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12 결제선 아래에 기억의 영속 수록분 추가)






<만천(滿天)>






"…그래서 제가 딱 그랬죠. 너는 독 쓰고 나는 안 쓸 테니까 배때기 같이 쑤셔서 누가 먼저 뒈지나 한번 보자고. 새끼가 버르장머리 없이 누구 앞에서 나대고 지랄이야, 족보에 먹물도 안 마른 게. 확 독단지 다 뜯어서 주둥이에 꽂아 버리려다 말았다니까요. 아깝고 귀하신 독인데 꼴딱꼴딱 안 흘리고 처마시지. 아, 듣고 있습니까?!"

"그 소리 이제 서른일곱 번째다. 정신 나간 놈, 패악질을 자랑이라고."

"크, 역시 우리 말코 형님이야. 역지사지가 안 되지."

"오냐, 그놈의 술 내가 깨워주마. 대가리가 깨지면 같이 깨게 되어 있어."

"허, 내가 쫄 줄 알고? 일어나쇼, 일어나! 비무하러 갑시다!"

"미친아."


당보는 비틀비틀 걸어가 기어코 연무장에 섰다. 화산의 바람이 취객의 벌건 뺨을 식혔다. 그는 잠시 별을 헤아리듯 하늘을 보다가 말했다.


"만천화우(満天花雨), 들어보셨습니까?"

"당가의 양대 비기 중 하나라는 그거?" 

"예, 이제는 이름만 남은 비기외다. 당가는 만천화우를 잊었소. 더는 천하를 꿈꾸지 않기 때문이지요. 고작 독무 따위를 피워 제 머리 위나 겨우 가리면서 사천이 천하인 듯 으스대는 가문이 되고 말았단 말입니다. …천하를 본 적도 없는 것들이 감히 하늘을 덮어 교란하겠다고."

"너는 다르고?"

"다르지요. 이 당보는 아직 천하제일의 꿈을 꾸고 있으니까."

"그렇게 처맞고도 정신을 못 차렸단 소리 아닌가?"

"모르시는 말씀. 도사 형님이 적당히 봐주면서 팼으면 진짜 정신 못 차렸을 겁니다. 한 끗 차이로 졌지만, 비도에 독 발라 던졌으면 내가 이겼을 듯? 이 지랄 했겠지. 근데 잘근잘근 밟아 아주 패대기를 쳐버리더라고. 크, 이런 인간말종 개차반을 봤나."

"뭐?"

"아, 들어보쇼. 암튼 이건 확실히 안 된다. 독이고 나발이고, 내 그릇 자체가 아득히 못 미친다. 이렇게 된 거지. 그래서 특별히 보여드리는 겁니다. 아직 미완성이지만, 형님 마음에도 드실걸?"


당보는 웃음 섞인 말을 마치고 후, 천천히 호흡을 뱉었다. 몽롱한 눈을 반쯤 뜬 그 모습은 얼핏 흥취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풍류 공자와도 같았으나, 무겁게 가라앉은 기운은 극도로 절제되어 있었다. 이에 바람도 점점 잦아들고 수런대던 낙안봉 역시 숨을 죽였다. 정적만 남은 가운데, 푸른 달만이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일순, 청명이 당장 검을 뽑을 듯 몸을 낮추고 발검 자세를 취했다. 까딱. 손끝이 절로 움직였다. 대기에 녹아든 살기에 반응한 탓이다. 사천당가의 상징, 넓은 소매의 진녹색 장포가 어느새 푸르르 떨리고 있었다. 곧 세찬 바람을 맞이한 듯 힘차게 나부끼며 부풀어 올랐다. 찌잉, 가늘고 높은 쇳소리가 났다. 당보가 지닌 모든 암기가 하늘로 떠오르며 제각기 거대한 원을 그렸다. 중심에 있는 건 청명이었다.


"나는 지금 나를 잊고 나의 비도를 잊었소. 수도 없이 쌓아 올린 법과 술, 초식에 얽매이지 않겠단 말이외다. 내리는 비에 초식은 없으니. 그럼 이제 내게 남은 건 오직 '찌른다.'"


소용돌이 속에서 미세한 침이 날아왔다. 매화검과 충돌하자 불티가 팍 튀었다 흩어졌다.


"'벤다.'"


이번 비도는 머리 위에서 직각으로 뚝 떨어졌다. 빠르게 회전시킨 검에 튕겨났으나, 돌연 낮게 날아온 암기에 맞았다. 챙, 챙. 두 번의 금속성이 빠르게 이어졌다. 첫 번째는 비도의 경로가 바뀌는 소리, 다음은 왼쪽 허리 아래에서 반대편 어깨 방향으로 솟구치는 그것을 청명이 내려친 소리였다.


하, 청명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 쳤다. 그의 움직임을 계산한, 불편한 궤도였기 때문이다. 청명이 아래로 늘어뜨린 검신이 미세하게 떨렸다. 희미한 잔상에서 이내 매화가 피어나고,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암기의 와류는 그것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빨라진 소용돌이에 휘말린 꽃잎은 갈가리 분쇄되어 흩어졌다.


"…'막는다.'"

"까부네."

"오직 그만을 남겨놓은 채 전부 덜어내면 그만큼 나는 자유로워지지. 그리하여 하늘이 되고 비가 되며 그마저 질리면 세상을 다 덮어버릴 꽃이 되리다. 나무와 가지도 떨어지는 낙화의 뜻을 거스를 순 없소. 꽃비에 젖을 준비는 되셨겠지요?"


내력을 흠뻑 머금은 암기들이 서로 스치자 흡사 성난 구름이 으르렁거리는 듯했다. 청명은 고개를 몇 번 꺾고 어깨를 푼 다음, 일제히 쏟아지는 암기의 폭풍우를 맞이했다. 당보가 땅을 박차고 높이 뛰어올랐다.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서 회전하면 그의 지휘에 따라 암기가 쏟아졌다. 암기는 하나하나 담긴 내력이 달랐다. 어떤 것은 많이, 또 어떤 것은 적게, 혹은 회전하거나 방향이 변하도록 조절된 암기들은 모두가 다른 색을 띠고 있었다. 바닥에 착지한 직후, 당보는 튕겨 나는 비도를 잡아채고 다시 한 번 쏜살처럼 달려들었다. 맹렬한 색색의 꽃비 아래에서 소리치며 뛰어다니는 두 사람은, 어느새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




당소소는 팔뚝으로 이마와 얼굴을 되는대로 훔쳤다. 이미 땀과 눈물에 전 무복은 축축 늘어졌다.


"어때?"

"너무…, 좋네요. 겨우 이렇게 표현할 절기가 아닌 건 아는데 전 그냥 머리에 아, 너무 좋다. 이런 생각만 꽉 차서 다른 말이 안 떠올라요."

"매화만천(梅花滿天)의 심득을 이 화산의 누구보다도 절실히 이해할 수 있는 게 바로 너야. 당가를 떠나 화산으로 가겠다 마음먹었을 때, 그리고 그걸 실제로 이루어냈을 때 기분이 어땠어?"

"그야 하늘을 날 것 같았죠!"


주먹을 불끈 쥐며 해맑게 대답하니, 청명도 그 구김 없음에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넌 화산이든 어디든 갈 수 있고, 원하는 무엇도 될 수 있어. 그러나 방랑의 끝에 기억해. 돌아올 길도 마찬가지라는 걸. 그게 진짜 자유야."


당소소는 눈을 감고 청명의 말을 한참 곱씹었다. 이윽고 눈을 뜨자, 낙안봉 아래에서 불어온 바람이 이마에 달라붙어 있던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는 세상에 피운 모든 꽃이 자신을 향해 활짝 미소 짓는 것 같았다.


"아름답네요."

"동감이야."


청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이어질 말은 가까스로 삼킨 채다.


처음 본 순간부터 늘 그렇게 생각했다고.














<꽃비녀를 주웠네>






- 형님, 괜찮으시오?!


당보가 달려와 덥석 손을 잡았다. 코라도 박을 듯 바짝 대고 상처를 살피는 모습은 이제 새삼스러울 게 없었다. 그 사이 청명이 당보를 훔쳐보는 것 또한 마찬가지, 늘 있는 일이다.


- 상처가 그리 깊진 않습니다만, 혹시 모르니 소독을,

- 진흙 발라놓으면 낫는다.

- 또, 또! 말 같잖은 소리 나불대는 주둥이 어느 도사 형님이지요?!


평소와 다른 건 청명이 매양 속으로만 생각하던 대로, 성가신 잔소리꾼의 입술을 툭 건드려 보았다는 것이다. 노려보던 세모눈은 삽시간에 동그래졌다. 그 반응이 제법 기꺼워, 청명은 계속 쓰다듬거나 꾹 누르고, 살살 쥐었다 놓았다 하며 만지작거렸다. 그 도로록한 살점은 뭉툭한 손끝에 이리저리 밀리고 뭉개져 물크러질 듯했다. 그때마다 연약한 화순 사이로 깨끗한 치아, 그리고 불그름한 혀가 잠깐씩 보였다. 그를 집중해서 바라보며 청명은 스스로 비웃었다. 이게 눈독을 들인단 거구나. 당보의 입술 안, 더 깊은 곳에도 못내 욕심이 났다.


- …당보야.


생각지도 못하게 낮은 목소리가 났다. 청명은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기 직전임을 알았다. 그래서 자제한다는 게 당보야, 이름만 다시 부른 것이다. 그러나 열기 가득한 음성은 그 자체로도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눈이 마주친 순간, 당보는 미소 지었다. 주변이 뿌옇게 변하면서 소리가 사라졌다. 꽃이 피듯 입술이 벌어지고 타액에 젖어 꿈틀대는 혀가 유혹하듯 내밀어졌다.


"!"


청명은 제 침상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전신의 맥이 쿵쿵 소리를 내며 요동쳤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가 땀으로 축축했다. 꿈이었다고 알아차렸으나, 눈앞엔 지금도 그 광경이 아른거렸다. 손끝에도 망령된 감각이 남아 흩어지지 않는다. 전부가 인식과 어긋난 잡스러운 사념이다.


문득 청명은 당보를 꿈에서 본 게 처음이 아님을 깨달았다. 얼굴이나 곁눈질하고 이름을 부르는 게 전부였기에 굳이 그 의미를 구하지 않았을 뿐이다.


청명은 한참이나 그 자리 그대로 굳어 있었다. 이 밤이 절로 물러나길 바란 것 같다. 그러나 그때 우르릉, 구름 소리가 울렸고, 머지않아 거센 장대비가 쏟아져 지붕을 때렸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서악의 심산유곡에 숨겨진 청명의 처소, 화산의 제자조차 꺼리는 그곳에 손님이 찾아왔다. 신이 난 목소리로 형님, 도사 형님. 저 왔습니다! 소리 지르며 까부니, 더 볼 것도 없이 당보였다.


"제가 또 하북에 다녀오는 길 아닙니까. 황소 새끼 등짝에 신발 자국 좀 내줬습죠!"

"…하여튼 독사 같은 새끼, 싸움질하겠다고 또 거기까지. 왜? 내친김에 요녕까지 달려가서 모용세가 현판도 깨버리지."

"쓰읍, 거긴 봉문을 해서."

"그러고 보니 네가 손주 보는 앞에서 팼다는 태상장로가 모용가놈이었나? 이런 패륜 종자가 있나."

"억울합니다. 저도 비공개 비무로 알고 있었거든요? 손주가 보고 있는 줄 몰랐지."

"이게 다 우리 세대에 비무 대회를 안 열어줘서 그렇다. 어릴 때 쌓인 걸 적절히 안 풀어주면 커서 미친다더니."

"낄낄, 누구 탓인데?"

"누구 탓인데."


청명이 떨떠름하게 되묻자 당보는 샐샐 웃으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덕분에 도사 형님과 만나 연을 맺었으니 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보오. 우리가 비무 대회에서 처음 봤다면 좀 다르지 않았겠습니까? 개인 간의 비무와 문파와 가문의 자존심을 건 비무는 또 다르니."

"모를 일이지."

"어쨌든, 팽가에서 술이나 뜯어왔으니 마십시다!"


당보는 집주인보다 먼저 평상에 자리 잡고 앉았다. 잔도 없이 주병을 늘어놓으면 청명이 게으른 호랑이처럼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당보는 청명의 손에 술병을 하나 쥐여 준 다음, 으레 하듯 제 것과 짠, 부딪었다. 눈이 마주치자 또 헤프게 웃는다. 청명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몰랐지만, 입가는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웃고 있었다.


"옳지, 그거 아십니까? 팽가와 남궁가, 사돈 맺을지도 모릅니다. 손주놈들끼리 오가는 기류가 심상찮더라고. 근데 내 보기엔 이번도 좀 힘들 것 같고, 아마 다음 대쯤?"

"남궁천명이 왜 그런 자해를 하겠냐. 안 그래도 패검과 패도, 괜히 엮여서 똑같이 막 나가는 취급받는다며 치를 떠는데. 차라리 대가리 굴리는 제갈가를 더 좋아할걸."

"쯧쯧, 이래서 도사놈은 도사놈이로구만."

"아, 세가놈은 뜻밖에도 빠삭한가 보지? 그런데 왜 장가를 안 갔냐."

"에헤이, 모르시는 말씀. 제 정인은 이것이외다."


당보는 제 앞에 추혼비를 탁 놓았다. 어쩐지 으스대는 기색이었으나 천명은 별다를 것도 없어 심드렁했다. 그러자 외려 안달이 난 것도 당보로, 청명에게 제 애병을 들이밀었다.


"좀 보시라니까요. 실금 하나 안 갔잖소!"

"어쩌라고."


당보는 답답하단 듯 제 가슴을 팍팍 두드렸다.


"그 무식한 팽가놈의 대도와 몇 합이나 겨뤘는데도 말짱하단 말입니다! 기이특하게! 이게 이게 명품이지!"

"당연한 거 아니냐? 방금 꺾은 나뭇가지로 붙어도 부러지면 안 되지."

"염병하고 자빠졌네, 미친 말코 새, 악!"


당보는 툴툴거리며 술이나 마시려다가 머리를 세게 맞았다. 분한 듯 노려봤으나 청명은 표정 변화 없이 다시 물었다.


"근데 네가 왜 그걸로 몇 합이나 주고받아? 안 던졌냐?"

"아, 그거! 크, 물어보실 줄 알았지. 비도만 가지고 비무를 한다는 게 그렇습니다."


당보는 어깨를 쭉 펴고 말했다.


"저야 던지고 싶지만, 그쪽에선 그렇게 해주겠습니까? 비도 그거 못 던지게 해주마, 다들 생각하겠죠. 여기서 재미있는 역설이 탄생합니다."

"비도술을 독문무공으로 삼기 위해선, 보법과 체술을 완벽하게 익혀야 한다."

"바로 그거. 크…!"


당보는 청명의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 허벅지를 두들겼다. 그리고 잠시 술 한 모금을 입안에서 굴리며 할 말을 정리했다.


"당가에선 이렇게 말합니다. 실전에선 독과 암기로 무장한 우리 당문이 무조건 강하다고. 과연 그럴까요? 독도 그렇지만, 비도 역시 쓰고 싶다고 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제한이 있는 병장기요. 비무대와 실제 전장은 다르니까 숨으면 된다? 거리만 확보해라? '실전'이란 게 언제부터 '나한테만 유리한 전장'이었습니까. 지형지물 포함, 변수를 이용하지 않고 싸우는 훈련은 필수입니다. 그게 비무죠."

"거기서 네가 패, 강, 쾌의 도를 구사하는 하북팽가를 비도로 상대한다는 건 확실히 의미 있어."

"그렇죠? 상성을 따지면 비무대에서 팽가의 도는 까다로운 상대입니다. 근접전에서 압도하는 걸 전제하니까요. 하지만 상대에 따라 약하고 강해지는 수준이란 이 당보가 노리는 경지가 아니올시다."

"그놈의 천하제일…."

"음. 한때는 이 중원에서 가장 강하기만 하면 그게 곧 천하제일이라 여겼죠. 그러나 도사 형님과 만나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길이 트였다고 할까요? …암, 천하제일이 그렇게 가벼울 리 있나.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도 시대와 역사, 환경을 초월한 절대적인 강자, 그게 천하제일인입니다. 그리고 그이는 바로 내 앞에 있지. 한눈팔 틈이 있겠습니까."


청명은 실소했으나 당보는 사뭇 진지했다. 그 열의에 한숨을 참아야 했을 정도다. 대신 청명은 주병을 숫제 수직까지 기울였다. 남은 술을 목구멍에 다 쏟아 이것저것 죄 삼킨 후 몸을 일으켰다.


"따라 와, 이 시건방진 새끼야. 내가 널 모르냐. 모용가, 팽가의 패, 강, 중, 첨, 쾌를 골고루 눌렀으니 이제 화산의 변, 환과 손 섞어 보고 싶단 거 아냐."

"…저는 진짜 우리 도사 형님이 너무 좋다니까요."


금시에 환해지는 얼굴이 얄미워 청명은 첨언했다. 넌 오늘 먼지 나게 처맞을 줄 알아라.


잠시 후, 당보는 산속 연무장에 뻗어 생각했다. 치명적인 약점 하나 더. 비도와 암기가 다 떨어지고 나면 그나마도 도저히 수가 안 났다. 줄이라도 달아? 처참한 몰골을 하고서도 골똘히 고민했으나, 곧 청명에게 걷어차여 계곡으로 풍덩 떨어졌다.


청명은 먼저 돌아와 침상에 누웠다. 그동안 여기서 꾼 꿈을 떠올리면 당보를 이 방에 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 확인하길 그의 관심사는 오직 청명의 무위에만 있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내심 긴장했던 것이 우습고 김빠질 지경이었다. 청명은 당보를 방에 들이되, 장의자에서 재우기로 했다.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마음이 한층 편했다. 그렇게 무거운 눈꺼풀을 느릿느릿 끔벅이며 세가의 공자놈답게 목욕 시간이 길구나, 중얼거린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품으로 얼음덩어리가 뛰어들었다. 나삼 한 장 차림의 당보였다. 기겁한 청명이 떼어놓으려 해으나 그는 도리어 악착같이 파고들었다.


"추, 추추…, 추워, 추워 죽겠소…. 계, 계곡에 빙정을 파묻어 놔, 놨나…?"

"…저쪽으로 안 꺼져?"

"시, 싫소…! 나, 나난 지금 떨어지면 죽소…! 이, 이, 내 마음도 모르는 나쁜, 한서불침 같으니…!"


마구 안겨드니 당보의 입술이 자꾸 목덜미며 가슴에 찍혔다. 팔은 몸통을 힘껏 껴안았고 다리는 다리와 마주 얽혔다.


"이런 미친, 미친놈아! 죽고 싶어?!"

"모르오…! 주, 주, 죽이시오…!"


주먹을 치켜들자 당보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그 찰나에도 이가 쉴 새 없이 딱딱 부딪쳤다. 새파란 안색과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보니 쫓아내기도 쉽지 않았다. 청명은 이를 갈며 말했다.


"조금만 있다가 저리로 가라. 이불 있으니까."

"아, 역시 우, 우우, 우우리 도사 형님이오…! 고, 고맙습니, 다아!"

"…비비진 말고."

"아, 조옴, 뭐 어떻소…. 쩨쩨하게 굴기는…. 이렇게 이렇게 등도 좀 쓸어주고 그러시오. 그래야 빨리 따뜻해지지."


당보는 아예 청명의 팔을 베개처럼 받친 다음, 다른 팔로 제 몸을 덮었다. 못 이기는 척 손바닥으로 등을 문지르면 히죽히죽 웃었다. 청명은 오늘 밤 눈붙이긴 물 건너갔다 치기로 했다.


"도사 형님, 잠이 안 오십니까?"

"안 추우면 저리 가라."

"아이, 그럴 리 있습니까? 하여간 잘도 이 돌산에서 먹고 자고 하네."

"……."

"자장가 불러드립니까?"

"아, 영원히 잠들고 싶다?"

"히익…!"


당보는 겁먹은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가 슬슬 눈치를 보며 다시 힘을 뺐다. 그리곤 청명의 허락도 없이 작게 흥얼거렸다.


새 노래 주거니 받거니 술술 이어 부르며

바람과 이슬 맞은 긴 소매 쪽 찐 머리를 기우뚱기우뚱

달 떨어지고 까마귀 울어 구름과 비 흩어지면

노니는 아해 길 위에서 꽃비녀 줍는다네


"…넌 그게 자장가냐? 어디 청정도량에서 음분시(淫奔詩)를, 확 마 도덕경으로 대가리를 조사버릴라."

"사천 풍속을 노래한 답가사(踏歌詞)거든요? 다시 잘 들어보쇼. 밤새 땅을 밟고 춤추고 노래하는 청춘이 보일 테니까."


느릿느릿 시를 읊는 동안, 당보의 손이 박자 맞추듯 청명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모르는 노래를 이어 부르는 낯선 사람들, 밤을 새우기에 충분히 뜨거운 밤, 황홀경에 빠져 비녀가 흐르는 줄도 모르고 몸을 흔들고 머리를 헝클이는, 운우…. 노래가 잘못된 건지, 등허리를 매만지는 손이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청명은 내뱉는 숨이 더운 것을 느끼고 다시 한번 당보를 보았다. 그는 어느새 곤히 잠들어 있었다. 청명은 이번에야말로 한숨을 참지 않았다.




- 너무하십니다, 형님. 제 정인인데, 금이 갔잖소….


당보가 추혼비에 입을 맞췄다. 이어 혀끝을 뾰족이 세우더니 도신(刀身)을 따라 덧쓴다. 하얀 나삼만이 몸을 가리던 가운데, 모으고 있던 다리가 벌어졌다. 눈이 향하는 것은 그 사이로, 설마 했던 순간….


"형님!"


청명이 튀어 오르듯 소스라쳐 일어났다. 그리곤 잠이 덜 깬 머리로 당보를 눈에 담은 즉시 침상에서 굴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반대편 벽에 도착한 그는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춥다고 지랄하더니 이젠 덥냐? 옷 당장 안 여며?"

"아…, 우리 사이에 이런 걸 가지고. 전 형님이 악몽을 꾸시는 줄 알고 급히 깨웠죠."

"악몽?"

"제 이름도 부르시던뎁쇼? 꿈에서 무슨 힘든 일이라도…."


당보가 말을 맺기 전에 청명이 벌떡 몸을 고쳐 세웠다. 한참 허공을 이리저리 방황하던 눈동자가 겨우 당보를 보았다.


"집에 가라."

"예?"

"좋은 말로 할 때. 홀딱 벗고 사천까지 안 기어가려면 당장 꺼져."


굳은 표정이 휙 몸을 돌려 사라졌다. 당보는 그 뒷모습만 멍하게 보다가 어이가 없단 투로 중얼거렸다.


"…순진한 것 보소. 도사인 줄."


제가 뱉어놓고도 웃기는지 이번에는 낄낄 웃음을 흘린다.


"내가 이 나이 먹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했다만…. 에휴, 가라면 가야지…."


당보는 청명에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단 걸 헤아리고 있었다. 기민한 사내이니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보는 이제 사천으로 돌아가면 당분간 외부와의 모든 연락을 끊고 폐관 수련에 돌입할 계획이었다. 매번 당기기만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기 때문이다. 조만간 칼 든 말코놈이 수작질을 알아채고선 제 분에 못 이겨 뛰쳐오리라.


여기까지 생각하고 당보는 자기 몸속에 흐르는 피를 새삼스레 돌아보았다.


- 독사 같은 새끼.


청명이 혀를 차며 욕하던 목소리가 겹쳐졌다. 당보는 진저리치며 고개를 저었다. 기분이나 전환할 겸, 재차 노래를 흥얼거렸다.


"구름과 비 흩어지면 노니는 아해 길 위에서 꽃비녀 줍는다네에."


유치하고 집요하면 뭐 어떤가. 점찍어둔 먹이는 놓치지 않는다. 아무리 버거워도 좋다. 턱이 빠지더라도 삼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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