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결이 한나를 집으로 데려다주고 다시 돌아왔다.

유하는 술상을 다 치우고 주방에서 설거지 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한결아, 한나 누나 잘 배웅해주고 왔어?”

“네. 뭐 그럭저럭. 죄송해요. 술주정이 너무 심해서. 선배가 좀 이해해 주세요.”

“뭐 난 괜찮아. 누님 성격도 화끈하고 좋으신 분 같았어.”

유하가 고개를 저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한결이 갑자기 진지한 눈빛으로 유하를 바라보았다.

“선배…. 아까 누나가 했던 말 다 거짓말이에요. 저는요. 사람들이 제 외모만 보고 바람둥이라고 오해하는 질색이거든요. 쑥스럽지만 한 사람만 바라보는 순정파예요.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할꺼에요. 영원히.”

유하는 한결의 강렬한 눈빛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얼굴이 빨개졌다.

두근 두근.

유하는 한결이 눈치 못 채게 시선을 회피했다.

아, 위…위험해. 분명히 나한테 하는 말도 아닌데 내가 요즘 왜 이러지. 너무 떨린다.

유하의 몸뿐만 아니라 손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한결이 유하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보고 걱정돼서 손목을 덥석 잡았다.

“선배…. 왜 이렇게 손을 떨어요? 혹시 수전증 있어요? 아니면 손목 터널 증후군 같은 건가. 그러니깐 제가 게임 너무 많이 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한결이 유하의 손목을 손에 꼭 쥐고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아니야. 나 원래 손목이 약해. 그림 많이 그려서 그래. 알잖아? 일종의 직업병 같은 거야. 이제 놔줘. 괜찮아.”

유하가 얼굴을 붉히며 한결의 손에 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했다.

“손이 참 작고 하얗고 귀여워요.”

한결이 유하의 손을 신기한 듯 만지작거렸다. 유하는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랐다.

“키가 작으니깐 손도 작지 뭐.”

한결이 자신의 손바닥을 쫙 펴고 그 위로 유하의 앙증맞은 손을 포갰다.

“이 봐요. 선배랑 나 손 크기 차이가 이렇게 많이 나요. 남자 손 치고 정말 작아요. 이쁘고. 애기 손 같아요. 푸웁.”

“그…그런가….”

유하는 얼굴이 너무 빨개지고 열이 올라서 한결의 눈을 마주하기 겁났다.

“이제 그만해. 손 커서 좋겠다. 부럽네.”

“오늘은 술 많이 안 마셨네요?”

한결이 조금 섭섭한 듯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한나 누나랑 처음같이 술 마시는데 술도 약해가지고 취해서 주사 부리면 민폐잖아. 그래서 일부러 안 마셨어.”

“잘했어요. 다른 사람 앞에서 적게 마셔요. 내 앞에서만 술에 취해요, 알겠죠?”

한결이 능글맞게 웃었다. 한쪽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유하는 한결의 그 웃음에 묘하게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고 보니 술에 취하면 유하는 그 이후로 필름이 끊겨서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결의 저 능글맞은 웃음이 이상하게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설마…내가 술 취했을 때 무슨 일이 있지 않았겠지. 그래도 당분간은 좀 조심해야겠다. 한결이 볼 때마다 자꾸 이상한 감정이 생겨서 내 자신이 아닌 것 같아. 어쩌면 내가 이상한 행동을 할지도 모르잖아. 여자 친구도 있는 녀석인데. 유하는 침을 꿀떡 삼켰다.

“아까도 말했듯이 누나가 술주정해서 정말 미안해요. 이혼하고 심적으로 많이 힘들어요. 남편이 바람을 펴서. 바람에는 아주 민감해요.”

“어? 그래. 저렇게 미인이신데. 어떻게 남편이란 작자가 그럴 수가 있어!”

유하가 갑자기 흥분해서 화를 버럭 냈다.

“저희 누나…미인이긴 하죠? 왜요? 혹시 반했어요?”

한결이 심통 나서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눈빛이 살기등등했다.

“아니…막 설레고 그런 건 아니고. 너무 예쁘셔서 쳐다보고 있으면 눈이 부셔. 성격도 화끈하시고 재미있으셔. 나도 예뻐해 주시고. 헤헤. 자주 놀러 와 주셨으면 좋겠어.”

유하가 볼이 빨개져서 수줍게 말했다. 발끝으로 바닥을 톡톡 쳤다.

“씨발…. 반했네.”

한결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아니야. 절대로. 나는 그냥 누나가 없어서 저런 누나가 있으면 좋겠다 싶고. 또 재벌가의 손녀니 돈이 많아서 남자 신데렐라라고 되고 싶어서 그런 게 절대로 아니야. 정말이야. 만약에 잘 되면…. 한결아, 네가 처남이 되는 거니? 훗.”

유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두 손을 흔들며 농담을 했다. 야, 한결아. 내가 내 주제를 잘 안다고. 그냥 꿈이라도 꿔 본 거야. 희망 사항일 뿐이라고. 저런 미인이 나 같은 걸 좋아할 리가 없잖아.

한결은 피가 거꾸로 솟아서 뒷목을 잡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처…처남 이라고욧! 미쳤어요. 선배는 보는 눈이 그렇게 없어요. 누나는 아주 포악하고 돌싱에다가 나이 차가 많이 난다고요. 정신 차려요. 제 눈에 흙이 들어와도 안 돼요. 헉헉.”

한결의 눈에서 이글이글 불이 활활 타올랐다. 흥분해서 숨을 헐떡였다.

“야, 그래도 서운하다. 같이 사는 선배인데. 너네 누나한테 내가 한참 모자란 건 맞는데 어떻게 그렇게 질색하는 티를 낼 수 있냐.”

유하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선배는 너무 잔인해요. 눈치도 없고 바보 멍충이 똥개 찐따에요. 그렇게 눈치가 없으니깐 아직도 혼자인 거라구요. 이제 주변을 좀 살펴보란 말이에요!”

한결이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유하는 멍하니 한결의 잔소리를 듣고 뻣뻣하게 서 있었다.

뭐야, 농담인데 왜 이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여. 저러다가 울기까지 하겠다.

결국 한결은 너무 서운한 나머지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우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2층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뭐? 내가 뭐! 이게 미인 누나 있다고 되게 빡빡하게 구네. 도대체 욕을 몇 개나 하고 간 거야. 어휴. 저게 귀엽다고 봐주니깐.”

유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

 

유하는 창밖으로 쏟아지는 눈부신 아침 햇살에 눈을 떴다. 일어나서 방문을 여니 한결이 고고하게 다리를 꼬고 손에 책 한 권을 들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거실 통창으로 황금빛 햇살이 들어와서 한결을 환하게 비추었다. 한결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유하를 보며 한결이 왔구나 싶어서 환하게 웃으며 쳐다보았다.

“하암!”

유하는 하품을 하며 한결에게 인사를 했다.

“한결아, 잘 잤어?”

“네.”

한결이 유하에게 책 제목이 잘 보이게 들었다.

선배 이 책 제목을 꼭 봐줘요. 저 이런 책 읽는 사람입니다.

“뭐냐? 책 제목이 무소유네. 너랑 정말 안 울린다. 큭. 넌 완전 풀소유잖아. 평소 책도 안 읽는 녀석이 뭔 바람이 분 거야.”

“선배는 아직 절 몰라요. 저는 늘 무소유 정신에 관심이 많다고요. 집착하고 뭐 그런 거 이제 많이 내려놨어요. 이 책을 읽으니 그게 얼마나 부질없고 헛된 일인지 알게 됐어요. 집착하고 질투 그런 거 안 해요.”

한결이 짐짓 어깨를 쫙 펴며 우쭐대며 말했다. 힐끔 유하를 보며 눈치를 살폈다. 유하는 한결의 모습에 조금 놀란 듯했다. 감동받았는지도 몰랐다. 이제 저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겁니다. 흐흐. 유하 선배 이상형에 맞춰서. 사람이 절박하면 이렇게 뭔가 하게 되네요. 곧 있으면 저한테 반하게 될지도 몰라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하죠.

“어. 그거 잘됐네. 이제 너도 철드나 보다. 크큭. 난 소박한 사람 좋아하는데. 히힛.”

유하가 한결을 보며 싱긋 웃었다.

“선배. 저도 어쩌다가 가끔 소박해 보인다는 이야기 듣거든요. 선배 이상형이랑 좀 비슷한 거 같아요, 그쵸?”

한결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지만 거짓말을 했다. 아잇, 살다보면 거짓말을 할 때가 있는 법이죠. 크큭.

한결이 눈을 반짝이며 유하를 쳐다보았다. 유하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응. 그렇네.”

유하가 한결의 머리를 한 번 슥슥 쓰다듬어 주고는 유유히 욕실로 들어갔다.

“역시… 이렇게 주입식으로 이상형의 이미지를 심어주는 거야. 벌써 절반은 넘어 온 눈빛이었어. 크큭. 선배 의외로 쉬운 사람일지 몰라. 저번에 선배가 내 단점을 알려줬을 때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몰라. 그날 밤 좀 울었지.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거야. 그게 오히려 힌트였어. 저…전화위복인 셈이지. 오늘 나 책을 읽어서 그런가 어려운 단어가 팍팍 나오네.”

한결은 혼자 좋아서 헤벌쭉 웃었다.

“이제…바람둥이 이미지만 어떻게 없애면 될 것 같은데…. 누나가 헛소리까지 하는 바람에 더 심해졌잖아. 짜증 나. 한쪽 쌍꺼풀 때문이라면 양쪽 다 쌍꺼풀 시술을 할까? 어후. 그건 아니야. 그럼 완전히 느끼해서 선배가 싫어할지도 몰라.”

한결은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흔들었다. 잠시 후 한결은 샤워를 하고 나오는 피부가 촉촉이 젖어 뽀얀 유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유하 주위의 공기에만 반짝이는 빛 알갱이들이 있는 것 같았다. 크윽. 오늘도 역시 예쁘다. 동거한 후에 가장 좋은 점이라면 선배의 막 샤워한 후의 아기처럼 뽀얀 모습을 볼 수 있는 거야.

1일 1 유하.

하루에 한 번이라도 유하를 안 보면 한결은 미쳐버릴 것 같았다.

어떻게 매일 봐도 질리지도 않고 사람이 저렇게 예쁠 수 있을까?

한결은 너무 좋아서 속으로 방방 뛰었다. 당장 달려가서 저 뽀얀 뺨에 뽀뽀해주고 싶었다. 아니…아침마다 키스하면 더 좋겠다. 막 키스하다가 지각하고. 서로 입술이 빨개서 퉁퉁 불어있고. 크핫! 한결은 상상만으로도 좋아서 광대가 볼록 솟았다.

사귄다면 막 그렇게 해도 되겠지만 지금 달려가면 변태 취급받으며 한결은 한 대 맞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제 곧 얼마 안 남았어. 조금만 더 참자. 유하 선배 많이 넘어왔거든. 크큭. 날 바라보는 눈빛이 가끔씩 끈적하다니깐.

한결은 괜히 입술을 허공으로 쭉 내밀었다가 다시 넣었다. 여전히 책을 손에 펼쳐놓고 늘 그렇듯이 유하의 몸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유하의 허전한 팔목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선배!”

한결의 턱이 딱딱하게 굳었다.

“전자시계 또 잊고 나왔죠?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차기 싫어서.”

“들켰네. 큭큭.”

유하가 물이 흐르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닦았다. 능글맞게 웃으면서 구렁이 담 너머가 듯이 넘어가려고 했다. 한결이 욕실로 들어가서 전자시계를 가지고 나와서 직접 유하의 팔목에 채워주었다.

“사람 성의를 무시하면 안 되죠. 이게 벌써 몇 번째에요? 저 너무 섭섭해요.”

“미안해. 샤워하면서 딴 생각하다보면 깜빡할 때가 많더라. 잘 차고 다닐게.”

유하가 제대로 삐진 한결을 보며 어쩔 줄 몰랐다.

“흥.”

한결이 팔짱을 끼고 콧방귀를 끼었다.

유하는 이런 사소한 일로 다투는 게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한결은 유하에게 바라는 게 은근히 많았고 유하는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잘 잊어버리는 편이라서 늘 한결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처음에는 티격태격 싸웠지만 이제는 다 지겨웠다. 그냥 한결의 요구를 들어주고 편안하게 지내는 걸 선택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려니 싶었다. 스트레스는 점점 마음속 깊은 곳에 쌓여만 갔다.

아, 몰라 또 삐졌어. 어제부터 살짝 빡쳐있더니 오늘 역시나 예민하게 구네. 시계는 진짜 집착해. 나도 가능한 차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잘 까먹는 걸 어떻게 해. 어휴.

유하는 눈앞에 덩치는 커다란 놈이 이마에 삐졌다고 광고하고 있는 걸 보니 짜증이 확 치밀었다. 곧 있으면 K 그룹 미술 대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 유하는 잠을 제대로 못 자서 피곤했다. 그런데다가 한결이 저러니 뚜껑이 열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루라도 싸우지 않는 날이 있다면 그건 기적이었다.

이…이러고도. 무소유야. 이게 무소유냐고? 여전히 간섭하고 집착하잖아. 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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