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 스티브 / 오메가 토니

코믹스 타임라인을 대체로 따라갈 예정입니다

큼지막한 코믹스 사건들에 대한 스토리 및 설정 스포일러(주로 아이언맨 사이드)가 있을 겁니다

기본적으로 정발된 건 거의 포함된다고 보셔도 될 것 같네요 

기억의 왜곡과 전개상 필요해서 한 날조가 다분히 있습니다..








스티브는 선언대로 때때로 토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화 내용은 별 것 없었다. 오늘 무엇을 했는지 뭘 먹었는지 하는 사소하고 일상적인 이야기였다. 처음엔 긴급한 건이면 곤란하다 싶어 울리면 무조건 받았던 토니도 횟수가 잦아지자 세 번에 한 번은 바쁜 척을 하며 무시했다.

약속도 토니가 신규 사업 시작 초기라 미팅이 잦다고 몇 번 거절했더니, 지나가는 길에 들린다며 손에 쿠키 상자를 들고 회사로 찾아왔다. 스티브는 믿음직한 표정과 목소리로 금세 토니를 제외한 모두를 그의 팬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토니의 회사를 드나드는 합당한 이유가 되었고, 외부인의 이질감을 지웠다. 명색이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가 아무리 S.H.I.E.L.D. 사령관이기로서니 설마 토니 스타크의 기술을 빼내어 갈 리도 없지 않은가. 내전은 미국 전체—어쩌면 세계 전체—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 속에서 반목했던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이 다시 친분을 쌓겠다는데 의아해하거나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없었다.

따로 약속을 하고 찾아오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스티브가 찾아온 시간에 토니가 자리에 없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도 그는 그 잠깐의 시간을 회사에 남아 있는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는데 쓰고 다음에 또 찾아오겠다며 돌아갔다. 그리고 토니가 회사에 돌아오면 그 소식을—특히나 아보가스트 양이—흥분 섞인 목소리로 토니에게 알렸다. 토니는 자신이 없는 사이에 다녀간 스티브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입이 썼다.

“자네 일이 많이 바쁠 텐데 이런 곳에서 이렇게 시간을 때워도 되나?”

눈앞에 놓인 서류를 검토하면서 토니가 말했다. 스티브는 접객용 소파에 앉아 아보가스트가 내어 준 차를 마시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아무리 바빠도 자유시간이 없겠나?”

그러니까 그런 얼마 안 되는 소중한 시간을 여기서 허비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는 물음이었지만 토니는 가만히 서류만 바라보고 더 말을 얹지는 않았다. 스티브는 오늘도 손에 쿠키 상자를 하나 들고 와 토니의 회사를 찾아왔고 가만히 앉아 토니가 일을 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따스한 햇살을 즐기며 그저 가만히. 미리 알았다면 피했겠지만 스티브는 정말 뜬금없는 날과 시간에 불쑥 찾아오는 터라 의도적으로 자리를 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토니는 서류를 앞에 두고 있었지만 스티브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솔직히 아까부터 내용이 눈에 들어오고 있지 않았다. 평소라면 벌써 검토하고 다음으로 넘어갔을 시간이 배는 더 지났음에도 서류는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것을 스티브도 분명 눈치 채고 있을 거라고 토니는 생각했다.

대체 뭐가 하고 싶어서 저러는 걸까.

아니, 사실은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토니는 그날 스티브의 눈동자가 담고 있던 감정을 봤다. 스티브는 그걸 숨길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러니 그렇게 대놓고 감정을 드러냈겠지. 하지만 대체 왜 갑자기.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러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스티브는 자신의 옆자리에 둘 상대로 토니가 아닌 다른 사람을 선택했다. 적어도 자신이 기억하는 한 그들 사이는 순조로웠다. 살아 돌아오긴 했지만 스티브가 살해당하는 사건까지 있었으니 그들 사이가 더 돈독해졌으면 돈독해졌지, 파탄으로 치닫진 않았을 거라 예상되었다. 그러나 토니는 그런 것들을 구태여 언급하지 않았다. 물어보지 않았고, 조사해보지도 않았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사이가 어떻게 되었든 스티브가 어떤 감정을 새로이 가지고 토니를 대하든 토니는 그것들을 외면할 생각이었다.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은 어차피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토니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치 채지 못한 척, 무심한 태도로 일관했다. 드디어 자신의 알파에게 사랑받을 수 있게 된 걸지도 모른다는 오메가 성의 기대에 찬 본능이 방심하면 툭 튀어나왔지만 토니는 그것을 꾹 눌렀다.

스티브 로저스에게 토니 스타크는 안 된다. 절대로 그것만은 안 된다. 토니는 이성을 총동원해서 감정을 죽이려 애썼다.

토니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그때 어느 샌가 가까이 다가온 스티브가 토니의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머리가 좀 길었군.”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관자놀이를 스친 손가락 끝으로 스티브의 체온이 잠시 머물렀다 떠나갔다. 그 순간의 접촉에 가슴이 떨렸다. 토니는 그것을 진정시키려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래. 요즘 바빠서 신경을 못 썼는데 그러고 보니 슬슬 다듬을 때가 됐어. 머리카락이 눈을 찌르기 시작했거든.”

다행히 목소리가 떨리는 일은 없었다. 그 사실에 토니는 안도하고 긴장으로 굳어 있던 어깨에 힘을 뺐다. 토니는 각인 알파이자 이미 오래전에 마음을 줘 버린 상대를 앞에 두고도 평온을 가장할 수 있는 자신의 정신력에 쾌재를 부르고, 그 꼿꼿한 고집이 못마땅해 속으로 혀를 찼다.

상반되는 감정과 욕구가 토니를 끊임없이 흔들었다. 그럼에도 이기는 건 항상 본능보다는 이성이었다. 적어도 토니는 스티브 로저스를 그만큼은 사랑했다.

그러니 가치 있는 것만을, 그가 가슴에 품고 아낄만한 가치가 있는 것만을 토니는 그에게 주고 싶었다. 그의 의사를 무시하고 강제로 각인한, 이런 되다 만 오메가가 아니라. 끝내 고집을 꺾지 못하고 모든 걸 뜻대로 컨트롤하려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토니 스타크가 아니라.

“토니.”

그래야만 하는데, 왜 그는 이리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가.

토니는 감미로운 목소리에 홀려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고요하게 젖은 푸른 눈동자가 눈앞에 있었다. 숨이 멈췄다. 스티브의 얼굴이 생각보다도 더 가까웠다. 토니는 자신의 시야를 꽉 채운 그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자신의 것보다 조금 밝은 푸른색의 동공이 유리세공처럼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아름답다. 그 단 한 마디가 토니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스티브의 눈동자를 오래 바라본 적이 있었나?

계속 눈을 떼지 못하고 있자, 밝게 빛나기만 하던 눈동자가 점점 어둡게 변했다. 스티브의 얼굴에 그림자가 지고, 서로의 코끝이 닿을 것처럼 가까워진다. 곧 토니의 마른 입술 위로 스티브의 숨결이 느껴졌다.

삐——————.

그 순간을 방해하듯 공기를 찌르는 날카로운 호출음이 울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토니가 스티브의 어깨를 집고 몸을 뒤로 물렸다. 스티브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굽혔던 허리를 다시 피고 시끄럽게 울리는 호출기를 꺼내 받았다.

“그래. 무슨 일이지, 힐?”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차분하게 대응하는 스티브와 달리 토니의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으로 변했다.

방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던 거지?

그게 무엇인지 모를 리 없다. 그런 노골적인 행동의 의미를 모를 수가 없었다. 토니의 손끝이 떨리고, 그 떨림이 온몸으로 번지기 전에 토니는 주먹을 꽉 쥐었다.

스티브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지,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하지만 토니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그건 아닐 거라고 외면하고 모른 척 했다. 그러면 정말 그대로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마무리 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래, 애당초 새로운 S.H.I.E.L.D.의 사령관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런 곳에서 수다나 떨 시간이 있을 리 없었다. 매일, 매시, 매분, 사건은 온 세상에서 터져 나온다. 그 중에 S.H.I.E.L.D.가 직접 개입해야 할 사건도 결코 적지 않다. 실제로 언제든 긴급 사건에 대응할 수 있게 대다수의 요원들은 하늘 위의 헬리캐리어에서 숙식을 한다. 육지 땅을 밟는 일은 실전에 투입되는 인력을 제외하면 극히 드물었다. 그리고 스티브는 그 S.H.I.E.L.D.와 어벤져스를 같이 이끄는 총 사령관이었다. 토니는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안일하게 대응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스티브 로저스를 사랑한다면서, 그래서 자신은 안 된다고 생각한 주제에 결국 토니는 그가 아닌 자신의 감정을 더 우선한 것이다. 토니는 사실 스티브가 이렇게 찾아와 주는 게 좋았다. 그가 자신을 보고 싶어 찾아와 주는 게 좋았다. 스티브의 행동을 어이없어 하면서도 정작 토니는 그와 만나는 것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아, 너무 역겨워서 토악질이 나올 것 같다.

“미안하네, 토니. 오늘은 그만 가 봐야겠어.”

토니는 가빠오는 숨을 감추려 살짝 고개를 숙였다가, 이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꾸미는 건 특기다.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을 토니는 상대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배워왔다.

그리고 고개를 든 토니의 얼굴에는 그 뜻대로 잡지의 사진에서나 볼 법한 잘 꾸며진 미소가 새겨져 있었다.

“사령관씩이나 되는 사람이 안 바쁠 리가 없지. 그러니 스티브, 앞으로는 이렇게 무리해서 찾아오지 않아도 돼.”

미안한 듯 눈썹을 늘어뜨리고 웃던 스티브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토니는 스티브와 똑바로 눈을 마주한 채 눈을 가늘게 뜨고 입매를 더욱 말아 올렸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자연스러운 미소를 짓는 것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자네가 연락하면 언제든 난 만사 제쳐놓고 자네를 도우러 달려갈 거야. 아, 혹시 뭔가 숨기는 걸 걱정하는 거라면 그런 걱정도 할 필요 없다는 걸 미리 말해두지.”

“토니.”

“그래, 이제 슬슬 어벤져스 활동을 시작해도 좋겠어. 내 자리 혹시 아직 남아 있나? 남아 있었으면 좋겠는데.”

“….”

“없어도 괜찮아. 없어도 언제나 나는 자네 편이니까.”

토니가 한 마디씩 얹을 때마다 스티브의 미간에 주름이 한 줄씩 늘어났다. 화가 났군. 토니는 그럼에도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지우지 않았고, 스티브의 눈에서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잠깐의 침묵 후, 스티브는 끓는 소리를 짓씹은 목소리로 한 자, 한 자 힘을 담아 말했다.

“…어벤져스에는 물론 자네 자리가 있네. 언제나 자네 자리는 존재하지. 힐에게 말해두겠어, 자네가 합류하기로 했다고.”

“알았어. 출동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줘.”

“그리고 토니.”

무언가 엄포라도 놓을 것 같은 스티브의 말은, 그러나 잠시 멈췄다 다시 울린 호출음 때문에 갈 곳을 잃었다. 정말 멋진 타이밍이다. 토니는 바람 빠진 웃음을 흘리고 문을 손짓했다.

“급한가 보군. 얼른 가봐, 스티브.”

“…다음에 다시 연락하지.”

거칠게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토니가 의자에 몸을 뉘였다. 깊게 숨을 내쉬고 몸속에 고이기 시작한 열을 뱉는다. 이젠 익숙해진 열감에 토니는 서랍을 뒤져 억제제를 꺼냈다. 그대로 옷을 들추고 주사기를 꽂으려고 보니 아직 채 아물지 못한 주사자국들이 멍이 되어 남아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토니는 그것들을 잠시 바라보다, 멍이 생긴 자리에 새로운 주사자국을 남기고 빈 주사기를 던졌다.










어벤져스 활동을 재개하고, 다행스럽게도 토니가 스티브와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다. 스티브는 직접 현장을 뛰기보다는 총 사령관답게 상황을 통제하는 것에 주력했고, 직접 나서는 일이 생기더라도 토니가 속해 있는 것과는 다른 팀으로 움직였다. 토니는 두 팀으로 나눠진 어벤져스의 멤버 조합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적절한 배분이었다. 어벤져스가 나선다는 건 결국 팀으로 움직여야 하는 일이니 만큼 사적인 감정이 결속을 방해해선 안 되었다. 적어도 나뉜 팀의 구성 속에서는 어떤 부정적인 감정이 서로에게 있더라도 성향과 경험 상, 그 안에선 충분히 조화가 가능한 인선이었다.

팀의 연락책은 마리아 힐이 담당했다. 스티브가 직접적으로 접촉해 오거나 연락을 하는 일은 없었다.

그래, 이게 맞는 거지.

이전에도 스티브가 특별한 일 없이는 토니에게 연락하거나 약속을 잡거나 하진 않았다. 그야말로 그가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눈을 뜨고 세상에 적응하기 시작하고부터는 말이다. 그 전에는 아직 시대에 마음 붙이지 못한 탓인지 종종 토니에게 의지하는 경향이 없진 않았었다. 이 시대를 상징하는 게 당신인 것 같다고 말했던 그때의 스티브는 토니가 후원자로서든 동료인 아이언맨으로서든 제시한 현대문물을 애써 소화하면서도 같이 하는 것은 가능하면 토니와 하고 싶어 했다. 그가 저를 의지해주는 건 기뻤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토니는 생각했다. 토니는 스티브가 진정한 의미로 이 시대를 살아가길 바랐다. 스티브는 토니를 이 시대의 상징과 같다고 여겼으나 토니의 판단으론 그렇지 않았다. 스티브에게 있어 자신은 오히려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인물일 터였다. 군수업자였던 토니에게선 죽음이, 싸움과 전쟁의 향이 짙었을 테니까. 토니가 미래에 눈을 뜬 스티브에게 준 것 또한 과거의 그로써 존재해야 하는 현실이었다. 캡틴 아메리카. 그건 상징과 의무이지, 삶이 아니었다.

그래서 토니는 스티브에게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보라느니 얼마 전에 알게 된 친구와 같이 해보라느니 하며 그의 시선을 밖으로 돌리려고 애를 썼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그저 가만히 고여 과거에 고립된 채 썩어 문드러져 버릴 테니까.

다행히 토니의 노력은 꽃을 피웠다. 스티브는 점차 다른 많은 친구들을 새로 사귀면서 그들과의 시간을 늘려갔다. 자연스레 토니와의 접점은 줄어들었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이었겠지만, 사람은 언제 어느 때든 미래를 바라봐야 하는 존재다. 삶이란 언제나 미래를 향하게 되어있다. 과거는 그 사람의 정체성을 설명해줄 수 있겠지만 미래가 곧 삶이었다. 누군가에겐 그게 낯설기만 한 터무니없이 먼 미래라 할지라도 그 속에서 살아야 한다면 결국 받아들이고 더 앞의 미래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진정으로 스티브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자신과 그가 적절한 거리감으로 안착한 것이 그 증거였다.

자신은 그를 치유해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필 이젠 사라지고 없다 여겨지는 오메가이며 그를 각인까지 해버린 미성숙한 존재이기에 더욱. 토니 스타크는 미래 주의자이자 미래를 지향하는, 미래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평해지나 그게 스티브 로저스의 삶을 상징하진 않았다.

벌써 몇 번을 반복해도 사라지지 않는 감정을 향해 토니는 한 번 더 빗장을 걸었다. 이 세상의 누구라도 괜찮지만, 너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지만 빗장을 아무리 걸어도 그는 너무도 손쉽게 그 빗장을 흔든다.

“로저스 님이 찾아오셨었어요.”

지지부진한 미팅을 외부 미팅을 마치고 돌아온 토니에게 아보가스트는 스티브의 방문 사실을 알려주었다. 테이블에는 스티브가 종종 들고 오던 쿠키 상자가 놓여 있었다.

지금껏 아무런 연락도 없다가 왜 갑자기 또.

원망을 닮은 서운함과 한탄이 새어나왔다. 토니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건 떠올라선 안 되는 감정이었다. 스티브가 무엇을 하든 그건 그의 자유였으며, 자신은 그의 애인도 무엇도 아니었기에 한동안의 부재를 탓할 자격도 없다.

토니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책상으로 가 겉옷을 의자에 걸쳤다. 갑갑한 넥타이를 잡아 푸는 그의 시야에 나가기 전엔 보지 못했던 봉투가 하나 놓여 있는 것이 들어왔다.

“로저스 님이 두고 가신 거예요.”

토니가 무엇을 보는지 알아챈 아보가스트가 미리 답했다. 새하얀 봉투는 무언가의 초대장처럼 보였다. 토니는 봉투를 열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두꺼운 종이의 카드를 꺼냈다.

—토요일, 저녁 9시.

카드에는 시일과, 그리고 장소만 적혀 있었다. 스티브의 필체다. 토니는 마지막에 적힌 장소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넘쳐나는 돈으로 통으로 빌려서 누군가와 둘이서만 오붓하게 디너를 하는 상상을 했어.

그곳이었다. 일전에 토니가 기억의 부재를 이기지 못하고 살짝 내보인 진심이 담긴 곳. 제가 버린 기억 속에서 아마도 스티브를 불러내었으리라 짐작되는 장소.

스티브는 그곳을 약속 장소로 잡았다. 굳이 그곳을 잡은 이유를 토니는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뻐근했다. 귀가 울릴 정도로 소리가 컸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토니의 시선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바로 눈앞에 있던 스티브의 얼굴이, 닿을 것 같은 차에 결국 닿지 못하고 떨어진 호흡이, 입술과의 거리가 떠올랐다.

토니는 스티브 외엔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수없이 걸었던 빗장 따위 다 부서지고 남은 건 주체할 수 없는 떨림과 기대와 흥분이었다.

“안…, 안 되는…, 데….”

이건 옳지 않았다. 분명 옳지 않았다. 스티브 로저스에게 토니 스타크는 바른 짝이 아니었다. 스티브에게 토니는, 토니 스타크는 불행의 씨앗이었다. 하지만.

“스티브가…, 나를?”

만약 스티브 로저스가 정말 자신을 원한다고 말해온다면, 진짜 그렇게 말해준다면 그것을 거절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절대로.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유일하게 줄 수 있다 믿은 그의 행복을 토니는 두 번 다시 그에게 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 어떤 불행도 거짓도 자신은 행복이라 믿으며 추하게 그에게 매달리겠지. 그렇다 해도 스티브가 원한다고 한다면, 그렇다고 한다면, 주지 못할 것은 또 뭐란 말인가.

벗겨진 빗장은 토니가 애써 숨겨둔 이기심과 갈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토니의 이성을 흔들었다.

“흐….”

토니는 더듬더듬 입가를 매만졌다. 웃고 있다. 아아, 나는 지금 기쁜가 보다. 

그리고 후두둑, 책상 위로 물방울이 여럿 떨어졌다. 그것을 본 토니는 또한 자신이 지금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좋아하는 걸 합니다

우설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