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은 전정국의 말을 듣고 뛰쳐나갔다. 전정국은 갑자기 뛰어나가는 김태형에 놀랐지만 그를 쫓아가지도,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냥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가 보다. 하고 굳이 쫓아가지 않았다.

 

김태형은 달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멈추지 않았다. 이 정도 고통은 여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테니. 그가 열심히 달려서 도착한 곳은 엑소팀 숙소였다. 그는 숙소 앞에서 멈춰서 숨을 몰아쉬었다. 마지막 희망이다. 모든 걸 되돌릴 수 있는, 여주를 살릴 수 있는.

 

떨리는 손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곧 바로 문이 열리고 도경수가 보였다. 도경수는 누군지 확인하자마자 얼굴을 찡그렸다. 곧바로 문을 닫으려 했지만 김태형이 문 사이에 손을 집어넣고 다급히 말했다.

 "아, 제발. 내 말 좀 들어줘... 중요한 일이란 말이야..."

 "쓸데없는 말이면 바로 쫓아낸다."

 "여주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았어..!"

 "미친놈."

 도경수는 그를 미친놈 취급하고 문을 닫으려고 했지만 그의 진지한 눈빛을 보고 손을 멈췄다. 정말 여주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걸까, 김태형을 믿을 순 없었지만 여주를 살릴 수 있는 일이라면 시도라도 해보고 싶었다.

 도경수는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했다. 그리고 이미 그의 말을 다 듣고 있었던 엑소팀원들은 그를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중 리더인 김준면은 그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만약 장난으로 한 말이면 지금 나가세요. 우리도 그쪽들만큼 힘드니까."

 김태형은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믿어 달라는 듯이 강한 고갯짓을 헤댔다. 아직도 미심쩍었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김태형은 다른 이들을 지나치고 변백현에게 다가갔다. 변백현은 자신에게 올 줄 몰랐다는 듯 당황했지만 일단 가만히 있었다. 김태형은 변백현의 손을 잡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변백현 도와줘.. 여주 좀 살려줘..."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

 "너, 니 두번째 능력 뭔지 알잖아."

 "... 시간 역행."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탁할게, 시간 좀 돌리자. 여주가 살아있던 그때로. 여주 이렇게 죽은 거 너무 억울하잖아."

  "하지만..."

 "할 수 있잖아, 알고 있었어. 너네들 실제 능력 감추고 다니는 거. 빛으로 할 수 있잖아, 빛만 모으면.. 되돌릴 수 있잖아.”

 "...그래 한번 해볼 수는 있어, 대신 이 능력을 쓰게 되면 우리팀, 그리고 너를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기억이 지워질 거야. 능력을 쓸 때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거든. 그래도 괜찮겠어? 여주가 똑같은 상처를 다시 받아야 할 수도 있어. 어쩌면 최악의 경우 똑같이 되풀이 될 수도 있고."

 "그건..."

 "니가 막아. 니 목숨을 바쳐서라도 만약 시간을 되돌리고 나서도 달라지는 게 없으면 그땐 우리가 여주 데리고 올 거야."

 "응.. 알겠어..."

 "그리고, 만약 기억을 되찾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이 오르골을 열게 해. 그럼 그 사람은 기억이 돌아올 거야."

 

.

.

.

.

 

 "여기 어디야!!!!!"

눈을 뜨자 처음 보는 천장에 놀란 게 한 번, 주위를 둘러보자 생에 처음 보는 방에 두 번, 그리고 거울을 보자 내 얼굴이 아닌 모습에 세 번. 딱, 세 번 놀랐다. 주위를 둘러보자 보이는 거울에 다가가서 얼굴을 확인하니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순간 내가 기억상실이라도 걸렸나 싶었다. 성형수술을 했는데 내가 그냥 기억을 못하는 건가 싶기도 했고. 하지만 그 의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누군가가 방 안을 자연스럽게 들어와서 아주 빤히 나를 보고 있었다. 들어온 남자의 얼굴을 보니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했다. 아니... 내 방에 들어온 사람이... "가이드가 특별한 이유" 책에 나오는 김태형이면 어떡하냐고... 책이 너무 유명해서 드라마로도 나온 그... 그 소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지금 상황도 잊어버리고 순간 속으로 감탄했다. 우와... 잘생겼다... 

김태형은 자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내가 짜증 났는지, 미간을 찡그렸다. 아... 어떡해... 얼굴을 구겨도 잘생겼네... 

 사실 "가이드가 특별한 이유"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냥 친구들이 하도 얘기해서 어쩌다 보니 등장인물과 스토리 정도는 꿰고 있었던 것 뿐이지. 친구들이 그렇게 잘생겼다. 잘생겼다. 노래를 불렀었는데 이 정도로 잘생긴 줄 알았으면 책이라도  읽었을 거다. 그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얼굴만 쳐다보자 찡그린 미간에 더욱 힘을 주며 내게 말했다.

 "너..."

 "네..?"

 "돌아온 거 맞네.."

 나를 쳐다보며 뭐라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나를 끌어 안았다. 습기 가득한 숨소리에 이 사람 울고 있구나를 느꼈다. 나는 얼떨결에 그의 등을 토닥였다. 금방 그칠 줄 알았던 그의 눈물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저 이유가 있겠지 하면서 등을 일정하게 토닥여 주었다.

 그는 드디어 울음을 멈췄지만 빨개진 눈으로 나를 계속 쳐다봤다. 그렇게 한참을 보다가 일어나더니 나에게 말했다.

  "먼저 내려가 있을게. 얼른 내려와 지은이가 기다리겠다."

 지은이..? 지은이라면 이 책의 여주인공이다. 남주인공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에스퍼들의 공주님 B급 가이드 이지은. B급 가이드여서 사실 팀에 큰 도움이 되진 않지만 남주인공들에게는 소중한 아이였기 때문에 내보내지도 못하고 앰플과 가이딩을 동시에 사용하면서 살아간다. 그치, 그랬지. 근데 내가 주인공이 아니면 이 얼굴은 누구지..? 아주 뻔뻔하게도 나는 내가 주인공으로 빙의가 되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다시 한번 거울을 유심히 보며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 스치는 잊고 있던 한 명의 조연, 악녀. 아... 내가 그 흔하디 흔한 악녀가 됐구나. 이지은을 괴롭히다가 그들한테 걸려 미움을 받고, 그러면서도 절대 괴롭힘을 멈추지 않던. 사실은 못된 방법으로 사랑을 갈구하던 그런 아이. 

 그게 나라니... 하필 왜 악녀냐고!!! 그냥 엑스트라 정도면 좋을 걸... 악녀 역할을 해야 한다니... 그리고 얘 나중에 죽는단 말야... 나는 땅이 꺼질 듯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이미 벌어진 일이라면 차라리 조용히 살자.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나는 익숙치 않은 낯선 내 자신을 거울로 보며 속삭이듯 다짐했다.

  "조용하게, 있는 듯 없는 듯... 그래야 살 수 있어."

나는 심호흡 후 문을 열고 밑으로 내려갔다. 밑으로 내려가자 이미 밥을 먹고 있는 몇 명이 보였다. 다들 나를 한번 쓱 보더니 눈길을 거두고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내가 이미 이지은을 괴롭혔나..? 그래서 이렇게 나를 무시하는 건가, 아니면 그냥 이지은이 아니여서? 후자면 좀 상처 받을 거 같은데. 이유 모를 미움을 받는 건 생각보다 많이 아팠다. 어쩌면 나는 이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오지 않는 관심과 애정에 목말라, 차라리 사랑을 독차지 한 대상을 괴롭히자. 이런 마인드를 가지게 된게 아닐까.

 나는 비어있는 자리로 가 앉았다. 앞에 놓여져 있는 숟가락을 들어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반찬은 많았지만, 내가 악녀라는 생각에 눈치가 보여 이것저것 집어먹을 수가 없었다. 그냥 제일 가깝게 있는 계란후라이나 먹어야지. 나는 내 할 일만 해야겠다. 라는 생각을 하며 밥을 먹고 있었는데 전정국은 나를 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너 오늘 등급 나온다며 낮게 나오면 바로 아웃인 거 알지."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을 때 김태형이 전정국에게 말했다.

 "전정국, 너 말 조심해, 똑같은 실수하고 싶지 않으면."

 전정국은 갑자기 변한 김태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같이 여주를 욕하며 무시할 땐 언제고. 왜 이래 이 형. 뭘 잘못먹었나. 너무 이상해서 순간 걱정까지 했다.

 

김태형은 밥을 다 먹고 전정국의 손을 끌어 여주의 방으로 갔다. 전정국은 내가 쟤 방을 왜 들어가냐고 하며 질색했지만 곧 들려오는 김태형의 단호한 말투에 결국 마지못해 들어갔다.

 

김태형은 변백현이 말했던 오르골을 찾았고 화장대에 있는 오르골을 집어들어 전정국에게 내밀었다. 전정국은 주길래 받긴 받았지만 뭘 어쩌란건지 모르겠어서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김태형이 말했다.

  "열어봐."

  "뭘 열라는거야..."

  "오르골. 열으라고, 그리고 여주를 지켜."

전정국은 이 형이 정말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생각했다. 그래도 표정이 진지한 걸 보니 안 열면 못 나갈 것 같아서 한숨을 쉬며 오르골을 열었다. 이깟 오르골. 열고 빨리 나가자. 하며 근데 그 순간 오르골에서 빛이 쏟아져 나와 전정국을 감싸 안았다. 곧이어 전정국의 눈에서는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고 바로 방에서 나가 여주를 찾았다.

 

밑에서 여주는 식탁에서 앉아 모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여주를 보자마자 전정국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천천히 다가가더니 여주 어깨를 잡았다. 갑자기 다가온 전정국에 여주는 많이 놀랐지만 더 놀라운 건 전정국의 눈물이었다.

 "김여주.. 살아 돌아왔구나..."

 "어..?"

김태형은 다짜고짜 여주를 안으려고 하는 전정국을 막았다, 그리고는 입모양으로 그에게 말했다.

 "아직은 알게 해선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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