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누가 나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인생에는 어떤 의미도 없어

나쁜 꿈에서 깨어나면

또 한 겹 나쁜 꿈이 기다리던 시절  (한강, 거울 저편의 겨울2)



엘리엇....! 나를 안은 채 내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 그의 모습. 그의 두 손을 흥건히 적신 피. 이대로 죽는 건가 싶을 때, 잠에서 깬다. 내 눈에 보이는 건, 내 방의 겨자색 배게 커버가 아닌 낯선 하늘색 배게 커버. 눈에 담긴 배경은 루카스네 거실이었다. 그제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머리가 돌아갔다. 어젯밤, 루카스가 나를 찾았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것이었다. 루카스는 옆에 없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 다시 잠을 자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다른 세계로 가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꿈의 내용은 언제나 같았다. 깊게 손목을 긋고, 핏방울이 조금씩 맺히는 게 아니라 울컥, 넘쳐흐르고 나면, 루카스가 도착하는 것이다. 정신없이 내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다 보면, 꿈은 끝난다. 어쩔 때는 너무 생생해서 진짜 이것이 현실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꿈이 끝날 때쯤 난 잠에서 깼고, 루카스는 거의 대부분 내 곁에 있었기에, 현실이 아니라 꿈이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날도 그랬다. 흠칫 잠에서 깼고, 월요일 아침이란 것을 알았다.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아직 학교에 가지 않은 것이었다. 늦은 거 아니냐고 묻는 나의 말에, 그는 내가 일어났을 때 아무도 없는 게 싫다고 했다. 분명 나를 걱정해서 한 말일텐데도, 쏘아붙이고 싶었다. 난 바보가 된 게 아니라고, 내 걱정 따윈 하지 말고,학교나 가라고. 마구 쏘아댔다. 나중에 보자는 그의 말에서 느낄 수 있었다. 상처받았음을. 그래, 너도 그럴 거야. 처음엔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다가도, 언젠가는 내게 따져묻겠지. 사람은 다 변하니까.

머릿속의 울림을 잠재우기 위해 다시 잠을 선택했다. 그러니까, 도피인 것이다. 차라리, 잠들다 숨이 멎어버리면 좋겠다. 


"안녕, 배고파? 뭐 좀 먹을래?" 

몽롱한 상태로 상체를 일으켜 앉아있는 내게 조심스레 말을 건넨 건 부엌의 스툴에 앉아있던 미카였다. 마른세수를 하고 고개를 끄덕인 내게 크루아상을 건네었다. 

"고마워."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불러. 나는 저 쪽 방에 있을 거야."

"응. 고마워."

비가, 올 것 같네.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보며 빵을 뜯어 으적 으적 씹었다. 같은 꿈도 여러 번 반복해서 꾸다보니 면역이 된 건가,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비가 올 거면, 얼른 내리면 좋겠다. 비오기 직전까지 먹구름만 잔뜩 낀 날씨는 꼭 평상시의 나를 나타내는 것 같아서 싫었다. 

내는 내가 너무 지겹다. 널 좋아해서 네 말이 곧 나의 인생의 법인 것처럼 따르고 싶다가도, 한 편으로는 네가 떠날까 두렵고, 또 한 편으로는 차라리 지금이라도 끝내고 싶은 복합적인 마음이 언제나 휘몰아친다. 담배를 피고 싶었지만, 주머니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다시 매트리스에 누웠다. 한참을 바깥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다른 꿈을 꾸길 기대하면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스타워즈 테마곡. 천 번도 더 연주했던 곡이었다. 하지만 내 열 손가락은 마디마디 철근을 달아놓은 듯 무거웠고, 하지도 않을 실수를 계속했다. 그것은 더 이상 연주가 아니라 소음이었다. 손가락은 더디게 움직였고 이내 나는 시끄러운 불협화음을 내며 연주를 멈추었다. 건반 위로 인영이 드리웠다. 익숙한 손이 내 손을 감쌌다. 

괜찮아.




잠에서 깼다. 여전히 하늘은 어두웠고, 먹구름이 잔뜩 있었다. 시계를 확인하니 루카스가 곧 집에 올 시간이었다. 1인용 소파에 앉아있던 리사가 인사를 잘 잤냐고, 인사를 건네었다. 같이 카드게임 하겠냐는 제안에 매트리스를 접어 정리하고, 이불과 배게도 접어 소파의 한 쪽으로 밀어둔 뒤, 테이블을 둘러 싸고 앉아 그녀와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미카가 붙고, 두 번째 라운드가 한창일 때 루카스가 학교에서 돌아왔다. 

"아침에, 짜증내서 미안해."

객관적으로 보면 그에게 짜증낼 일은 아니었다. 나는 다섯 살 난 어린애는 아니지만, 그는 이런 적이 처음이니까, 걱정할 수도 있다. 그는 밝은 표정으로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겠어? 넌 이미 상처 받았을 텐데. 

"아니. 아니야. 그런 게 아냐."

몇 번이고 부정했는데도 그는 다 괜찮다는 말로 반응하며, 나를 안아주려고 했다. 그가 상황을 쉽게 넘기려는 것 같아서 조금은 화가 났다. 

희미하게 비 냄새가 났다. 하루종일 흐리던 날씨는 이제 곧 비가 내릴 모양이다. 이윽고 빗줄기가 시원하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차라리, 너도 저 비처럼 나에게 화를 내. 루카스. 덮어두고 괜찮다고만 해서 될 일이 아니야. 

"이미 벌어진 일이야."

"그래, 이미 벌어진 일이지. 우리 둘에게 처음있는 일이었잖아. 나도, 너도, 방법을 몰랐던 거야." 

루카스는 차분한 말로 나를 설득하려 했다. 

"앞으로도 그럴 거야.....분명 그럴 거야. 어떤 방면에서든, 내가 널 힘들게 할 거야...그리고 그 사실이 날 갉아먹어. 넌 날 감당하지 못할 거야. 넌 겨우 열 여섯이잖아..." 

더욱 거세어지는 빗줄기는 이제 천둥을 동반했다. 차창 너머 들리는 천둥이 꼭 지금의 우리 사이를 비난하는 것 같았다. 루카스는 그제야 이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입을 꾹 닫았다. 거봐, 너도 이제 겁나지?

"그리고.. 네가 날 보살펴야 하는 것도 싫어. 오늘 아침처럼 상태가 나쁠 때가 많을 텐데.. 가끔, 일주일 내내 잠만 잘 때도 있을 거고, 그냥 모든 게 다 싫을 때도 있어. 때로는 아무 것도 아닌 일로 흥분할 거야." 

사람마다 짊어져야 할 십자가의 무게는 다르다. 하지만, 친구들과 아무 걱정없이 지내야 할 네가, 혹은 앞으로의 진로가 가장 큰 고민이 되어야 할 네가, 벌써부터 조울증을 앓고 있는 연인을 신경써야 한다는 점이 갑자기 큰 장벽으로 다가왔다.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거다. 너와 내가 잘 될 리 없어. 결국은 내가 다 망칠 거야. 관계에 있어서 나도 상처를 받는 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 3자의 눈에서는 늘 내가 원인이었다. 그는 괜찮다 말했지만, 누구나 처음에는 쉽다. 내가 나침반으로 설정한 그도 결국은 변할 것이고, 나에게 지쳐 떨어져 나갈 것이다. 내가 걱정하는 건 그 부분이었다. 속에서 조금씩 울음이 올라왔고, 눈가가 뜨거워지면서 시큰해졌다. 

"나 감당할 수 있어."

"아니야, 루꺄. 나 진지해."

"난 아닌 것 같아?"

감당하겠다고..? 넌 뭘 감당해야 하는 지 몰라. 눈물을 참으려고 긴 숨을 내뱉었다. 그가 무엇을 감당해야 하는 지를 나열했다. 어쩌면 지난 번 요트에서의 일이 매번 반복될 수도 있고, 그런 식으로 내가 그를 지옥으로 밀어 넣을 게 분명할 거라 단언했다. 그동안 내가 어떤 일을 했었는 지, 내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고통받았는 지 낱낱히 말했다. 

"널 두렵게 하거나, 상처주고 싶지 않단 말야. 나때문에 너가 고통받는 거 보기 싫어."

"그래서, 지금 내게, 헤어지자고 말하는 거야?"

파란 눈동자는 단호했고, 나는 차마 그의 눈을 바로 볼 수 없어 바로 고개를 떨구었다. 이대로, 저 문을 열고 나가는 게 맞는 걸까. 너를 위해서. 퍼붓을 듯 내리는 비를 맞으며 집에 가다보면, 빗물에 너에 대한 내 마음을 다 씻어낼 수 있을까. 너와 서로의 마음을 확인 할 때에는 모든 게 다 잘될 것 같은 기분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에 확신이 없어. 

"내가 견딜 수 없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꺄 네가 좋다는 거야. 너랑 있는 게 좋아..... 이런 마음을 갖는 내가 너무 역겨울 정도로.."

내 이야기를 차분히 듣던 루카스는 고개를 휘젓으며 그만하라며 말을 잘랐다. 두 손으로 내 어깨를 쥐더니 서로 좋아하면 된 거 아니냐고, 앞으로 어떻게 될 지 아무도 모른다며 열변을 토했다. 올려다본 그의 턱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도, 터져나오는 부정적인 감정을 참고 있었다. 거봐, 내가 또 너를 힘들게 하잖아. 

"앨리엇, 그만. 누구나, 누구나 바보같이 말하고, 바보같이 행동할 때가 있어. 나도 그래. 나도 별 것 아닌 일로 너에게 소리지르고, 화를 내고, 동굴에 들어 갈 거야. 내가 그런 상황이면, 넌 그대로 나 포기할 거야? 아니잖아." 

하지만 빈도나 강도가 다르잖아. 차마 그 말을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고개 숙인 나의 시야에 담긴 건 그가 내민 손이였다. 터널에서의 첫 키스가 떠올랐다. 너는, 늘 중요한 순간에 먼저 내게 손을 내미는 구나. 고개를 들어 한참이나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서 절실함과 비장함을 읽을 수 있었다. 마침내 그의 손 위로 내 손을 겹쳤을 때, 그는 있는 힘껏 내 손을 잡았다. 

"너를, 내 인생의 남자로 받아들인 이후부터, 결심했어. 뭐가 되었든, 다 감당하기로... 그래 엘리엇. 아직 나는 열 여섯밖에 안 돼. 그리고 조금 있으면 열 일곱이지. 넌, 고작 열 아홉이야. 우리가 살아온 시간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을 거야. 십 대의 패기라고 해보자. 시작하니 마니, 감당하니 마니, 다 제쳐두고, 일단 같이 가 보자.. 그리고 같이 지켜보자. 내일 지구가 종말한다 하더라도, 난 네 옆에 있을래. 그게 지금 내 마음이야.... 지난 번에 내가 말했지? 난 강하다고. 네가 여린 꽃이여도 괜찮아." 

그것은 나에게 하는 말임과 동시에 그 자신에게 하는 선언이었다. 요트 사건 이후, 넌 시간이 필요하다 말했다. 꼬박 하루가 지나고 너는 다시 내게 연락했지만, 내가 거부했다. 너가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여겼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와 함께한 시간동안 행복했고, 앞으로 또 언제 그런 감정을 느낄 지 모른다고 믿었기에 살아감을 그만두려 한 내 앞에 너가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넌 지금 내게 네 '인생의 남자'라고 한다. 

".............내가 정말 네 인생의 남자야...?"

참아왔던 눈물이 조금씩 볼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울먹이는 통에 말할 때 마다 목소리가 떨렸고, 목이 아려왔다. 그의 엄지 손가락이 아프지 않게 나의 눈가를 긁어 눈물 방울을 훔쳐내었다. 

"너와 내가 걱정할 미래는 하루에 한 번만 생각하는 거야. 그리고, 우리가 신경쓸 건 앞으로의 일분이야. 일분씩만 생각하자. 쉽지?"

".......그래."

"내가 생각한 일 분은 너랑 키스하는 거야. 마음에 들어?"

응. 내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입을 맞춰왔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혀가 들어왔다. 눈물이 섞여 짠 맛을 느끼며 혀 끝으로 그를 탐하고 또 탐하였다.

루카스, 사실 난 자신이 없어. 일 분씩만 생각하는 거 말야. 그래도 너가 원하니까, 시도라도 해 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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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일주일 만에 돌아온 집에는 냉기가 가득했다. 돌아와야 해서 온 집인데, 북적이는 집에 있다 돌아와서 그런지 적막과 한기가 더 크게 느껴졌다. 그게 싫어 라디에이터의 전원을 켜 집 안에 온기가 돌도록 하고, 턴테이블로 Shostakovich 교향곡 앨범을 재생했다. 우울증 약을 챙겨 먹고, 샤워를 한 뒤, 쇼파에 앉아 그동안 못 피웠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 

- 다음 1분도, 그 다음 1분도, 네 생각 할 거야. 

- 사랑해.

네 생각을 할 것이라는 것도, 사랑한다는 고백도, 모두 진심이었다. 어차피 어떤 생각을 하던 그 끝에는, 루카스, 네가 있을 것이다. 

거실 테이블에는 늘 연습장과 연필이 놓여있다. 언제라도 영감이 떠오를 때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이다. 최근의 그림은 모두 고슴도치였다. 피던 담배를 재떨이에 올려두고 새로운 연습장에 나와 루카를 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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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의 짐을 덜어주는 것은 내가 약을 꼬박꼬박 챙겨먹고, 상담에 다시 나가는 것이다. 우울의 끝을 달리던 감정의 롤러코스터는 조금씩 남들이 말하는 정상 궤도를 향했고, 다행히 그 궤도를 유지 중이다. 부모님이 원하던 루카스와의 저녁 식사도 성공적이었으며, 이사오기 전에 살던 방을 루카스에게 보여주고, 서로의 어린 시절을 공유하고, 그 곳에서 새로운 둘 만의 추억을 만드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루카스는 좀 더 자주 나의 아파트로 놀러왔고, 함께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갔다. 쇼파에 엉켜 누워 같이 음악을 듣기도 했고, 발장난을 치며 책을 읽거나, 서로의 피아노 연주를 감상하기도 했다. 그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그도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다음 일 분만 생각하는 건 여전히 힘들었지만, 그와 함께하는 '시간 잇기'기에 참을 수 있었다. 



"네 눈에은 블랙홀 같아. 가만히 바라보면 빠져들어, 헤어나올 수 없게."   

마주보며 누운 루카스가 내 눈을 보며 속삭였을 때, 머릿속을 번뜩이며 스쳐지나간 것은 한 때 꾸었던 반복되는 꿈이 언젠가, 현실이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진정한 '인생의 남자'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매 순간 너를 사랑하기로 결심했다. 


감정의 롤러코스터가 끝나는 날, 그 날의 기분을 행복으로 정할 거야.

사랑해, 진심으로. 루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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