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 스티브 / 오메가 토니

코믹스 타임라인을 대체로 따라갈 예정입니다

큼지막한 코믹스 사건들에 대한 스토리 및 설정 스포일러(주로 아이언맨 사이드)가 있을 겁니다

기본적으로 정발된 건 거의 포함된다고 보셔도 될 것 같네요 

기억의 왜곡과 전개상 필요해서 한 날조가 다분히 있습니다..








외계 종족인 스크럴은 외형을 변형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종족이었다. 그들은 한때 크리-스크럴 전쟁의 일환으로 지구를 침공한 적이 있었는데, 전쟁이 끝나고 토니를 비롯한 일루미나티 멤버들은 직접 스크럴 함선을 찾아가 더는 지구를 침공할 생각은 말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경고는 효율적으로 끝나지 못했다.

스크럴이 가진 기술력은 예상 외로 뛰어나 일루미나티 멤버들은 속절없이 그들에게 당하고 말았다. 그들은 스크럴에게 사로잡혔고 생체 실험을 당했다. 지구의 기술과 능력을 고스란히 가져다 바치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들이 지구인을 얕잡아 본 덕분에 더 많은 것을 내어주기 전에 탈출을 했다는 점이었다. 일루미나티는 스크럴 함선과 전력을 엉망으로 만들고 그들의 우주선을 하나 탈취해 지구로 귀환했다.

이후로 스크럴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스파이더맨의 센서가 반응한 적이 없었고, 울버린의 후각이 이질감을 발견한 적도 없었다. 스티븐 스트레인지의 마법도 마찬가지였다. 지구 어디에서도 그들의 흔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일루미나티 멤버들을 실험하면서 얻어낸 것으로 그 모든 것을 피해갈 기술을 개발해내었고 더욱이 토니를 비롯한 히어로들이 초인등록법으로 서로를 견제하느라 외부를 신경을 쓰지 못하는 사이 수많은 사람들로 위장하여 숨어들었다.

심지어는 히어로 중의 누군가로까지 말이다.

실은 스크럴이었다는 것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늦어 있었다. 토니가 스크럴이 위장한 일렉트라의 시체를 들고 급히 소집한 일루미나티는 같은 멤버 중 하나인 블랙볼트 또한 스크럴이었던 탓에 가장 먼저 그들의 공격을 받았다. 일루미나티는 갑작스런 위기를 극복해내었지만 전쟁은 이미 서막을 알린 뒤였다. 그들이 다시 힘을 뭉치는 것 또한 이미 늦은 일이었다.

스크럴과의 전쟁 속에서 토니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스크럴의 생체 바이러스가 몸속에 스며들어 익스트리미스를 정지시켜버린 것이다. 익스트리미스의 인자가 토니와 아머를 연결하고 있었기에 기능을 잃고 나니 아머를 조종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토니는 과거에 만들어 두었던 구형 아머를 꺼내입고 스크럴 전쟁에 임했다.

결국 어떻게든 지구는 다시 한 번 무사히 승리를 거뒀지만, 이미 세계는 상당한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전쟁의 종식을 알릴, 스크럴 여왕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 최종적으로 지구를 위기에서 구한 것이 바로 노먼 오스본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지구를 구하는 순간을 모두가 보았고, 그 덕분에 그는 한 순간에 빌런에서 영웅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외계인의 지구 침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S.H.I.E.L.D. 국장, 토니 스타크는 국장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그 후임으로 노먼 오스본이 임명되었다. 토니는 그 소식을 듣고 국장으로써의 마지막 날, S.H.I.E.L.D.의 시스템에 바이러스를 심었다. 만약 오스본이 국가의 정식 승인 없이 초인들의 등록 자료를 열람하려고 하면 실행되는 바이러스였다. 이것은 즉시 S.H.I.E.L.D.의 중추 시스템을 마비시키고 모든 초인들의 정보—토니 스타크의 것을 제외한—를 영구적으로 파괴시킨다. 그리고 이 바이러스는 십중팔구 머지않은 미래에 실행될 것이라는 걸 토니는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어도 노먼 오스본 같은 이에게 히어로들의 신상명세를 넘길 수야 없었다. 무엇보다 직접 뿌린 씨는 직접 거둬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이렇게 되는 구나, 하는 탄식과 그때의 대립이 정말 의미가 없었다는 허탈함. 그리고 그럼에도 같은 상황이 온다면 자신이 할 일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고집이 뒤섞여서 조금은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아니, 어쩌면 이제부터 실행할 일의 결과를 내심 기대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당분간 S.H.I.E.L.D., 아니 이젠 H.A.M.M.E.R.인가. 아무튼 오스본의 조직은 유기적으로 움직이지 못할 거야. 내가 심은 바이러스의 피해를 복구하기에도 벅찰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시간이 넘치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서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예요, 토니?”

토니는 버지니아 포츠, 페퍼의 붉은 머리카락을 시야에 담았다. 한때는 저 붉은 머리카락에 손가락이 닿고 싶다고도 생각했었지만, 스티브를 각인한 뒤로는 사라진 생각이었다. 더욱이 그녀는 토니의 개인기사로 취직한 해롤드 호건, 해피와 결혼을 했다. 하지만 해피는 초인등록법으로 토니가 정체를 밝힌 뒤에 스파이마스터의 공격을 받아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고 결국 고인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페퍼는 지금, 하나뿐인 남편을 잃은 미망인이었다.

아직 힘든 시기를 다 헤쳐나오지 못했을 그녀를 이 일에 끌어들이는 게 맞는 선택일까. 그러나 달리 토니에게 믿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S.H.I.E.L.D.의 데이터베이스에 남은 자료는 이미 영구적으로 손상되고 없어. 내가 남긴 기술도, 이니셔티브 프로그램에 명시된 초인들의 신상명세도. 그러니 남은 건 백업본 뿐인데, 이젠 그걸 없애야지.”

“그게 어디 있는데요?”

마리아 힐이 물었다. 힐 역시 토니가 S.H.I.E.L.D.에서 해임될때 같이 해고를 당했다. 그녀와는 재직시절, 꽤나 반목하고 다투던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지나고 보니 토니가 그나마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토니는 힐에게도 한 가지 부탁을 할 참이었다.

“익스트리미스는 내 몸을 개조했어. 내 몸의 세포들은 그걸 유해하다고 판단하지 않았지. 그래서 개조는 내 의도에 맞게 끊임없이 이루어졌고 결국 그건 내 몸을 일종의 기계로 만들어버렸어. 지금 내 몸을 구성하는 모든 것은 하드웨어이며 그것을 잇는 신경은 전자회로인 셈이야. 난 익스트리미스라는 소프트웨어를 통해 아머의 시스템에 접근했고 덕분에 내 몸처럼 아머를 다룰 수 있게 되었지. 기계가 명령을 받고 작동하기까지 걸리는 버퍼가 사라진 거야. 그래도 조금은 버퍼가 남아 있었지만, 업그레이드를 통해 계속 줄여 왔어. 덕분에 이제 아이언맨 아머는 정말 나 아니면 아무도 쓸 수 없는 고성능 기계가 되어버렸지만…. 아니, 조금만 더 들어 봐. 요컨대 익스트리미스로 몸을 개조시키고 그 소프트웨어를 사용한 덕분에 난 최고의 무기를 손에 넣은 거야. 그리고 네트워크만 있으면 어떤 시스템이든 접근 가능해져서 최고의 정보망도 손에 넣은 거지. 그건 내 강점이 되었지만, 음…, 약점도 되었어. 스크럴 전쟁이 그 증거지. 그래서 지금은 익스트리미스를 제거했어. 남은 건 이미 개조 된 몸뿐이야. 아까 내 몸은 하드웨어라고 했지. 그럼 내 뇌는?”

“토니, 설마…!”

페퍼가 경악해서 말했다.

“맞아, 나야. 내가 백업본이야. 내 뇌는 일종의 하드디스크의 개념을 가지게 되어서 내 뇌 속의 모든 정보는 디지털 데이터로 치환할 수 있어. 여기 내 목 뒤에 있는 이 구멍에 특수한 회로만, 내 리펄서 기술의 전력만 사용할 수 있다면 언제든 마음대로 내 뇌 속의 정보를 화면에 띄워볼 수 있는 거지.”

“그런…, 백업을 지워야 한다면서요. 그렇다면 그걸 어떻게…!”

“데이터를 지우는 일이야 뻔하지. 그냥 삭제하는 거야. 싹 밀어버리는 거지. 단지 좀 상황이 힘든 건 이제키엘 스탠이 일으킨 사건 때문에 리펄서 기술을 가동시킬 수 있는 공장도 시스템도 먹통이라는 건데, 그래도 내가 직접 조작하면 여분의 에너지를 조금씩은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스크럴 침공이 있기 직전, 토니의 사업 동료이면서 그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적이 있는 오베디아 스탠의 아들, 이제키엘 스탠이 뒤로 불법 유통되고 있는 토니의 기술을 모아 테러 사건을 일으켰다. 그의 최종 목표는 토니였다. 그는 스타크 인더스트리 본사를 비롯하여 리펄서 기술을 만들고 구동할 수 있는 국제 지사를 포함, 총 네 곳에 동시다발 테러를 시도했는데 그때 그 테러를 막기 위해 토니가 선택하게 된 방법이 바로 모든 전자기기를 파괴시키는 것이었다. 그 사건으로 수 조 달러의 재산손실은 물론, 토니가 지구상에 구축한 모든 시스템이 먹통이 되었다. 스크럴의 침공은 하필 그런 때에 일어났다.

“데이터만 지우면 되는 건가요?”

힐이 물었다.

“그렇지.”

“초인들의 신상명세만?”

“사람의 뇌가 그렇게 간단하면 좋겠는데 그렇지가 않잖아.”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그 데이터인지 아직 구분할 수 없었다. 그럼 남은 방법은 전부 삭제하는 것이다. 단 하나의 데이터도 남기지 않고, 전부.

“전부 지워질 거야.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 이를테면 숨 쉬는 방법까지도.”

토니의 대답을 들은 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뭐, 이런 미친 사람이 다 있나 기겁하는 게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차라리 지금 머리를 쏴 버리는 게 낫겠네요, 제가 쏴 드리죠!”

“총은 안 돼. 파편이 남잖아. 내 뇌의 남은 조직만 가져가도 데이터를 빼어갈 수 있어. 거기에 다행스럽게도 초인들의 신상명세가 없으면 좋겠지만, 그런 운에 맡길 순 없지.”

“토니, 토니. 이건 아니예요. 이건…, 이건 자살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페퍼의 반응 역시 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짓이다. 그런 감정이 여실히 보였다. 페퍼가 토니의 계획을 자살이라 칭하는 건 타당했다. 표면적으로는 정말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으니까.

“자살이라니, 그럴리가.”

하지만 이건 자살이 아니었다. 자살이라면 이런 복잡한 계획따위 세울 필요가 없었다. 더 쉬운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토니는 죽을 수 없었고, 죽지 않으면서 뿌린 씨를 거두려면 지금 하려는 계획이 최선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그저, 굳이 따지자면 차오른 컵의 물을 덜어내는 행위일 뿐. 마리아 힐에게 배달을 부탁하게 될 하드디스크에는 토니의 기억이, 초인등록법이 표면에 떠오르기 전까지의 기억이 담겨 있었다.

그 말은 곧 스티브 로저스와 반목하기 전의, 그리고 그가 죽기 이전까지의 기억이라는 소리였다.

그렇다고 일어난 사실이 변할리는 없지만, 기억을 조금만 드러내면 앞으로 얼마간은 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토니는 그녀들을 그 계획에 끌어들여 각자에게 역할을 부여했다. 그 역할의 진정한 의미는 말하지 않았다. 모르고 움직여야 더 예측을 벗어날 가능성이 줄어드니까. 아니 어쩌면, 한편으론 그들의 실패를 기대하고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모두가 나가고 없는 방에서 토니는 작게 조소했다.

과연 이것은 소극적인 자살일까, 아닐까.










어벤져스에 새로이 호크아이와 스칼렛 위치, 퀵 실버가 가입했을 때, 아이언맨은 잠시 휴식기에 들어갔다. 이는 와스프와 앤트맨도 마찬가지였는데 자신의 삶을 한번 돌아보자는 이유였다. 요는 원래 하던 일에 집중을 좀 해야할 것 같다는 거였다.

아이언맨의 대외적인 일은 토니 스타크의 경호였으므로, 곧 그의 이유는 그것이었다. 물론 아직 모두에게 비밀이긴 해도 토니 스타크가 아이언맨이었기에 그 아이언맨은 사실 경호가 아니라 대내외적으로 회사를 건사하느라 바빴다. 개인적인 적들을 처리하기에도 바빴고.

어쨌거나 어벤져스 휴식기인 아이언맨은 설령 개인적으로 활동을 하더라도 이제 어벤져스와 마주칠 일은 없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와 마주칠 일도 없어졌다.

결국 마음은 줘버렸지, 그렇다고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지, 그래도 보고 싶고 곁에 있고 싶은 마음을 주체할 수는 없어서 토니는 휴식기에 들어갔음에도 종종 이렇게 멘션을 찾아왔다. 후원자 토니 스타크의 신분 만만세다.

사실 아이언맨 휴식기의 은밀한 이유 중 하나에는 스티브 로저스도 있었다. 몸이 멀어지면 그나마 좀 마음 추스리기에 좋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추스러지기는 개뿔, 안 보이니까 더 생각나고 보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스티브 말고 새로운 사랑찾기를 할 때도 토니의 숨통은 어벤져스 활동을 하면서 그를 만나는 것이었으니 하등 의미없는 일이었던 셈이다.

어벤져스 멘션은 채광이 좋았다. 넓은 거실에 둔 고급 소파의 촉감도 돈을 들인 만큼 부드럽고 편안했다. 지금 멘션에는 아무도 없어서 토니는 거실의 소파에 앉아 자비스가 내어준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조용한 집안과 밝은 채광, 따뜻한 차와 몸에 쌓인 피로는 토니의 눈을 감기기에 충분했다. 토니는 조용히 하품을 하고 눈을 비비다가 결국 이기지 못하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기다리는 입장에서 이런 모습은 좋지 않을 것 같지만 정말 오랜만에 찾아오는 단잠의 기운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불면증이었고 이전에는 술로 그걸 억눌렀지만 지금은 금주중이었다. 벌써 며칠째 제대로 자지 못한 몸은 이런 때에 꿀같은 잠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자비스가 잠든 자신을 볼 것이고 그럼 스티브나 어벤져스 멤버들이 돌아왔을때 조용히 먼저와서 깨워주겠지.

토니는 유능한 집사를 믿었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그의 집사 자비스는 유능했지만 도련님을 생각하는 집사였고 스티브는 몸에 배려가 베인 사람이었으며 자비스는 그런 스티브의 인품을 긍정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이었다. 어쨌거나 덕분에 토니는 정말 간만에 포근하고 기분 좋은 잠을 만끽했다. 잠이 깨고 난 후의 민망함만은 어찌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깨우지 그랬습니까?”

붉어진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토니가 앓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비스를 믿고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것이 무려 3시간이었다. “로저스님께서 깨우지 말라 하셨습니다.” 잠에서 깨지마자 부른 자비스는 인자한 표정으로 답했고, 토니는 그를 더 추궁하지 못했다. 옆에서 스티브가 “제가 부탁드렸습니다.” 하고 자비스를 두둔하기까지 했기 때문이었다.

“로저스 님을 비롯하여 어벤져스 여러분들은 모두 지금 멘션에 안 계십니다.”

“기다리지. 어차피 오늘 일정은 이게 마지막이니까.”

그래, 멘션에 들어오면서 그런 대화도 했으니 자비스는 더욱 스티브가 그러지 말라는데도 토니를 무리해서 깨울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터였다.

“많이 피곤하신 것 같아 그냥 주무시게 두었습니다. 자리가 불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러면 오히려 깨실 것 같아서….”

토니는 스티브 로저스가 직접 자신을 안아들고 저 복도 끝에 있는 자신의 개인방에 데려다 주는 상상을 했다가 민망한 것이 아닌 치사량의 부끄러움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솔직히 설레기도 했다.

아, 이럴 계획이 아니었는데.

스티브는 토니가 잠든 소파 맞은편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토니가 잠들고 30분쯤 지나서 스티브가 멘션에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니까 무려 2시간 30분을! 코앞에서 기다리게 만든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캡틴. 이렇게 기다리시게 할 생각이 아니었는데요.”

“괜찮습니다, 토니. 저는 책을 읽으며 기다리는 이 시간이 무척 즐거웠습니다.”

“책이 그렇게 재밌었나요?”

“책도 즐거웠지만, 평화로워서 말입니다.”

스티브의 평화롭다는 말에 토니는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용하고 따뜻하고 밝은 실내에 귀를 찌르는 전화벨 소리도 어벤져스 콜이 울리는 소리도 없으니 확실히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토니가 알기론 오늘은 어벤져스가 출동할만한 일도 없었다. 아마 다들 간만의 휴식에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러 나섰을 것이다.

“무슨 책을 읽고 계시나요?”

“아, 아이언맨이 소개해 준 목록에 있던 책입니다.”

스티브가 슬쩍 표지가 보이도록 책을 들었다. 토니는 책의 제목을 보고 기함했다. 하필 목록 중에 고른 게 함정카드라니. 아이언맨은 스티브가 좋아할만한 것들을 추천하면서 취향이 아닐 것 같거나 안 어울릴 것 같은 것들을 일부러 끼워넣었다. 그러니까 지금 보고 있는 ‘요즘 유행하는 요즘 소설’ 같은 것들을.

한창 유행하고 있는 스타일이라 스티브가 보기에는 적응도 안 될 뿐더러 등장인물을 이해하는데도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하필 들고 있는 게 게임 속을 오가는 하이틴 러브스토리라서 더더욱.

“그, 크흠. 그…, 읽으실만 한가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려니 퍽 힘들었다. 이런, 오늘같은 날은 토니 스타크가 아니라 아이언맨으로 왔어야 했는데. 그럼 웃으면서 “아이고 이 친구야, 그걸 그렇게 미련하게 다 읽고 앉아있나?” 하고 어깨를 두드리며 책을 뺏고….

“읽을 만하냐고 물으신다면 솔직히 그렇진 않군요. 하지만 보다보니 요즘은 이런 세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좋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좋은 기분이요?”

“네. 이렇게 사소한 것에 울고 웃고 기뻐하고 화내는 어린 친구들을 보니 전쟁이 끝나고 찾아온 세상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

“절 골리려고 고른 책이었겠지만, 오히려 이런 책을 골라줘서 아이언맨에겐 감사할 따름이군요.”

아, 정말 당해낼 수가 없다. 토니는 오늘 세번째로 얼굴에 열이 올라 이젠 정말 터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마지막은 대놓고 티를 낼 수도 없는데.

시선을 둘 데가 없어 고개를 돌린 토니의 시야에 벽시계가 들어왔다. 그러고보니 어느 샌가 거실에 쏟아지던 노란 빛의 햇살이 붉게 변해 그림자를 길게 그렸다. 처음 스티브만 머물던 멘션엔 이제 토르의 친구이자 어벤져스 주치의인 도널드 블레이크 박사도, 새로 들어온 어벤져스 멤버들도 머물고 있다. 토니는 모처럼이니 다같이 파티라도 열 생각으로 찾아온 거였지만, 저녁이 다 되어가는데도 도무지 다른 멤버들이 나타날 기미가 안 보였다.

“음…, 다른 멤버들이 안 돌아오네요.”

“오래간만의 여유라 다들 들떴나 봅니다.”

“그럼, 스티브. 남은 사람들끼리 외식이라도 어떠신가요? 당연히 자비스도 같이….”

“저는 퇴근해서 가족들과 보내겠습니다, 도련님.”

합, 토니의 입이 다물렸다. 둘만 남을 생각은 없었던 터라 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스티브가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준비하고 나오겠습니다, 토니.”

“아! 네, 네. 그래요….”

아이언맨은 헬멧을 벗을 수 없으니 파티에서든 어디서든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당연히 스티브와 밥을 먹으러 어딘가 나간 적도 없다. 그와 둘이서만 출동해서 빌런을 상대한 적은 많았지만 그게 사실 전부였다. 때때로 비는 시간에도 대화만 몇 마디 나눴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자 보통 친구처럼 친해지긴 했다.

토니 스타크는 어벤져스 멤버들과 다 같이 어울렸지, 멤버 개개인과 따로 만난 적이 없었다. 그나마 자넷이 패션 업계에서 유명했기에 외부에서 자주 마주친 정도일까. 하지만 결국 그것도 파티장이나 기업 이벤트가 끝이었다.

그러니까 토니가 스티브 로저스랑 단 둘이서 그것도 식사를 같이 하러 간다는 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토니는 자신이 말을 꺼내놓고도 실수한 건 아닌가,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당연히 자비스도 같이 껴서 둘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 게 패착이다. 오늘의 자비스는 유능하지 않은 자비스라며 혼자 중얼거리던 토니는 정신을 가다듬고 외출복을 입고 나온 스티브와 같이 멘션을 나섰다. 이제와서 너랑 둘이서만 밥 먹는 건 좀…,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댈 수야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단 둘이라는 게 심장에 안 좋아서 그런거지 싫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좋아서 문제였지.

토니는 이건 따지고 보면 그냥 아는 사이끼리 시간이 맞아서 대충 때우는 그런 것이라며 필사적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그래도 나란히 걷는 거리가, 그 시간이 무척 아름답고, 행복했다.











정신이 들자 온몸이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밤새 뒷거리를 전전하다 잠시 벽에 기대 눈을 붙였더니 근육통이 말도 아니었다.

이 머리속의 데이터를 지우려고 리펄서 에너지를 주입시킨지도 벌써 세 번째였다. 리펄서 에너지에는 특수한 파동이 있어서 사용하면 바로 위치를 들킨다. 그래서 토니는 각지에 숨겨둔 연구소에서 데이터 삭제 코드를 입력하고 에너지를 주입 후, 바로 그곳을 빠져나와 다른 곳으로 숨어들었다.

토니의 머리속에 들어온 에너지는 잔량이 다 할 때까지 무작위로 데이터를 지워간다. 어제 바로 주입한 에너지는 새로 충전된 만큼 뭔지는 모르지만 토니가 잠든 사이 빠르게 기억을 지웠다. 그건 대체로 꿈으로 나타났는데 지워지는 기억이다 보니 눈을 뜨면 그게 뭐였는지 당연히 기억하지 못했다.

“모처럼 기분 좋은 꿈이었는데….”

그래봤자 이미 삭제된 것을 떠올릴 수 있을리 만무하다. 토니는 습관처럼 꿈이 뭐였는지 기억해내려는 행위를 그만두고 다음 위치를 생각했다. 다행히 아직 자기가 누군지 뭘 하려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는 기억났다. 조만간엔 이마저도 지워지거나 데이터에 결함이 생기겠지만 아직까지는 괜찮았다. 계속 호출하는 최우선 순위의 데이터는 제일 나중에 지워질 확률이 높았다.

토니는 벽에 연이어 부착된 수배 전단지를 보고 모자를 눌러쓰고 고개를 숙였다. 지금 토니 스타크는 전 세계에 수배된 범죄자였다. 지구 방어 시스템을 강제로 다운시키고 중요한 데이터를 빼돌렸다는 국제적 반역 혐의였다.

전 세계에 감시의 눈이 있는 셈이었다. 토니는 누군가가 알아보기 전에 아이언맨의 컨트롤을 다운그레이드 시킬 수 있는 장치들을 구입하며 분주히 움직였다. 기억이 사라지고 나니 자신이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언맨은 너무 하이테크 기술이라 좀처럼 다루기가 힘들었다. 좀 더 누구라도 사용하기 쉽도록 만들어야 했다. 늘 새 기능, 새 기술을 적용시킬 생각만 했지, 이미 한물 간 기능을 붙일 생각은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이런 사태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우울한 기분이 완전히 걷어지진 않았다.

지나가던 사람 중에 누군가가 토니의 얼굴을 알아봤다. 토니는 그것을 빠르게 눈치채고 시장을 빠져나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머를 입은 빌런이 나타나 토니를 쫓았다. 토니는 그를 피해 아이언맨 기술을 이용해 신발에 부착해둔 임시 부스터를 써서 건물과 건물 사이를 넘나들었다. 빌런의 아머는 아이언맨의 그것처럼 뛰어난 기능이 아니라 움직이는 목표를 정확히 맞추기 어려울 것이다. 토니의 예상은 맞았고, 빌런도 이내 그걸 깨달았는지 토니가 다음으로 이동할 곳을 예측해 미사일을 쏘았다. 토니의 발밑이 무너졌다. 토니는 그대로 부서진 파편들과 같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으윽!”

낙법은 어떻게 하는 거더라? 누가 가르쳐 줬었는데.

전혀 대응을 하지 못해 낙하 충격이 그대로 몸에 들어왔다. 토니가 고통에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사이, 다가온 빌런이 토니의 등을 밟았다. 꼼짝할 수가 없다. 토니는 상대를 방심시키기 위해 인정에 메달리듯 “제발….”이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누구더라. 누가 가르쳐 줬었지?

빌런의 등 뒤로 새파란 하늘이 보였다. 구름 한점 없이 깊이감이 느껴지는 하늘과 그 하늘 위에 뜬 밝은 태양이.

저런 광경은 언제나 그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살짝 빛바랜 색의 금발이 빛을 받으면 저 태양빛처럼 색이 변했다. 눈동자는 저 하늘을 그대로 담은 듯한 밝은 푸른색이었다. 흐린 점 하나 없는, 깨끗하고 맑은 파란색의 눈동자였다.

그게 누구였지?

누구긴 누구야. 그 사람이지. 나의 우상,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

그래, 맞다. 낙법도 스티브가 가르쳐줬었지.

맙소사. 내가 어떻게 그를 잊고 있을 수가 있지?

스티브를, 내 알파를.

토니가 빌런의 다리를 붙들고 손바닥에 감춰둔 리펄서 에너지를 흘려보냈다. 다 끝난 것처럼 의기양양하던 그는 토니의 공격에 당해 속절없이 쓰러졌다. 갑자기 처리 불가능할 정도의 고압 에너지가 흘러들었으니 당연히 기계는 먹통이 되었다.

토니는 빌런의 발밑에서 빠져나와 아이언맨 아머를 숨겨둔 곳으로 향했다.

“스티브 로저스, 스티브….”

뛰는 동안 계속 중얼거렸다. 절대로 잊으면 안 되는 것을 되새기듯이.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럴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도 잊어버리는 게 너무 무서웠다. 자신이 스티브를, 그를 잊어버리게 된다니. 

그건 정말 그 무엇보다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좋아하는 걸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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