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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뭐야? 4년마다 돌아오는 단 하루니까 좀 특별하게 보내고 싶은데, 어쩌다 보니 연인이랑은 보내지 못해서 나로 대체하겠다는 말?"


  에리스는 제 앞에 있는 여인의 긴 말에 마시고 있던 커피 잔에서 조심스레 입술을 떼고는 못마땅하다는 듯 눈썹 끝을 내리며 볼멘소리를 내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물론 아쉬운 것도 맞지만 그렇게까지 하루하루에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아요."


  "거짓말~ 너 이런 거에 강박증 있잖아. 우리가 같이 일 한 게 몇 년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새 직장은 다닐 만 해? 적응은 잘했고? 사내 왕따라도 당하는 거 아니지?"


  "에이~ 제가 그런 걸 당하고 살 성격이에요?"


  "하긴 그렇다~. 너 은근 성질 더럽잖아."


  원래 다 참고 사는 거죠. 하고 웃으며 덧붙인 뒤, 다시 입술을 컵에 대며 안의 커피를 들이켰다. 아직 좀 뜨거운 액체가 혀를 지나 식도로 넘어가는 것에 화상을 입는 것은 아닌가 우려될만치 뜨거웠지만 잠깐 눈을 감고 인내하면 특유의 향만이 남아 제법 만족스러웠다. 티코스터 위에 소리가 나지 않도록 잔을 내려놓은 에리스는 그 옆의 포크를 들어 아직 예쁜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케이크의 앞부분을 갈라내었다. 하얀 우유 크림이 단면에 녹아내리는 색의 조화가 예뻤다. 


  "사내 왕따는커녕 오히려 가끔 좀 지나치게 배려해준다 싶을 때가 있으니까요. 뭐, 아무래도 가지고 사는 페널티가 있다 보니 이해는 되지만요."


  "사람이 심장을 부여잡고 픽 쓰러져버리는데 어련하겠어? 어우, 나도 너 처음 그랬을 때 내 심장도 같이 떨어진 줄 알았잖아. 지금 생각해도 손 발이 차갑게 식는다."


 "그 정도인가요? 기절할 만큼 고통이 크긴 한데, 그래도 꽤 금방 기절해서 저로서는 별로 기억이 잘 나지 않네요."


  물론 이것은 거짓말이다. 가장 처음 능력이 발현했던 어릴 적, 트럭에 치여 온몸이 짓이겨질 정도로 컸던 교통사고의 고통을 기억하듯 이따금씩 찾아오는 부하를 견디지 못한 심장의 격통 역시도 그 순간, 순간을 모두 기억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밥 먹듯 입에 달고 살아온 거짓말은 숨 쉬는 것보다도 자연스러워 이제 와 내색하기에도 생소한 것이었다. 다만 에리스는 능숙해진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바꾸지 못한 그 본인의 성질 탓에 죄책감으로부터는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덕분에 늘 이런 선의의 거짓말이라고도 할 수 있을 소소한 거짓말에서조차 콕콕 쑤시는 양심통을 그 심장의 무게와 함께 달고 살아야 했다.


  "음~ 정말 그럴까~?"


  눈앞에 앉아 있는 여인, 알리샤 그린우드는 에리스가 헬사렘즈 롯에 근무할 시절부터 함께 했던 HPD의 동료로 때로는 에리스보다도 더 에리스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에리스는 그것을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과, 타인이 생각하는 자신은 공존함과 동시에 완벽히 동일할 수는 없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생각했다. 다시 말해 알리샤가 파악한 자신은 그가 오해하는 에리스 리암이 아닌, 에리스 그 본인이 인지하지 못한 자신의 본질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에리스는 그의 말에서 자신이 혼자서는 파악할 수 없을 자신의 성찰점을 찾을 수 있어 늘 그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이런 얘기 별로 재미없지 않아요?"


  "으음? 아니? 완전 재밌지. 아니면 너가 좋아하는 설명충이라도 할래?"


  "말을 너무 심하게 하시네~. 그래도 기대에 응해볼까요? 2월 29일을 3월 0일이라고 부르는 건 알아요?"


  "12월 32일은 익숙한데."


  "뭐, 비슷한 느낌이죠. 소비에트 영화 『6월 31일』에 나오는 가상의 날짜 6월 31일이라던가, 『세상의 마지막 밤』이라는 단편 소설에 나오는 1951년 2월 30일처럼요. 사실 정확하게는 다른 달과 달리 말일이 고정되어 있지 않은 2월의 말일을 3월 0일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오묘하네. 그럼 오늘은 2월이기도 한 동시에 3월이기도 한 거구나. 거기다 4년에 단 한 번만 경험할 수 있으니 너가 집착할 만도 해."


  끝까지 자신의 강박증을 논하는 그의 모습에 에리스는 다시 못마땅해지고 말았으나, 그리 틀린 말도 아니라는 것 역시도 인지하고 있었기에 무어라 더 반박하지는 않았다. 사실 마음 한 편으로는 자신은 4년 뒤에 돌아올 똑같은 날을 맞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어렴풋,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느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날이지만 자신에게는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날. 지나치게 부정적이었으나 에리스 리암이란 인간은 원래 그랬다.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미리 두려워하고, 겁을 집어먹은 채 도망가는 나날들.


  자신이 가진 두려움을 무언가로 환산한다면 그 무언가의 크기는 얼마나 클까? 가령 그것을 알약으로 바꿔본다면? 능력이 발현한 뒤로 에리스 리암은 자의로는 병원을 찾지 않았다. 병에 걸리지 않았고, 때문에 약이란 것을 먹을 일이 없었다. 이런 체질이 아니었다면 남들은 혀를 찰 쓸데없는 것에서조차 번뇌하고 속앓이를 하는 그는 아마 위장병을 달고 살았을 것이고, 수십 가지의 알약을 입 속에 삼켜 물과 함께 제 안으로 흘려 보내었을 것이다. 그런 만약을 상상한다면 그가 집어삼켰을 악약의 개수는 몇 개일까? 평생 병들지 않을 몸을 대신에 앓아온 마음의 세월은 몇이나 될까? 주기적으로 리셋을 반복하며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몸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로 인해 심장은 낡아갔고, 그 심장을 닮은 그의 삶 역시 반복해서 아팠다. 치유할 병이 없어 그 속앓이는 탈출구가 없었고 종내에는 그 자신이 바라던 삶이 아닌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결말을 맞이했다. 아니, 결말이라고 하기엔 말에 어폐가 있을까. 에리스 리암은 동화 속 주인공도, 하다못해 아름다운 이야기 속 엑스트라조차 아니었고. 그저 이 현실에 존재하는 하나의 작고 여린 인간이었을 뿐이니. 


  "너 또, 또, 또. 쓸데없는 생각 하고 있지?! 벌이야!"


  "아!"


  이마에 딱!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에리스의 고개가 살짝 뒤로 넘어갔다. 그 길게 뻗은 손가락으로 딱밤을 먹인 알리샤는 기세등등하게 웃으며 팔짱을 끼고 의자에 기대었다. 맞은 이마를 문지르며 시선을 정면으로 돌리자 오랜 HPD 생활로 인해 굳은살과 흉터가 가득한 손이 보였다.


  "언제까지 그렇게 순식간에 축 쳐질래? 뭐, 그것도 너 다운 거라면 너 다운 거지만. 있지. 사람이 하는 걱정 중에 50%는 보통 일어나지도 않을 아주 쓸데없는 걱정이래. 남은 50% 중에서도 그나마 20% 정도가 실제로 일어날 확률에 근접하다고 했던가? 아 예전에 책에서 읽은 거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나네."


  "그래요? 나중에 한 번 그 책을 찾아봐야겠네요. 꽤 흥미로운 얘기지만 그것이 제 이 성격의 변화에 영향을 줄지는 잘 모르겠지만."


  "또, 또 그러네. 너 이상적인 척하면서 은근 부정적인 거 가끔 좀 재수 없어."


  "언젠 저다워서 좋다면서요?"


  새침하게 그리 대꾸하자 알리샤는 빤히 째려보다 호쾌하게 웃으며 에리스의 조각 케이크의 절반을 가져갔다. 아슬하게 걸린 딸기가 절벽이 되어버린 곳으로 기울어졌으나, 약간의 미동 후에 멈춰 섰다. 그런 딸기의 모습에조차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에리스는 그 광경을 눈에 담고, 생각에 잠겨 들었으나 눈앞에서 재잘대는 밝은 목소리에 쉬이 정념 속 네모난 탈출구를 찾을 수 있었다. 


  케이크가 맛있다는 말에 에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케이크 몇 조각을 다시 시키고, 알리샤는 그에 이렇게 케이크를 많이 먹으면 살이 찐다는 속에도 없는 말을 꺼낸다. 그러면 에리스는 다시 살이 찌는 것이 오히려 더 보기 좋을 것이라며 듣기에 달디 단 말을 해주고, 알리샤는 다시 능청은~ 하며 그 단 향을 이어간다. 몹시도 평범하고 익숙한 풍경이었다. 4년에 한 번씩만 돌아오는 달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굳이 의식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닌 날이었다. 그레고리력 따위 결국 인간의 손에 의해 재정된 역법에 불과했으니 당연한 말이었다.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영웅이 되고 싶었으나 영웅은커녕 동화 속 엑스트라조차 되지 못했던 마음대로 되는 것 하나 없는 제멋대로인 삶. 그렇게 부정했던 사랑을 끝끝내 인정하며 무너졌던 것들과, 자기 자신조차도 부정하며 다시 시작된 인생은 그 유통기한이 10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결국 이것 역시 아무것도 아니 일이 될 것이라면. 차라리 괜찮았다. 실패만 반복했던 삶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오히려 좋지 않은가. 그러니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에리스는 자신의 삶에 아직도 커다란 전환점이 남아있다면, 부디 제 남은 생명이 다 타버린 재가 되기 전에 찾아오기를 바랐다. 이왕이면 4년 뒤에 찾아올 똑같은 윤일이 되기 전에. 전혀 다른 생각과, 마음으로 같은 날을 맞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염원하며 언제나와 같이 일과 피곤에 찌들어 그 특유의 거뭇한 눈을 하고 있을 연인에게로 향했다. 어쩌면 다시 돌아올 윤년의 60번째 날엔 함께가 아닐 수도 있으니. 단 1초라도 소중히 하고 싶었다. 아직 그 전환점은 찾아오지 않았기에, 결국은 그런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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