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색 - 과거 회상






"다, 다음에 봬요. 죄송합니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하고서 허둥대는 모습이 나 당황했어요- 하고 난감한 티가 역력히 드러났다. 그렇게 준호가 황급히 밖으로 빠져나가자 우영은 혼자 덩그러니 어두운 공간에 남겨졌다. 두터운 문이 닫히면서 불어오는 바람에 바닥은 아까보다 더욱 엉망이 되어버렸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우영 역시 방금 일어난 상황이 혼란스러워 자꾸만 멍해졌다. 그러니까 이때까지 들려오던 목소리는 이준호가 맞았고, 나를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티를 안 내려고 무던한 척했지만 사실 우영은 적잖이 놀랐다. 이름은 대체 어떻게 안거야? 헌터들의 직업 특성상 본인이 직접 얘기하지 않으면 대외적으로 이름을 비롯한 개인 정보가 새어나갈 일은 절대로 없었다.



"...거기다 나를 보자마자 대뜸 껴안았고?"



 사실 가장 의문스러운 부분은 이거였다. 정말이지 종잡을 수가 없는 여우다. 사람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꼬리를 내놓고 있던 것도, 온통 멍투성이에 다쳐 있던 것도, 그리고 바로 지금도 말이다. 평소 주변에 관심이라고는 1도 없는 우영이 일면식도 없던 그가 왜 자꾸 신경 쓰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흐릿해진 정신을 차리기 위해 우영은 두 뺨을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이제 그만 이곳을 나가야 했다. 옷에 묻은 먼지들을 대충 털어주고 발걸음을 옮기자 발밑에서 자꾸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냥 지나치려는 우영의 발목을 붙잡기라도 하듯 내딛는 걸음마다 종이 자락이 걸리적거렸다. 결국 한숨을 포옥- 내쉰 우영이 무릎을 낮춰 앉았다. 준호가 놓쳐버리는 바람에 온데 흩뿌려진 종이들을 하나씩 줍기 시작했다. 재작년도 자료를 보고 있었던 모양인지 그 양이 꽤나 두툼했다. 멀리까지도 날아간 마지막 한 장을 짚기 위해 손을 뻗자 손에는 왠 옥구슬 하나가 같이 잡혔다. 



"뭐야.. 이런 게 왜 여기 있어?"



 푸른색 옥구슬이 꿰인 고운 노리개였다. 실내가 어두웠음에도 그 자태가 곱게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뜬금없는 물건의 등장에 우영이 의아해하며 주변을 살펴보니,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오래된 장식함 하나가 보였다. 구석에 숨겨져 있던 작은 상자가 엎어지면서 물건이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제자리에 넣기 위해 넘어진 상자를 바로 하니 겨우 걸쳐져 있던 내용물들이 결국 우르르하고 쏟아져 나왔다. 그 안에는 말린 꽃잎, 작은 돌멩이 등 그다지 용도와 의미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함께 보이는 것은 이준호의 초상화 한 장.



"...얼굴이 그대로 남아있네."



 천년은 족히 묵었을 구미호답게 얼마나 오래전의 그림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색만 조금 바랬을 뿐 보관 상태가 좋아 그림은 여전히 선명하게 보였다. 밝은 미소를 그대로 담아놓은 그림은 척 보기에도 애정이 가득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이준호의 눈과 입매가 그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영아, 이게 다 뭐야?"

"여기 서봐. 내 너를 그려볼 테니. 꽤나 소질이 있는 모양이야 내가."

"그냥 이렇게 있으면 돼..?"

"그러엄- 너는 존재만으로도 이미 한 폭의 그림인걸."



 세상에 둘뿐인 듯 두 사람은 마주 보며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기억이라도 되는 양 선명한 두 소년의 잔상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물건에 담긴 그 기운이 완전히 우영에게로 넘어오자 갑작스레 두통이 몰려왔다. 윽-, 두개골이 깨질듯한 고통에 우영은 다급히 머리를 부여잡았다.


준호야,

- ...준호!


 기억 속의 우영은 연신 살갑게 그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참으로 다정히 내뱉는 목소리가 의아하게도 내 것이 맞았다. 꺄르르 거리며 해맑고도 밝은 얼굴 역시 아무리 보아도 어릴 적 자신 그대로였다. 이 기억들은 꿈일까 현실일까. 우영은 알 수 없는 무의식 속에 갇힌 느낌이 들었다. 그것도 잠시, 한없이 행복해 보이던 장면은 빠르게 전환되고 푸르르던 하늘은 삽시간에 회색 연기 자욱한 잿더미로 변했다.


- 우영아·· 안돼….

- 준호야, ...내가 꼭 찾아갈게.


 고개를 저으며 울먹이는 소년은 당장이라도 눈물을 왈콱 쏟아낼 것 같은 얼굴이었다. 입을 뗄 때마다 쏟아져 나오는 핏덩이에 우영은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그럼에도 담담히 입을 벙긋거리며 미소 지어 보였다. -어서 가. 제발… 살아. 아직 어린 티를 다 벗지 못한 소년이지만 굳건하고도 단단한 목소리였다.


 그 순간, 그림 끝에서는 불길이 화륵- 치솟았다. 알면 안 될 것을 알아버린 인간에게 마치 신이 노하기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순식간에 손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며 우영은 겨우 기억 속에서 빠져나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손에는 거뭇거뭇 한 자국만이 남아있었다. 삽시간에 까만 재가 되어 날려버린 종이에 손쓸 새도 없었다. 아니, 여기에 라이터는커녕 빛 조차도 없는데 갑자기 왠 불이 붙어..? 이준호를 만나고서부터 정말이지 주변에는 알 수 없는 일 투성이였다.


 과연 이 모든 것들이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영의 표정은 점점 더 심각해져 갔다. 더 이상 구미호와 저 사이에 생기는 일들이 공교로운 일이라 치부하며 넘길 수가 없었다. 자꾸만 보이는 잔상이 자신의 것이 맞는지, 맞다면 나는 왜 전혀 기억을 못 하는지 알아야 할 것이 많았다. 삼신은 분명 알고 있을 테지. 우영은 불길이 닿았던 느낌이 생생해 손가락을 한 번 쓸어 만지고는 답을 찾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창고 문이 닫히자 우영이 머물렀던 자리에는 까맣게 그을린 종이만이 힘없이 휘날렸다. 뒷면에는 미처 보지 못하고 불씨에 타버린 문구와 함께…….


[ 준호, 너는 나에게 햇살과 같아. ]






구미준호뎐_제 11장






"...연결이요?"

"그래. 인간들은 태어날 때 인연으로 맺어진 자들은 서로의 손가락이 붉은 실로 이어져있지."

"하지만-, 그 자는 인간이 아닌걸요."

"...그의 물건이 너에게 있어. 꽤나 소중한 것이지."



 네? 그게 무슨…. 삼신은 도통 우영이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았다. 인간의 생을 관여하는 삼신은 출산을 돕고, 산모와 갓난아기를 보호하며, 자식 갖기를 원하는 부인에게 아기를 점지하기도 한다. 이 세상에 많은 인간들이 생겨나고 태어나는 순간들을 사사로이 다 지켜보고 있는 셈이었다. 그런 삼신이기에 분명 없는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닐 테다. 하지만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우영이 볼멘소리를 했다.



"저는 그에게 무언가를 받은 적도 없고, 여태껏 존재조차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준호의 물건이 저한테 있다니요. 우영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살아생전 구미호라는 것도 처음 봤건만…. 그러면 백번 양보해서 있다 치고, 그럼 대체 어디에? 해답은커녕 오히려 머릿속이 더 복잡해진 것 같다. 이 황당무계한 소리에 우영은 한없이 답답해졌다. 삼신은 별다른 표정 변화도 없이 마주 앉은 우영을 묵묵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래, 몰랐을 테지. 응당 그래야만 하니까."

"아니 그럼 뭐.. 저에게 출생의 비밀이라도 있다는 겁니까?"

"...알고 싶니?"

"네."

"후회할 텐데..?"

"...저는 그게 무엇이든 알아야겠습니다."



 삼신할미는 확고해 보이는 우영의 표정에, 더는 말리지 못하겠는지 한숨을 작게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네 뜻이 정 그렇다면….

 이 붉은 실을 새끼손가락에 걸어봐. 홍실을 따라가다 보면 네가 궁금해하는 해답이 나올게다.



"단,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실을 절대 빼서도 안되고 놓쳐서도 안돼."



 그리고 이 실타래가 모두 풀리기 전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한다. 명심하거라-. 단호한 삼신할미의 목소리에 우영은 왠지 조금 긴장이 되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한 치 앞도 예상되지 않았다. 후우… 심호흡을 하다 말고 걱정스러움에 입을 떼었다. 그, 혹시.. 위험한 일이라도 생기는 겁니까?



"...삼신?"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눈을 떠보니 주변은 공허했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양 삼신할미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참나, 가면 간다 말도 없이..


 세월이 느껴지는 허름한 공간은 전통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한옥이었다. 건장한 남성 한 명이 누우니 이미 가득 차 보이는 좁은 방에 우영은 홀로 남겨졌다. 옆에 덩그러니 놓인 실타래를 잠깐 쳐다보다 다시 바닥에 털썩 누워버렸다. 그래, 붉은 실을 따라가보자…. 평온하게 누워 삼신이 말한 대로 마음을 비우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니 우영의 눈이 절로 스르르 감겼다. 




 어느새 어두운 공간 속 홀로 서있는 우영은 어리둥절했다. 주변은 캄캄할 뿐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뭘 해야 하지..? 꿈이라든지 무의식의 세계 속이라도 도착할 줄 알았건만 입고 있는 옷도 그대로에 별다른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다만, 새끼손가락에 묶인 실 만이 좀 전과 달리 끝도 없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지 모를 얇고 가는 실을 따라 서서히 걸어가기 시작하자, 저 멀리 빛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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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부실 정도로 빛이 번쩍이는 곳을 통과한 우영은 시야를 가리고 있던 팔을 천천히 내렸다. 그러자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온통 초가집에 상투를 튼 사람들...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타임슬립이라도 된 거야? 놀라움도 잠시, 눈에 익은 두 소년이 보였다.



 햇살도 좋고, 꽃도 이쁘고, 준호도 이쁘고…. 신이 난 듯 준호를 앞에 세워두고 붓질을 하는 우영의 눈에는 즐거움이 가득 차 보였다. 화풍(畫風)에 소질이 있는 모양인지 꽤나 보기 좋은 그림이 완성되었다. '내 선물이니, 꼭 잘 간직해 줘. 알겠지?' 해맑게 웃는 우영과 그에 따라 미소 짓는 준호였다.



 저것은 창고에서 봤던 그 그림이다. 설마 내가 그려 준 건가…. 우영이 생각을 정리할 새도 없이 장면이 빠르게 전환되었다.



"준호야, 지킬 거다. 내가 꼭 너를 지켜줄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영은 평소답지 않게 무거운 목소리로 준호에게 말했다. 그때, 저 멀리서부터 불을 밝히며 달려오는 무리들에 우영은 본능적으로 위험함을 감지하고, 준호의 팔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저기 있다, 잡아라!!"



 숨이 목 끝까지 차도록 달아나려 뛰어보지만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소년들이 감당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다. 결국 우영은 뛰던 것을 그만두고 준호를 자신의 등 뒤로 숨겨 막아섰다.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말아."

"…도련님. 저런 요괴는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대치하고 있는 군대의 수장(首長)이 우영에게 회유를 하고 있었다. 무기를 고쳐 잡은 사내들이 자꾸만 소년 쪽으로 가까이 거리를 좁혀 오자,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도를 빼내어 들어 제 목에 갖다 대었다. 



"가까이 오지 말래도-!"



 지금부터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오거든, 내 목숨도 잃는 것이다. 그것 역시 아버님이 시키신 일이라면 얼마든지 해도 좋다. 우영은 나이답지 않게 강단 있는 모습을 보이며 모든 이들의 행동을 멈추게 만들었다.



"준호야… 내가 시간을 벌 테니 어서 가."

"··안돼, 나 혼자 못 가…."

"여기 있으면 너 죽어..!"



 가야 해 얼른. 자신의 한복 끝자락을 힘겹게 쥐고 있는 손가락을 바라보다 우영은 고개를 돌려 준호에게 재촉하듯이 말했다. 준호와 우영, 두 사람은 곧 다가올 이별을 짐작하는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두 뺨에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우리…, 잠시만 떨어지는 거야. 그러니.. 어서 가."



 울음을 삼키며 힘겹게 떠나라 말하는 우영의 얼굴을 보다 준호는 결심했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때문에 우영의 목숨까지 앗아갈 수는 없어 준호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엄마도, 우영이도·· 저 때문에 사랑하는 이들이 모두 다치는 것 같아 자책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럴수록 자꾸만 눈물이 흘러나와 눈물이 앞을 가렸다. 옷깃으로 뿌연 시야를 겨우 닦아내던 준호의 등 뒤로는 빠르게 화살이 날아오고 있었다.



"도련님-!!"



 다급한 목소리로 수장이 크게 소리쳤다. 저 멀리서 잠복해 있던 궁사(弓師)가 준호를 향해 겨누었으나, 그 화살은 목표물보다 먼저 발견하고 뛰어온 우영의 가슴에 꽂혀 버렸다. 살이 찢어지는 날카로운 통증에 우영이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아, 안돼…. 그의 몸을 관통한 화살을 보자마자 준호는 믿을 수 없어 말까지 더듬었다. 가까이 다가오려는 준호에 우영은 곧장 손을 뻗어 제지했다. 전할 말이 있는지 입을 벙긋하자 붉은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준호야, 내가·· 꼭 찾아갈게. 그러니 제발… 가서 살아."

"너··, 너는 정말."



 다 죽어가면서도 왜 내 생각만 해…. 이대로 내가 도망가는 것을 포기하고 저들에게 잡히면 엄마는 물론, 우영이의 모든 노력까지 헛되는 것일까··. 준호는 쉽사리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굵은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멈춰있던 소년은 결국 결심이 섰는지 순식간에 형체를 바꾸었다. 순백의 털이 덮힌 백여우의 모습으로 변한 채, 준호는 누구도 쫓아오지 못하게 빠르게 달아나버렸다.



 그렇게 하얀 털 달린 요괴를 놓치고 영의정 대감은 약이 잔뜩 올라 한동안 여우사냥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거기다 그 요괴 대신 독화살을 맞은 아들이 며칠째 내리 앓고 있었으니... 집안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져갔다.



"어찌 의원이라는 자들이 병을 못 고친단 말이야―!"



 낮고 우렁찬 무서운 호통질에 시중들이 모두 옴짝달싹 못하고 숨죽이고 있었다. 온갖 귀하다는 약재, 용하다는 의원들을 죄다 불러 모았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우영의 상태는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장家의 대를 이어가야 할 하나뿐인 아들, 무려 귀하디 귀한 삼대 독자였다.


 불덩이같이 절절 끓는 몸에 눈도 뜨지 못하는 우영은 벌써 열흘째 사경 속을 헤매고 있었다. 영의정 댁 외아들이 온몸에 독이 퍼져 곧 죽을 것이라는 얘기는 벌써 저잣거리에 파다하게 소문이 나고 있었다. 이게 다 그 괴생명체 때문이다. 요물 같으니라고….


 영의정 대감은 요괴를 찾아 제 앞에 데려오는 사람에게는 그 공으로 쌀 100석을 내놓겠다 언질 하니, 군사들은 더욱 바삐 움직였다. 수시로 마을을 뒤지며 백여우를 찾아 헤매는 통에 준호는 평소보다 움직이기가 힘들어졌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동안 숨어 지내던 허름한 빈 집 역시 그들로 인해 엉망이 되어 있었다. 바로 코앞까지 쫓아온 군사들의 행적에 준호는 몸을 숨기며 그대로 뒷길로 빠져나갔다. 거리로 나와 자연스럽게 왁자지껄한 사람들 사이에 숨어든 준호는 저잣거리 상인들에게서 우영의 이야기를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자네, 이참에 그 요괴를 잡아 팔자 피는 게 더 빠르겠네."

"무슨 수로. 그 대감집 아드님이 이미 병으로 오늘 내일 한다더만은…."



 벌써 앓은 지 열흘이나 지났다지? 그의 병세가 깊어지고 있다는 얘기에 준호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더 이상 이리 피하며 손 놓고 기다릴 수는 없었다. 이제는 준호가 우영을 구해 줄 차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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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이 내려앉은 밤, 크고 밝은 보름달이 휘영청 떠오르는 날이었다. 음기가 가장 깊은 보름에는 구미호가 여우구슬을 만들기에 적합한 날이기도 했다. 준호는 온통 검은 천으로 휘감아 자객 같은 행색을 하고서 길거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우영의 방 주위로 왔다 갔다 움직이는 시중들의 눈을 피해 높은 담벼락을 단숨에 훌쩍 뛰어넘었다. 발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손쉽게 안까지 진입한 준호는 우영이 누워있는 자리로 다가갔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 이마를 찌푸리고 있는 우영에게서 뜨거운 열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끙끙 앓으면서도 작은 목소리로 무어라 중얼거리기에 준호는 입가로 귀를 가까이했다.



"준호야… 어서 피해…,"

"……위험해."

"…준호…."



 정말… 미련하기 그지없다. 사경을 헤매면서도 연신 내 이름을 불러대는 너를 어쩌면 좋을까. 안쓰럽다 못해 마음이 아려왔다. 네가 그 화살을 맞기는 왜 맞아 이 바보야. 골골 거리느라 당사자는 들리지도 않을 말을 중얼 걸렸다. 툴툴대면서도 소중하다 못해 애틋한 마음에 준호는 차마 그를 만지지도 못하고 손이 허공에 머물렀다.



"...우영아, 나 왔어."



 이름을 부르는 준호의 목소리에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찾아온다 할 땐 언제고 왜 이러고 있어…. 곁에 붙어앉은 준호는 우영의 낯빛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반질반질 윤이 나던 피부도 까끌까끌해지고 입술 색도 보랏빛으로 변해있었다. 연신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기에 준호가 결국 손을 뻗었다. 펄펄 끓는 체열에 손가락만 가까이해도 뜨거운 기운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어찌나 강한 맹독을 썼기에 이리도 맥을 못 추는 거야. 비교적 차가운 준호의 손이 얼굴에 닿자 찡그리고 있던 우영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힘들었을 텐데… 잘 버텨줘서 고마워."



 까칠해져 버린 살갗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는 손이 점점 느려졌다. 준호는 조그만 얼굴을 온통 감싸고 있던 복면을 아래로 내렸다. 곧장 양손으로 우영의 얼굴을 조심스레 감싸 쥐며 가까이 다가갔다.



"이제 아픈 기억도, 좋은 기억도, 그냥 모두 잊고… 새로운 삶을 살아."



 네가 있어 나는 참 행복했어··. 입술이 닿을 듯 따뜻한 숨이 오가는 두 사람의 입 사이로 푸르른 구슬 하나가 나타났다. 빛을 잔뜩 머금어 밝게 발광하는 구슬은 영롱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도장을 찍어 누르듯 준호의 입술이 우영에게로 닿자, 구슬도 함께 움직였다. 준호가 내뱉는 숨결 따라 구슬은 점점 목구멍 깊이 흘러갔다. 쉬이 떨어지지 않는 입맞춤에 구슬은 우영의 몸속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이제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이다. 그 생각이 들자 준호는 속에서부터 울컥,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평정심을 유지하던 이마가 잘게 일그러지더니 이내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잇새로 자꾸만 흐느낌이 흘러나오려는 통에 맞닿아 있던 입술이 결국 떨어졌다. 울음을 참아보려 떨리는 눈가를 꼭 감아버리자, 투명한 눈물이 볼을 타고 미끄러졌다. 미처 닦아내지 못한 한 줄기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려 우영의 얼굴에 떨어졌다. 톡, 하고 물방울이 닿자 우영의 몸 주변으로는 순식간에 청백색의 기운으로 온통 휘감겼다.



"사랑했어, 나의 우영아."



 그 한마디를 남기며 준호는 급히 눈물을 훔쳤다. 부산스러워지는 밖의 공기를 느끼며 빠르게 방을 벗어났다. 우영이 연신 콜록대는 소리에 유모가 놀라 방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도련님! 괜찮으셔요? 피를 토할 것처럼 내리 기침을 하던 우영은 갑작스레 펄떡, 상체를 일으켰다. 



"유모·· 나 얼마나 누워있었어?"



 바닥에다 팔을 짚으며 앉은 우영은 죽을 고비를 넘긴 환자 치고는 너무나도 멀쩡해 보였다. 오히려 몸이 너무 가볍게 느껴질 정도로. 지금 당장에라도 밖으로 나가 말을 타고 활도 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열흘은 누워 계셨지요? 유모는 앓던 게 무색하도록 말끔하게 일어난 우영의 안색을 살펴보다 급히 몸을 돌렸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이럴 때가 아니지.


 

"대감님! 도련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대감님..! 희소식을 전하려 아닌 밤중에도 유난스럽게 소리를 지르며 안채로 달려가는 유모를 바라보다 웃음을 지었다. 거참, 저리 호들갑은…. 우영은 서늘한 밤 기운에도 불구하고 문을 활짝 열어 밖을 쳐다보았다. 그 어느 날보다도 보름달이 유난히 크고 밝았다. 지붕에 걸터앉아있던 준호는 우영이 멀쩡하게 걸어 나오는 모습까지 보고서야 몸을 일으켰다. 네가 살았으니 되었다…. 이제 안심이 되는지 미련 없이 어둠 속으로 휙- 사라졌다.



"뭐지? 방금 뭐가 지나간 것 같은데…."



 주변의 구름마저 훤히 밝히는 달빛을 바라보다 우영이 기와지붕으로 눈을 돌렸다. 검은 천이 휘릭 바람에 날리며 사라졌다. 자객인지, 고양이인지 알아보려 우영이 마당을 향해 발을 내딛는 순간. 유모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아휴, 도련님 바람이 찹니다. 얼른 안으로 드셔요!"



 이제야 겨우 깨어나셨는데 혹여나 다시 고뿔이라도 걸려 앓아누우실까 유모는 걱정이 일었다. 자꾸만 창밖을 보며 뭉그적거리는 우영을 이상하게 여기며 얼른 안으로 등을 떠밀었다. 뭐 찾는 거라도 있으셔요? 유모의 물음에 우영은 아니.. 그냥 뭘 본 것 같아서. 문을 단단히 걸어 잠글 때까지도 우영의 시선은 문밖 처마 너머에 한참이나 머물렀다.




 준호는 그렇게 몸속에 있던 여우구슬을 우영에게 넘기고 며칠을 내리 앓았다. 자신을 쫓는 인간들을 피해 산속 깊은 차가운 동굴 속에 자리 잡은 준호에게는 한줄기의 빛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온몸을 말아 잔뜩 웅크리고 있는 몸은 힘없이 끙끙 거리고 있는 것이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100일 뒤, 다시 보름달이 뜨는 날 밤. 음의 기운을 받고 여우구슬은 새로이 만들 수 있지만, 준호에게 그것은 중요치 않았다. 우영은 이제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 그의 새로운 삶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다시 마주쳐서도 안되었다. 그것은 준호에게서 가장 큰 것을 잃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찾아와주는 이 하나 없이 홀로 외롭게 동굴 속에 고립되어 있던 준호를 깨운 것은 탈의파였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미련한 놈…. 그만 궁상떨고 일어나. 어서 가자꾸나."



 탈의파 할멈은 힘이 하나도 없는 준호를 억지로 데려다 자신의 거처로 옮겨놓았다. 청승맞게 열흘이 넘도록 내리 떨고 있었던 몸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탈의파가 내온 차를 마시고 체온은 정상적으로 돌아왔으나 준호가 문제였다. 매 끼니마다 먹는 둥 마는 둥 도통 음식을 넘기지 못했다. 그렇게 준호는 한동안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 지도 모르게 그저 멍하니 허송세월을 보냈다. 그 모습을 보고 삼도천 어르신이 걱정이 되어 결국 탈의파에게 한마디 했다.



"준호… 저렇게 놔둬도 되는 거요?"



 흐음-. 탈의파 역시 심란한지 크게 한숨을 내었지만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저 내버려 두는 수밖에. 시간이 약이 될 때가 있지….




 우영은 여우구슬을 삼킨 이후로 신체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본래에도 시와 그림 실력이 뛰어나며 총명하던 자가 이제는 몸까지 잘 쓰게 되었다. 가벼운 몸짓과 날렵한 손놀림으로 무예를 능숙하게 익혀 날로 실력이 높아만 갔다. 그로 인해 조선 왕실 최초로 문과 무과 시험을 모두 통과한 자로 장家의 명성을 널리 떨칠 수 있었다. 그렇게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뒤로 우영은 하는 일마다 술술 잘 풀리었고 슬하에 건강한 자식을 여럿 두었다고 했다. 40세가 되던 해, 우영은 그 흔한 질병 하나 없이 건강하게 가족들의 품에서 행복하게 삶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탈의파를 통해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준호는 별다른 반응이 없는 듯했으나 잠자코 있던 몸을 갑자기 벌떡 일으켰다.



 그 시각, 우영은 삼도천을 건너는 뱃길에 당도했다. 사람이 죽어서 저승으로 가기 위해 건너는 강. 우영이 죽은 지 7일째 되는 날이었다. 자연스레 나룻배에 올라탄 우영은 평온하기 그지없는 강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안개가 자욱한 강 위에는 오직 뱃사공과 우영 단둘뿐이었다.


 하지만 그때, 저 멀리서 지켜보는 두 눈이 있었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안광에 우영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뽀얀 털이 밝게 빛나는 여우 한 마리였다. 꼬리가 바람결 따라 부드럽게 살랑이고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가 아닌 둘, 셋, 다섯 …아홉?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헛것을 본 듯 우영은 두 눈을 비볐다. 눈 깜짝할 새에 이미 사라지고 없는 형체에 우영이 깜짝 놀라 뱃사공에게 물었다.



"이곳에는 하얀 여우가 다 있습니까?"

"하하-, 붉은색도 아니고 하얀 여우가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삼도천 주변으로는 어떠한 생물도 살 수가 없습니다. 오직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인간만이 존재할 뿐이지요. 이상하다·· 분명히 여우를 보았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지만 더 말을 해봤자 자신을 이상한 사람으로 여길 게 분명했다. 천천히 노를 젓는 뱃사공의 손짓에 따라 잔잔하게 물장구가 피어나는 파장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바로 한 우영은 이 강을 건너고 나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조금은 걱정스러웠다. 죽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 나는 아직 살아있는 양 이리도 멀쩡한 것 같은데…. 자신의 몸을 하나하나 훑어보던 우영은 손가락에 걸린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붉은 실…?

 손가락에 걸려있는 고리를 따라 얇은 실을 잡아당기자 우영의 몸이 기우뚱 옆으로 넘어갔다.



 곧장 물에 빠지겠다 생각한 순간, 우영은 감겨 있던 눈꺼풀이 번쩍-! 뜨였다. 동공이 확장된 채, 심장이 멎었다 깨어난 것처럼 크게 두근거렸다. 눈을 뜨자마자 익숙한 듯 낯선 천장이 보였다. 자신이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한옥 지붕이었다.



'다행이다….'


 

 두통이 이는 듯 이마를 부여잡은 우영은 여전히 새끼손가락에 걸려있는 붉은 실에 안심이 되었다. 그것을 따라 시선을 옮겨가보니 두툼했던 실타래는 어느새 그 많던 실이 다 풀리고 없었다. 몇 가닥 남지 않는 얇은 실들로 겨우 연명하고 있는 것을 보고 우영은 후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 뻔했다.





 그러한 안도감도 잠시, 우영은 반수면 상태에서 만난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떠올라 마음이 울컥울컥 차올랐다. 당장이라도 이준호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것이 전생이든 현생이든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이준호는 그저…… 그저,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이 오랜 세월이 지나오기까지….  강인해 보였던 우영의 눈이 촉촉하게 변해갔다.








우영의 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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