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오빠, 그러니까 윤화평은 진에게 발목이 잡혔다. 진 생각에도 제가 발목을 잡은 건 맞았다. 맞는데... 윤화평이 제 발목을 누가 잡고 있는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지. 진이 화평의 발목을 잡았다기보다는 화평의 발목에 매달렸다, 또는 바짓가랑이 붙잡고 있다는 표현이 어쩌면 더 어울리는 모양새였다. 진이 이 얘기를 들으면 노발대발하며 아니라고 우길 게 뻔하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그때 차에서 전화번호를 받고, 곧바로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걸려온 윤화평의 휴대폰을 뺏더니 제 마음대로 이름을 빨간색 하트를 양옆에 붙인 ‘진이’로 저장하기도 했고, 휴대폰을 돌려주며 꼭 연락하라고도 말했다. 이 정도 했으면 그래도 뭐라도 있겠지 싶었다. 왜냐면 진이 그렇게 하면 보통 사람들은 다 연락을 했으니까. 그런데 지금, 며칠, 아니 몇 주는 지난 지금 윤화평은 한 번을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뭐 해? 바쁜가? 어, 바빠. 이따 연락할게. 오빠 바쁨? 오빠 아니고 삼촌. 그리고 이따 연락할게. 진은 이 대화의 반복만 며칠 째 있는 대화창을 의미 없이 왔다갔다 정독하다가 괜히 죄 없는 베개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윤화평이라고 연락을 일부러 피하는 건... 맞았다. 바쁜 것도 사실이었지만 진에게 먼저 연락 한 번을 못 할 정도로 바쁜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왜 연락을 안 했냐고 묻는다면, 진이 저보다 한참 어렸으니까. 그리고 진이 저와 어떻게 한 번 해보려는 게 눈에 훤히 보였으니까. 이 두 가지 이유였다. 그리고 사실 저 둘은 화평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이유였고, 화평 스스로 어렴풋이 인지했지만 인정하지 않은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작정하고 저를 꼬시는 진에게 제가 안 넘어가지 않을 것 같은 것을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어쨌든 저쨌든, 그렇게 똑같은 날들이 지나고, 진은 웬일로 독한 감기를 앓았다. 원래 아프지도 않는데 왜 아프고 난리인 건지, 연애사업이고, 건강이고 되는 게 없으니 아주 열이 받았다.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는데 물을 마시려 일어날 힘도 안 났다. 이마만 짚고 누워 있는데 웬 전화가 오는 거다. 눈도 못 뜬 채로 받은 전화 너머에서는 할아버지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진의 목소리가 힘 없이 갈라졌다. 기운이 뚝뚝 떨어지는 진의 목소리를 들은 할아버지는 밥 먹었냐는 질문을 하더니 금방 가겠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할 말만 하고 끊어 버린 할아버지에 대고 진은 성질을 부릴 여유도 없이 곧 잠에 들었다. 잠에 들락 말락 할 때까지 바쁘신 노인네가 도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온다는 건지 이런 생각 등을 하다가.

 

그리고서 다시 깬 건 마구 울리는 초인종 소리 때문이었다. 좀 자고 일어났는데도 계속 발광을 하는 초인종 소리에 머리가 울렸다. 울려대는 머리를 부여잡고 현관문으로 가며 퍼뜩 잠에 들기 전 받은 전화가 생각이 났고, 따라서 손녀딸이 아프다는데 초인종을 왜 저렇게 울려대는 건지 등의 짜증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아, 초인종을 무슨...!”

“야, 아프다는 애가 뭔 목소리가 이렇게 크냐? 아픈 거 맞아? 꼴 보니까 아픈 거 맞는 거 같기는 한데.”

“뭐야?”

“뭐기는 뭐야. 너희 할아버지가 너 아프다고 그러시길래 왔지. 야, 밥 안 먹었지? 밥을 먹어야 약을 먹을 거 아니야.”

 

화평의 손에 들린 (아마 죽과 약 등이 들어 있을)종이봉투가 보였다. 그것을 물끄러미 보며 진은 산발이 돼 있을 머리를 대충 손으로 쓱쓱 정리하며 어물거렸다.

 

“오늘도 바빠?”

“그런 건 왜 묻냐?”

“안 바쁘면 여기 있어.”

“얌마, 너 혼자 사는 집에 사람 막 함부로 들이고 그러면 안 되지. 너 나 잘 알지도 못,”

“아, 진짜. 나 지금 아파서 쓰러질 거 같은데 그렇게 잔소리를 해야 돼? 그냥 좀 와. 내가 오빠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내가 사는 집에 내가 아는 사람 집에 들인다는데 뭐 그렇게 잔소리를 해?”

 

진은 진저리난다는 듯 말하며 화평의 팔을 잡고 냅다 끌었다. 힘도 없이 저를 질질 끄는 진을 보던 화평은 한숨을 쉬며 장단을 맞췄다. 그래, 집에 괜히 혼자 뒀다가 쓰러지면 나도 골치 아프지. 밥 먹이고, 약 먹이면 바로 나오는 거다. 화평은 속으로 생각했다.

억지로 들어온 집 안은 아주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기보다는 그냥 딱 진 같았다. 전체적으로 둘러봤을 때에는 모난 구석 없이 깔끔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통일성 없이 여기저기 자유롭게 정리되어 있는 물건들. 화평이 크지 않은 방을 슬쩍슬쩍 둘러보고 있을 때, 진이 종이봉투를 열어봤다.

 

“이거 뭐야? 김밥?”

“아, 그건 내 거. 마침 잘 됐네. 넌 죽 먹고, 나는 김밥 먹고.”

“내가 들어오라고 안 했어도 들어올 생각이었네, 딱 보니까.”

“아니그든요. 바쁜 시간 쪼개서 같이 있어 주는 고마움을 모르고 기어오르네, 이게. 너 자꾸 그러면 나 간다?”

“안 돼. 나 밥 먹을 힘도 없어.”

 

방금까지도 종이봉투를 열심히 뜯고, 상을 열심히 정리하던 진이 갑자기 힘이 없다며 벽에 풀썩 기댄다. 화평을 그런 진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야, 뭐 먹여 달라고? 네가 애냐? 하긴 나이로 보면 애 맞지. 애 맞지, 애 맞지, 애... 애? ‘애’라는 말이 진의 귀에서 환청처럼 울렸다.

 

“애 아니거든?”

“아니기는, 너랑 나랑 나이 차이가 열 살이 나는데.”

“열 살 차이가 무슨 애야!”

 

진은 제 아픈 몸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도 모르게 바락!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서 둘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와, 방금 소리 지른 거 진짜 애 같았다.’ 그러나 둘 다 그 말을 입으로 내뱉지 않았고, 적막이 흘렀다.

제가 지른 소리에 울리는 제 머리를 부여잡고, 자리에 느릿하게 앉는 진이 한층 힘 빠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 애로 보지 마.”

“너 하는 거 봐서. 죽이나 얼른 먹어. 괜히 식은 거 먹었다가 체하지 말고.”

 

김밥을 한입 먹으며 하는 화평의 말에 진은 화평에게 눈을 한 번 흘기고 적당히 식은 죽을 작게 떠서 입안에 넣었다. 뭘 먹을 입맛은 없었지만 제가 죽을 안 먹으면 그 바쁘시다는 윤화평 님께서 당장 떠나실 게 분명했기에 꾸역꾸역 조금씩 입에 밀어 넣었다.

화평은 김밥을 금세 다 먹었고, 진은 통 안에 가득 담긴 죽을 4분의 1 정도 먹었다. 조금 먹었는데도 아까보다는 기운이 좀 생겼다. 정신도 말짱해졌고.

 

“그만 먹을래, 이제.”

“그럴래? 그거 어디에 막 놔서 상하게 하지 말고 냉장고에 잘 넣어서 이따 저녁에도 먹어.”

“귀찮은데.”

“귀찮다고 안 챙기지 말고, 인마. 그리고 그 봉투 보면 약 있을 거거든? 그것도 챙겨 먹어.”

 

상 위로 허리를 숙여 엎드린 진이 먹은 것들을 치우는 화평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봤다. 그냥 보내기 좀 그런데. 아깝단 말이야. 또 바쁘다고 못 볼 텐데.... 진은 이런저런 미련 가득 묻은 생각을 하며 웅얼거렸다.

 

“오빠 오늘 바빠?”

“안 바빠. 오늘 일 뺐어.”

“뭐야, 그래도 돼?”

“안 된다고 하면, 그냥 순순히 보내 주려고?”

 

그런 말을 하며 뒤를 돌아보는 화평의 눈과 진의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마주친 눈에 진은 별 대답도 안 하고 그냥 애매한 웃음을 짓기만 했다. 진의 웃음에 화평은 저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

“보내 줄 거 아니잖아.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오늘 아니면 네가 나를 언제 부려 먹겠냐.”

“이따 나 저녁 먹을 때까지 있다가 가.”

“저녁 먹으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나 그동안 뭐 하라고.”

 

진은 그것까지는 생각을 안 해 봤는지 잠시 생각하고는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그냥... 좀 자지, 뭐. 오빠 매일 일하느라 바쁜 거 아니야? 오늘 일도 뺀 겸, 그냥 푹 쉬다가 가.”

 

진이 한 마디 한 마디, 말을 또박또박 내뱉자 화평이 황당한 듯 반사적으로 어?? 하며 되물었다. 그러더니 심각한 얼굴로 다가와서 진의 이마에 손을 대고는 너 많이 아프냐느니, 어쩌느니하는 소리를 하는 거다. 이 오빠가, 진짜. 진은 평소대로 성질을 부리며 화평의 손을 뿌리치고 제가 아까 누워 있었던 침대로 쪼르르 가 누웠다. 침대라고 하기엔 제대로 프레임이 갖춰지지 않아 그냥 매트리스를 그만한 판에 올려놓은 정도였다.

그러더니 그대로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는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좀 쉬라고 생각해 줘도 난리야....”

 

조용히 들리는 말소리에 화평은 그냥 모르는 척 한숨을 쉬며 허공을 몇 초 응시하더니 천천히 침대 옆으로 갔다. 그리고는 침대 바로 옆 바닥으로 털썩 앉고는 그대로 바닥에 천천히 누웠다.

눈부시다는 핑계로 쳐둔 침대 바로 옆의 커튼 덕에 밖의 햇볕이 비추지 않았고, 실내는 적당히 어둡고, 적당히 아늑했다. 아직 밤이 아닌데도 낮같지 않았다. 시간이 한참 지나도 둘 중 누군가 자는 듯한 새근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진도 못 잤고, 화평도 못 잤다.

냅다 바닥에 누워 버리는 화평에게 위로 올라오라고 하려다가 그러기에는 침대가 너무 작다는 사실을 깨달은 진은 그대로 입을 다물고, 저녁 이후의 시간에는 화평을 어떻게 잡아둘지, 오늘이 지나면 또 어떻게 만날지 등을 생각했다. 제가 화평에게 왜 이렇게까지 매달리는지 따위의 생각이 문득 문득 끼어들었지만 진은 억지로 그것들을 무시했다.

화평은 딱딱하고 찬 바닥에 빗겨 누워 있었다. 딱딱하고 찬 바닥이었지만 그것은 화평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기에 이왕 이렇게 된 거, 푹 자려는 찰나, 화평의 코에 무슨 향이 스쳤다. 향수나 디퓨저 같은 건 아닌 것 같았고, 샴푸나 바디워시 향 같은 것. 그런 향을 맡아서 그런 건지 뭔지 괜히 잠이 안 왔다. 결국 화평은 몇 시간 동안 뒤척이기만 했다. 낮은 매트리스 너머로 살짝 보이는 진의 모습도, 화평의 불면에 영향을 줬다.

 

어느새 잠에 든 진은, 곧 화평의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일어나니 바로 앞에 따뜻하게 데워진 죽이 있었고, 옆에는 약과 물이 있었다. 화평은 저 부엌에서 정리를 대충 하고 있었고.

진은 멍한 정신으로 죽을 깨작깨작 입에 넣으며 몽롱한 정신에 말을 내뱉었다.

 

“오빠 나한테 연락 좀 자주 해.”

“바쁘다니까.”

“연락 한 번 하는 게 그렇게 힘들어? 나는 바빠도 오빠 기다리는 건 매일 해.”

“나를 왜 기다려, 네가?”

“왜겠어?”

“야....”

 

화평이 말에 사이를 두는 동안의 적막함은 숨이 막힐 정도였다. 죽이 뭉근하게 묻은 숟가락을 들고 화평을 물끄러미 보는 진, 그런 진을 물끄러미 보는 윤화평. 사이가 가깝지 않은 데다가 실내가 밝지 않아서 화평의 얼굴이 붉었는지 어쨌는지는 볼 수가 없었다. 한숨이 섞인 너와 내가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는 알고 하는 소리냐는 식상하고 뻔한, 그리고 목을 콱 막는 듯한 답이 왔을 뿐이다.

진은 입에 적당히 식은 죽을 넣으며 열 살이 뭐 대순가, 하는 생각을 했다. 목이 먹먹한 기분은 죽과 함께 삼켰다.

 

저녁 시간이 지나고서 화평의 발을 더 묶어두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몽롱한 정신으로 머리를 빠르게 데구르르 굴릴 여유는 없었다. 그냥 밖으로 나가는 화평의 뒷모습을 보며 다음에 또 왔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진은 그날 이후로도 연락을 꾸준히 했다. 딱히 안 할 이유가 없었고, 윤화평에게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이제는 답장이 왔으니까. 그리고 몇 번은 그쪽에서 먼저 연락을 주기도 했다. 오늘 날씨 어떻다, 몸조심해라 기타 등등 같은 것들이었지만.

온전히 진의 생각일 뿐이지만, 저번에 그 애매한 고백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도 아닌 말까지 하고 갑자기 이러는 건 화평도 저도 모르게 열 살 그게 뭐 대순가,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겠지. 진은 그런 생각을 하면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 오빠랑 징그럽게 엉겨 붙어서 누구 하나 어떻게 될 때까지 연애든 뭐든 하는 거. 그 엄청난 프로젝트의 출발을 한 것 같아서.

장르 부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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