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 엘리베이터 차임벨이 울리고 문이 열렸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가자 인기척을 느낀 차 실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여주에게 인사를 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전무님. 네. 차 실장님도 좋은 아침이에요- 미소를 지으며 인사에 답한 여주가 전무실로 들어가려다 아- 하며 상체를 살짝 뒤로 물렸고 차 실장이 무슨 일이냐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오늘 점심은 차 실장님 따로 드셔야 할 것 같아요.”


“아, 네. 알겠습니다.”





그 뒤로 전무실로 들어와 오전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올라온 보고서를 살펴보고 있는데 울리는 벨소리. 흘긋 시선만 옮겨 발신자를 확인해 보니 모르는 전화번호였다. 누구지. 잠시 고민을 하던 여주가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받았다.





“네. 김여주 입니다.”





나직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고 전화를 건 상대방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 안녕하세요 전무님. 저 재무팀 한예진 입니다.


“아, 네. 예진씨.”





이렇게 직접적으로 전화가 올 거라 전혀 예상 못 한 인물이라 살짝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씀 하시라고 얘기하자,





- 바쁘신 거 알고 있지만 잠시 제게 시간 좀 내주셨으면 해요.


“어떤 이유 때문에요?”


- ......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알아야 제가 바쁜 제 시간을 예진씨께 내드릴 수 있지 않을까요.”


- ......제가 전무님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여주는 예진이 듣지 않게 휴대폰을 살짝 떼고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으니 전무실로 올라와서 얘기를 하자 하니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오늘 연차를 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럼 밖에서 만나죠.”





전무실 문을 열고 나가자 의문을 띈 얼굴로 쳐다보는 차 실장에게 일이 생겨 좀 일찍 나가보겠다는 얘기를 하고 그대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켜고 엑셀을 밟자 부드럽게 차가 움직였다.






* * *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카페에서 예진을 만났다. 주차를 하고 카페에 들어서니 아직 점심시간 전이라 사람이 없었다. 구석에 있는 자리에 앉아있는 예진을 발견하고 걸어가 반대편에 앉았다. 예진은 자리에 앉은 여주에게 갑자기 이렇게 시간을 내달라고 해서 죄송하다며 짧게 인사를 했고 여주는 예진이 무안하지 않게 살짝 웃으며 괜찮다며 대답했다.





“그래서 황금 같은 연차에 저를 만나서 할 얘기라는 게 뭘까요.”


“...... 제가 이렇게 따로 만남을 요청드려서 할 말이라면 전무님도 눈치는 채셨을 것 같습니다.”


“글쎄요. 저는 모르겠네요. 예진씨랑 크게 접점도 없을뿐더러 또 예진씨가 제게 고민 상담을 할리도 없잖아요.”





안 그래요? 딱 잘라 얘기하자 예진은 아무 표정 없이 앞에 놓인 물컵을 들어 마셨다. 그리고 결심한 듯이 테이블을 보고 있던 시선을 올려 비장한 표정으로 여주를 쳐다봤다.





“전무님께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실례라는 건 알지만.”


“실례라면 말 안 하는 게 낫지 않나요.”


“......마케팅팀 이동혁 대리님에 관한 얘기입니다.”


“저한테 이동혁 대리의 얘기를 왜 하죠?”


“저 대충 눈치는 채고 있습니다. 이 대리님하고 전무님 사이. 흔한 보통 친구 사이 아니라는 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전무님 제가 이동혁 대리님을 많이 좋아합니다.”





여주는 헛웃음이 나올 뻔한 걸 꾹 참았다. 뭐 어쩌라는 건가. 지금 나보고 예진씨가 너를 많이 좋아한다더라- 하며 이동혁에게 전해달라는 건가? 자신과 동혁의 사이를 눈치를 챘다는 예진의 말에 크게 동요 하지도 않았다. 완전하게 다 알았다면 이렇게 차분히 얘기할리는 없었으니까.





“네. 그래서 그때도 못 본척 해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사내연애를 반대하는 편협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전에 이 대리님 오피스텔 주차장에서 봤어요.”





뭐를요? 그곳에 전무님 차가 있더라고요. 예진의 말에 여주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저도 같은 회사 다니는 직원인데 전무님 차를 모를 리는 없잖아요."


"......"


"그리고 감사 인사를 늦게 드리네요. 그때 주신 립스틱, 잘 받았습니다.”





처음에 의문이 들었을 때는 어라? 하며 우연이겠지- 하며 넘겼고 두 번째는 설마- 하며 넘겼지만 세 번째에 깨닫고 말았다. 예진은 신제품 출시 행사 때 데이트 신청을 하려고 동혁이 혼자 있을 타이밍을 잡기 위해 곁눈질로 훔쳐 보고 있었고 휴대폰을 보며 슬쩍 미소 짓던 동혁이 비상 계단 쪽으로 향하길래 바로 쫓아가면 티가 날까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 비상 계단 쪽으로 슬그머니 다가가 문을 열었었다.





문을 열자마자 여주의 목소리가 바로 들려왔고 예진은 화들짝 놀라 문을 닫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면서 비상 계단 쪽 문을 계속 흘끔 거리며 보고 있는데 문을 열고 나오던 여주와 그 다음으로 문을 열고 나오는 동혁을 보며 '아, 둘 사이에 뭔가 있구나.' 라는걸 그날 확신했다. 그날 이후로 동혁과의 연락과 약속이 줄어들었고 그대로 동혁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듣게 됐다.





“......전 전무님처럼 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일머리도 뛰어나지 않아요. 전무님에 비하면 많이 뒤처진 사람이라는 거 잘 알고 있어요.”


“......”


“저는 전무님이 항상 대단하고 멋진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


“......전무님의 마음이 궁금합니다.”





당돌하게 제 마음을 묻는 예진을 보며 여주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제 마음이 왜 궁금한데요? 하고 묻자 예진은 여전히 여주를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전무님은 제 롤 모델이시고 무척 존경하는 분이에요.”


“네. 칭찬은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저는 계속 그 마음을 유지하고 싶어요.”





여주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어떠한 말을 해야 할까.





“제가 지금 하는 말이 예진씨가 듣기에는 재수 없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내 능력은 내가 쌓아올린 것도 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운이에요.”





소위 말하는 금수저. 지금 여주의 나이에 비해 있는 위치는 운이었다. 좋은 집안에 태어난 운. 그렇다고 해서 남들한테 무시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죽어라 노력했다.





“제가 봤을 땐 예진씨도 충분히 멋진 사람이에요. 굳이 남하고 비교하며 자신을 깎아내리지 말았으면 해요.”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마음대로 되나요? 다른 사람이 이래라저래라 하면 그대로 따라지는 것도 아니고.”


“......”


“내 마음이 어떻다고 해서 예진씨 마음을 고칠 필요는 없어요. 예진씨 마음 가는 대로 하세요.”





저를 계속 존경하던 아니면 미워하던, 그건 제 관할이 아니고 예진씨 마음이에요.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하세요. 방긋 웃으며 말을 마치자 예진은 입술을 살짝 말아 물었다. 더 할 얘기 없으면 이만 일어날까요? 시간을 확인한 여주가 묻자 예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약속 시간보다 일찍 왔지만 여주 보다 상대방이 먼저 앉아있었다. 조용히 닫히는 문을 뒤로 두고 맞은편에 가서 앉자 노년의 남자가 여주를 반겼다.





“어서 오게.”


“기다리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닐세. 내가 너무 일찍 온 탓이지.”





여주의 반대편에 앉아있는 노년의 남자는 Y 기업의 회장이었다. 행사에서나 몇 번 인사를 했던 것이 여주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렇게 둘이 따로 사석에서 만날 사이도 아니었다.





“내가 갑자기 식사를 하자고 해서 놀랐을 거라 생각하네.”


“아니라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좋은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기회일 것 같아 반가웠습니다.”


“나이 먹은 늙은이와의 약속을 반겨주다니, 이거 참 영광이구먼.”





최근에 몸이 좀 안 좋으셨다고 전해 들었는데 지금은 좀 괜찮으신가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허허- 하고 웃던 이 회장은 늙으니까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던 감기도 쉽게 못 지나쳐 간다며 대답했다.





“아들이나 손주들도 안 해주는 걱정을 받다니, 이거 참 기분이 묘하구먼.”





이 회장은 슬하에 아들 형제만 두었다. 집안에서 큰 반대가 있었지만 굽히지 않고 결혼하게 된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나온 장남. 하지만 장남을 낳으면서 그만 몸이 안 좋아 먼저 세상을 떴다. 그리고 몇 년 뒤 집안에서 맺어준 두 번째 부인하고 재혼해 차남을 낳았다. 이 회장은 자식들에게 무척이나 자상한 아버지였다.





하지만 이 회장의 장남은 가족 여행을 가던 중 불후의 사고를 겪게 됐고 장남과 며느리와 함께 먼저 떠나보내게 되었고 손주만 돌아왔다. 무척이나 사랑했던 부인과 그 아들도 먼저 떠나보내게 되었으니 이 회장은 크게 실의에 빠졌다.





“이 회장님을 보면 저희 할아버지가 생각나서요. 저도 할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거든요.”


“허허, 하긴. 내 손주들도 다 김 전무랑 비슷한 나이대들이니.”





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회장의 눈빛을 보니 이제 이 약속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낼 것 같았다. 크게 교류 없던 자신에게 식사 약속을 잡은 이 회장의 목적이 무엇일까, 여주는 이미 예상은 했지만 이 회장의 입으로 직접 들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여주는 환하게 웃으며 이 회장을 쳐다봤다.






* * *






“이 대리님. 저희 오늘 밖에서 점심 먹을 건데 어떻게 하실래요?”


“아, 저는 오늘 선약이 있어서요.”


“그래요? 알겠어요. 점심 맛있게 드시고 오세요-“


“네- 주임님도 식사 맛있게 하세요.”





웃으며 인사를 건넨 동혁은 재킷을 들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찍고 안내를 따라 운전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한 동혁은 안내를 받아 룸에 들어갔다. 직원들이 문을 열어주자 동혁은 몸이 굳었다.





“딱 맞춰서 왔구나.”


“.....여주야.”


“그럼 저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오늘 즐거웠네. 혹시 다음에도 이렇게 만나 대화할 기회가 있을까?”


“네. 그럼요. 언제든지요.”





여주의 대답에 이 회장은 만족스러운지 허허 소리를 내며 웃었고, 자리에서 일어난 여주는 이 회장에게 목례를 하며 인사를 한 뒤





“그럼 편하게 대화 나눠.”







아직도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동혁의 옆을 슥- 지나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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