라는 것은 반드시 가혹한 좌절과 절실한 노력의 끝에 얻어낼 수 있도록 해두었으면서 생각지도 않았던 결과는 희망이라는 이름하에 제멋대로 던져주더라. 원하지 않은 행운은 어떤 이에겐 그저 불행일 뿐인데. 횡액을 떠넘기고 값싼 찬양이라도 바라는 것인지.


세월은 끊임없이 흐르고 다들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와중에 나는 홀로 멈추어 서 있어. 멀어지는 이들의 뒷모습만 바라보면서. 그들에게 기다려 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 생을 부여받아 이 땅에 태어난 이상 사람은 누구나 살아야만 하는걸. 끊임없이 움직이고, 탐구하고, 갈구하고, 원하고, 바라고, 때로는 절망하고, 분노하고, 자책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서서,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의 끝으로.


나의 존경. 나의 경외. 나의 다정. 나의 연민. 그들이 걸어가는 길 아래엔 분명 무언가가 있는 거겠지. 안전하고 든든한 받침이 존재하는 거겠지. 어느 날은 문득, 그 발자국을 따라가고 싶다가도. 막상 발밑을 내려다보면 그곳은 미지의 어둠이라. 지금 이 순간까지 달려오기에 급급해 무엇도 예비하지 못한 나는 텅 비어서, 해와 달은커녕 촛불 하나 들지 못한 빈손인데.



“그런 내게, 두 눈을 감고 어둠 속을 건너 빛을 향해 나아가라고……”



다름 아닌 그 너머에 진정으로 빛이 있을지조차 알 수 없는 삶을.

 




끝이 있다고 믿었기에 여기까지 달려올 수 있었다. 고지가 눈에 보인다고 여겼기에, 매 순간 전력을 다할 수 있었다. 한 인간에게 잠재된 힘은 무한하지 않고 열정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며 다정마저 애쓰고 노력하여 붙들지 않으면 쉬이 벗겨지는 한 꺼풀의 가면과도 같아서. 제 능력이 닿는 범위를 엄격히 재단하고 철저히 대비하지 않으면 결코 이루어 낼 수 없는 위업을 해내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숨을 쉬고 심장을 박동치게 만들 단말마의 기력조차 모조리 짜내야만 했다.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 자는 두려움을 모르고 달려들 수 있었으나, 그 너머에 생각지도 못했던 연속이 펼쳐진 마당에 어찌 척연惕然에 무릎 꿇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언제나 등 뒤를 엄습해오던 무지의 죄악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 순간 새로운 미지가 눈앞을 덮쳤다. 두 다리로 대지를 짓밟고 설 의지조차 잃은 이에겐 재앙과도 같은 연명延命이었다. 간절히 고대했던 안식은 끝내 주어지지 않은 채, 타의에 의해 등 떠밀려 내몰린 드넓은 세상. 위무선은, 제 나이가 어언 열여덟의 소년인 것을 잘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로소 하늘 아래 첫 숨을 터트린 것만 같은 공포에 모든 갈피를 상실한 채 황허荒墟에 주저앉고 말았다.


천지엔 깊은 밤이 내렸는데 내 올려다볼 하늘엔 해도 달도 별도 뜨지 않는구나. 

꼭 그 전부가 진작에 나락까지 떨어져 내렸단 걸 증명이라도 하는 양.




 

남망기는 눅진하게 물기 섞인 음성을 끝으로 괴롭게 몸을 뒤트는 위무선을 두 팔로 가득히 끌어안았다. 여름의 태양은 높이 뜬 만큼 기우는 것도 느려서, 활짝 열린 창 너머로 낱낱이 스미는 석양은 무정하게도 어둠으로의 도피를 허락해주지도 않았다. 하여, 제 곁에 드리운 유일한 그늘 속으로 파고드는 몸짓이 애처롭고도 심장이 먹먹하도록 저려서 할 수만 있다면 가슴을 갈라 그 안까지 들여보내 숨기고만 싶었다. 흰 옷자락에 붉은 침의가 엉망으로 뒤엉켰다. 품속에 얼굴을 파묻은 이의 목소리는 귀가 아니라 온몸으로 울렸다.


남잠. 나… 힘들어. 너무 힘들고, 지쳤어. 한때는 다리가 잘리면 팔로 기어서라도 보고 싶었던 미래인데, 이렇게 실제로 눈앞에 닥쳐오니 이젠 뒤를 돌아보는 것마저 두려워. 


나는 지금까지 어떤 길을 걸어왔던 걸까. 어떤 위험을 넘고,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희생해 가며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걸까. 그중에 내게 소중한 게 있지는 않았을까. 사실 결코 버려서는 안 되는 게 있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그 상실들로 인해서, 그 결핍으로 인해서,

 

더는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게 되었다면.

갚을 것이 많아 스스로 생을 져버릴 수도 없는 이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미안하다는 말밖에 하지 못하던 어린 소년은 사과 대신 감사를 표현하는 법을 배웠고 어느 순간에는 웃는 낯으로 괜찮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으나, 그러나 마음부터 따르지 않은 일에 뜻인들 움직였을까. 괜찮았을 리가 없다. 정말로, 그럴 리가 없었다.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일인데도 보다 빨리 전하지 못했던 진심이 지금에서야 사무치도록 후회스러웠다.


사방은 저물녘의 황혼.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밀려 들어오는 어둠을 피해 안온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저마다의 안식으로 떠나가는 이들의 뒷모습을 그저 가만히 서서 바라보기만 했을 이에겐 고독조차 새삼스러울 것이 못 되었으리라. 어둠 속에 남겨지는 일이 익숙해 도리어 빛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 두렵다는 사람에게는 무엇으로 위안을 삼으라 일러주어야 할까.


목 너머로 삼키는 게 동화된 설움인지 메마른 분노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남망기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넘겨 눈물에 젖은 뺨 위로 제 입술을 미끄러트렸다. 맞닿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처염凄艶이 설익은 감정을 온통 충동질했다.


그의 존경. 그의 경외. 그의 다정. 그의 연민. 그 하나하나의 감정으로 이름 지어졌을 위무선의 소중한 이들. 남망기는 그 가운데 제 몫의 자리가 없는 것을 오히려 한 줄기의 희망으로 우러렀다. 위무선이 바라보고 있는 멀어지는 뒷모습 중, 자신은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가면 된다.

그의 앞이나 뒤가 아니라, 손을 맞잡고 설 수 있는 옆자리에.


같은 위험을 밟고, 같은 공포를 넘고, 같은 깊이의 어둠을 가로질러서,

끝내는 환한 빛 아래에 당당히 고개를 들 미래를 상면하여.



“…고소로 돌아가자.”



나와 함께 고소로 돌아가자, 위영. 서투른 청을 뱉어놓고도 부연할 언어를 찾지 못해 입속에서만 방황하던 혀끝은 기어이 당혹스러울 만치 바보 같은 헛소리까지 만들어냈다. 토끼가, 토끼들이 많이 자랐어. 너… 네가, 나중에 토끼들을 보러 다시 온다고 했었잖아. 그때까지 대신 소식을 전해달라고. 그건 언젠가 운심부지처에 또 오겠다는 말이었으니까. 그러니까. 그, 러니까. 나랑. 같이.


항상 소년답지 않은 성숙과 우아함으로 성급히 침범할 수 없는 경계를 둘러친 것 같았던 남망기의 어수룩함에 위무선은 그만 제가 조금 전까지 재앙 같은 여명에 익몰하여 죽어가던 참이란 것도 잊은 채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도 눈물을 삼켜 깔깔해진 목을 비집고 새는 웃음소리에 어깨를 한 번 떨었던 남망기는 위무선을 책망하는 대신 제 품에 안긴 몸만 한 차례 더 꼭꼭 단속해서 안았다. 마른 뺨에 닿았던 입술에서 때늦은 열기가 희미하게 일었다. 나 이제 너희 집 가규들 다 지키고 살 자신 없는데… 위무선의 첫 마디가 부정이 아니었던 탓에 남망기의 긴장에서도 힘이 사르륵 빠졌다.



“수학생이 아니라 손님의 자격으로 가는 거니까 지키지 않아도 돼.”

“그걸 남 선생님께서 두고 보실 리가 없잖아.”

“괜찮아. 내가 대신 벌 받을게.”

“네가 벌 받는 것도 싫어. 그냥 여기 있을래.”



쇠약한 육신에 다시금 열이 오르기 시작하자 위무선은 무의식적으로 남망기의 어깨에 이마를 문질렀다. 몇 겹의 옷을 뚫고도 전해지는 뜨거운 체온에 이마를 쓸어주는 손이 그가 품은 단향목 향기만큼이나 서늘했다. 한동안 신중히 문장을 가다듬던 남망기는 아무리 노력해도 명료하게 정리되지 않는 혼란한 머릿속에 체면을 차리는 것은 의연히 포기하고 위무선의 귓가에 속삭였다. 알 수 없는 부끄러움 만큼이나 낮은 목소리로.



그럼, 내가 설득할게. 전부 내가 알아서 할게.

너도, 나도, 더는 다치는 일 없도록.

 

 








56.

남망기는 하룻밤 꼬박 대화를 나눈 끝에 기어이 위무선에게서 알겠다는 답을 얻어냈지만 떠나는 일은 그 이후로도 첩첩산중이었다. 가장 날뛴 것은 강징으로, 그 몸으로 어떻게 고소까지 가겠느냐 위무선을 들볶던 강징은 급기야 남망기에게 삿대질을 하며 애를 낫게 만들라고 데려왔더니 빼앗아 갈 작정이었냐고 소리를 질렀다. 강징의 노호를 정면에서 맞고도 남망기의 얼굴엔 조금의 실금도 가지 않았지만 괜히 마음이 조마조마해진 위무선이 강징의 팔에 매달려 만류했다.



“말이나 마차를 타고 가기엔 너무 멀어!!”

“어검 해서 가면 금방이야.”

“너 지금 제대로 어검 할 수 있어? 떨어져 죽을 셈이냐고!”

“남잠이 데리고 가 줄 거야. 남잠의 어검 실력은 잘 알잖아.”

“높이 날아서 가면 얼마나 추운데!”

“옷 따뜻하게 입을게. 많이 챙겨갈게. 짐은 마차로 보내. 이번엔 사양하지 않고 주는 대로 다 받을 테니까…….”



긴 문장을 한 번에 말한 탓인지 위무선이 잠시 호흡을 고르자 노여움이 다글다글 들어찬 눈으로 희미하게 웃고 있는 그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강징은 위무선을 도로 자리에 눕혀주고 방문을 거칠게 박차고 나가버렸다. 등 아래에 칼침이라도 꽂혀있는 양 곧바로 일어났던 위무선은 어깨를 누르는 강염리의 부드러운 손길에 다시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워야 했다.


아선, 이번엔 정말로 사양 말고 주는 것 다 받아가야 해.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인데도 그게 꼭 제 과거사를 책망하는 것만 같아 눈동자만 굴려 침상 옆 협탁에 올려둔 은령을 쳐다본 위무선은 면목이 없어 고개만 열심히 끄덕였다. …그럴게요. 미안해요, 사저.

 

강징의 반발과는 별개로 가뜩이나 더운 운몽보다는 적어도 여름 만이라도 고소에서 휴양을 하는 게 더 나은 것은 명백했기에 위무선의 고소행은 생각보다 쉽게 허락을 받았다. 해보다 득이 많은 일이니 감정으론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라도 이성으론 이해를 해 주어야 했다.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짐을 마차로 보내기로 했으니 간단한 옷가지 몇 개만 챙겨나온 위무선은 허리를 잡아줄 줄 알았던 남망기가 저를 간단히 안아 올리는 것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잠, 너는 날 안는 걸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



조그맣게 낸 목소리는 남망기의 귀에만 정확히 가 닿았다. 남망기는 여전히 몰풍스럽고 고상한 낯빛이었지만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귀 끝만 발갛게 달아오른 것은 누구도 보지 못했다.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땅을 한 번 내려다보며 연신 한숨을 내쉬던 강징은 웃는 낯으로 손을 흔드는 위무선에게 다가가 우는 낯으로 제 장포를 벗어 덮어주었다.



“이미 충분…”

“거절하지 않겠다며.”

“…알았어. 알았으니까 제발 웃는 얼굴로 보내주지 않을래? 나 어디 죽으러 가니? 어검 해서 오면 너도 금방일 거 아냐. 영영 못 볼 먼 거리도 아닌데…”

“시끄러워. 입만 살았지, 아주.”



여름이라 추울 일도 없을 텐데 강징의 과한 수선에 기어이 위무선의 몸을 감싼 보랏빛 장포를 흘긋 바라본 남망기는 하늘 위로 올라 그늘이 사라지면 차라리 저것이 있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납득하곤 그대로 두었다. 형식적이나 어절마다 속속들이 들어찬 감정은 조금도 겉치장이 아닌 강 종주 내외의 인사와 강염리의 다감한 쓰다듬을 마지막으로 남망기는 묵례로 작별을 고하고 그대로 위무선을 안고 날아올랐다.


한동안 땅 아래를 바라보던 위무선은 얼마 못 가 움츠리듯 남망기의 목에 건 팔에 힘을 더했다. 불편해? 걱정스레 물은 말엔 고갯짓으로 답이 돌아왔다.



“…이상해서. 뭔가, 이상해서 그래.”

“기분이 안 좋아?”

“그런 건 아닌데…”

“그럼?”



빠른 속도 덕분에 이제는 작은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들은, 그렇게 작은 점이 되어서도 끝까지 연화오의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위무선은 혹여나 눈가에 고여든 물기가 남망기의 옷자락에 떨어질까 고개를 깊이 숙였다. 남잠, 너 며칠 전에 나한테 고소로 돌아가자고 했었잖아. 응. ……나, 어쩌면,



“돌아갈 장소가 둘인가 봐…….”



습관적으로 참았던 날숨에 섞이어 바람결에 흩어지는 자그마한 고해에 남망기는 잠자코 위무선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지금은 이것으로도 충분했다.

 

 







57.

미령한 건강을 염려해 중간중간 객잔에서 쉬어갔던 덕분인지 위무선은 고소까지 가는 먼 길에도 크게 지치지 않았다. 이동하는 도중에 잠든 위무선을 먼저 정실에 데려다 놓은 남망기는 운몽과는 다른 기후에 몸이 놀라지 않도록 창문과 이불을 꼼꼼히 단속한 후에야 남계인의 앞에 강풍면의 친필 서찰을 가져다주며 사후보고를 했다.


귀한 손님으로 맞아들인 것이니 어떠한 책도 잡지 말아주십사 미리 단언하는 태가 몹시 낯설고 심지어는 고깝게 느껴졌지만 위무선이 운심부지처의 은인인 건 분명하여 남계인은 마지못해 그러거라 허락했다. 그간 지켜보았던 위무선이란 인물이 천방지축으로 가규를 어기진 않을 것 같단 생각도 그 결단에 한몫했다.


처음 며칠 간은 운심부지처로 돌아온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지 정실 문을 열어놓고 멍하게 넋을 빼고 있던 위무선은 나흘째 되는 날 작은 소쿠리 가득히 배추며 당근 따윌 챙겨온 남망기가 토끼들을 보러 가자고 권한 뒤에야 중문 너머까지 발을 내디뎠다. 남은 짐은 마차로 보내겠다고 했으면서 정작 운심부지처에 도착해 보니 그새 운몽의 문하생들이 모든 짐을 맡겨두고 간 후였다.


좋게 말하면 밝고, 까다롭게 평하자면 화려한 색채의 의복을 들여다보며 난감해하던 위무선은 결국 남망기의 옷을 빌려 입고 다녔다. 아무리 제가 운몽의 유일한 대사형이라 해도 운심부지처의 복판에서 붉고 푸른 옷을 입고 다닐 깜냥은 들지 않았기에.


나무 그늘에 옹송그려 잠들어 있던 토끼들은 그리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았는데 기민하게 고개를 들더니 망설이지 않고 위무선의 검은 목화 앞까지 폴짝폴짝 뛰어와 매달렸다. 해가 몇 번이고 바뀌었는데 아직 저를 기억하나 신기해하던 위무선은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제가 걸친 옷자락에서 희미한 단목향이 풍기는 것에 사정을 눈치채고 웃었다.


남잠, 이 애들이 내가 너인 줄 착각했나 봐. 두꺼운 당근을 어렵지 않게 몇 개의 조각으로 부러트리던 남망기는 쪼그리고 앉아 토끼를 품에 안은 위무선을 흘긋 돌아보곤 ‘너를 알아보는 거야.’ 하고 먹히지도 않을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본래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언제나 정실에 앉아 책을 읽거나 고금을 연주하던 남망기는 손님을 맞이한 주인이 된 탓에 여기저기에 무언가를 묻고 다니는 일이 늘었다. 남희신에겐 의약당의 의원 중에서도 실력이 좋은 사람의 이름을 물었고 어린 문하생들에겐 요즈음 유행하는 볼거리나 놀잇감이 없는질 물었다.


유흥을 즐기기엔 지나치게 고리타분하고 빡빡한 규율의 속에서도 소박한 일탈은 자행되기 마련이라 책벌을 담당하는 남가 둘째 공자의 앞에서 어깨를 떨었던 어린 문하생들도 정실에 터를 잡은 손님의 이야기를 듣곤 선뜻 간식거리며 풍속소설 같은 것을 건네주곤 했다.


채의진에 내려가 빙과를 사 먹었던 날, 위무선은 작게 자른 과일과 사박한 얼음 조각이 어우러진 음식을 한 입 떠서 입에 넣곤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눈만 크게 떴다. 맑게 부풀어 오른 눈동자엔 눈물 대신 소박한 감격이 핑그르르 돌았다. 더 사주고 싶어도 속이 탈이 날까 걱정되어 전낭을 단단히 여민 남망기는 그 대신 위무선이 반쯤 먹었을 때 한 입도 먹지 않은 제 그릇과 그의 것을 맞바꾸어 주었다.

 

어느 날엔 장서각에서 책을 읽고, 어느 날은 토끼를 보러 가고, 또 어느 날은 벽령호까지 나들이를 갔으며 체력이 조금 괜찮아 보이던 날엔 뒷산을 올랐다. 야트막한 공터에 도착한 위무선은 주위를 둘러친 대나무를 구경하다 자신이 처음 토끼들을 발견한 곳이 이곳이라며 살며시 고백했다.



“나, 사실 그때만 해도 네가 정말 무서웠는데.”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잠시 얼어붙었던 남망기는 위무선이 샛노란 민들레 한 송이를 꺾어 들자 반사적으로 그 손을 붙잡은 채 찰나 간에 바짝 마른 입술을 열었다. 내가, 왜? 먹을 생각이 아니니 놓으라며 남망기의 팔을 톡톡 친 위무선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배시시 웃었다. 너한테 미움받기 싫어서.



“너랑 친구가 되고 싶었거든.”



…그놈의 친구. 깊이 숨을 삼켰던 남망기는 끝내 아무런 첨언도 못 하고 한숨만 뱉었다. 먹지도 않을 민들레를 왜 꺾나 싶었더니 여러 개를 엮어 금세 조그만 화관을 만들어 낸 위무선은 겁도 없이 제 허벅지 위를 기어오르는 야생 토끼의 머리 위에 그 화관을 얹어주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토끼의 세계엔 화관이란 게 없어 소박한 선물은 촌각도 세기 전에 오물거리는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남잠, 얘 민들레 먹었어. …그게 왜? 먹지 말라고 화 안 내? 남망기는 어이가 없어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위영. 토끼는 원래 풀을 먹어.


석찬 시간이니 그만 돌아가자고 위무선의 손을 잡아 길을 안내하던 남망기는 운심부지처의 옆문을 통과할 때가 되어서야 물었다. 혹시 지금도 내가 무서워? 위무선은 오래 생각하지도 않은 채 곧바로 아니, 하고 답했다.



“우리 친구 하기로 했잖아.”

“…….”

“그치?”



웃는 얼굴에 대고 할 수 없는 말은, 생각보다 무궁무진하게 많았다.

 








 

58.

운심부지처의 재건도 얼추 마무리가 된 참이니 새로운 문하생을 받는 일을 의논하기 위해 난실로 건너갔던 남망기가 돌아왔을 무렵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오점 하나 없을 순백의 옷자락 위로 핏빛의 노을이 길게 어룽졌다. 위무선이 붉은 옷을 입고 있었을 땐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이, 흰 옷자락 위에 적홍의 색채가 겹쳐진 것만으로도 불길한 기억을 연상케 해 남망기는 드물게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발걸음 소리는 없었으나 옷자락이 팔락이는 소리는 감출 수 없어 마루 끝에 앉아있던 위무선이 그리를 돌아보고 옅게 웃었다. 그 미소가 한결 편안하고 밝아 보여 남망기는 제 속의 불안을 밖으로 밀쳐냈다. 좋은 것만 생각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토끼들 밥을 주고 왔어.”



위무선이 무언가 능동적으로 행동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아직 섣부르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막연한 낙관을 확인받고 싶은 두 충동에 시달리느라 미려한 얼굴을 일그러트렸던 남망기는 제 뺨을 가볍게 쿡 찌르는 손가락에 굴복이라도 하듯 위무선과 마주 앉았다. 위영. 응, 남잠. 답을 들어놓고도 남망기는 한참 말을 골랐다. 상처 위에 쏟아붓는 다정은 아무리 넘쳐도 과하지 않았다.



“이제, 무섭지 않아?”



위무선은 낙양落陽 아래 고개를 숙인 달맞이꽃처럼 웃었다. 탈진에 공허하고, 잔혹에 질식되어 여울지는 미소의 끝자락에 작은 한숨이 따라붙었다.



“남잠. 내가 한 일이, 큰일이야?”

“응.”

“내가 많은 것을 했어? 대단한 일을 해냈어?”

“많은 것을 했고, 대단한 일을 해냈어. 네 덕분에 어쩌면 무참히 희생되었을지 모르는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건졌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전보다 나은 미래를 살게 되었어.”

 


네가

우리들의 미래를 비틀었어.

 


반박의 여지조차 주지 않는 확답의 앞에서도 위무선은 여전한 탈력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가 그랬어. 내가 해냈지. 내가 기어코 미래를 비틀었어. 있지, 남잠. 그럼, 그러면, 나라는 사람의 쓰임은─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닐까?


여기가 내 끝인 거야. 주어진 임무를 다 했으니 이제는 돌아갈 때인 거지.





해거름이 자욱하게 번지는 묵천의 아래에서 순백의 의복은 속절없이 색채의 파도 속에 뭉그러들었다. 붉었다가, 흐렸다가, 희었다가, 다시금 어둠 속에 잠겨 들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태양의 일대도 하루 반절의 기한만 꼬박 지킨 뒤 산 너머로 저문다. 아무리 찬란한 광명이라도 기어이 지고 만다. 세상은 순환하는 것이고 삶은 윤회하는 것. 그렇다면 돌아간다는 말은 진실로 섭리에 따르는 순응이었으나, 그럼에도 달갑게 받을 수 없는 것은 그것은 언제나 상실을 전제로 한 결과이기에. 어떠한 미사美辭로 덮어씌워도 날것의 본질은 죽음을 의미하고 있기에.


하여, 남망기는 제게 부여된 당연으로 의문의 발치를 붙들었다. 아니, 맹목으로 매달렸다. 우리 둘 앉은 자리는 그저 풍아한 정실의 마루에 불과하나 눈을 감고 기울어지는 이의 발치는 이제사 생과 사의 경계에 서 있었다. 아직 그 곁에 달려가 설 권리를 얻지 못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거기까지였다.


아직은, 거기까지.



“…돌아가다니. 어디로.”

“어디로든. 어느 곳으로든.”

“……위영.”

“…나도, 나도……”

 


나도. 이제는 모르겠어.

나도 더는 모르겠어.


이 뒤의 이야기는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는걸.




 

유난히 혹독했던 아홉 살 겨울의 막바지에, 하필이면 자신에게만 주어졌던 단 한 번의 기연. 그것을 대가로 삼아 구 년의 시간을 오로지 예지의 삶만 살아왔던 위무선은 난생처음 맞이하는 미지의 앞에서 한없이 작게 움츠러들었다. 세상의 전부가 무섭고 천지의 모든 것이 두려웠다. 내 분명 차라리 무지한 채로 죽게 해달라 빌었기로서니, 이제 와서 이것을 축복이라고 내려주신 걸까.


허면 응당 뒤따라 와야 할 나의 죽음은 어디로 갔는지.

반쪽짜리의 성취를 두고 기뻐하기엔 사는 것이 너무나 고통이니.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려도 잔인토록 세세히 굽어보는 하늘까지 가릴 수는 없었다. 유년은 물론이고 미성년의 끝자락까지 끈질기게 따라붙을 요량이었던 혼자만의 죄업은 이제 산산이 조각나고 깨어져 누구도 알 수 없는 평행의 저편으로 떠나갔는데 자신의 육신은 아직도 이 땅 위에 남아있었다.


아아, 차라리 빠짐없이 거두어 가지 않으시고. 이것이 나의 첫 번째 생인 것 알지만, 그 속에 깃든 기억은 이미 한 번의 죽음을 겪었던 이의 것. 죽음을 꺼릴 나약함 따위가 남아있을 리 없는데.


뼈대가 도드라지도록 마른 손은 세상에서 위무선을 숨길 수는 없었으나 남망기의 눈앞에서는 그의 얼굴을 감추었다. 이미 지척의 거리를 더욱 좁혀 다가간 남망기는 가늘게 떨리는 어깨를 강인한 손아귀로 꽉 쥐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마음은 결국은 세 치 혀끝에서 자아내는 진심으로 묶어야 하는 것이라 차선으로 완력으로 말미암아 육신이나마 제 곁에 붙들었다.


오래도록 들여다보기 위해 애썼던 심연은 기어코 남망기에게까지 그 속내를 열었다. 죽음을 기원하는 간절함 아래 깊이 잠든 근원을 찾아내었으니, 이제는 부수어야 할 때였다. 사지와 더불어 마음조차 짓누르는 누름돌을 깨트리면 속박에서 벗어난 희망은 자연히 하늘을 앙모仰慕해 떠오를 것이라. 어찌하여 모든 환난이 지나간 이 순간을 두고 스스로의 끝이라 매듭지었는지는 모를 노릇이나, 남망기는 적어도 위무선의 이야기에서 단 한 가지만은 명백히 틀렸노라 선언할 수 있었다.


위영. 무관의 삼자까지 끌어들이는 심연을 떨쳐낸 목소리는 두 글자의 이름에조차 전심全心을 담았다. 언젠가 위무선이 제 삶을 불태우듯 쏟아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무게로. 위영. 위영. …위영. 외면하는 게 죄악이라 느껴지는 다정에 그대로 피안의 너머로 꼬꾸라지기만을 빌던 이도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는 것은, 항상 필연이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만천을 모조리 제 등 뒤에 짊어진 이의 얼굴에서 선명하게 빛나는 금안은 아직은 무력하여도 괜찮았던 그 날의 새벽으로 시간을 되돌렸다. 누군가는 막연한 낙천으로 타인을 보듬고, 누군가는 세신 같은 영롱에 눈이 멀어 아직 움트지 못한 사랑 대신 생을 내걸어 맹세했던, 황혼 그친 자리를 채운 짙푸름의 장막 아래로. 무상한 세계는 그대로 둔 채, 단 두 명의 사람만을 끌어안고.


위영. 그 뒤에 나올 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몸이 먼저 떨렸다. 심장이 요동치고 가파르게 숨이 차올라, 누군가의 손에 잡혀있지 않았더라면 기다림을 견디지 못하고 이미 반쯤 아가리를 벌리고 마중 나온 연옥으로 몸을 내던졌을지도 몰랐다. 얇은 입술이 벌어지고 낮게 스미는 목소리가 텅 빈 몸 안에 새로운 이치를 새겨넣었다.

 


위영.

이 세상에, 사명을 띠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어.

 

모든 사람은 생을 부여받는 것만으로 이 땅 위에서 살아갈 자격이 생기는 거야.


 

위무선은 제 귓가에 선명히 들리는 파열음에 덜컥 겁을 집어먹고 황급히 눈을 돌렸으나 숨을 곳은 여전히 남망기의 품속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곳으로 기어들었다. 남망기는 제 언제 바위라도 부술 악력으로 어깨를 붙들었냐는 듯이 부드럽고 섬세한 팔로 그 몸을 당겨 안았다. 이제는 제 말이 끝나기 전까지는 감히 도망칠 수 없으리라. 여림심연如臨深淵을 파헤치는 눈 안으로 일찍이 무색천無色天을 밝혔던 성하가 아련히 흘렀다.



“그러니 살기 위해 반드시 이뤄내야만 하는 업적 같은 건 없어. 이루었기에 생의 의미를 앗아가는 천명 따위도 없어. 오로지 주어진 쓰임대로 이용당하기 위해 살아가는 건, 그건, 사는 게 아니야. 사람은 누구도 그렇게 살 수 없어. 그 누구도.”



너는 좋은 사람이고, 그것만으로도 너는 귀해. 가치 있어. 충분히 누군가에게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어. 너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도 너를……


사랑할 수 있어.



남망기는 거기까지 말한 뒤 흐린 낯으로 입을 다물었다. 잔뜩 부풀어 엉망으로 찔러 드는 양심이 자못 따가워, 곧게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고는 흡사 죄인처럼 고개를 떨군 채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팍 위를 타고 오른 가느다란 손가락이 목덜미를 지나 뜨겁게 열이 오른뺨 위에 닿았다. 남잠, 괜찮아? 꼭 그렇게 묻는 것 같은 연약한 손짓에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심장에서부터 터진 애달픈 마음은 어김없는 충동으로 달빛 아래 희게 드러난 뺨 위에 입을 맞추게 만들었다. 턱선을 타고 내려간 입술은 옅은 숨결이 새어 나오는 좁은 틈까지는 침범하지 못하고 얼어붙은 입매의 끝에서 멈추었다.


품 안에서 딱딱하게 굳는 당황이 안타까웠다.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로 이렇게 볼품없는 모습으로 고백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각하지 못한 순간부터 주었던 정情을, 깨닫지 못한 사이에도 새었던 마음戀心을, 오래 참아 더욱 선연하게 드러난 상사相思를, 세상 무엇보다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다듬어 공허에 뿌리는 한 줌의 꽃씨로나마 쥐여주고 싶었다. 되돌아오기를 바라진 않으니 그저 받아만 달라. 고하는 것은 나의 몫이고 응하는 것은 너의 몫이니 나는 나의 최선에만 충실하겠노라고. 숱한 강요와 강박으로 점철된 네 생에 이것이나마 자유로 선택할 수 있게끔. 그랬으나,


사랑하는 이에게 비상을 위한 날개를 달아주지는 못할망정 청승으로 매달리다니 이 무슨 송구함이란 말인가. 몹시 미안하고, 죄스럽고, 어린 날의 위무선만큼이나 엉망진창의 자책으로 스스로를 꾸짖어도, 이 사람이 언제고 죽음으로 스러질지 모른다 생각하니 이런 것으로라도 발목을 붙잡고 싶어서. 곁에 남아주었으면 해서. 남아달라고, 빌고 싶어서.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가… 내가 너를 사랑할 수 있게 해 줘.

그렇게 해 줘, 위영.

 

아주 오랫동안.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긴 시간을.

감히 영원永遠의 이름을 걸어 맹세할게. 내 평생을 바쳐 너를 사랑할 테니까.

 

그것으로 부디 네 살아가는 의미로 삼아주면 안 되겠느냐고.






 

제 손으로 비틀어버린 미래의 종장 앞에서 위무선은 그 일그러짐에 짓눌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위무선의 속내는 이제 얼굴을 살피지 않아도 잘 아는 남망기는 약하게 마른 몸을 제 품 안으로 마구 욱여넣으며 간절하게 그 귓가에 속삭였다. 황혼으로 태양이 저물지라도 뒤이어 맑은 달湛月이 반드시 떠오를 거라 말해준 건 너잖아, 위영. 그게… 불변하는 세상의 이치라 내게 말했었잖아.

 


지금이 네 삶의 황혼이라면,

나 기꺼이 그 어둠 비출 달이 되어줄 테니.

 

그러니 살자. 나와 함께 살자.

 

사랑받기에 지극히 합당한 사람아.

이 찬란의 미래를 누릴 자격 네게도 분명히 있으니, 내 너를 한 가닥의 빛으로 품어 지킬 수 있게.

 

허락해 줘.

위영.










59.

우리들의 삶은 참으로 어찌 이럴까. 달콤한 행복에 젖어야 할 고백의 순간마저 도저히 일말의 처절을 떨칠 수가 없으니. 사랑을 고하는 자는 죄인이 되고 사랑을 받아야 할 자는 더한 고통에 떠는 것이 무슨 세상의 이치냔 말이다.


제 생의 전부를 이 참혹을 뒤집고 엎어 지우기만을 위해 살았던 위무선은 지금 이 순간이 못내 견디기 어려웠다. 멍하게 뜨인 눈에서 넘친 눈물이 흰 옷자락 위에 둥근 물자욱 자꾸만 만드는 것 알면서도 손가락으로 문질러 닦아낼 수 없었으니.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나더러 함광군含光君이 품어 마땅한 빛이라고.


한때 사마외도 이릉노조라 불렸던 십악불사의 죄인을 두고.

 그 황공함 내게 무엇으로 감당하라고.



두렵기까지 한 지극한 황홀을 이기지 못한 위무선은, 거절을 말하는 것이 옳았다. 그게 제게 부여된 당위이고, 주어진 필연이고, 갚아 마땅한 업이었기에.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는 오로지 미래를 비틀고 싶은 이야기라.

 

천리天理는 역전되어 허상으로

본질本質은 힘을 잃고 가망으로

실재實在는 붕괴하여 거짓으로

 

단지 그것만을 위하여.


그 행함의 가운데,

설령 누군가에게 깊이 사랑받아 평온에 안주하는 일이 있단들 조금도 어색할 것 없으니.








위무선은 사슬에 묶인 듯 잘 움직이지 않는 팔을 들어 간신히 눈물을 닦았다. 제 눈물은 평생에 닦아본 적이 없어 이번에도 남의 눈물만 손끝으로 쓸어 훔쳤다.



“…원래, 이래?”



남망기는 아직도 제 속을 꽉 채운 무저갱의 먹먹함에 한마디 말도 더 하지 못했다. 마른 뺨 위를 타고 흐르는 눈물, 저도 닦아주고 싶은데 이 손 놓치면 혹여나 영영 잃을까 하여. 차마 붙잡은 몸을 놓지 못했다. 위무선은 그 심정까지 안다는 듯 입꼬리를 희미하게 당겨 웃었다.



“원래 사랑한단 말은… 이렇게 울면서 해야 하는 거야?”



나, 고백받아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

이번이 처음이라 잘 모르겠어.



남망기는 그 웃음에 무한으로 안도 되어 흠뻑 가라앉은 목소리로 겨우 답했다. 나도, 나도… 이게 처음이야. 그 서투름이 몹시 익숙한 종류의 것이라 위무선은 그만 또다시 눈물이 넘쳤다.



“…울지 마.”

“…….”

“울지 마, 위영. 내가…”



내가 잘못했어. 

전부 내 탓이야.


그에 위무선은 되묻고 싶었다. 

무엇이? 네 나를 사랑한 것이?


세상 만물에 죄지은 양 살지 않아도 된다 말해준 것 너인데. 나는 내가 한 말을 잊었고 너는 네가 한 말을 잊었으니 아마 우리는 평생 이러려나 보다. 평생, 서로가 서로에게 일깨워주며. 그렇게.


살아야 하나 보다.

 




첫 생에 이루어진 첫 입맞춤은 눈물에 젖어 쓰라렸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위무선은 언젠가 운몽의 식구들이 저를 외나무다리에서 밀어 떨어트렸던 그 순간마냥 남망기의 목을 끌어안아 매달렸다. 찰나 간 맞붙었다 다시금 떨어진 좁은 틈을 사이에 두고 위무선은 남망기에게 종막의 유언처럼 청했다. 너도 처음이고 나도 처음이라 둘 다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러면 남잠.

웃으면서 말해주면 안 될까.

 

웃으면서, 나를 사랑한다고.


그렇게 말해줄 수는 없을까.

 





운몽 강씨의 차기 종주 강만음의 그림자 속에서 그저 연명하듯 자란 위무선은 늘 제 바라는 것을 스스로 입 밖으로 꺼내어 부탁하는 일이 드물었고 간혹 가뭄에 연꽃 피듯 하고 싶은 일 말하거든 연화오 사람들은 그게 무엇이든 들어주기 위해 전심전력을 아끼지 않았으니. 비록 남망기는 운몽의 사람은 아니라지만 그 심정 모를 바보는 아니라 위무선이 이끌어 낸 결과 역시 그와 같았다.


긴 속눈썹 끝에 아롱지며 매달렸던 눈물이 끝내 마지막을 알리며 바닥으로 추락하고, 달빛 깃든 눈매를 아름답게 휘어 웃은 이는 기꺼이 그 청을 수락하여 환한 미소로 다시 한번 고했다.




사랑해. 사랑할게. 내가 널 사랑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줘.

 

너는 나로서 네 삶의 의미 삼아 살고

나는 너로서 내 생의 목적 삼아 살고

 

우리 그렇게 살자.

함께, 살자.

 

이 비틀린 미래에서

일생을 내걸어도 결코 닿지 못할 영원까지.

 

 








60.

달이 떠오르는 것이 필연이라면

그 옆에 별이 따르는 것 역시 세상의 섭리.

 

그러니, 우리 더이상 걱정하지 말도록 하자.

너 홀로 지나온 험난은 짧고 함께 나아갈 여생은 길기에, 탄식의 눈물로 적시기엔 이 밤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구태舊苔를 벗고 황홀로 피어난 감정 앞에 이제는 사랑이라 적힌 이름을 징표로 삼아 서로를 묶는다.  

너의 간절함은, 나의 기다림은, 우리의 생을 내걸었던 맹세는 끝내 헛되지 않았으니.

 

감은 눈꺼풀 위에 드리운 망중莽重의 어둠을 거두어내고 마침내 태양 아래 잊힌 달처럼 네게로 왔다.

네 그리는 미래의 끝에 붙잡을 단 하나의 평안으로.


네 일생에 유일할 사랑으로.

 



감히 바라건대

부디 평안하라.

 

나의 사람아.









- 미래를 비틀고 싶은 이야기, 完 








후기 : http://posty.pe/38tngd 


+) i Moran 님께서 멋진 팬아트를 선물해주셨습니다.

물러가는 황혼의 흔적과 다가오는 밤의 걸음이 잘 느껴지는 아름다운 그림 감사해요 ;v;)//

링크 : https://twitter.com/i___MoRan/status/1351513926974881792?s=20  


+) 나베님께서 그려주신 팬아트

링크 : https://twitter.com/NaVe_MDZS/status/1385665710425198593?s=20 


+) 사선님께서 주신 소장본 축전

링크 : https://twitter.com/sa_seon/status/1338837835479089152?s=20


+) 엠제님께서 주신 소장본 축전

링크 : https://twitter.com/MJOT_1141/status/1338720376210124800?s=20 


+) 치즈님께서 주신 소장본 축전

링크 : https://twitter.com/cheeseandsalmon/status/1338837365884813312?s=20 


잔불의 기사 / 마도조사 (프로필 사진 - 배추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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