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익명의 독자님이 보내주신 귀여운 두 컷과 함께합니다. 재밌게 읽어주시고, 기꺼이 피드백도 주시고, 또 이렇게 선물도 주시고... 제가 늘 감사하고 있어요.... *-_-*....






제주라고 일 년 내내 귤이 나오는 건 절대로 아니지만, 그래도 창고에 잘 보관했던 귤을 구하려면 못 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엄마가 정한이 형네도 한 박스 보내주래.”

“어! 나도 커피 보내고 싶었는데.”

“비행기로 보내면 하루면 가니까…. 같이 보낼래?”

 

사실 귤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간장게장이라던가 방어 같은, 정한이 좋아하던 음식을 종종 서울로 보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

 

날이 무척이나 더운 밤이었다. 승철의 생일에 발매한 디지털 싱글 반응이 좋아서 며칠을 내리 정신없이 바쁘다가 드디어 사흘 휴가를 받았다. 활동을 안 해도 난리야. 생일 하루를 빼고는 내내 집에 와서 잠만 자는 통에 겨우겨우 얼굴을 보고 나서야 승철이 말했다.

 

“좋으면서.”

“좋긴 한데…. 같이 사는데 어? 1주일 만에 얼굴을 보는 게 이게 말이 돼?”

“흐흐. 자는 건 실컷 봤는데.”

“진짜 잠만 잤다, 잠만.”

 

승철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대뜸 정한을 끌어안고 괜히 툴툴 거렸다. 주렁주렁 들고 들어온 선물들은 그대로 현관 앞에 내팽개친 뒤였다.

 

“오늘 고마워.”

“웰컴.”

 

승철의 휴가 전 마지막 스케줄은 라디오였다. 하필이면 저녁 시간과 맞물리는 때라, 정한이 카페에서 샌드위치며 음료를 만들어 보냈다. 멤버들이나 디제이는 물론 스텝들의 몫까지 잔뜩 사 보낸 덕분에 다들 즐겁게 나누어 먹은 것이었다.

 

-오늘 저희가 엄청 든든하게 식사를 하고 방송 중이에요. 에스쿱스씨 남편분이-. 남편분이라고 하는 게 맞죠? 뭐라고 소개를 드려야 하나. 모델이라고 하면 되나요?

-하하하. 뭐. 아트웍만 하긴 하지만…. 뭐 굳이 모델이라면. 근데 실제로는 카페에서 바리스타 해요.

-아? 바리스타가 원래 직업이에요? 어 근데 화보가 엄청 핫 하시던데…?

-그쵸. 쿱스보다 더 핫 하죠, 요새 정한이가.

-그러니까요. 저번에 방송 같이 나오신 것도 봤어요. 여하튼 지금 그 에스쿱스씨 남편분이 저희 막 샌드위치랑 커피랑 잔뜩 보내주셔 가지고요. 막 열심히 먹으면서, 방송 하고 있습니다. 듣고 계실까요? 감사합니다-.

 

방송은 정한도 들었다. 승철의 설명에 디제이가 어쩐지 샌드위치가 파는 것 같았다고 말하자, 아 근데 정한이가 직접, 만들기는 해요. 라고 굳이 설명하는 승철의 목소리가 유달리 부드러웠다.

 

-저나 정한이나 요리 잘 못 하는데, 그래도 정한이는 카페 일 오래 해서 이런 건 잘 만들거든요.

-맞아요. 막 케이크도 굽고 쿠키도 굽고. 가끔 작업실에 들고 와서 먹고 그래요.

-어, 그 정도면 거의 프로 아니에요? 맛있어요?

-하하. 맛있어야죠. 카페에서 팔기도 하는 건데요.

-어우…. 근데 잠깐만요. 지금 이게 보라가 아니라서 이걸 어떻게 설명을 못 하겠네-. 지금 에스쿱스씨 얼굴이-!!

-아하하하.

-저 형들 가까이서 보면 되게 짜증 나요, 진짜.

-아까도 보셨잖아요. 쿱스 거만 아이스초코 보낸 거.

-야 너희는 커피를 더 좋아하잖아.

 

소란스러운 인트로에 정한도 피식피식 웃으면서 들었었다.

 

“디제이 누나가 너 엄청 세심하대. 그, 우유 따로 보내줘서.”

“아. 하하. 카페에서도 그냥 제공하는 거니까….”

“그래도.”

“푸흐. 잘 먹었음 됐지. 얼른 씻고 나와. 덥지.”

“응. 엄청 덥다.”

“씻고 와. 거실에도 에어컨 틀게.”

 

그리고 씻고 나오자마자 커다란 상자를 뜯고 있는 정한을 마주 한 것이었다.





“제주도?”

“응. 귤이랑 커피랑 왔다. 엄마 아니고 애들이 보냈네.”

“우와. 맛있겠다.”

“좀 먹고 잘래?”

“그럴까? 아 맞다. 나 오늘 와인 받았는데? 한 잔?”

 

그래서 그 밤에는 귤과 올리브, 포도로 와인 상을 차렸다.

 


* * *


다음에 태어나면,


* * *

 


꾸마는 착하다. 까불고 장난치고 막 뛰어다니다가도, 불 끄고 모여 앉으면 얌전하게 제 자리로 가서 앉았다.

 

“꾸마. 이리 와.”

 

정한은 벌써 제 자리에 얌전히 엎드린 꾸마를 불렀다. 부르면 또 좋다고 냉큼 일어나 후다닥 달려온다. 좋아? 응? 푸흐흐. 좋아? 좋아? 무르팍에 달려든 강아지를 붙들고 한참이나 귀여워하는 동안, 승철은 겨우겨우 와인 오프너를 찾아왔다.

 

“이게 왜 찬장에 들어가 있지?”

“아하하. 찬장에 있었어?”

“응. 그, 통조림 넣는 데에.”

“왜 거기 있지?”

 

자리에 앉자마자 냉큼 씰을 뜯고, 코르크에 스크루를 박아 넣은 승철이 후딱후딱 뚜껑을 열었다.

 

“칠링 안 됐는데 맛있을까?”

“칠링 하면서 먹는 거지.”

 

승철은 어쩐지 좀 신난 것 같았다. 정한이 푸흐흐 웃으며 꼴꼴 와인을 따라주는 잔을 살짝 잡았다. 승철이 제 몫까지 와인을 따르고 얼음이 담긴 통에 와인병을 세웠다. 끝? 응.

 

“짠.”

“짠.”

 

붉은 와인이 담긴 잔 두 개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맞닿았다.

 

*

 

함께 한 세월이 십년도 훌쩍 넘었다. 더구나 죽고 못 살 정도로 엉기며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쯤 되면 좋은 일 나쁜 일을 따지기가 모호한 것이다. 옛날얘기라기엔 너무나 현재 진행형인 얘기들. 승철만 기억하는 일도 있고, 정한만 아는 얘기도 있고 그랬다.

 

“진짜? 내가 그랬다고?”

“응.”

“때려도 돼. 맞아줄게.”

 

진지하게 대꾸해서 정한을 웃기기도 했고,

 

“…그런 일이 있었다고?”

“응. 그래서 우지가 진짜 쌍욕 했어, 나한테. 자기가 너면 나랑 당장 헤어질 거라고 막 그러면서. …미안.”

“…난 기억 안 나는데?”

“왜 너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

 

정한은 도저히 생각이 안 나는 얘길 끄집어내기도 했다.

 

“몰라. 나는 그때 그런 거 말고. 그때 너 **에서 공연했잖아. 너 그때 빨간 모자 쓰고 노란 나시 입고 초록색 반바지 입어서, 신호등 같았던 거만 기억나. 크크큭.”

“아씨, 야. 근데 그거 진짜 아무도 안 말렸다? 왜 나 안 말렸어, 그때?”

“넌 말려도 말 안 듣잖아.”

“하씨. 존나 나 성격….”

“크크큭….”

 

홀짝홀짝 와인을 마시며 둘 사이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마침내는 물을 떠 온다고 일어났던 승철이 아예 정한의 옆으로 와서 앉았다. 작게 틀어놓은 음악을 흥얼거리는 정한의 목소리를 들으며 승철은 새삼스럽게 정한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뭐가.”

“왜 그렇게 봐?”

“푸흐. 보지도 못하냐?”

 

그 순간이 신기해서 그랬다. 너무너무 사랑하는데, 가끔은 사랑한다는 말이 좀 부족해서. 기껍고 고마운데, 그걸 일일이 말하자니 또 민망해서. 침대에서야 도저히 참아지지 않으니까 예쁘다 소리를 달고 살지만, 사실 승철은 말짱할 때에 그런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가끔 정한이 멍하니 그를 보다가, 진짜 잘생겼다 너.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못 견딜 지경인걸. 그래서 정한이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을 때나 꽉 껴안고 사랑해, 작게 속삭여 보는 게 전부였다. 진짜 너무너무 예쁘다 정한아. 어떻게 이렇게 좋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려놓고, 혼자 귀 끝까지 시뻘게져서 끙끙 거리는 것이다.

 

“…엄마가, 모레 밥 먹으러 오래.”

“아, 맞아.”

“뭐야. 엄마가 너한테도 카톡 했어?”

“아니, 전화. 나 그날 카페 오프닝이라 그 날 오라고 하신 걸걸?”

“와. 뭐야. 우리 엄마 나한테는 카톡으로 통보했는데.”

 

곱실대는 머리카락을 살살 만지다가 말하자 정한이 배시시 웃었다. 너는 전화 잘 안 받으니까 그렇지. 아니 엄마가 나 일 할 때 전화하니까 그렇지. 그럼 네가 나중에라도 해야 할 거 아냐.

 

“하씨, 쫑알쫑알 진짜.”

 

승철이 잔소리를 하는 정한의 자그만 뒤통수를 꽉 붙들었다. 훅 끌어당기는데 저항 없이 끌려온다. 말은 투덜거리는 말이었지만, 쪽, 입술을 붙이는 움직임은 상냥했다.

 

“넌 진짜 성질 좀 죽여야 돼.”

“나도 참는 거야. 솔직히 나 좀 착해지지 않았냐?”

“뭐. 나이 드는 거지.”

“너무하네.”

 

쪽쪽 입술을 빨다가 소곤소곤.

 

“아직까지도 나한테는 화내잖아. 다른 사람들한텐 안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은 내 알 바 아니잖아.”

 

그런데 이 말에 정한은 순간 입을 꼭 다물었다. 포도주의 향긋한 냄새와 귤의 달달한 맛이 섞여 입에 침이 고이는 입맞춤을 잘게 하던 승철이 응? 하고 슬쩍 정한의 눈치를 살폈다.

 

“푸흐…. 뭐야.”

 

정한의 얼굴이 또 붉었다. 부끄럼을 타거나 좋을 때 나오는 반응이었다. 승철이 피시식 웃었다.

 

“나는 진짜 널 모르겠다. 어디가 또 그렇게 좋아?”

 

황당하기도 귀엽기도 애틋하기도 해서 물었는데,

 

“…그냥. 다.”

 

정한이 답했다.

 

“다 좋아.”

 

라고. 승철은 결국 다시 한번 정한의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승철이야말로 정한의 이 무조건적인 애정의 힘을 알았다. 언제든 어디서든 무조건 저를 좋아해 주고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누구보다 잘 느끼고 있었으니까. 기실 그가 항상 제멋대로 할 수 있는 바탕이 바로 정한의 이 애정 덕분이 아니던가. 가지만 않으면, 뭐든 제게 다 해도 된다는 말. 그 말이야말로 정한의 진심이었으니까.

 

“내가 진짜 많이많이 사랑해.”

 

살짝 취했는지, 쪽, 다시 입술을 부딪치고는 또 사르르 웃으며 하는 말에 승철은 좀 울컥했다.

 

“피곤해?”

“푸흐…. 왜?”

 

승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주섬주섬 테이블을 좀 밀어버리고, 정한의 허리를 끌어 소파 위로 올라가 앉았다. 그리고 정한을 제 허벅지 위로 앉혀 마주 보고 고개를 들었다.

 

“키스해 줘.”

 

눈을 살짝 감으면서 정한이 고개를 숙였다. 작은 손이 승철의 뺨을 살짝 감싸고 있었다.

 

*

 

정한이 하는 말 중에서 승철이 가장 싫어하는 말은, 너 없으면 죽을 것 같다는 말이었다. 진짜로 죽겠다는 말 같아서 무섭기까지 했다. 그런데 승철이 그런 말 하지 마. 하면, 정한은 흐흥, 하고 웃었다.

 

“상관없어 할 거면서.”

“아 뭐가!”

“너 나한테 성질부리다가 나가면, 내 생각 어차피 안 하잖아.”

“아냐. 해. 하씨. 머릿속에서 나가지를 않는다, 진짜.”

 

언제적 얘길 하는 거야. 괜히 민망한 마음에 뽀얀 살갗을 왕왕 물었다. 그러자 아아, 아파아. 하고 앓는 소리가 웃음소리와 섞였다. 한참 위에서 내려다보다가, 이제야 겨우 자리에 누운 정한이 밀어내는 손을 붙들고 그 팔까지 한꺼번에 꽉 껴안았다.

 

“…그렇게 죽어서 다음에 안 태어날 거야.”

“왜?”

“다음에 태어나면 너 만나지 말라며. 그럼 그냥 안 태어날래.”

“하씨, 진짜. 안 돼. 태어나. 처음부터 잘해 줄게. 진짜야. 나랑 또 살자. 응?”

 

그 웃음 섞인 진담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승철은 또 다시 정한의 뺨을 앙앙 물어댔다.

 

“다음에도 또 같이 태어나자. 그리고 담에 태어나면, 네가 나한테 못되게 굴어.”

“푸흐흐. 왜. 지금은 안 되고?”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지금 계속 말하는데도 너는 못되게 안 굴잖아. 그리고 내일부터 못되게 굴어도 내가 더 오래 못되게 굴었으니까….”

 

웅얼웅얼, 작게 수그러들던 목소리로 대꾸하던 승철이 다시 한번 꽉 정한을 껴안았다.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지금부터, 다음에도, 또 다음에도. 나는 착하게 굴게.”

“푸흐….”

 

찡얼거리는 꼬마애처럼 저를 껴안고 웅얼대는 소리를 듣던 정한이 꼼질꼼질 팔을 빼 승철을 껴안았다.

 

“다음에 태어나면, 그냥 사랑하자.”

“…….”

“첨부터 끝까지, 헤어지지 말고.”

“…응.”

“너만 잘 하면 돼.”

“맞아….”

“푸흐흐.”

 

이번에는 어쩐지 눈까지 뜨거워지는 것 같아서, 승철은 고개를 슬쩍 돌리며 다시 정한을 꽉 안았다. 으윽. 숨 막히는 소리를 내는데도 팔을 풀지 않았다.

 

“승철아…. 더워….”

“참아.”

“…인제 착하게 군다며.”

“이씨, 진짜.”

“크크큭.”

 

삐빅 소리를 내며 에어컨이 꺼지는 소리가 났다. 예약시간 종료. 아침은 아직 멀었다.

 

 

 

 





+ just do what I want to do. Then it would be akin to what I expected.

윤른 위주 셉페스 올라운더, 한 마리의 새우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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