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방을 나가자 널찍한 정원이 나타났다. 갑자기 나타난 평화로운 풍경에 카이는 잠시 멈춰섰다. 길 옆으로 여름 꽃들이 피어 있고. 길은 잘 닦인 돌길이었다. 날씨는 화창하고 하늘은 파랗고 주변은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새소리도.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원의 여기저기 이름이 적힌 문들이 보였다. 뒤를 돌아보니 카이가 나온 문에도 회색으로 카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천천히 길을 따라가다 가장 가까운 문 앞에 섰다. 자주색으로 '디아나'라고 적혀 있었다. 똑똑 노크하자 들어와!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실내인데? 어지간해서는 표정이 변하지 않는 카이도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얀 대리석 천장에는 구름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어디선가 눈이 흩날리며 내리다가 바닥에 닿는 순간 사라지고 있었다. 손을 뻗어 보니 차가운 눈송이가 내려앉았다가 스르륵 녹았다. 눈이 맞기는 했다.

그제야 카이는 방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대리석으로 된 방은 어마어마하게 넓었고 벽에는 정교한 부조가 새겨져 있었다. 네 귀퉁이에 고양이 조각상이 하나씩 서 있었지만 벽도. 조각상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잡동사니들이 방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르골이라든가. 섬세한 무늬가 있는 컵이라든가. 종이 더미들.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무언가들. 방 중앙에는 금색 공과 빨간 전구를 걸어 둔 거대한 트리가 있었다. 시민은 보이지 않고 발랄한 목소리만 들렸다.

"새로 온 친구야? 반가워. 메리 크리스마스야."

"... 지금은 여름인데."

카이는 여기도 계절이 있나? 하고 의문을 가지면서도 말했다.

"그러니 크리스마스가 더 특별해지는 거지."

그렇게 말하며 거대한 트리 뒤에서 나타난 건 자주색 머리를 틀어올리고 어두운 붉은색의 원피스를 입은 소녀였다. 어께에 걸친 빨간 망토가 나름 산타 복장인 듯 했다. 머리에는 녹색과 붉은색 보석이 박힌 귀여운 머리띠를 쓰고있었다. 소녀가 경쾌하게 걸어오자 부츠가 대리석 바닥에 부딪치며 따각따각 소리가 났다. 

"내 이름은 디아나. 카이 맞지?"

"응. 반가워."

"다른 애들은 좀 만나봤어?"

"아직."

"내가 처음이야? 진짜 막 왔구나."

"내가 새로 온 건 어떻게 알았어?"

"팝업이 떠. 누구누구가 새로 온다는."

디아나는 카이를 트리 옆의 긴 탁자로 안내했다. 그리고 차를 따라주며 유쾌하게 말했다.

"크리스마스는 왜 하루뿐이지? 매일매일 크리스마스였으면 좋겠어. 아니 부활절도 매일. 새해도 매일. 그리고 할로윈도 매일이면 좋을 텐데."

"... 정신이 하나도 없을 것 같은데."

"사실 그렇지. 원하는 걸 다 가지면 오히려 실망스러워지는게 욕망의 딜레마 아니겠어. 결핍이 있어야 만족도 커지고. 기대가 있어야 기쁨도 커지지."

카이가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자 디아나는 차를 건네주며 물었다.

"뭘 좋아해? 케이크도 있고. 초콜릿이랑 사탕이 있고. 단 게 싫다면 여기 칠면조도 있어."

"뭐든 상관없어."

"아. 혹시 뭘 좋아하는지 아직 모르나?"

"음. 잘 모르겠어."

"그럴 수 있지. 여기 뭐가 많으니까 천천히 시도해봐."

디아나는 잡동사니 틈에서 이것저것 꺼내왔다. 계속 움직이는 디아나를 보던 카이는 가장 가까이 있는 병에 담긴 지팡이 사탕을 아작 깨물었다. 박하맛이 났다.

".....너도 감정을 발현한 거지?"

"응."

"무슨 감정을 발현했는데?"

"내가 맨 처음 발현한 건 욕망이야. 오해하지는 마. 욕망은 그저 내가 맨 처음 가진 감정일 뿐이고. 욕망 자체는 나쁜 게 아니니까. 하지만 여기 온 다음에 이것저것 다른 감정도 많이 가지게 되었어."

"다들 여기 오면 그렇게 되나?"

"다 그렇진 않지만. 보통은 일단 감정을 느끼게 되면 다른 감정도 발전하더라고. 나 같은 경우엔 욕망이 생기니까 그 욕망이 채워지면 성취감도 느끼고 안 채워지면 슬퍼하고....뭐 그렇게 되지."

"욕망이 뭔데?"

"뭔가를 가지고 싶어하고 해보고 싶어하고....뭐 그러는 거지. 가장 발현하기 쉬운 감정 중 하나야. 예를 들면 생존욕구."

"아."

카이는 디아나의 창을 띄워보았다.


<이름:디아나

출생일:2500-11-15

일련번호: 25001115-28

칭호: 수집가, 욕망의 디아나

외모: 머리: #C94B84 올림 머리. 눈: #632736 쌍커풀. 붉은색 망토. 긴소매 적흑색 플레어 원피스. 적흑색 부츠

특징: 활달함. 수집벽

특기: 물건 수집. 식도락.

좋아하는 것: 케이크. 초콜릿. 반짝이

싫어하는 것: 아스파라거스

현재 상태: 반가움.>


디아나도 카이의 상태창을 읽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 발현한 게 사랑이야? 어려운 걸로 시작하네."

"어려워?"

"보통은 좀 더 원초적인 감정으로 시작하지. 기쁨이나. 분노나. 아니면 나처럼 욕망이라든가. 거기다가 겔다라니. 어려운 상대를 골랐네."

"....왜?"

"걘 너무 바쁘거든. 박애주의자라니까. 항상 누굴 돕는다고 돌아다녀. 우리들 중엔 이졸데랑 겔다가 가장 바빠. 그건 그렇고 혹시 네가 누굴 좋아하는지 알리고 싶지 않다면 상태창 항목 일부는 비공개로 돌릴 수 있으니까 참고해."

"아. 그런 기능이 있었지."

"보통 잊어버리더라고. 미발현자한테는 필요한 기능이 아니니까."

"겔다가 어디 있는지 알아?"

"어. 미발현자들이랑 있는 거 아냐?"

"돌아왔다고 들었는데."

"그럼 잘 모르겠어. 여기 어딘가 있겠지."

말하는 동안 드디어 식탁을 꽉 채운 디아나는 반대편에 앉았다.

"자. 우선은 네가 뭘 좋아하는지부터 알아보자."

디아나는 접시를 둘씩 밀어주며 둘 중에 하나를 골라보게 하는 걸 여러 번 반복했다.

레몬과 박하. 초콜릿과 사탕. 우유와 커피.... 의도한 건지 대부분 크리스마스 음식이다. 이쯤되면 욕망이 아니라 식욕을 발현한 게 아닐까....그것도 욕망이긴 하구나. 카이는 머뭇거리며 주는 대로 이것저것 먹어보았다. 역시 잘 모르겠다.


"자. 이거 줄게."

마지막으로 계피사탕을 든 채 돌아갈 채비를 하는 카이에게 디아나는 구슬을 하나 주었다.

"스노우볼?"

"크리스마스 테마야."

구슬 안에서 반짝이는 금빛 사슴 위로 눈꽃이 흩날렸다.

"무슨 용도가 있어?"

"그런 건 없지만. 예쁘니까. 네 방에 장식해봐."


대기실로 돌아오니 팝업이 떴다.

<방을 꾸며보세요.>

뭘로 꾸미라는 건가. 스노우볼을 구석에 두는 정도로 방을 꾸몄디고 할 수는 없다. 긴가민가하며 상점창을 열어보니 익숙한 창이 떴다. 아직 쓸 수 있는 줄은 몰랐다. 체력이나 포만감 등의 상태 수치는 다 사라져서 당연히 상점 창도 없을 줄 알았다. 품목도 거의 비슷했고. 가격도 비슷했다. 포인트도 그대로였다.

<포인트는 기존처럼 직업 활동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럼 또 수업을 들으면 된다는 건가. 일단 미루고 그녀는 상점창을 훑어보았다. 꾸미는 건 또 어떻게 하는 건지 전혀 감이 안 잡혔다. 디아나 방처럼 트리라도 들여놓아야 하나. 결국 카이는 기본적인 가구를 구매해 방에 배치했다. 스노우볼은 탁자 위에 놓고 침대에 누웠다. 상태 수치가 더 이상 없는데도 피곤했다. 문득 카이는 스노우볼을 도로 가져와 한번 흔들어 보았다. 눈꽃이 하늘하늘 흩날렸다.

.....평소였다면 지금쯤 잘 준비를 끝내고 침대에 누워 있었을 것다. 그리고 일어나면 언제나처럼 등교를 하고. 또 서머와 수업을 들었을 것이다.


서머가 보고 싶었다.


이게 외로움이구나. 문득 카이는 깨달았다. 어떤 감정을 발현하면 다른 감정도 같이 생겨난다는 디아나의 말은 옳았다.


다음 날 카이는 아침을 먹을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아무래도 더 이상 먹을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결국 카이는 이무것도 하지 않고 다시 문 밖을 나섰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던 정원에 희미한 말소리가 들렸다. 아무 생각 없이 말소리를 따라가 보니 흰 테이블 주위에 모여 있는 시민들이 보였다. 아침 식사중인것 같았다. 다가가 보니 시민들은 카이를 보고 아는 체를 해왔다.

"뭐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

검은 긴 머리에 검은 원피스 차림의 여자가 말했다. 보라색 눈이 그녀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카이야."

"그런 것 같더라. 여기 애들은 다들 얼굴을 알아서. 난 멜이야. 여긴 릴리아나. 그 옆엔 쥘레트. 각각 분노. 외로움. 질투라도 불러도 돼."

연둣빛 눈에 흰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이 양손을 흔들며 배시시 웃었다. 그 옆에는 갈색 머리에 정장에 코트를 차려입은 여성이 고개를 숙여보였다.

".....실례지만 다들 부정적인 감정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

"아니. 저기 저쪽에 보면 성취의 요안나. 기쁨의 레아. 뭐 그런 애들도 있어. 발현하고 시간 지나면 다들 비슷해지니까 호칭은 별로 신경 안 써도 돼. 안 그런 애들도 있지만."

조금 떨어져 앉아 얘기중인 푸른 머리와 금발을 각각 가리키며 멜이 말했다.

"그렇구나."

"앉아서 아침 먹을래? 여기서 먹고 싶으면 음식을 가져와서 먹는 거야. 방에서 먹고 싶으면 그래도 되고."

"아침은 안 먹어도 되지 않아?"

"그렇긴 해. 그냥 습관 같은 거지. 아무 때나 먹는 애들도 있고, 안 먹는 애들도 있어. 욕망처럼 그냥 계속 먹어대는 애들도 있고."

"디아나?"

"응. 걔처럼. 만나 봤구나?"

"어제."

"기운이 넘치지. 욕망 칭호는 꽤 많은 편인데. 그중에서도 걔는 좀 특이해. 이번에는 무슨 행사를 하고 있든?"

"크리스마스라던데."

"여전하구나."

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분노라는 칭호를 가진 시민이라면 언제나 화를 내야 할 것 같은데. 쥘레트가 당겨 주는 의자에 앉아 상점창을 열며 카이는 물었다.

"혹시 겔다 어디 있는지 알아?"

"어.... 걘 여기 잘 안 붙어있어서. 알아?"

릴리아나가 고개를 저었다. 쥘레트가 말했다.

"문에 부재중이라고 붙어있던데."

"얼마나?"

"꽤 오래. 몇 년 된것같은데."

그건 그동안 자신과 같이 있어서 그럴 거라고 카이는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왔다면 왜 여전히 부재중인지 모르겠다. 혹시 다시 내려간 게 아닐까.

"너희는 보통 뭘 하면서 지내?"

"뭘 배우기도 하고. 일도 좀 하고. 취미생활을 즐기거나 하면서 살지. 식물을 길러도 좋고 뭘 만들어도 좋고. 뭐든 해도 괜찮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요안나와 레아를 비롯한 다른 시민들까지 소개받은 뒤 식사를 끝낸 카이는 이제 뭘 해야 하나 고민했다. 어딜 가면 겔다의 행방을 찾을 수 있을까.

"이졸데는 어디 있어?"

"이졸데? 걔는 보통 방에 있을걸. 아니면 록시랑 있던가. 걔들 방 찾아봐."

이졸데는 뭔가 알지도 모른다. 카이는 이졸데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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