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5월 어느 날


"정식으로 협력자가 되어주겠다니 나야 고맙지만 괜찮은거야?"

"안 괜찮을거 뭐 있어요. 게다가 개인의 협력자라기 보단 제로에 협력하는 쪽이잖아요."

"그러니 더 걱정이지. 개인의 협력자보다 더 힘들지 모르니까. 일의 무게도, 난이도도."

"어차피 절 써먹을 곳은 정해져있을 텐데요, 뭘. 그 분야에선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도 않을테구요. 저 그쪽으론 세계 최고라고 인정 받은거나 다름없는거 아시잖아요."

"...그래. 그래도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 이래 봬도 꽤 직급이 높은 편이니까."

"네, 그럴게요."


봄의 끝자락, 여름이 다가올 무렵. 나는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완전히 귀국했다. 예의 조직에 잠입 임무를 그만두게 된 아카이 상이 FBI와 일하는 걸 권하기도 했고, 학교로 부터 교수로 오지 않겠냐는 제안, 각종 유명 회사의 CTO로서의 제안을 받았지만 전부 거절하고 일본으로 돌아온 참이다. 부모님이나 하쿠도 상의 영향도 있지만 꽤 친해진 후루야 상의 동기들도 걱정이고, 무엇보다 후루야 상이 걱정 돼서라도 돌아와야 했다. 아무래도 동생도 관련되고, 후루야 상이 부상당하는 원인인 조직은 이쪽이 홈그라운드인 모양이니까.


"보안 프로그램을 재구성하는 건 시간이 좀 걸릴거예요. 정보마다 보안 단계가 다 다르고 전체적으로 어떻게 구성할 지도 고민해야하니까요."

"전에 설명들은 적 있었지. 얼마나 걸릴 것 같아?"

"현재 보안 상태는 확인했으니까 제대로 보고서 써서 올릴게요. 검토해서 윗분들 결재가 떨어지면 바로 작업들어갈거예요."

"그래. 도움이 필요한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그럴게요. 오늘은 바로 들어가서..."

"소라?"


하쿠도 상과 대화를 하던 중 사무실 나가려던 찰나 문밖으로 보이는 후루야 상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말 끝을 흐렸다. 이렇게 내 몸으로 그를 마주보는 건 처음이라 그가 나와 눈을 마주칠 때까지 무심코 바라보게 되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는 아차 싶어 시선을 돌렸지만 이미 글렀겠지?


"왜 그래? 수사관들 중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신입은 없어서 대부분 한 번 쯤 본 사람들일텐데..."

"아뇨. 그냥...눈에 조금 띄는 사람이다 싶어서..."

"아, 누굴 말하는 건지 알겠네. 뭐, 이런저런 예외 사항이 있었어. 언젠가 소개하게 될 일이 있을테니까 그때 정식으로 인사시켜줄게."

"네. 그럼 전 이만."


아무렇지 않은 듯 답하고 날 쳐다보는 듯한 후루야 상의 시선도 무시한채 그 옆을 지나치며 경비기획과를 나섰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려나? 첫인상은 좋게 남기고 싶었는데...아, 이미 동기들에게 내 얘길 들었으려나.


"뭐, 고민해도 소용없겠지. 몇 년 뒤가 되어도 그는 내가 아는 그가 아닐테니까."


그렇게 나는 나와 인연이 닿은, '레이 상'이라고 부르고 싶은 '후루야 상'과 방금 마주친 '후루야 레이'를 구분지으며 주어진 임무로 다시금 머리속을 꽉 채웠다.


"뭐냐, 후루야~ 너도 미인이면 눈이 돌아가는 모양이지?"

"하? 무슨 헛소리야?"

"방금 하쿠도 상의 사무실에서 나온 사람 말이야."

"객관적으로 봐도 미인인건 인정하겠지만 그래서 본 건 아니야. 먼저 쳐다본 건 저쪽이라 오히려 내가 궁금하군."

"오- 역시 미남은 다르다 이건가?"

"시끄러워. 그래서 넌 아는 사람이야?"

"잘은 모르는데 이름 정도는 알아. 후지미네 소라. 종종 이쪽에 얼굴을 비추는 걸 보면 아마 하쿠도 상의 협력자 정도? 아직 어려보이는 걸 고려하면 협력자가 된 건 최근의 일이고 원래 알던 사이겠지."

"...후지미네? 확실해?"

"어? 엉. 뭐야. 아는 이름이야?"

"조금. 직접 본 건 아니라 확신은 없지만."

"뭔데, 뭔데~"


레이는 일방적으로 받았던 동기들로부터의 연락에서 보았던 그들의 은인이라는 이의 이름을 떠올린다. 하지만 직접 본적도 없고 소라의 이름이 그리 희귀한 이름도 아니기에 단언할 순 없었다. 그럼에도 레이는 어쩐지 소라의 얼굴이 눈에 밟혔다. 이성에게 드는 연애적인 감정과는 다른 미묘한 감정이 그녀가 나간 문에서 눈을 때지 못하게 만들었다.


"진짜 뭐 있는거냐?"

"몰라. 됐고 이거나 처리해놔. 급한 건이니까."

"엥? 그러고 가버리는게 어딨냐!"

"여기있다. 그리고 시끄럽다고 몇 번 말해."




22년 5월 어느 날


"이걸 죽여, 살려?"

"하하하..."


하나 뿐인 귀여운 사촌동생이 조직과 관련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알고있었는데...그게 이렇게 일줄은 몰랐지!!


"너는 낄 데, 안 낄 데 구분을 좀 해! 아직 미성년자에 네 직업이 경찰이나 탐정인 것도 아니잖아!"

"죄송합니다..."

"하...이렇게 된 거 이제와서 되돌릴 수도 없고 앞으로 어떻게 할 지나 생각해."

"그, 그건 어떻게든 해결했어! 당분간 란 네 집에서 신세지면서 정보를 좀 모을 생각이야."

"뭐? 란? 제정신이야?"

"그럼 뭐 어떡해!"

"진짜 한숨밖에 안 나오네. 안 들킬 자신은 있고?"

"에이- 갑자기 고등학생이 초등학생이 됐다고 한들 누가 믿겠어~ 사실대로 말해도 안 믿을 걸?"

"자랑이다 임마!"


뺀질뺀질한 얼굴로 열받는 소리만 늘어놓는 신이치의 머리에 결국 꿀밤을 먹여버렸다. 귀엽디 귀여웠던 초등학교 시절의 얼굴로 억울한 듯 날 쳐다보니 조금 죄책감이 들었지만 알맹이가 열일곱 고등학생이라 상기하면 얄미움의 극치다.


"앞으로 정말 중요한 일 말고는 네가 원래 대로 돌아가는 데 힘을 보태줄게. 너도 이 이상 허튼 짓 하지말고 위험한 일에 끼어들지마."

"진짜? 누나가 도와주면 금방이지! 누나가 모르는 정보 따윈 없잖아!"

"아부하긴. 대신 고모부나 고모한테도-"

"아, 안 돼! 누나만 알고 있으라고 몰래 부른거란 말이야..!"

"하?"


얘가 진짜 열받는 소리를 하고 자빠졌네. 어디 가둬둘까? 시간만 되면 내가 잘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 조직과 관련됐으니 아카이 상이나 하쿠도 상도 적당히 부려먹으면...


"...미안. 그래도 나중에, 조금만 더 나중에 말하면 안 돼? 응?"

"어차피 알게 될 거 더 늦어진다고 뭐가 달라져? 오히려 빨리 해결하려면 아시는 쪽이 낫지."

"일단 내가 해결해볼게. 응?"

"좋아. 그럼 한 달 준다. 그 전에 안 되면 무조건 알리는 거다. 어차피 그때쯤이면 귀국하실테고."

"응! 고마워!"

"알면 사고치지마. 수습하는건 이제 질려."

"응? 전에 무슨 일 있었어?"

"...아무것도 아니야. 난 그만 간다. 이것저것 알아봐야 하니까."

"응. 조심해서 가."


이후로 나는 사고뭉치를 위해 이것저것 알아보기 시작했고 문제의 조직은 많은 정보기관들이 애를 먹은 만큼 쉽지 않은 상대였다. 결국 유예기간인 한 달 안에 무엇도 해결되지 않아 고모부와 고모도 신이치의 상황을 알게 되었고 여차저차 해서 아카이 상을 비롯한 FBI의 도움도 얻게 되었다. 코난이라는 이름으로 살게 된 신이치는 어느새 제로인 후루야 상과 모로후시 상을 비롯해 그 동기들과의 친분도 만들어버렸더라.

하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나는 이곳의 후루야 상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를 필요이상으로 마주하면 1년 넘게 만나지 못하고 있는 '후루야 상'이 떠오르고 마니까. 그나마 팬던트로 만든 아몬드 꽃잎의 압화와 그동안 주고 받은 교환일기가 허한 마음을 달래주는 정도였다. 한 번 만, 딱 한 번 만 더 바뀌면 좋을텐데...


"그러면 그를 '레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알 수 있잖아. 직접 듣지는 못해도 그가 '소라'라고 불러주는지도 알 수 있고."


연애적인 감정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시간이 갈 수록 그와의 추억을 되돌아 볼 수록 그 감정의 깊이가 더해지며 이런게 사랑인가 싶었다. 그렇다고 대용품 마냥 아무런 추억도 없을 지금의 후루야 상과 무언가를 시작할 생각은 없다. 그러니 사적으로 그를 만나는 일은 없었어야 할텐데...



22년 10월 30일


무슨 변덕인지 할로윈을 하루 앞둔 날, 어떻게든 후루야 상을 만나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포와로의 마감시간에 맞춰 갑작스럽게 그를 찾아갔다.


"죄송하지만 마감...후지미네 상?"

"잠깐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저와요?"

"여기 ㅎ, 아무로 상 뿐이니까요."

"...그렇네요. 커피는 무리지만 주스 정도는 드릴 수 있는데, 어떤게 좋으세요?"

"괜찮아요. 그리 긴 얘기도 아니니까요."

"아, 네..."


내가 평소에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 쯤은 그도 알고 있을테니 이렇게 나오는게 당황스러울게 뻔했다. 표정관리를 하고 있긴 하지만 간간히 당황스러움이 비져나오고 있으니까. 나는 대체 왜, 하필 오늘, 그를 만나고 싶었던 걸까. 차마 첫마디를 시작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데 압화 팬던트가 눈에 들어왔다. 아, 이거. 결국 내 기적은 뭘까 싶었지. 기적이 누군가를 살려주는 거라면 후루야 상이 그 정도의 부상으로 그친게 어쩌면...


"3번지 근처 언덕의 오래된 아몬드 나무를 아시나요?"

"그런게 있었나요? 이 동네로 이사온 건 얼마 되지 않아서 몰랐네요."

"그럼 거기에 얽힌 전설도 모르시겠네요."

"...네."

"실없는 얘기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들어주실래요?"

"얼마든지요."


후루야 상은 꾸며낸 사람좋은 얼굴을 하고선 웃으며 답한다. 그에 나는 천천히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떨어지는 꽃잎을 한 번에 잡은 숫자만큼 기적이 일어난다는 전설이에요."

"희망적인 전설이네요. 괴담인가 싶었어요."

"전 괴담은 믿지 않는 편이라서요."

"전설도 딱히 과학적인 근거가 있진 않잖아요."

"그렇지만 직접 겪은 걸 없던 일 취급하는 재주도 없어서요."


내 말에 후루야 상은 '그런가요'라며 긍정적인 대답을 내뱉으면서도 여전히 믿지 못하는 눈이었다. 그거 어딘가에 있을 당신의 얘긴데.


"꽃잎을 잡은 '그'는 친구 넷을 구하는 기적을 경험했죠."

"친구, 넷을요..."

"네."

"그게 정말 꽃잎을 잡아서 찾아온 기적이었을까요?"

"물론. 그게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거든요. 그러니 제가 잡은 하나의 꽃잎도 무언가 기적을 일으켜 주겠지...라고 여기고 있어요."

"...그렇군요. 후지미네 상은 어떤 기적을 바라나요?"

"소중한 사람의 안전?"

"그건 코난 군을 말하는 걸까요?"

"그 아이는 그런 기적이 아니라도 지켜주는 사람이 많으니 괜찮을거예요. 그러니 이건 당신에게-"


나는 걸고 있던 팬던트 목걸이를 풀어 후루야 상에게 건냈다. 그는 얼떨결에 그걸 받았지만 의아한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제가 잡은 아몬드 꽃잎을 압화 팬던트로 만든 목걸이에요. 당신에게 그 어떤 연애적인 감정, 그 비슷한 게 있어서 드리는게 아니에요. 사적인 감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걸 저더러 믿으라는 건가요?"

"손해는 아닐거예요. 그냥 부적이라고 생각하세요. 언젠가 진짜 당신의 목숨을 구해줄지도 모르잖아요."

"탐정으로선 그런 미신을 믿는 편이 아닌데요."

"그렇겠죠. 하지만 '아무로 토오루'는 타인의 호의를 내버리는 냉혈한이 아니죠."

"...당신-"


후루야 상의 눈빛이 순식간에 변한다. 아마 내가 한 말이 자신의 다른 정체를 알고있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의심스러워서라도 저걸 그냥 버리는 일이 없지 않을까.


"날 새울 것 없어요. 당신이 다섯 장의 벚꽃잎 중 하나로 있는 한, 내 가족에게 손을 대지 않는 한, 나는 절대 배신하지 않는 당신의 아군일테니까요."

"더 의심스럽다는 거 알텐데요."

"검사 해봐도 좋아요. 그게 폭발물의 일종일지는 마츠다 상이 잘 알테니까. 당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은 아마 하쿠도 상, 모로후시 상에게 물으면 뭐라도 답이 나오겠죠. 어차피 절 한 번은 본 적 있잖아요. 작년 쯤?"

"...그랬던 기억은 있네요."

"부탁드려요. 그거 잘 하고 다녀주세요."


후루야 상은 한참을 고민하더니 이내 받은 목걸이를 스스로 목에 걸었다. 애초에 화려한 디자인이 아니어서 그런지 크게 위화감은 없어 보였다. 화려했어도 저 얼굴이면 뭔들 안 어울리겠냐만은.


"잘 어울리네요. 그럼 전 이만."

"왜 하필 오늘 전해주는 거죠? 꽤 오래 지니고 있었던 물건 같은데."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계속해서 근거없는 감 뿐이네요."

"저는 제 감을 믿어요. 그의 첫번째 기적도 그 감이 잘 맞아서 귀국했던 덕분에 일어날 수 있었으니까."


나는 처음 후루야 상의 동기를 구했던 때를 떠올리며 가볍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더는 시간 끌 것 없다는 생각에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시는 건가요?"

"아쉬우세요?"

"예의상 물었어요."

"아깝네요. 참, 그거 알아요?"

"네?"


곧바로 돌아서려던 나는 후회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몇 마디를 더 보태기로 마음먹고 입을 열었다.


"아몬드꽃의 꽃말은 희망. 그게 기적을 가져다 주면, 그 기적으로 당신이 희망을 볼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을 것 같아요. 지금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당신은 제 기적이고, 희망이에요."

"그게 무슨..."

"그럼 저는 진짜 가볼게요. 해야할 말과 전할 것은 모두 전했으니까요. 부디 몸 건강히 지내길."


포와로를 나서는 나는 그 다음 날이 되어서야 왜 오늘이 아니면 안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 감이 잘 들어맞는 대부분은 좋지 않은 일이었다는 것도.




23년 10월 초


"이상한데."


하기와라를 구한 이후 진작에 압화로 만들어 소중히 보관했던 다섯장의 꽃잎은 왜인지 딱 한장을 남겨두고 색이 바라거나 바스라졌다. 하지만 지금 이상하다고 한 건 그걸 말한 건 아니었다. 아직 꽃잎이 하나, 일어나야 할 기적이 하나 남았는데도 한달 간격으로 몸이 바뀌던 게 뚝 끊어져버렸다. 처음에도 꽤나 불규칙적인 패턴이었으니 이번에도 그런 건가 하고 넘기기엔 어딘가 마음에 걸렸다. 이런 좋지 않은 불안감은 항상 잘 들어맞았던 기억이 있어 곤란하다. 그런 내 생각을 끊어준 건 하쿠도 상으로부터의 전화였다.


"네. 무슨 일입니까?"

[조직소탕 때의 증거품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온게 후루야 군과 관련 있는 것 같아서 확인차 들러줬으면 좋겠어.]

"제 소지품이라도 발견된 겁니까? 딱히 뭘 잃어버린 기억은 없습니다만."

[일단 확인만 해줬으면 해. 잠깐 들러줄 수 있나?]

"네. 금방 가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네.]


몇 달 뒤면 조직 소탕으로 부터 1년이 지나게 된다. 물론 워낙 광범위한 조직이라 잔당처리가 몇 달 전까지도 이어졌을 정도긴 하지만 이제와서 무슨 물건이 발견 됐다는 건지...경비기획과까지 도착한 나는 하쿠도 상의 사무실에서 목걸이 하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수수하지만도 않은 팬던트 형식의 목걸이. 그런데 어째서인지 목걸이를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후루야 군..?"

"...아, 죄송합니다. 눈에 뭐가 들어갔나봅니다. 그래서 이건 왜-"

"구석에 박혀있던 걸 며칠 전에 발견했어. 처음엔 조직원과 관련된 물건인가 했지만 거기서 나온 지문은 자네의 것이었지."

"제 물건이란 말입니까? 기억에 없는데요."

"하지만 지문이 남아있었지. 사용했던 사람이 자네라는 걸 알려주는 위치에. 그리고 팬던트의 안쪽엔..."

"...."

"다른 이의 지문이 있었어. 내가 잘 아는 어떤 이의 지문이. 내가 묻고 싶은 건 그거야. 후루야 군, 자네. 소라, 후지미네 소라와 무슨 관계지?"


날카롭게 물어오는 하쿠도 상의 물음은 완전히 잊고 있었던 어느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소라와의 첫만남은 몸이 바뀌었을 때가 아니었다. 작년 이맘 때, 소라를 알지 못하던 나는 그녀를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압화 팬던트 목걸이를 받은 건 그때였다.


'손해는 아닐거예요. 그냥 부적이라고 생각하세요. 언젠가 진짜 당신의 목숨을 구해줄지도 모르잖아요.'


소라가 했던 말이 떠올라 하쿠도 상의 손에 들린 목걸이를 자세히 살피니 무언가에 긁힌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래. 난 저 목걸이 덕분에 찰나의 기회를 잡아 중상으로 그친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아, 소라의 기적은 어쩌면 내 목숨을 살린 걸지도 모르겠네. 친구들의 은인을 넘어 내 생명의 은인 조차 그녀였다니.


"후루야 군, 내 질문에 대답해주었으면 하는데. 소라의 일이라면 내게 아주 중요한 문제니까."

"알고있습니다. 소중한 사람일테니까."

"뭐? 하지만 자네는-"

"지금 기억났습니다. 이건 작년 할로윈 전날 소라가 제게 건내준 것입니다. 부적이라고. 그리고 덕분에 전 소탕작전 중 중상에 그친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죠."

"...작년 할로윈 전날이라고..?"

"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아무것도...아니네."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기엔 하쿠도 상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있었지만 새롭게 떠오른 기억 쪽에 더 관심이 있었던 나는 그 반응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목걸이를 넘겨받길 원했다. 하쿠도 상은 잠시 머뭇거리긴 했지만 내게 목걸이를 넘겨주었다.


"소라와의 관계를 궁금해 하시는 것 같은데 조만간 제대로 설명하겠습니다. 할 일이 좀 생각나서 오늘은 이만 가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길 바라네."

"그럴겁니다. 제게 무엇보다 소중한 보물일테니까요."


나는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느끼며 목걸이를 목에 걸고 사무실을 나섰다. 소라의 기적이 내 목숨을 살린거라면 내 남은 기적은 그녀를 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쪽이 타당하다. 내게 목걸이가 부적이 되어주었으니 나도 같은 방법으로 되돌려 줄 수 있으면 되는거겠지. 그리고 어쩌면 그 기적이 이루어지는 그 날 소라에게 '레이'라 불릴 수 있지 않을까.


"정정해야겠네. 단순한 은인보다는 좀 더 깊은 감정이라고."


막 내 감정의 끝자락을 잡아낸 것에 들떠 생각도 못했다. 이 모든 바람이 좌절될 거라고는. 조금도.




23년 10월 30일


"혹시 몰라서 좀 더 튼튼하게 만들긴 했는데...이걸로 괜찮겠지?"


압화로 만든 팬던트 목걸이의 완성본은 생각보다 빨리 내 손에 들어왔다. 소라가 내게 건내주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심플한 디자인의 팬던트를 선택했는데 조금 더 화려했어도 나쁘지 않을 뻔 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완성하긴 했으니 건내주기 위해 소라를 만나야 했다. 소라라면 모를까 내가 직접 소라를 찾아낼 순 없다. 그 방면으론 여전히 소라의 실력을 뛰어넘지 못했으니까.


"남은 건 지인에게 묻는 방법 뿐이겠군."


더 기다릴 것도 없이 목걸이를 가지고 집을 나선 나는 가장 먼저 모리 탐정사무소로 향했다. 가족들이 있을 쿠도 저택으로 향하지 않은 건 이전에 묘하게 소라에 대해 아는 나를 경계한 쿠도 군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하쿠도 상도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으니 이쪽이 최선이었다.


"안녕하세요, 모리 상."

"아무로 군? 여긴 어쩐 일인가. 사건을 찾으러 온거라면 안타깝게도 오늘은 일 없어."

"아뇨. 여쭤볼게 있어서 들렀어요."

"자네가?"

"네. 소라에게 꼭 전하고 싶은게 있어서요."

"...소라라고?"


아니나 다를까 모리 상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진다. 하지만 이내 내가 말하는 소라가 자신이 아는 소라와 다르겠지 싶었는지 '사람찾기냐? 지인이라도 의뢰비는 받는다.'라고 받아친다.


"전혀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제가 말한 '소라'는 모리 상이 알고계신 그 '소라'가 맞아요."

"...그리 달갑지 않은 얘기라고 전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그 전에 자네, 소라랑 아는 사이였나? 들은 기억은 없는데."

"단순히 아는 사이라고 보기엔 좀 복잡해요. 일단은 생명의 은인이고 친구들을 구하는 데도 도움을 준 은인이기도 하니까요."

"뭐?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래서 어떻게든 전하고 싶은게 있어서요."


모리 상은 한참을 고민하더니 직접 전해야 하는 거냐 물어온다. 꼭 그래야 할 필요는 없지만 이왕 주는거 얼굴을 보고 전해주고 싶었기에 그렇다고 답했다.


"그럼 내일 3시까지 다시 와. 좀 걸리긴 하지만 어차피 가족들은 오전에 다녀온다했으니 마주칠 일도 없겠지."

"가족이라면...쿠도 군 쪽을 말하시는 건가요?"

"그렇지 뭐. 너도 알고 있는거 아냐?"

"네."

"제가 그들과 마주치는 게 모리 상에게 곤란한 일이라면 그냥 오늘 다녀올테니 장소만 알려주세요."

"응? 어차피 전해줄거면 내일이 낫지 않아? 내일 바빠서 시간이 안 되면 몰라도."


모리 상의 말은 어딘가 이상했다. 어차피 내일이 낫다니. 내일은 딱히 주말도 아니고 오늘도 평일이니 오늘과 내일이 다르다고 다르다고 판단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내가 은퇴한 이후 본명을 알려주진 않았지만 대충 사정을 알고 있는 모리 상이라면 더더욱 그래야 했다. 내일이, 10월 31일 할로윈이 '후지미네 소라'라는 존재에 있어 특별한 날이 아니라면.


"어? 아무로 상! 어쩐 일이세요?"

"소라에게 전할 게 있다고 찾아왔다. 그래서 내일 같이 가자고 했어."

"네? 소라 언니랑 아는 사이였어요? 전엔 아닌 것처럼 말씀하시더니..."

"사정이 좀 복잡해서요."

"신이치도 알고 있어요? 아, 모르겠구나. 전에 혹시 언니한테 아무로 상의 얘기를 들은 적 있냐고 물은적이 있었으니까..."


이쪽에는 직접적으로 떠본건가. 굉장히 예민하군. 혹시 소라가 그 능력으로 조직과의 일에 연류되었다고 해도 조직이 완전히 궤멸된 지금은 그렇게 신경을 곤두 세울 이유가 없을텐데.


"그랬나요? 모를만도 하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인연이라서요. 그래서 같이 보다는 혼자가 좋을 것 같아서 오늘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던 참이거든요."

"전해줄 게 상하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게 더 나을텐데...혹시 벌레라도 생기면 관리인 분이 곤란해 하실테니까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런데...관리인이요?"

"아, 네. 신이치 가족의 개인 사유지라서 다른 사람이 들어올 일은 없으니 누가 훔쳐가진 않겠지만 일단 관리하시는 분은 계시거든요."

"...이해가 안 되는데요. 소라에게 전하는데 누가 훔쳐간다는 거죠? 직접 만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소린가요?"

"네? 아무로 상이야 말로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대화가 맞지 않는다. 물건을 전할 수는 있지만 본인이 직접 받을 상황은 아니다? 혹시 조직의 일에 관여한 것 때문에 중상을 입고 혼수상태인건가? 그렇다면 주변에서 소라의 얘기가 나올 때마다 예민한 반응을 보인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갑자기 몸이 바뀌지 않게 된 것도 그런 이유인 걸지도 모르고.


"너 진짜로 소라랑 아는 사이인게 맞아? 거긴 유리 상과 케이 상도 있는 곳이니 소란을 피우는 건 곤란한데."

"유리 상과 케이 상...?"


낯선 이름이지만 처음 듣는 건 아니었다.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데...어디지? 한참 고민을 해야하나 싶었지만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예전의 나에겐 아니지만 지금의 나에겐 제법 중요한 사람들이니까.


"소라의 부모님..! 하지만 그 분들은 그 놈들 때문에 소라가 어릴 적 순직...잠깐, 지금 거기에 같이 있다고 했습니까?"


그럴리가 없어. 그건 마치...소라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처럼 들리잖아.


"설마...몰랐던거냐?"

"네? 하지만 소라 언니가 죽은지 벌써 1년이 지났는데..."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소라가, 내게 네 번이나 기적을 안겨준 그녀가 죽었을리 없..!"


생각지도 못한 정보에 혼란스러운 와중 1년 전 오늘, 소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왜 하필 오늘이냐는 내 말에 그녀가 내뱉었던 그 답이.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그녀는 그걸 그저 감이라고 했다. 그리고 모리 상이 내일이 특별한 날인 것처럼 언급하는 걸 보면 내일이 그녀의 기일. 두 사실을 종합했을 때, 그녀는 죽기 전 날 늦지 않게 내게 목걸이를 전하러 온거였다. 그 덕분에 나는 죽지 않고 살았지만 그녀는...


"그럴리 없어. 이 목숨이 그녀를 대가로 얻은 거였을리가..."

"아무로 군?"


나는 모리 상의 말의 믿고 싶지 않아 그대로 탐정 사무소를 뛰쳐나와 쿠도 저택으로 내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고 불편한 다리로 인해 몇 번이고 넘어졌지만 왼팔의 감각 마비가 전염이라도 된 듯 고통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엉망진창인 상태로 쿠도 저택에 도착한 나는 예의 따위 차릴 새도 없이 죽어라 대문을 두들기며 소리쳤다.


"아무라도 좋으니까! 당장 나와서 설명해! 소라는 살이있다고 말해달란 말이야!"


내 난동에 오래 지나지 않아 쿠도 가족이 전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내게 다가오기도 전에 나는 대문의 철장을 붙잡고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소라는. 소라는 어디있습니까! 당장 만나게 해주십시오!"

"설마 후루야 상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누나에 대해서 묻고 다녔던 거군요."

"만나게 해달라고!"

"진정하세요, 후루야 군. 이미 듣고 온 거 아닌가요? 소라는 죽었습니다. 작년 할로윈, 당신이 잠입했던 조직의 손에."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그녀가, 내 목숨을 살린 그녀가 죽었을리 없습니다."

"목숨을 살려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누나랑 원래 알던 사이셨어요?"

"유사쿠 상은 기억하고 있을텐데요. 저와 소라가 어떤 사이였는지."

"네. 마지막으로 들었던 호칭은 '후지미네'였던 것 같은데 모르는 사이 더 친해졌던 건가요? 소라는 당신을 꽤 좋아한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 이 상황을 본다면 안타까워 할 것 같군요."


차분한 유사쿠 상의 모습에 점차 몸의 고통이 돌아오며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소라의 죽음을 내가 인정했다는 것과도 같은 사실이었다. 철장을 움켜쥔 손에서 힘이 빠지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절망에 휩싸인 순간 고개를 숙인 내 눈에 들어온 건 목에 걸려있던 소라가 건내준 팬던트 목걸이의 흠집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에게 건내주려 했던 내가 만든 팬던트 목걸이의 존재를 떠올렸다. 그래. 소라의 기적은 이걸로 끝난 걸지 모르지만 내 기적은?


"아직 하나 남았어."

"후루야 상, 괜찮은거예요?"

"유사쿠 상."

"네."

"소라가 그 놈들의 손에 죽은게 확실합니까?"

"이런 걸로 거짓말 할 이유는 없죠."

"하쿠도 상이라면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겠군요."

"그렇긴 하겠지만...설마, 후루야 군-"

"집 앞에서 추태를 부려 죄송했습니다. 전 급한 일이 생겨서 이만."


살릴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정보수집이 먼저겠지. 반드시 과거를 바꿔 살릴거야.



* * *



"...소라가 죽을 당시의 상황을?"

"전부. 사소한 것 무엇하나 빠짐없이 다 알려주십시오."

"후루야 군, 자네는 이제 제로의 소속이 아닌 건 당연하고 경찰조차 아니야."

"알고있습니다. 그럼에도 전 알아야 겠습니다. 소라를 위해서."

"복수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런거라면 더더욱 허락할 수 없어."

"이제와서 복수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럼 왜 그 정보가 필요한 거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데."


하쿠도 상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차분히 논리적으로 그를 설득할 시간 따윈 없다. 지금까지의 패턴도 깨졌으니 언제 몸이 바뀌게 될 지도 모르니까.


"얼굴을 보니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군."

"네."

"정말 그걸 알려주는게 소라를 위한 거라고 확신할 수 있나?"

"물론입니다."

"내가 알려주지 않겠다고 하면?"

"여기서 얻는 편이 편하니까 온 것 뿐입니다. 알려주지 않으시겠다면 절대 안 볼 생각이었던 그 녀석을 찾아가야겠죠."

"...FBI쪽을 말하는 건가?"

"네."


빈말은 아니었다. 어쨌든 이쪽 소속이었기에 빠르게 정보를 얻기 위해 찾은 것 뿐이었다. 소라를 살릴 수 있다면 조직 소탕이후 쳐다도 보기 싫었던 아카이 얼굴을 다시 보는 것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가 그저 홧김에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하쿠도 상도 알았는지 한숨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거절하는게 맞겠지만 네가 그렇게까지 나온다면 이유가 있는거겠지. FBI쪽 보다 우리쪽 정보가 훨씬 정확하고 자세하기도 할테고."

"알려주시겠다는 겁니까?"

"그래. 대신 외부로의 유출은 곤란해. 모든 자료는 여기서 보고 이 사무실 밖으로는 한 글자도 가지고 나갈 수 없다."

"네."


보안 때문인지 위에서 정식 문서로 남기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인지 종이 문서로 보고서가 남겨져 있었다. 언제 어디서 살해당했는지는 물론 당시 진행된 부검 내용까지 세세히 기록되어있었다. 그 내용 덕분에 비록 기록되어 있진 않았지만 누가 범인이었을지도 대충 짐작이 갔다. 이 방을 나서면 다시는 볼 수 없는 자료였기에 토시 하나 빠뜨리지 않고 머리속에 새겼다. 당장 여길 나서자 마자 기회가 온다고 하여도 제대로 구해낼 수 있도록 해야 했으니까.


"감사했습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이제 와서 소라를 되살릴 수도 없을텐데 왜 그렇게 필사적인 거야?"

"둘 다 구하진 못하겠지만 한 명 정도는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뭐? 그게 무슨-"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한 하쿠도 상에게 제대로 된 답을 주지도 않고 그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내게 지금 중요한 건 그 무엇도 아닌 내 동기들을 살릴 기회를 주었던 소라를 살리는 거였으니까.



* * *



경찰청을 빠져나온 레이는 머리속으로 세운 계획을 실천하는데 필요할 물건들을 하나 둘 모았고 필요한 것들이 모두 갖추어 지고 나서는 이걸 어떻게 소라에게 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제일 그럴듯 한 건 내일이 그녀의 기일이니 자정이 넘어가면 몸이 바뀌거나 예전처럼 잠이 든 사이 그 날의 그녀와 몸이 바뀌는 형태겠지만 확신할 순 없었다.


"지금껏 몸이 바뀌었을 땐 초반 몇 번을 빼고는 죄다 날짜가 맞진 않았어. 이번이 특별한 케이스라 처음 바뀌었을 때처럼 날짜까지 맞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확신은 못하겠는데..."


이렇게 고민한다 한들 소라를 알게 된 계기 조차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기에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레이는 뜬 눈으로 밤을 새우다 물건들과 소라에게 건내주지 못한 목걸이를 손에 쥔 채 잠이 들어버렸다.



22년 10월 31일


레이가 잠에서 깨어나 다시 눈을 떴을 땐 기대했던 소라의 몸이 아닌 여전히 그의 몸 그대로였다.

오늘이 지나면 정말 기회가 사라질 것만 같은 기분에 레이는 잠이 들 때까지 손에서 놓치 않았던 것들을 챙겨들고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아몬드 나무가 있는 언덕으로 달려간다. 소라와 만나게 해주었던 계기가 되어준 것이니 이번에도 기적을 보여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해서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여기가 아니면 다른 곳은 없는데..."


레이는 나무에 조심히 손도 가져가 보고 떨어지는 붉게 변한 잎들을 잡아 보기도 했지만 별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 수록 레이의 마음은 초초해지고 소라에게 받은 팬던트를 열어 안에 들은 압화 꽃잎을 만지작 거리기만 했다. 그러다 슬슬 하늘이 붉게 물든 잎과 같은 색을 띨 때 쯤, 레이 밖에 없던 공간에서 다른 인기척이 느껴지게 된다.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서있던 레이는 바로 뒤에서 느껴진 인기척에 황급히 뒤로 돌았고 그곳엔 그가 그토록 만나고 싶던 이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후루야 상?"

"소라..? 정말 소라 너 맞아?"

"아니, 왜 여기에...그보다 소라라니 아직 후루야 상은..."


소라는 본인을 '소라'라고 부르는 레이의 행동에 혼란스러웠다. 이 시기의 그는 소라와 이렇다 할 접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상황을 채 파악하기도 전에 레이가 들고 있던 물건들을 한쪽으로 치워버리고 소라를 끌어안는다.


"왜, 왜 그래요?!"

"다행이다..."

"아니, 대체 왜...일단 이거 좀 놓고 천천히 얘기해요. 네?"


살아있는 소라를 만나 흥분이 가시지 않은 레이를 소라가 잘 달래고 그의 품에서 어떻게든 떨어져 나왔을 때 소라의 눈에 그녀가 만들었고 바로 어제 자신이 있던 시간대의 레이에게 준 목걸이를 발견한다.


"이거..."


하지만 그녀가 줬을 때와는 달리 눈에 띄는 흠집을 발견하고는 눈 앞에 있는 레이가 자기와 교환일기를 주고 받던 그 레이라는 걸 깨닫는다.


"설마...그 후루야 상이에요? 정말로?"

"그럼 누구겠어? 아니면 너와 같은 시간을 살고 있을 나랑도 친해졌어? 내가 순순히 이름을 알려줄 만큼?"

"음- 그건 아니죠. 그런데 절 소라라고 불러준다는 건 저도 이름 불러도 된다는 허락이죠?"

"안 될 거 뭐있어."

"좋네요. 레이 상이 제 이름 불러주는 걸 듣는 건 한참 후라고 생각했는데..."


웃으며 말하는 소라를 보고 레이는 무언가 울컥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만나지 못했다면 소라는 영원히 레이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걸 듣지 못했을 테고 레이 역시 소라에게 이름을 듣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눈치 빠른 소라는 그런 레이의 표정에서 레이와 몸이 바뀌었을 때 느낀 점을 더해 자신의 미래를 직감했다.


"어쩐지 어제 팬던트를 너무 주고싶더라. 중상에 그쳤던 이유가 팬던트 때문이었네요. 그래도 기왕이면 경상이었으면 좋았을텐데..."

"넌, 지금 그런 말이..!"

"충격 받았어요? 나 죽었다는 얘기 듣고."

"당연한 소리를-"

"괜찮아요. 이렇게 만났으니까 됐죠. 조직 일도 잘 마무리 될 거고."

"안 괜찮아. 난 너 살리려고 온거야. 지금부터 다 알려줄테니까 정신차리고 살아남을 생각만 해."


레이는 들고 있던 물건들을 전부 넘기며 자신이 세운 계획을 빠르게 늘어놓는다. 기본적인 계획은 FBI들을 매번 위기에서 구해낼 때 쓴 방법과 결이 같아서 소라가 이해하는데는 무리가 없었다. 실제로 소라가 총에 머리를 관통당해 살해된 건 아니었기에 방법을 생각해내는 데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레이 상은 빨리 몸이라도 숨겨야 하는 거 아니에요? 사건 현장은 이 근처인 것 같은데 레이 상이 저랑 같이 있으면 앞으로 의심받게 될 지 모르잖아요. 그럼 후에 일도 차질이 생길테고."

"그때는 또 다른 방법이 있겠지. 지금은 널 살리는게 더 먼저야. 여기 내 폰이 안 터지는 걸 보면 네 시간대인 건 확실하네. 네 폰 줘봐."

"뭘 하시게요?"


의문을 가지면서도 순순히 잠금까지 해제해서 스마트폰을 건낸 소라. 레이는 소라에게 받은 폰으로 좀 만지작거리더니 다시 돌려준다.


"뭐 했어요?"

"메일 보냈어. 네 덕분에 목숨 건진 녀석들한테."

"네? 그래도 되는거예요? 그러다 위험해지기라도 하면-"

"그 정도 생각은 있겠지. 그리고 급하니까 현장 위치만 보냈어. 어차피 그 녀석들이 움직이면 쿠도 군도 움직일테고 여기에 있을 나도 뭔가 하게 되겠지. 나도 도울거고."

"그러면 다행이지만..."

"그리고 이거."


레이는 소라를 위해 자신이 만들었던 팬던트를 건낸다. 소라는 곧장 건내받은 팬던트를 열어보았고 그곳엔 그녀가 그에게 주었던 것처럼 압화로 만든 아몬드 꽃잎이 있었다. 막 레이에 대한 감정을 자각한 소라였기에 묘한 느낌을 받는다.


"레이 상이 잡은 꽃잎이에요?"

"어. 남은 건 그거 하나야."

"이걸 저한테 준다는 건..."

"확신할 수 있어. 내게 남은 마지막 기적은 분명 널 살리는 거라고."

"...레이 상, 실은 저-"


소라는 자신의 팬던트를 넘겨주었을 때처럼 어쩌면 다시 기회가 없을 것 같은 느낌에 고백을 할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맞잡고 있던 손의 온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레이는 넘겨준 팬던트와 물건만 남긴채 본래 자신이 있던 시간대로 돌아오고 만다.


"소라..?"


남아서 소라가 무사한 모습까지 지켜볼 요량이었던 레이는 허망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본다. 하지만 그의 희망과는 달리 어두워진 하늘과 싸늘한 바람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럴리 없어. 어떻게 만났는데...살릴 수 있는 기회였는데..!"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소라의 눈빛이 레이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기에 더더욱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무를 손으로 내리쳐도 보고 붉게 물든 잎들이 우수수 떨어지도록 흔들어도 봤지만 그 어떤 행동도 레이가 원하는 결과를 가져다 주진 않았다. 그제서야 레이는 자신이 겨우 끝자락을 잡아냈던 감정의 정체를 깨닫는다.


"소라...제발, 내 목숨이 대가라고 해도 좋으니까 다시 한 번 만..."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린 레이는 자신이 그토록 필사적이었던 이유가 사랑 때문이었음을 자각하며 소라가 유일하게 남긴 자신의 목에 걸린 팬던트를 움켜쥐고 오열한다.



* * *



"레이 상..?"


고백 직전에 눈 앞에서 사라진 레이 때문에 당황한 소라는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러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소라는 멍하게 있을 시간이 없었다. 레이에게 전달받은 정보에 의하면 소라가 조직원을 마주치기까지 2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일단 살아있어야 뭐든 기회가 있겠지."


소라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일단 레이의 계획대로 준비를 시작했다. 한편 레이에 의해 소라의 폰을 통해 달랑 주소 하나를 메일로 받은 동기조들은 난리가 났다.


"야, 이거 봤냐?"

"봤어. 소라짱이 보낸거 맞아?"

"걔가 어디 휴대폰을 털릴 얘야? 막상 털렸다고 해도 직접 열어준게 아니면 이런 메일 못보내지."

"어쩔 수 없이 열어줬으면?"

"그럼 더 찾으러 가야지. 그 녀석이 말려든 사건이 어디 가벼운거겠냐?"

"진페이짱 안 그런척 하면서 소라짱 걱정 제일 많이 하는거 알아?"

"시끄러워. 반장한테 가보자."


마츠다는 하기와라를 데리고 다테가 있는 수사1과를 찾아간다. 마침 다테도 급히 나오던 중이었다. 아마 메일을 받고 주소를 확인한 뒤 급한대로 출발할 생각이었던 거다.


"반장, 메일 받았어?"

"너희도? 진짜 심각한 모양인데. 확인하니까 3번가의 언덕 근처야. 코난한테도 물어봤는데 소라가 거기있는 아몬드나무를 보러 자주 간다더라."

"그런데서 위험할 일이 뭐있어?"

"후루야 녀석 일이랑 관련됐을지도 모르지. 뭔지 몰라도 그 녀석 위험한데 잠입이라도 한 모양이던데 코난이 거기랑 관련이 된 모양이니까."

"그럼 지금 거기에 말려서 위험한거라는 거야? 대체 처신을 어떻게 하는거야?"

"후루야짱 지금 포아로에 있어? 아니면 연락 보기는 할테니까 물어라도 보던가."


하기와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이로부터 보내진 주소 근처로 소집 명령이 떨어진다. 세 사람이 그 장소로 가자 레이와 함께있는 코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불길한 예감이 적중한 모양이네. 꼬마 홈즈짱, 지금 소라짱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거야?"

"...많이요. 저 때문에 누나가-"


코난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한다. 괜히 자신이 끌어들여 죽을 위기에 놓인 소라에게 죄책감을 느낀 것이었다. 소라의 부모님 역시 조직의 손에 목숨을 잃었던 것까지 알게 된다면 그 죄책감은 무게를 더 하게 될 것이다.


"쉽진 않을거야. 혹시 몰라서 저격쪽도 준비했지만 우리 선에서 끝날 수 있으면 제일 좋겠지."

"계획은 있어?"

"코난에게 들은 바로는 기본적으로 그쪽의 계획이 있는 모양이라 최대한 맞출 생각이야."


레이는 코난에게 전해들은 소라의 계획에 따라 저격수로 대기 중인 모로후시를 제외한 나머지 동기들에게 각자의 역할을 안겨준다.


"무슨 일이 생기면 나눠준 인이어로 보고해. 위험한 행동은 하지 말고."

"두번째는 생각 좀 해보고. 소라짱을 무사히 구하는게 목적이니까."

"...누나가 걱정되는 건 사실이지만 누나를 구하느라 형들이 위험해지면 누나가 싫어할거예요."

"그정도는 우리도 알아, 꼬맹이. 그래도 이쪽이 위험한 편이 더 무사할 확률이 높잖냐."

"그래도 조심해주세요."

"너나 조심해라. 아주 위험한 일에만 다 꼬여가지고는-"

"잡담은 이쯤하고 자리에서 대기하자. 다들 계획대로 잘 진행됐는지 보고는 제대로 해."

"반장 말대로야. 개별행동은 절대 금물이니까."

"네, 네-"



* * *



"조금 덜 눈에 띄었으면 좋았을 텐데, goddess."

"흐으...이제, 와서?"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마라, 베르무트."


모든게 계획대로 잘 되어가고 있고 가짜피가 터지는 것에 맞춘 소라의 연기도 베르무트를 속여넘길 정도로 좋았지만 아직 모든게 끝난게 아니라 긴장을 놓칠 순 없었다.


"흐음- 그런데 생각보다 덜 괴로워 하고 있는 것 같은데...확실히 관통시키는게 좋지 않겠어, 진?"

"그냥 머리를 뚫어버리면 되는 것 아닙니까?"

"저런, 워커. 경고를 위해서라도 얼굴은 멀쩡히 둬야하지 않겠어?"

"알아만 보면 되는거잖아."

"확실히 해두면 좋잖아?"


진과 베르무트, 워커가 대화를 나누느라 잠시 한눈을 팔 때 좀 다치더라도 뒤로 떨어져 도망쳐 볼 생각이었던 소라는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을 친다. 하지만 몇 걸음만 더 가면 되는 상황에서 진에 의해 발포된 총에 한 번 더 맞게 된다. 문제는 치명상은 피했지만 예상했던 위치가 아니라 정말 출혈이 발생한 점이었다. 예상치 못한 고통에 비틀거린 소라는 그대로 뒤로 넘어갔고 안전히 넘어질 방법을 궁리할 새도 없던 터라 추락의 끝은 안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따라가서 확실히 처리할까요?"

"그만 두는게 좋을걸? 근처에 사건이라도 났는지 경찰이 쫙 깔린 모양이거든."

"...철수한다."


베르무트의 말처럼 그들이 있는 언덕 아래에 제법 큰 사이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서둘러 자리를 뜬 조직원들을 대신해서 그 자리에 달려온 건 마츠다와 하기와라였다.


"소라!! 어딨어!!"

"후지미네 소라!! 대답해!!"


미친 듯이 소라를 불러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러다 누가 떨어진 듯 수풀이 무너진 부분을 하기와라가 발견했고 거기로 들여다 보자 엉망진창으로 굴러떨어져 정신을 잃은 소라의 모습이 보인다. 위치를 확인한 하기와라는 마츠다를 이끌고 돌아서 소라가 떨어진 곳으로 향한다. 도중에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테에게 연락해 구조인원도 함께 그 자리에 도착한다. 코난을 비롯한 소라의 가족들이 소식을 알게 된 건 소라가 수술실에 들어간 뒤였다.


"어떻게, 어떻게 됐어요? 누나 괜찮데요? 네?"

"총상을 입은 부분이 위험한 곳은 아닌데 출혈이 꽤 심하고 굴러 떨어질 때 머리를 부딪힌 것 같아서 좋은 상황은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수술 잘 끝내면 문제 없는거죠? 그렇죠?"

"걱정마라. 수술, 잘 끝날거니까."

"소라짱..."

"걱정마. 소라는 잘 이겨낼테니까. 세 사람도 고생했을텐데 들어가봐요. 여긴 우리가 지키고 있으면 되니까요."

"아뇨. 혹시 녀석들이 다시 노릴지도 모르고 소라가 걱정되니까 저희도 함께 자리 지키겠습니다."


그렇게 수술이 한참 진행되는 동안 공안 소속의 두 사람을 제외한 동기조들과 쿠도 가족들이 자리를 지킨다. 수술이 끝난 뒤, 목숨은 건진 소라는 하쿠도의 지시 아래 경찰병원 특별 병동에 비밀리에 입원하게 된다.


"수술은 잘 끝났지만 깨어날 수 있을지는 장담 못하는 상황이라 들었어요. 그래서 소라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대외적으로는 수술 도중 사망한 걸로 알릴거예요."

"소라의 안전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동의하겠지만 수술한 의료팀이 비밀 유지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건가요?"

"걱정마세요. 문제없이 처리했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만 잘 지켜주면 새어나갈 일 없을 겁니다. 소라의 가족들은 걱정할 것도 없겠고 나머지 셋도 후루야 군의 정체를 계속 숨기고 있는 만큼 이정도는 무리 없이 해내겠죠."

"...알고 있었습니까? 저희가 그 녀석 소속에 대해 알고 있는걸."

"이번 일은 통해서 알게 된 거지. 소라를 위해서라도 부디 잘 지켜주길 바라지."

"네. 걱정마십시오. 그런데 후루야는 알고 있는 겁니까?"

"아니. 후루야 군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더 철저히 부탁하지."


레이가 모른다는 사실에 동기조들은 물론 코난도 놀란 얼굴을 했다. 이번 소라 구출 작전에는 레이 역시 포함되어있었기 때문에 모를리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잠입에 더 신경써야할 와중에 비밀이 더 늘어선 좋을게 없다는 위쪽의 판단이야. 병실 바깥 보안을 맡을 수사관들도 이 안에 누가 있는지는 모르게 될 거다."

"그럼 면회는..."

"불가해. 꼭 필요하다면 바깥 경비를 내가 선 뒤에 들어가거나 의료진으로 위장해서 들어가는 방법 외엔 없지."

"저희도 면회는 자제해야 겠군요. 잘못 움직였다간 안에 있는게 소라라고 금방 추측할 수 있을테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보안 만큼은 철저히 할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믿고 맡기겠습니다. 저희만큼이나 소라를 아껴주시는 분이니까요."

"네."

트위터 계정 : @writer_sophia 네이버 블로그 : https://blog.naver.com/sophia_k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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