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 대한 백 가지 이야기 



Marlin 作




병실은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다. 사복으로 갈아입은 아현은 침대에 걸터 앉아 지석이 짐을 챙기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후드티에 캡을 뒤집어 쓰고 앉아 다리를 대롱대롱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은 어린 아이 같았다. 


“지민 언니!”

“역시 퇴원하니 얼굴이 밝네.”



마지막으로 수건을 가방에 집어넣고 지퍼를 닫고 있던 지석이 지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병실 문간에 삐딱하게 기대어 서있던 지민은 그의 눈길에 가까이 걸어왔다.



“늦지 않고 왔네.”

“응. 밑에 와있데.”

“남자친구를 너무 막 부려 먹는 거 아냐?” 

“어차피 출퇴근 없는 프리한 사람인데.” 

“그래도…….”



아직 얼굴 두어 번 본 것뿐인 지민의 남자친구, 영제의 차를 빌려 퇴원 하는 것이 미안하면서도 조금은 고마웠다. 조금은 껄끄럽기도 했는데, 실은 결혼을 재촉하는 영제의 말에도 완강히 결혼 거부를 외치고 있는 지민의 덕택에 그런 감이 있었다.



택시를 타고 가도 된다는 지석의 말에도 불구하고 지민은 자가용이 더 편하다며 굳이 제 남자친구를 병원으로 불렀다.



“가자 현아.”



지석이 가방을 들자 아현은 침대에서 폴짝 내려왔다. 



“저는 퇴원해볼게요. 몸조리 잘하세요.”

“안녕히 계세요.”



침대에서 내려온 아현이 90도로 허리를 구부렸다. 어깨에, 손에 가방이 잔뜩 들린 지석은 그저 가볍게 목례를 대신했다. 침대의 주인은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던 여자가 빙그레 웃었다.



“새댁, 퇴원해있는 동안 몸 조심해요. 새댁이 공고요법으로 다시 올 때 우리 아버지는 퇴원할 수 있으려나.”

“할아버지도 꼭 괜찮아 지실 거예요!”



아현의 명량함에 여자가 다시 웃었다. 눈이 가볍게 휘어지면서 눈 뒤로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깊어졌을 그 여자의 눈주름은 세월과 어우러지며 보고 있는 상대에게 평온함을 주었다.



여자의 손 인사를 뒤로 하며 세 사람은 밖으로 걸어 나왔다. 지민이 잔뜩 가방을 들고 있는 지석의 손에서 비교적 작은 크기의 가방을 하나 빼앗아 들었다.



“고마워, 누나.”

“별말씀을. 현아, 이리로 와.”



지민의 말에 아현이 달려가 팔짱을 끼었다. 그 행동에 지민이 푸스스 웃었다. 무뚝뚝하게 구는 남동생과 달리 애교 있는 행동이 귀여워 절로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우아현, 마스크!”



사복으로 갈아입는 동안 벗어둔 마스크였건만 병동을 나오자마자 지석의 잔소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아현은 귀찮은 듯 입을 삐쭉거리면서도 그의 말을 들었다.



1층 로비 밖으로 나오자 누구보다 먼저 아현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매일 같이 병원 안에 갇혀있다 오랜만의 외출이었기 때문이다. 관해 성공 후, 다시 공고 요법을 들어가기 전 잠깐 동안의 휴가였지만, 그만으로도 아현 은 모든 것이 끝난 것 마냥 기뻤던 모양이었다.



“야! 다쳐!”



마치 어린아이를 물가에 내놓은 엄마의 마음처럼 지석이 그 뒤를 쫓아 달렸다. 병원 문을 나서기도 전에 아현은 그에게 목덜미를 잡혀 멈추어 섰다. 지석은 뒷덜미를 잡히고도 빨리 나가고 싶다며 버둥거리는 그녀의 목을 감았다.



지석의 팔과 허리 사이에 끼어, 질질 끌려가는 아현의 모습은 더 이상 아픈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멀찌감치 사라지자 지민도 빨리 걸음을 옮겨 그 뒤를 따랐다. 지민이 원형의 문을 빠져나오자마자 이미 자신의 남자친구인 영제와 만나 이야기 중인 둘이 보였다.



영제는 지석에 비해 조금 작은 체구였지만, 지석과 똑같이 머리를 노랗 게 물들이고 있는 것이 형제처럼 보이기도 했다. 비록 영제의 쪽은 어깨 까지 머리를 길게 늘어트리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긴 했지만 말이다.

 


“일찍 왔네?”

“늦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너 잔소리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에이, 내가 뭘 그리 그런다고. 영제씨, 고마워. 애들 좀 부탁할게.” 

“이 정도는 어렵지도 않지.”



지민의 손가락으로 인해 그의 노란색 긴 머리가 귀 뒤로 넘겨졌다. 



“속도 내지 말고 조심히 데려다 줘.”

“어.”

“지석아. 도착하면 연락하고. 현아 집에 한번 놀러갈게.”



지민이 아현의 볼을 잡고 흔들었다. 얼굴이 아직 퍼석했지만 항암제의 부작용으로 얼굴이 아직 탱탱하게 부어있어서 밀가루 반죽마냥 몽글몽글 했다.



아현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가자. 지민, 이따 연락할게.”



영제가 자동차 보닛을 돌아 운전석으로 들어갔다. 



“언니, 갈게요. 나중에 꼭 놀러 와요.”

“컨디션 조절 잘 하고. 백지석, 우리 현이 잘 챙겨라.” 



지민이 그의 팔뚝을 소리 나도록 쳤다.




“우리 현이는 내가 더 알아서 잘 챙기거든요?”




지석이 혀를 날름거렸고, 그 행동에 지민이 손을 뻗어 그의 혓바닥을 잡 아 끌어당기려는 시늉을 했다. 그는 그 팔을 피해 아현을 차 안으로 들여 보내고 자신도 들어가 냉큼 문을 닫았다. 허공을 헤치는 팔 사이로 문이 지나갔다.



지민이 분한 듯 창을 노려보자, 스르륵 소리와 함께 창이 내려가 지석의 얼굴이 나타났다.



“먼저 갈게. 들어가서 일봐.” 

“그래, 영제씨 부탁해.”



앞좌석에 있는 영제가 반쯤 몸을 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들어가 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지석의 뒤쪽에 몸을 붙이고 있는 아현도 손 을 흔들었다.



차가 출발 했다. 지민은 병원의 내리막길로 차가 보이지 않을 때 까지 계속 꽁무니를 바라보며 서있었다.

 


오랜만의 외출이라 아현은 창문을 반쯤 내리고 문 옆에 붙어있었다. 지 석은 찬바람에 감기라도 들까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다간 가방에서 담요를 꺼내 어깨에 둘러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오늘 따라 다이아몬드 같이 빛나는 하늘 덕택에 아현의 눈 또한 반짝거 렸다. 그녀의 정신이 온통 창밖 세상에 빠져있자, 백미러를 통해 지석을 힐끔거리며 보던 영제가 입을 열었다.



“대단하다 너도. 병원생활 쉽지는 않을 텐데. 둘이 안지 얼마나 되었어?”

“뭐, 제가 별거 한다고요. 현아, 우리 5학년 때부터 알았나?”



그의 물음에 아현이 고개를 돌렸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 탓에 뒤집 어쓰고 있던 후드가 가볍게 펄럭였다.



“응.”

“근데 아현이가 계속 튕기는 바람에 고등학교 졸업할 때는 되어서 친해 졌어요.”



그 말 한 마디에 차 안이 뒤집어졌다.



영제는 핸들도 잡아야 하고 웃기도 하느라 눈물을 쏙 빼어냈고, 아현은 양 손을 저으며 그의 말을 부정하느라 바빴다. 오히려 이 사단을 일으킨 본인만이 태평했다.



“솔직히 고등학교는 오버야!” 

“그럼 언젠데?”

“중학교 즈음부터?”

“퍽도.”



지석이 코를 찡긋하며 팔을 창가에 올렸다. 반대쪽 창으로부터 들어온 바람이 지석의 머리를 천천히 간질였고, 노랗게 물들인 머리칼은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정수리 부분에 꽤나 자라나온 까만 머리가 바람이 불 때 마다 산들산들 흔들렸다.



아현은 문득 그 자라나온 까만 머리를 보며 마음 한편이 시큰해졌다. 음악 생활을 시작하면서 노랗게, 검붉게, 때로는 검푸르게, 늘 그의 머리색은 변해 갔지만, 그 어느 때도 까만 머리가 길어져서 나오는 것을 관리 하지 않고 내버려둔 적은 없었던 것이다.



예전처럼 머리칼에 신경 쓰지 못할 만큼 그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 한구석이 알싸해졌다.



아현이 무의식적으로 지석의 머리칼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흘러내리며 손끝이 간질간질해졌다. 



“응?”



창밖으로 향해있던 지석의 시선이 돌아왔다. 아현은 울상인지 미소인지 모를 그런 어색한 표정으로 그을 바라보았다. 모자의 챙 때문에 콧잔등 위까지 잔뜩 그늘이 져서인지 지석은 그저 그녀를 보며 미소만 지었다. 마치 사춘기 소년, 소녀의 풋풋한 향기를 풍기고 있는 그들을 보며 영제 는 말없이 운전을 계속했다.



차가 한남 대교를 지나면서 아현은 지석의 어깨에 머리를 박고 잠들었다. 그 바람에 세 사람은 말없이 달릴 뿐이었다.



영제는 잠든 아현이 깨지 않게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가 멈추어 서자 지석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어 깨웠다. 아현은 아직도 비몽사 몽인지 큰 눈을 껌벅였다.



“형, 감사해요. 덕분에 편히 왔어요. 조심히 들어 가시구요. 나중에 누나랑 밥 한번 같이 먹어요.”

“그래. 아현씨 다음에 또 봬요.” 

“네. 오늘 감사했어요.”



지석도 아현 쪽의 문을 통해 내려왔다. 창 하나로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는 금세 영제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차가 멀어지자 지석은 다시 가방 을 들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했다.



“잠깐, 나 다녀올 데 있어!”

“어딜 가게!”



아현이 팔을 퍼덕이며 눈웃음을 치었다. 마스크로 가려서 그 미소는 보이지 않았지만, 눈이 곱게 휘어지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안 돼. 벌써 혼자 어딜 나돌아 다니려고. 필요한 건 나 시켜.” 

“으으음……. 진짜 이 앞인데.”

“뭔데? 오늘은 좀 얌전히 붙어있자.” 

“……약.”

“뭐?”



아현은 영 내키지 않은지 발을 베베 꼬았다.

 


“염색약……. 너 머리 자랐어.”



뚱하니 아현을 보던 지석이 한순간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벌써 염색할 때가 되었나? 해주게?”



아현은 홀로 부끄러워졌는지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지석의 큰 웃음 에 괜히 피가 얼굴 앞으로 쏠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가방 놓고 갔다 올 테니까. 일단 올라가자. 내가 방도 깨끗하게 치워놨어. 자, 얼른.”



잔뜩 가방을 매고 있는 지석의 팔이 아현을 향해 뻗어졌다. 망설이던 것 도 잠시, 아현은 어린아이 마냥 쪼르르 달려가 그의 팔이 떨어질 것 마냥 몸을 매달았다.



그나마 어제 지석이 집에 돌아와 사람의 온기를 심어 놓아서인지, 오랫 동안 비어있던 집임에도 불구하고 찬바람이 불지 않았다. 집에 들어오자 마자 아현이 마스크를 벗어 놓았다. 지석이 말없이 짐을 내려놓고 있는 사이 그녀는 집안을 한 바퀴 빙 돌았다. 그간 너무도 긴 여행을 떠나갔었다.



냉장고, 싱크대, 침대, 화장대……. 남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하나하나들이 그녀에겐 너무도 그리웠다.



“우아현, 좋아 죽네?”



아현은 미소를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염색약 사올 테니까 쉬고 있어. 아, 근데 그냥 안 해도 되는 데.”

“해주고 싶어서 그래!”



떠밀림에 의해 지석이 밖으로 나가고, 아현은 자신의 침대에 앉았다. 오랜만에 맡는 그 익숙한 냄새에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동안 이불자락에서 풍기는 이 섬유 유연제 냄새가 정겨웠다.



그대로 자리에 누우니 복슬복슬한 이불이 볼에 느껴졌다. 제 얼굴보다도 보드라운 느낌에 스르륵 눈을 감았다.



얼핏 잠이 들려는데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지석이 검은 봉지 하나를 들고 쭈뼛거리며 들어온다.



“자고 있었어?”

“아냐, 그냥 집에 돌아오니까 너무 편해서…….”

 


침대 이불의 한 쪽을 손으로 쓸어내리자, 극세사 털이 한 방향으로 진한 손자국을 내면서 쓸렸다.



아현이 침대에서 걸어 나와 그의 팔을 이끌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의 까만 머리 뿌리를 보며 그녀는 왠지 모를 모성애가 솟아올랐다.



염색약이 몸에 안 좋다며 한사코 아현을 변기에 앉혀 구경만 시키는 지석의 고집에 그녀의 입이 한 사발 나왔지만, ‘거기 비닐 좀’ 과 같은 간단한 심부름에도 금세 헤벌쭉 해지는 모습은 29살이 아닌 9살 아이 같 은 모습이었다.



노랗던 지석의 머리카락이 이번에는 연한 갈색으로 물들었다. 아현은 그 색이 꽤나 마음에 드는지 아직 물기가 젖어 촉촉한 머리를 꼬며 만지작거 렸다.



“밥 먹고 영화 볼래?”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털던 지석이 벌써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다는 것을 깨달고 부엌으로 걸어갔다. 아현은 그 뒤를 쫄래쫄래 쫓아가며 그의 목덜미를 간질였다.



자취 생활에 익숙했던 지석은 금세 전자레인지용 밥, 간단한 야채 볶음, 볶은 김치, 두부로 이루어진 조촐한 식사가 차려냈다. 조그만 텔레비전 앞 탁상 위에 펼쳐진 느지막한 점심 앞에 아현과 지석이 쪼그려 앉았다. 



“맛있게 먹겠습니다!”



배가 고팠던 듯 둘은 말없이 음식을 삼키기 시작했다. 이미 오래된 연인 은 굳이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았다. 이미 서로의 존재가 너 무도 익숙해 진 터라 다른 말와 행동으로 그 공간을 채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영화는 뭐보지?”



두 그릇째 먹고 있는 지석과 달리 이미 한 그릇을 뚝딱 비워낸 아현이 침대 모서리에 기대었다.



“일단 티비부터 틀어볼까?”

 “응.”



리모컨을 찾으려고 지석은 젓가락까지 내려놓고 허둥대고 있었다. 그걸 지켜보던 아현이 그의 무릎을 짚고 그의 엉덩이 뒤에 있는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지석은 괜히 당황해하며 마저 수저를 들었다.

 


“치울 동안 영화 골라놔.” 

“그래. 백서방, 어여 치워.”



그는 온통 텔레비전에 시선을 빼앗긴 채 건성으로 답하는 아현을 향해 주먹을 허공에 휘둘렀다. 하지만 그녀의 작은 움직임에 저 홀로 움찔하여 금세 그릇을 들고 부엌으로 도망쳤다.



아현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채널만 돌리고 있었다. 그러다 한 케이블 채 널에서 멈추었다. 마침 지석도 그릇을 모두 물에 담가 놓고 다시 그녀의 오던 찰나였다.



그가 앉자 그녀는 발로 탁자를 밀어 버렸다. 끼익하는 소리가 들리며 공간이 넓어졌다.



지석이 아현의 옆자리에 앉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갑작스런 행동에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뒤에 걸려있는 담요를 들어 아현의 어깨를 덮었다.



아현이 멈추어 놓은 채널을 말없이 본다. 이미 본적이 있는 영화였다. 영화는 끝자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머나먼 미래, 아들이 불치병에 걸려 냉동되어있는 부부에게 인공지능 로봇이 입양된다. 그 아이는 로봇이지만 엄마를 사랑하게 프로그래밍 되어 있었고, 결국 깊이 그 엄마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불치병에 걸린 아이 가 돌아오고 로봇은 아들의 자리를 빼앗긴다. 자신이 진짜 소년이 된다면 엄마가 다시 자신을 사랑해 줄 것이라고 믿은 아이는 푸른 요정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나게 되고, 결국 실패하여 바다 속에 갇혀 잠들게 된다. 다시 이천년의 시간이 지나고 다른 생명체로 인해 깨어난 아이는 단 하루 동안 그 엄마의 아들로 삶을 살게 된다.



지석이 기억하는 영화의 내용이었다.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막 아이가 다 시 엄마를 만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무릎 위에 아현이 꿈틀댔고, 그 는 그녀의 어깨 위에 조용히 손을 올렸다. 갑자기 아현이 말했다.



“이 영화 기억나? 고등학교 입학하고, 네가 엄청 졸라서 극장가서 본 영화잖아.”

“어? 정말? 그랬나?”

“뭐야, 그 난리를 치더니 잊어버렸어? 너 일주일 동안이나 귀찮게 굴다가, 결국 나한테 영화 티켓 두 장 다 내던지고 도망갔는데, 기억 안나?”

 “그랬나?”



지석이 머리 뒤로 팔짱을 끼고 몸을 기대었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그녀에게까지 들렸는지, 아현이 갑자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진짜? 정말? 그래도 나름 너랑 나랑 처음 영화 보러 간 건데!”



그의 허벅지를 세게 내려치고는 다시 머리를 그 곳에 괴었다. 매운 손 탓에 그가 절로 다리를 오므렸다. 그런 움직임에도 아현은 꿋꿋이 지석의 다리를 베고 누워있었다.



다시 영화에 집중한 아현을 두고 지석은 열심히 기억을 떠올렸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았던 것은 대충 기억이 났지만, 그 전후 사건은 희멀건 한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있잖아.”

“응?”



아현의 부름에 생각의 바다 속에서 빠져나와보니 이미 아이가 그의 엄마와 함께 잠드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흐르고 있었다. 곧 까만 화면에 감 독의 이름이 지나갈 때까지 아현은 말을 않고 있었다.



“나, 아프고 보니까. 그렇게 밉던 엄마가 보고 싶더라. 나 버리고 간 엄마인데, 그래도 꼴에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라고 아프니까 보고 싶어지 더라. 지금까지는 애써 숨기고 있었나봐. 보고 싶은데 안 보고 싶은 척. 그리운데 안 그리운 척. 그렇게 척척 하면서 살았나봐. 아프니까, 그 척 하기도 힘들어서 엄마도 보고 싶고, 우리 아빠는 누구일까 궁금하기도 하 고…….”



아현이 말할 때 마다 그 울림이 전해졌다. 지석의 몸이 굳었다.



대학교 입학식 전날, 실은 엄마가 편지 한 장만 남기고 도망갔다던 말 이후로는 처음 엄마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응…….”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오늘따라 아현이 더 작아 보였다. 그의 무릎을 벤 그녀는 몇 번 몸을 꿈틀대더니 담요를 턱 끝까지 끌어올리고 눈을 감았다. 다리를 가슴팍까지 끌어올린 아현은 외로움에 자기가 자신 을 끌어안고 있는 것 같았다.

 


다리가 저리고 발끝이 찌릿찌릿해졌지만, 지석은 움직일 수 없었다. 너무도 평온히 눈 감고 있는 아현을 깨운다면 그가 채워주지 못할 그 사랑 에 대한 그리움이 그녀를 덮질 것 같았다.



한참이나 가만히 있던 지석은 규칙적으로 새근거리는 아현의 숨소리가 들려서야 천천히 다리를 뻗었다. 피가 갑자기 통하며 바늘로 발가락 끝을 간지럽게 찔러대는 것 같았다.



그는 등 뒤 침대에 있는 아현의 베개를 꺼내서 천천히 자신의 다리 대신 끼워 넣었다. 움직임에 잠깐 깰 듯 하는 아현도 뒤척임 몇 번 이후로 다 시 잠잠해졌다.



아현이 깊게 잠든 것을 확인한 지석이 핸드폰을 들고 부엌 한 구석으로 갔다. 아까 대충 담가놓은 그릇에 붙어있는 밥알이 퉁퉁 불어있었다. 그는 고민하다가 지민에게 통화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한참을 지석의 귓가에서 울렸지만, 이내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사오니.’ 하는 기 계음이 흘러나왔다. 지석이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이미 점심시간이 끝나 진료를 보고 있을 법한 시간에 전화한 자신의 탓 이라 생각했다. 결국 그 자리에 서서 잠들어있는 아현을 바라보았다. 20 년 가까이 알았지만 웬만해서는 속에 있는 이야기를 잘 하지 않던 아이가 이렇게 까지 버겁게 이야기를 꺼낸 것을 보니 자신이 너무 무심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석은 다이어리를 꺼내들었다. 그 사이에 이런 저런 일정들이 추가되어 빽빽하게 적혀있었다. 그 달력을 넘겨 줄 모양 노트의 부분에 멈추었다. 



“AI, 고등학교 때 아현이랑 처음 같이 본 영화.”



중얼거린 내용을 그대로 적어 내리자, 왠지 바보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저 머리를 긁적이고만 있는데, 핸드폰에 짧게 진동이 왔다. 액정을 보 니 지민이 보낸 문자 메시지였다.



ㅡ 도착했어? 지금 진료시간이라 전화는 못하겠다.



그의 예상대로였다. 적던 다이어리를 내려놓고 지석도 자판을 눌렀다.



ㅡ 형님 덕택에 편안히 왔네.

ㅡ 잘 도착했다니 다행. 현이는 괜찮고?

ㅡ 응. 지금 자.

ㅡ 다행이네. 이따 퇴근할 때 전화할게.

 ㅡ 저기, 누나 부탁이 있는데.

— ?

ㅡ 아현이 어머니를 찾고 싶어.

 


헤테로 빙의글을 쓰고있는 말린입니다 다른 글들도 종종 쓰고있습니다 읽으면 행복해지는 글을 쓰고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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