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간학교편(5권) ~ 교토 부정왕편 사이 쯤의 이야기


* 유키린(유키). 주로 린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 2019년 3월 23일(토) 개최 예정인 [청십자마켓 온라인점] 발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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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부조리함에는 이미 길들어져있던 탓일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혼란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시련은 이겨내는 것이지만, 불행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유키오가 자신에게 해 준 수많은 것들이, 사실은 본인의 의사가 아닌 린의 마장(魔障)에 의한 것이라고 하여도 결국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사과를 한다고 용서될 것도 아니었으며,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린이 좋아서 유키오에게 그런 마장을 입힌 것도 아니지 않은가. 린이 원해서 악마로 태어난 것이 아닌 것처럼, 지금의 사태 또한 그저 주어진 것이었다.


어차피 린의 마장에 대해 아는 것은 메피스토와 본인뿐이었다. 짓궂은 악마도 가벼운 즐거움을 위해 자신의 말들이 어긋지는 것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 틀림없었다. 이대로 입을 다물면 유키오는 평생 모르고 지낼 수 있었다.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자신을 소중히 해 줄 것이었다.


「린, 일어났어?」

“쿠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린에게 창문으로 들어온 쿠로가 말을 붙여왔다. 그는 손을 뻗어 가까이 다가온 네코마타를 쓰다듬었다.


「몸은 좀 어때? 어제 열이 나서 유키오가 많이 걱정했어.」

“…지금은 괜찮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쿠로.”

「괜찮다니 다행이야!」


쿠로가 안심한 듯 웃으며 가르랑거렸다. 이걸로 됐어. 린만 모른 척 한다면 모든 것이 제자리였다.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있을 곳을 잃어버릴 수는 없었다. 왼쪽 가슴이 지그시 아려왔지만, 린은 이것 또한 모른 척 하기로 했다.

 


“다녀왔어.”

“어서 와, 유키오. 오늘은 빨리 왔네.”


침대에 누워 만화책을 뒤적이던 린이 동생을 맞이했다. 유키오는 의자에 가방을 내려두고 곧장 형에게 다가 왔다.


“…열은 내린 것 같네. 몸은 좀 어때?”

“멀쩡해. 건강한 것만이 내 장점이잖아?”

“그건 그렇지만.”


당당하게 말하는 린을 두고 유키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오늘까지는 약 먹고 자. 식사는 우코파크에게 부탁해뒀으니까 바로 내려가자.”

“아- 내가 해도 되는데…”


평소 유키오의 귀가 시간을 생각하면 한시간 쯤 뒤에 준비를 해도 늦지 않았다. 머리를 긁적이는 형에게 동생이 말했다.


“환자는 쉬어야지.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잖아?”

“요리는 내가 좋아서 하는 거거든?”


입으로는 투덜대면서도 린은 보던 만화책을 덮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래,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계속 모른 척하다보면 언젠가는 잊어버리지 않을까. 린은 자신에게 되뇌며 동생과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잘 먹겠습니다-”


식탁 위에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 먹음직한 요리들로 가득했다. 어제 저녁부터 제대로 챙겨먹지 못한 탓에 린은 정신없이 숟가락을 놀렸다.


“…먹는 것 보니까 다 나은 것 맞네.”

“히끄어-(시끄러)”


입안에 음식을 넣고 웅얼거리는 모습에 유키오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지만 더 이상의 잔소리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먹는 것에만 집중하던 린이 숟가락을 내려놓았을 때였다.


“…형.”


동생의 눈빛이 진지해진 것을 본 린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불안을 다잡으며 그가 되물었다.


“왜?”

“……어제 펠레스경과 만났다며.”


악마의 이름과 함께 겨우 가라앉았던 일련의 혼란이 용솟음쳤다. 손끝부터 피가 서서히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대답이 없는 것을 긍정으로 여긴 듯, 유키오의 말이 이어졌다.


“시에미양에게 들었어. 구마학원의 수업에도 늦게 들어오고, 수업 내내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고. 학교에서는 특별한 일이 없었으니,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알아봤는데…”

“…메피스토가, 뭐라고 했어?”


목소리가 떨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굳어버린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솜털 끝까지 곤두섰다. 자신을 바라보는 녹색 시선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영원 같은 순간이 흘렀다.


“형의 마장에 대해 물었다고. 하지만 형은 어느 권속에도 속하지 않는 상위악마라, 펠레스경도 잘 모른다더군.”

“…….”


폐 속에 고여 있던 숨결이 쏟아지며 주변의 공기가 천천히 흔들렸다. 들킨 것이 아니었구나. 어깨에 힘이 쭉 빠지며 의자 등받이 몸을 걸쳤다. 그런 린의 동작을 다른 의미로 해석한 듯, 유키오가 진지하게 말했다.


“저번에 물었을 때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대답해서 미안해. 형이 이렇게까지 고민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형은 악마로 각성한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자신에 대해 궁금하고 불안한 것이 당연한데… 내가 너무 무심했어.”

“따, 딱히 사과할 것까진 없잖아. 알면서 안 알려준 것도 아니고, 너도 몰랐던 거니까…”


어제에 이어 연이은 사과의 말에 린은 되려 몸둘바를 몰랐다. 유키오가 잘못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이유 없이 듣게 되는 사과가 린의 양심을 사정없이 찔러왔다. 동생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내 주의가 부족했던 것 맞아. 앞으로 나 외에 형의 마장을 입는 사람이 또 생길 지도 모르잖아. 형도 그게 불안했던 거지?”

“그, 그건…”


린에게 인간을 공격할 의사는 실낱만큼도 없었지만, 앞으로의 일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대규모 퇴마 작전 중 동료의 손에 의도치 않은 부상을 입게 되는 일은 흔했다. 유키오가 걱정 말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형의 마장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지고 밝혀 낼 테니까. 치료법까지 찾아내면 바티칸에서도 형을 좀 더 안전한 존재로 여길 거야.”

“아, 아니…”


그런 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의욕에 넘치는 동생의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동생은 무엇이 저렇게 즐거운 것일까. 자신이 입은 마장의 피해를 고치는 것이? 학자로서의 호기심이? 악마의 위협 요소를 조금이라도 줄이는 것이? 가슴이 검게 좀먹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새로운… 연구 주제가 생겨서, 잘 됐네…”


띄엄띄엄, 마음에도 없는 말을 겨우 뱉었다. 그저 마음 편했던 과거의 자신이라면 분명 그렇게 말했을 터였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알게 된 지금은 달랐다. 지금이라도 당장 하지 말라고, 몰라도 된다고 말리고 싶었다. 오쿠무라 유키오는 천재였다. 그가 밝혀내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상, 언젠가는 반드시 정답을 찾을 것이 틀림없었다.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동생이 어떤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까. 얼어붙은 녹주석의 눈동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린은 숨이 막혀왔다.


“연구 주제가 생긴 것도 좋지만, 내가 정말 기쁜 것은 다른 이유야.”

“…?”


린의 형식적인 축하에 유키오는 자신이 너무 들떴다는 것을 깨달은 듯, 어깨를 움츠렸다. 또 다른 이유라니, 무슨…?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형을 두고 동생이 쑥스러워하며 덧붙였다.


“형이 자기 일에 관심을 가진 거잖아. 자기 힘이 가진 영향력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하는 거고. …이제까지 늘 형이 자기 일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걱정이었거든.”


유키오는 늘 걱정이 많았다. 그리고 그 걱정의 대부분, 아니 전부는 린에 대한 것이었다. 새삼 이제까지 자신이 해 온 철없는 행동들이 부끄러웠다. 동생의 말이 이어졌다.


“앞으로는 혼자 고민하지 말고 이야기 해. 어차피 생각하는 건 잘 못하잖아?”

“…시끄러.”


짓궂은 말과 달리 표정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평소 다른 사람 앞에서 보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진심으로 기뻐하는 미소. 동생이 이렇게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정말 오랜만이었다. 눈 안쪽에서 열기가 차올랐다. 푸른 불꽃이 심장 안에서 빠직, 빠직 타는 소리를 냈다. 꽉 깨문 어금니가 떨렸다. 여기서 무너질 수 없었다. 저 미소에 금이 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린은 부서지는 거짓의 가면을 필사적으로 뒤집어썼다.


조아라에서는 '카즈메'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잡식계 사회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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