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7월


“안녕하십니까! 주상고등학교의 준비되어 있는 인재 기호 2번! 이동혁입니다!”

“기-호 2번! 2-동혁!”

“저를 뽑아만 주신다며언-!!!!”

“기-호 2번! 2-동혁!”




혈관에 같은 피가 흐르지 아니하고

멜러니




1998년 6월


2학년 1학기 중간고사 기준 전교 석차 374/446에 달하는 이동혁이 총학생회장 선거 후보에 등록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죄다 같은 반응이었다. 아, 이동혁이 되겠네. 그만큼 같은 후보자들 중에선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주상고등학교를 포함해 이 동네에서 이동혁을 모르면 간첩 소릴 듣는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아침엔 신문배달을 하고, 점심엔 충실히 학교에서 활동하며, 하교하는 동시에 교복 재킷을 벗고 배달 오토바이에 올라탄다.


주상고등학교에 재직 중인 교직원들은 동혁이 학생회장이 되어선 안된다고 말한다. 모범이 되어선 안될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학생이기 때문이다. 발등에 불 떨어진 선생님들은 동혁이 학생회장이 되지 못하도록 수를 써야만 했다. 학생회장 후보 등록이 끝나기 전날, 학년 부장 선생님이 직접 1반으로 찾아가 민형을 복도로 불러냈다.


“민형아. 너 일류 대학 갈라믄 이런 것도 하고 저런 것도 해보고 그래야지. 요즘은 공부가 다가 아니야. 이런 교내 활동이 아주 중요한 거야.”


학년부장 선생님은 민형이 하복 앞주머니 앞에 꼬깃꼬깃 넣어둔 단어장을 봤다가 민형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너무 쥐고 있어서 눅눅해진 단어장에 비해 민형의 온몸은 꼿꼿했다. 교복은 아침마다 부지런하게 다려 입어서 잔주름이 없고, 쓰고 있는 안경의 알도 수시로 닦아줘서 지문 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이런 아이가 학생회장이 되면 많은 전교의 학생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겠어.’ 학년부장 선생님은 용모단정한 민형의 모습에 스스로 흡족해했다. 그에 반해 민형은 전혀 감흥이 없는 얼굴이었다. 이 상황을 빠져나오고 싶어 했다. 민형은 동혁에 비해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어딘가 큰 공을 세우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고 어른들께 조언을 구하지 않아도 본인의 성적이라면 충분히 원하는 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민형은 주상고등학교의 모든 교직원들이 동혁이 학생회장 자리에 앉는 것을 불편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민형 역시 동혁이 가벼운 마음으로 학생회장이 되려고 하는 걸 알고 있었기에 학교의 명성과 미래를 위해서라면 학생회장의 자리를 다른 이가 받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효율적으로 생각해 보자. 차라리 동혁이 학생회장이 되는 쪽이 서로에게 편할지도 모른다. 동혁의 불같은 성격에 학생회장의 자리를 얻지 못했을 시 이 학교에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해 볼게요.”


잘 생각해 보라는 학년부장 선생님의 말에 민형은 바닥으로 눈을 흘기고 목뒤를 매만지다가 인사하고 돌아섰다. 민형에게 생각해 본단 말은 안 하겠다는 말과 같았지만 학생부장 선생님과 민형의 얘기를 엿듣고 있던 학생이 입을 놀리는 바람에 문제가 발생했다. 야, 부장 선생님이 이민형한테 학생회장 해볼 생각 없냐고 물어보더라. 역시 총학생회장도 다 비리가 있었어. 우리처럼 공부 애매하게 하는 애들은 껴주지도 않는 거지. 또 이 사실을 이동혁이 듣지 않았을 리 없다.


“야! 이민형.”

“…….”

“너 학생회장 나오는 거 진짜야?”


성격 급한 이동혁. 오토바이 헬멧도 벗지 않은 채 네쌍둥이가 같이 쓰는 단칸방에 쳐들어왔다. 밥상 앞에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아서 한 페이지씩 넘겨 교과서 복습하던 민형은 아니꼬운 얼굴로 동혁을 올려다봤다가 시선을 바로 책 위에 옮겼다.


“내가 부회장으로 껴준다고 할 땐 싫다 그러니. 더 큰 걸 노리고 계셨고만?”


그 뒤로 들어온 여주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민형을 바라본다.


“한다고 한 적 없어.”

“이여주. 너 누구 뽑을 거야. 여기서 똑바로 정해. 나야, 이민형이야.”


여주의 시선이 여기 이동혁에 닿았다가, 저기 이민형에게 돌아간다.


“근데 난 이미 너 뽑는다고 했으니깐.”


사실 여주의 입장에선 둘 중 하나가 되어도 이씨 집 안에 경사가 찾아온 것이다.


“진짜? 역시 넌 나 선택할 줄 알았어.”


동혁은 헬멧 페이스 실드를 위로 걷고 여주의 오른쪽 광대 부위에 입술을 부딪혔다. 동혁의 헬멧과 머리를 부딪힌 여주는 손으로 동혁의 입술이 닿은 부위를 문지르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근데 이제노가 안 보인다?”

“오늘도 놀다 들어오나 봐.”


동혁의 물음에 여주가 대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걔 뭔가 수상해. 이상한 애들이랑 다니는 거 같어. 오늘 당구장 삼촌들이 이제노 뭔 이상한 애들이랑 같이 다닌다고 했어.”

“정말?”

“나도 이 집구석 들어오기 싫어. 우리 이제 열여덟이나 됐는데 아직도 한 방 쓰는 게 말이나 되냐고.”


이 집엔 마당이 하나, 집 두 채가 있다. 한 채는 아버지가 혼자 쓰고 계시고 나머지 한 채는 조금 고쳐서 네쌍둥이가 사용하고 있다. 네쌍둥이는 아버지와 함께 지내길 원치 않는다. 외롭다는 이유로 모르는 여자를 데려오는 것도 불편하고. 술주정을 부리는 아버지를 견디기 힘들었다.


이들이 이 집에 불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천륜으로 맺어진 관계를 쉽게 내팽개칠 수 없는 이유는 이러했다. 돈이 없다.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주는 용돈을 얼마 받아도 그걸로 넷이서 쪼개 써야 한다. 똑똑한 민형은 주말에 같은 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불법 과외를 해서 생활비를 충당했다. 동혁은 저녁마다 짜장면 집 배달 알바, 제노는 어디서 돈을 구해오는 것인지는 몰라도 알아서 해결했는데. 이 중에 여주만 있는 돈으로 알뜰하게 생활하려고 하는 편이었다.


이것들도 핏줄에, 오빠들이라고 지폐 몇 장을 여주의 지갑에 넣어두고 모른척했다. 그도 그럴 게 여주는 이 중에서 가장 막내다. 동시에 마음이 여린 여자아이라 드는 걱정이 많다. 동네에 사건사고도 많이 일어나던데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지, 다 큰 남자애들 사이에 껴서 자는 게 불편하진 않은지. 이런 사소한 것들이 형제들에겐 공통된 걱정거리였다.


“넌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면서 뭐 그렇게 불만이 많아.”


동혁의 타오르는 욕망을 억누르는 건 늘 민형이었다. 동혁은 형제들과 같은 방을 쓰는 것에 대해 가장 불만이 많았다. 민형도 민형 나름대로 좁은 단칸방에 넷이 사는 게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걸 받아들였다. 주어진 환경이 이렇다는 걸 인정하고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었기에 늘 내키는 대로 사는 동혁을 이해하지 못하고 한심해했다. 넌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면서 뭐 그렇게 불만이 많아. 작지만 어마어마한 위력을 가진 돌멩이 같은 대사였다. 민형이 무심코 던진 말에 동혁은 개구리처럼 상처받은 얼굴로 서있었다.


“내가?”


뒤늦게 발끈하여 머리에 쓰고 있던 오토바이 헬멧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내가 뭐, 뭐 언제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았는데. 말해봐.”


동혁은 흥분하면 말을 더듬는다. 언행이 빨라지고 목과 뺨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뜨거워진다. 여주는 동혁이 발끈하는 순간을 주시하다가 빠르게 잠옷을 주워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침이 되도록 제노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민형은 식사도 하지 않고 학교에 가버렸고, 동혁은 마당 한가운데 엎드려뻗쳐 한 채 옆집 아줌마가 자루바가지로 뿌려주는 찬물로 등목하고 있었다. 여주는 교복을 꿰어 입고 나와서 부엌에 들어가 도시락통 네 개를 일렬로 놓고 밥을 담기 시작했다. 계란을 하나씩 부쳐서 밥 위에 올렸다. 마지막 제노의 도시락통을 빤히 바라보던 여주는 밥을 다시 꺼내 밑에 계란을 깔고 새로 하나 더 부쳐서 그 위에 올렸다. 티 나게 두 개를 넣어줬다간 민형과 동혁이 서운해할 것을 안다.


제노의 도시락통에만 계란을 두 개 부쳐준 것은 편애 같은 게 아니었다. 차려주지 않으면 뭘 먹으려고 하지 않으려고 하는 제노가 끼니를 제대로 챙겼을 리 만무하다. 인공적인 맛이 나는 싸구려 소시지도 좋아하지 않을 걸 알지만 하나 더 넣어주고, 그 위에 손수 구워서 소금 간까지 해놓은 맛김을 봉지에 하나씩 담아서 테이프로 붙였다. 펜으로 적어놓은 이름이 조금 지워져있길래 제대로 썼다. 빨간색 통은 동혁, 파란색 통은 민형, 회색 통은 제노. 마지막에 남은 여주의 하얀색 도시락 통에도 이름을 적으려다가 말았다. 내 건지는 나만 알아보면 되니까. 종이 백 안에 도시락을 담아서 나오자마자 동혁도 교복을 차려입고 나왔다.


“오늘도 버스 타고 갈 거야? 뒤에 태워줄게. 나랑 가자.”


동혁이 오토바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야, 난. 무서워…….”


여주는 겁이 많다. 미성년자에 무면허인 동혁이 어디서 가져온 건지도 모를 오토바이를 끌고 다니는 것도 문제지만. 이전에 오토바이를 타다가 사고 나서 척수손상 환자가 된 동네 아저씨 사례를 듣고는 본인도 그렇게 될까 겁이 났다. 여주는 동혁에게도 웬만하면 오토바이를 타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제 성질대로 사는 동혁에게 이래라저래라 해서 서로 얼굴을 붉히고 싶지는 않았다.


“네 도시락 먹어. 친구 거 뺏어 먹지 말고. 알았지?”


머리에 오토바이 헬멧을 끼우던 동혁에게 빨간색 도시락통을 건넸다.


“웅.”


신줏단지 모시듯 도시락통을 가방에 집어넣은 동혁은 여주의 손에 들린 종이가방을 힐끔 보고는 시선을 거뒀다. 집에서 도시락을 챙겨주는 이가 없어, 학부모회가 설립한 학교 매점에서 빵 같은 걸로 끼니를 때우거나 아예 결식했다. 가끔 옆집 아주머니께서 도시락 준비를 도와주시곤 한다. 물론 처음부터 맨입으로 도와주신 건 아니었고, 여주가 그집 다섯 살배기 아들의 한글 공부를 봐주러 옆집에 들락날락하면서 네쌍둥이의 사정을 알게 되고 도와주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마을버스를 타고 10정거장쯤 지나면 학교에 도착한다. 작년에 동혁이 여자친구에게 선물 받은 CD플레이어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여주는 버스를 타고 앉아서 학교까지 가는 시간을 좋아한다. 6정거장쯤 가면 3학년에 김정우 선배가 승차하는데. 사람들 사이에 껴서 버스 손잡이를 잡고 서있는 선배의 말간 얼굴을 힐끔 훔쳐보는 게 여주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그렇게 학교에 도착하면 가장 늦게 내려서 김정우 선배의 등을 주시하며 걷는다. 동급생 친구들이 하나씩 정우의 옆에 붙기 시작하면 여주는 괜히 오른쪽 가슴에 명찰이 잘 붙어있는지. 교복의 깃이 뒤집어져 있진 않은지 꼼꼼히 확인했다. 교실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민형의 도시락통을 들고 남학생 교실 앞에 기웃거린다. 맨 앞자리에서 수학 문제를 풀고 있던 민형은 주위 친구의 말을 듣고 복도로 나왔다. 뒷문에 나와서 주위를 둘러봤다. 여주가 교실 앞문에 서서 민형의 도시락통을 꼭 쥐고 서있었다.


“여주야.”


민형이 여주를 부른다.


“어!”

“거기서 왜 그러고 있어.”


다른 반 학생 출입 금지. 문 앞에 이런 게 적혀있었다.


“이거 주려고."

“들어와도 되는데.”


여주는 교칙을 어기지 못한다.


“이건 제노 건데. 도시락 통 위에 얼음물 올려서 감싸둬. 밥, 상할 수도 있으니까.”


여주는 여전히 자리에 미련을 가지고 맨 뒷자리를 살폈다. 제노의 자리를 아직 빈석이었다. 집엔 들어오지 않아도 학교에는 꼬박꼬박 오는 애였는데. 오늘은 왜 또 늦는지. 여주는 문을 닫고 자신의 교실로 돌아갔다.



제노는 1교시 시작 5분 전쯤 학교에 도착했다. 복도에서 친구들과 파인샌드를 나눠먹고 서있던 동혁이 제노를 발견하자마자 손을 들어 인사했다. 야, 얌마. 너 왜 어제 안 들어왔냐. 친구들이 다 보는 앞에서 대놓고 무시당한 동혁은 아예 제노의 어깨에 팔을 얹어 걸었다. 한창 나불거리던 동혁은 말을 멈추고 제노의 목뒤에 코를 박고 킁킁댔다. 아니 이게 무슨 냄새야.


“니한테 그 냄새난다.”

“…….”

“사우나 갔다 왔어?”

“안 씻고 올 순 없잖아.”


남들한테 예의 차릴 마음은 뭣도 없으면서 자기관리는 철저한 모습이 모순적인 것처럼 보였다.


“야. 너 나 학생회장 후보로 나오는 거 알아?”


동혁은 질질 끌지 않고 본론에 들어갔다.


“아니.”


제노의 대답에 동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웃더니 엄지로 코끝을 쓱 훑고 웃었다.


“나 이번에 학생회장 기호 2번으로 나오거든.”

“축하.”

“근데 내 말 끝까지 들어봐. 이민형 이 자식이 나한테 말도 없이 학생회장 후보로 나온다는 겨. 아니 이럴 수 있냐? 그래도 다행히 여주는 나 뽑아준다고 하긴 했는데. 너한테도 확실한 답을 들어야 할 거 같아서.”


이만 교실로 들어가 봐야 하는데. 동혁에게 어깨를 붙잡혀 있어서 움직이질 못하고 있다.


“이민형 학생회장 안 나올걸.”

“왜?”

“걘 너 같지 않아서 그런 귀찮은 거 안 해.”


말을 마친 제노는 제 어깨 위에 붙어있는 동혁의 손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지저분한 것을 털어내듯 치웠다.


“이여주는.”

“이여주 왜.”

“어제.”

“응.”

“잘 잤어?”


방금까지 넋이 빠져있던 동혁은 제노의 싱거운 물음에 실소를 흘리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뒤돌아 사라졌다.







3교시가 끝 종이 치자마자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운동장에 집합했다. 운동장에 나온 건 총 두 반이었다. 2학년 1반과 7반. 선생님이 계시지 않는 동안에는 삼삼오오 모여서 얘기를 나눴지만 무리가 없는 여주나 혼자 다니길 좋아하는 민형만 각반 줄에 덩그러니 혼자 서있었다. 민형은 이 시간에도 체육복 바지 주머니에 작은 단어장을 넣어두고 시간이 될 때마다 꺼내봤다.


지겹다 지겨워. 가끔은 재수 없어. 쟤는 체육시간에도 저러고 싶나. 그렇기 때문에 1등인 거겠지. 쭈뼛쭈뼛 서있던 여주는 주위 남학생들의 대화를 우연히 듣고 민형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주는 저런 민형의 모습이 익숙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그랬는걸. 집에만 있으면 바깥에 전혀 나가볼 생각도 하지 않고 선비처럼 밥상 하나 펴서 교과서만 읽고 종종 저 똑같은 소릴 동혁이 했던 적이 있었다. 남들 눈에 재수 없어 보일만하다. 저 뒤로 교복에서 체육복으로 갈아입지도 않은 채 어기적 어기적 걸어오는 제노가 보인다. 잠에서 깬지 얼마 안 된 얼굴이었다.


“왁, 이제노다.”

“웬일이니.”


땡볕 아래 서서 신발코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여주는 제노의 등장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제노는 매주 화요일 체육 수업에 한 번도 참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주는 어제 왜 집에 안 들어왔는지, 왜 이렇게 늦게 등교했는지.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제노에게 쏠린 관심으로 인해 여주는 까치발을 들고 기웃거릴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제노는 주위를 살피다가 7반 맨 뒷줄에 홀로 서있는 여주를 발견했다. 자연스럽게 여주의 옆에 선다.


“여기 말고 1반 줄에 서야지…….”

“응.”

“넌 1반이잖아. 여기는 7반 줄이야. 민형이 옆에 서있어. 체육복은 또 어디다 버렸어. 체육 나올 땐 체육복 입어야 돼. 너 그러다 벌점 받아.”


여주가 무어라 잔소리해도 제노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나란히 서있는 제노와 여주를 바라보는 반 아이들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체육 선생님은 이제노가 체육복을 입고 오지 않았든 말든 별 관심 없어 보였다. 남자는 축구, 여자는 피구. 자유 운동들 해. 불시에 와서 검사한다. 그렇게 말하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남자애들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축구공을 하나 들고 한가운데로 몰려갔고 여자애들은 횟가루로 그어진 라인 안에 들어가 가위바위보를 했다. 운동 잘하는 애들부터 하나씩 팀으로 데려간 뒤, 그다음 대충 머릿수를 맞춰 나눠갖기를 했다.


일부러 뒤에서 공격을 하기 위해 맞고 나간 친구를 보다가 공을 맞은 여주는 맞은 부위를 문지르며 뒤쪽으로 걸어갔다. 직접 나서지 않아도 운동신경이 좋은 친구들끼리 다퉜다. 여주는 저 멀리 간 공을 주우러 가거나 같은 팀이 유리해 보일 때 조용히 웃기만 했다. 가끔 돌계단에 앉아서 쉬고 있는 민형이 눈에 보였다. 제노는 보이지도 않았다. 교실로 돌아간 모양이다. 체육 선생님이라도 오면 어떡하려고. 불시에 검사 와서 안 하고 있으면 태도 점수 감점한다던데.


“여주야.”


잠시 다른 곳을 보고 있는 동안 상대편 학생이 여주에게 말을 걸었다.


“어?”

“공 잡게 되면 나부터 맞혀주면 안 될까?”


갑작스러운 부탁에 여주가 당황해하자 이어서 말했다.


“생리 중이라 몸이 좀 안 좋아서.”


일찍 죽고 쉬고 싶은 모양이었다. 공을 받으면 맞히기 쉽게 제 쪽으로 와준다고 하고. 여주에겐 무리한 부탁은 아니었다. 상대편 학생들이 둘 정도 공에 맞아서 나가떨어질 때쯤 여주의 손에도 공이 잡혔다. 같은 팀에 잘 던지는 친구에게 계속 넘겼던 여주가 공을 던질 기세로 준비 자세를 취하자 다들 숨을 죽였다.



7반 학생들끼리 피구 경기에 빠져있는 동안에 한차례 경기를 마치고 쉬고 있던 1반 학생들이 7반 학생들의 경기를 훔쳐보며 엄지로 뒤를 가리켰다.


“야, 우리 여자애들한테 공 보내볼까?”

“뭐 하러.”

“모르잖아. 김모희가 공 갖다 줄지.”


1반 학생들이 말하는 모희는 7반에서 가장 외적으로 출중한 학생이다. 한창 시각적인 자극에 약한 학생들은 홀린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참 좋겠다. 이미 합의된 모양인지. 다들 골대에 공 넣는 연습을 하는 척하면서 7반 학생들이 있는 쪽으로 공을 보냈다. 그래. 관심받고자 하는 그 마음가짐까진 좋았는데. 평소 공을 차던 버릇을 고치지 못한 1반 에이스가 힘 조절을 실패했다.


마침 다른 편 여학생을 맞히기 위해 집중하고 있던 여주는 남학생들의 “조심해!”라는 말을 듣지 못한 채 축구공을 정면으로 맞았다. 여주는 손에서 피구 공을 두 손으로 꼭 쥐고 뒤로 쓰러졌다. 얼굴이 얼얼하다. 다들 소리를 지르며 여주의 주위에 몰려들었다. 분명 이마를 맞았는데. 안에서 무언가 폭발한 것처럼 여주의 얼굴이 빨개지고 코밑으로 뜨거운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오른쪽만 흐르다가 몸을 일으키고 나니 왼쪽까지 흐른다. 여주는 이마를 문지르다가 앞 친구의 피, 라는 한마디에 코밑을 가운뎃손가락으로 닦아내듯 문질렀다. 피다. 코, 코피다. 여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어쩌지. 1반 학생들은 예상치 못한 일에 지레 겁을 먹고 발을 떼지 못했다. 7반 학생들 사이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눈치챈 민형만 손에 들고 있던 단어장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민형의 물음에 모세의 기적처럼 7반 학생들이 길을 텄다. 민형은 여주의 무릎 위에 위치한 피구 공에 코피가 몇 방울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살벌한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7반 애들은 빠르게 해명했다. 우리가 그런 거 아니야. 형철이가 공을 찼는데. 그게 얘 머리에 맞은 거야. 민형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1반 학생들을 돌아봤다.





민형은 주위를 살폈다. 여주의 얼굴을 저렇게 만든 축구공을 찾았다. 발밑에 공을 깔고 앞뒤로 굴리던 민형은 위를 한 번 보고 1반이 있는 곳으로 공을 보냈다. 신발코로 운동장 바닥의 흙을 퍼내듯 공을 세게 찼다. 강한 저항력으로 인해 공이 쏜살같이 날아간다. 저 공에 맞으면 누구 하난 죽겠다 싶었다. 그 공은 정확히 여주에게 공을 보낸 1반 에이스의 머리를 맞고 떨어졌다. 여주의 뒤로 탄식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혼비백산이 된 틈을 타, 민형은 여주의 손목을 잡아 일으켰다.


“머리 뒤로 들지 마. 피 역류해.”

“…….”

“양호실 가자.”


민형이 여주의 어깨를 감싼 채 운동장을 가로질러 나가자 저 멀리서 체육 선생님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너 이 자식 뭐야!”


쌈박한 욕이 섞인 체육 선생님의 물음에 민형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얘 오빤데요.”


그걸 몰라서 물은 건 아닐 테고.


“데려다주고 올게요.”


자세히 보니 저건 전교 1등이다.


공을 차는 다리 각도부터 타깃을 맞히는 정확성까지 완벽한 저 인재를 왜 내가 그동안 몰라봤을까. 체육 선생님은 빠르게 민형을 축구부로 납치할 준비를 마쳤지만, 그가 주상고 수재라는 것을 깨닫고 공부가 귀한 인재를 빼앗아갔다고 생각했다. 여주는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빠져있었다. 하늘이 노랗다. 민형이 부축해 주지 않으면 금세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피를 뚝뚝 흘리면서 코를 움켜쥐고 걸어가는 여주에 2학년 5반 창문이 열렸다.


  “야이 새끼들아아아!!!!! 내 동생 괴롭히지맠!!!! 내 손에 다 죽는다, 니네!!!!!”


……2학년 5반은 동혁이 소속된 학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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