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쩍 누군가의 얼굴을 자주 떠올리고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시도 때도 없이 늘어놓는다면, 그건 명백한 호감의 신호. 세린은 그와 비슷한 류의 신호들을 알아차리는 데 취약한 편이었다. 


“그러니까 둘이 만나는 것도 몰랐지.” 

“야. 저걸 어떻게 알아? 너도 어쩌다 봤다면서!” 

“그건 그래. 이건 역시 은수가 문제인 거지? 그걸 어떻게 이렇게 꼬옹 꽁 숨겨?” 

“너네 이렇게 몰아가기야?”


시내의 캔모아에 옹기종기 둘러앉은 은수와 세린, 유정은 한창 은수의 비밀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참이었다. 세린은 제 친구와 광수의 만남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상태로 유정의 깐죽을 받아쳤다. 사실 그녀가 유정을 대신하여 둘의 산책을 목격했어도 알아채지 못했을 테지만.이내 유정은 곧바로 방향을 틀어 은수를 목표물로 변경했다. 은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억울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토스트 위에 올라간 생크림을 괜히 포크로 쑤시는 것은 민망함의 표현이었다. 


“하기사 윤제윤이 여자친구 생긴 것보단 덜 충격이긴 하다.” 

“뭐?”


2차 충격에 휩싸인 세린의 얼굴은 그야말로 황당하다는 감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반면 은수는 올 게 왔구나 싶어 멋쩍은 웃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뭐야.”


그 멋쩍음을 놓치지 않은 유정이 은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가.” 

“너 알고 있었어?” 

“……엉.”


입의 무게와 비례하는 양심의 무게 탓에, 은수는 결국 저가 알고 있는 사실을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얘는 자기 연애만 몰래 하는 게 아니라 남의 연애도 몰래가 되네.” 

“윤제윤 일인데 내가 떠벌리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 

“하긴.”


순식간에 무거워진 분위기를 초 단위로 체감하던 은수는 쓸데없이 솔직했던 30초 전의 자신을 질책했다. 그까짓 거짓말이 어떻다고. 이런 상황에는 적당히 넘어갈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인데. 다행히도 금세 회복한 듯한 유정은 개의치 않은 듯 말을 이어갔다. 


“너도 참 윤제윤이랑 여전히 어색해. 둘 다 은근 낯가려. 그러니까 말 못 했겠지.” 

“나도 어색해.”


세린의 엉뚱한 동참으로 인해 분위기는 한결 가벼워졌다. 그녀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었다. 


“너넨 그래도 양호해. 얘에 비하면.” 

“그건 인정할게.” 

“그런데 너는 어떻게 알았어?”


유정이 은수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수련회 때 자유 시간에 광수 기다리다가 봤어. 여자애가 먼저 고백한 거.” 

“여자애가 먼저 했다고?” 

“응.”


다시금 정적. 유난히 기복이 심한 유정의 상태를 살피던 은수가 입을 움찔거렸다. 물어볼까 말까. 너는 윤제윤을 좋아한 게 아니었냐고. 그러나 입술 사이가 쉽사리 벌어지지 않은 이유는, 비단 유정만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 누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이 개인만의 일이었다면 그녀가 이렇게까지 망설이진 않았을 것이다.


망설임 가득한 시간은 흘러 어느새 8월의 초입. 방학에도 선도부를 서기 위해 남들보다 한 시간쯤 일찍 집을 나선 세린의 발이 느리게 끌렸다. 아직 아침인데도 도로의 아스팔트는 구불구불하게 일그러지는 것만 같았다. 덜 마른 머리에선 물기가 뚝뚝 떨어져내리고, 이윽고 아파트 단지 아래의 버스정류장에 도착할 즘엔 미열이 이마를 맴돌았다. 다행히도 도착한 버스에 올라타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불었다. 버스의 맨 뒷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세린의 눈길이 무심하게 녹빛의 도로 위로 내려앉았다. 열기가 식을 무렵 그녀는 교복 치마 주머니를 뒤져 mp3와 이어폰을 꺼냈다. 전원을 켜보니 배터리는 아슬아슬할 정도였지만, 그래도 등굣길의 지루한 적막을 채워주기엔 충분할 정도였다. 좋아하는 곡들만 가득 담은 mp3는 무작위로 재생 버튼을 눌러도 세린을 실망시키는 법이 없었다. 소녀시대의 소녀시대 전주가 시작되자 차분히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슬슬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1절 후렴이 끝날 즘 멈춰 선 버스에는 익숙한 얼굴이 올라탔다. 함께 선도부를 설 도정우였다. 버스 카드를 찍은 정우는 버스가 빨간불에 멈춰 선 사이 세린이 있는 뒷좌석 쪽으로 걸어왔다. 보통의 속도로 걸어온 그는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아는 체를 했고, 세린 역시 얕은 미소를 띠며 손을 흔들어 보일 뿐이었다. 다시 창밖으로 돌아가려던 시선은 잠시 멈춰서 동그란 정우의 뒤통수에 닿았다. 밤톨처럼 깎은 머리통을 바라보던 세린의 머릿속에는 어떤 얼굴을 떠올렸다. 정우와 아주 많이 닮은, 두 살 터울의 학교 선배 선우의 얼굴을. 도정우와 도선우는 형제다. 둘은 아주 많이 닮았으나, 또 아주 많이 다르기도 했다. 문과를 지망한 정우와 달리 선우는 이과에 속해 있었다. 정우는 공부를 잘하는 대신 운동은 그럭저럭이었고, 선우는 운동을 좋아하는 대신 평균을 겨우 웃도는 정도의 성적을 가지고 있었다. 접점을 만들기가 더 힘들 3학년과 세린이 어떻게 안면을 틀 수 있었냐 하면은, 그녀의 순간적인 판단 미스가 한몫을 단단히 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도정우!”


입학식 다음날, 세린은 중학교에서 제법 알고 지낸 정우와 똑 닮은 뒤통수를 발견하곤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 어깨를 툭 건드렸다. 졸업식 이후로는 자주 보지 못했던 터라 반가움에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엇비슷하던 눈높이는 훌쩍 높아져 있었고, 저를 돌아본 얼굴은 그야말로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너 키 엄청 컸다. 줄넘기했어?” 

“…아.”


하필이면 입학식 날 명찰을 잃어버린 그가 얼빠진 소리를 낼 때까지도 세린은 무엇이 잘못된 건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저 눈을 반짝이며 저를 올려다보는 1학년 여자애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잔뜩 곤란한 티를 내고 있던 그는 멋쩍게 웃으며 물었다. 


“정우 친구?” 

“…네? 네, 네…”


그제야 세린은 뭔가 잘못됐음을 깨닫고 존칭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러고 보니 말이다, 형과 같은 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런 기억은 왜 꼭 뒤늦게 생각나는 건지. 세린의 앞에 서있던 그는 상황이 꽤나 웃기다는 듯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저는 정우 형이에요.” 

“어.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친구는 이름이 뭐예요?” 

“아. 저…세린이요.” 

“와. 이름 예쁘다. 그러면 이거 정우한테 이를게요? 세린이라는 친구가 너랑 나랑 헷갈렸다고.”


세린은 곤란하다는 듯이 입을 떡 벌리며 웃음을 지었다. 기가 막혀서 소리도 나오질 않았다. 도정우랑 꼭 닮은 말간 낯으로 저런 협박을 하다니. 은은하게 분개하던 세린은 그와 시선을 마주치고 있던 것을 조금 내려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확인했다. 도선우. 정말 한 글자만 다를 뿐. 그리고 형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3학년의 노란색 선이 그어진 플라스틱 명찰이 반짝였다. 그저 그런 작은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던 선우와는 종종 마주쳤다. 매점을 갈 때나 체육관 이동수업을 할 때. 우연찮게도 자꾸만 마주칠 때마다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것은 선우였다. 이름조차 부르지 않지만 서로의 이름을 확실히 아는 사이인 상태에서 주고받는 인사. 그 횟수가 늘어갈수록 세린의 마음에도 알 수 없는 벅참이 차올랐다. 벚꽃나무의 새싹이 움트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세린아.”


그러나 지금은 어느덧 다 굳어버린 아스팔트 덩어리마저 우그러지는 한여름. 허송세월처럼 지나가버린 한 학기를 떠올리자 설렘은 어느새 심란함으로 모습을 바꿨다. 그때 세린의 앞으로 맨둥한 손바닥이 쫙 펼쳐졌다. 정우가 손바닥을 흔들어 보이며 세린의 시선을 끈 것이었다. 그제야 이어폰을 빼며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왜 부르느냐 물은 그녀에게 정우가 말했다. 


“기아랑 LG 이번에 광주에서 하는 경기, 표 생겼는데 보러 갈래?” 

“헐. 좋지! 언젠데?” 

“다음 주 목요일.” 

“우리 그날 학원 수업 있잖아.” 

“특강 때문에 시간표 바뀌었잖아. 금요일로.” 

“아. 맞다. 허얼. 나 완전 돼. 갈래!” 

“그럼 오후 5시까지 무등 야구장 앞으로 와. 먹을 거 사서 들어가자.”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던 세린도 그제야 미소를 띠며 어떤 생각들을 떨쳐냈다. 이를테면 선우가 졸업을 한다거나, 그 이후에 다신 볼 수 없다거나 하는 생각들을.


학교 현관을 통과한 세린은 곧장 1층의 선도부실로 들어가 벌점 기록용 대장을 집어 들었다. 새로운 종이가 짱짱하게 끼워진 대장은 꽤나 무게가 나가는 편이었다. 유독 지각을 하거나 명찰을 빼먹거나 복장이 불량해서 벌점을 많이 부여받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마도 이번 달 역시 그들이 대장에 끼워진 볼펜의 잉크를 적잖이 해먹을 것이었다. 그중에 한 명은 선우였다. 선우는 골고루 해먹기로 유명했다. 동생은 전교 1등에 선도부까지 하는데 형은 그러질 못한다며 타박을 받으면서도, 선우는 인상을 찡그리는 법이 없었다. 그는 오늘도 늦을까. 오늘은 뭘 빼먹어서 벌점을 받고 커다란 운동장을 돌며 쓰레기를 줍게 될까. 고삼 씩이나 돼서도 그러고 싶을까. 현관에 당도한 세린은 볼펜을 딸깍이며 날짜를 써 내려갔다. 그러나 월초면 꼭 그런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8월이라 써야 할 것을 실수로 7이라 기입해버린 세린은 작게 탄성을 지르며 숫자를 두 줄로 긋고 수정했다. 그러던 그녀의 앞에 인기척이 들렸다. 세린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래도 오늘은 선생님들이 늦게 나오셨으니, 복장 불량 같은 일들은 대충 넘어가 주자는 심산이었다. 


“안녕.”


그러나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선우. 매일 명찰이나 넥타이를 빼먹고, 그도 아니면 조끼를 빼먹고 셔츠에 재킷만 걸친다거나, 하복 아래에 너무나도 휘황찬란한 상의를 받쳐 입어서 늘 현관 문턱에서 걸리곤 하던 그가 웬일로 번듯한 차림새로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7시 30분. 평소의 선우가 등교를 하던 것에 비하면 너무나도 이른 시간에. 


“오빠 오늘 되게 빨리 왔네.” 

“100일의 기적 해보려고.”


하여튼 특이한 사람이라고, 세린은 생각했다. 심지어 정확히 100일도 아니다. 일주일은 더 남았을 텐데 이게 웬 말도 안 되는 소린가. 혼란에 빠진 세린을 지나쳐 신발장에 다다른 선우는 실내화로 갈아 신고선 곧장 교실로 향하지 않고 다시 돌아와 세린에게 뭔갈 건넸다. 커다란 부채였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팔 법한 디자인의 대형 부채였다. 


“이제 아침에도 덥잖아. 쓰고 이따가 돌려줘. 1교시 시작하기 전에 가지러 갈게. 1반 맞지?” 

“어…어. 고마워.”


선우가 간 뒤로도 부채를 빤히 바라보던 세린은 괜히 그것을 손에서 한번 돌려보았다. 뒷면에는 3학년 9반 도선우, 라고 매직으로 떡하니 적혀 있었다. 부챗살을 따라 삐뚤어진 글씨를 보던 세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정우가 옆에 없어서 다행이었다. 아마도 이런 저를 봤으면 둘이 뭐냐며 한참을 요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었다. 측문 쪽에 있을 그를 떠올린 세린은 작게 웃으며 부채질을 시작했다. 


“부채 뭐야? 도선우? 가 누구야?”


8시 30분. 1교시가 시작하기 30여 분 전에 교실로 돌아온 문을 열자마자 세린은 품에 안고 있던 부채를 앞자리의 은수에게 들켰다. 복도 쪽 창가의 맨 뒷자리의 책걸상이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냈다. 자리에 앉은 세린은 눈을 굴리며 선우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아무리 학업을 위해 시작한 보충수업이라지만 이들은 1학년, 아침 자습까지 완벽하게 해낼 리는 만무했다. 교사들이 1층 회의실에서 교무회의를 하는 동안 시끌벅적해진 교실에서 세린이 들고 있던 부채는 소소한 화젯거리가 되었다. 


“헐. 이거 그 선배 꺼네.” 

“누군지 알아?”


맨 처음 부채를 발견한 은수와 그 옆자리에 앉아 있던 동급생, 소진의 시선이 부딪혔다. 소진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작년까지 야구부였대. 근데 갑자기 대학 간다고 이과로 전과했다던데.” 

“헐. 넌 그런 거 어디서 알아와?”


은수는 정말 순수하게 놀라 물었다. 그러자 소진은 주변의 눈치를 한번 본 뒤 은수와 세린의 얼굴을 한 데 모아, 굉장히 비밀스러운 것을 말하는 것처럼 손으로 입까지 가려가며 말을 이었다. 


“옆반 김현서네 언니가 도선우랑 사귀었잖아. 지금은 헤어졌고. 근데 그게 걔네 언니가 야구부에 있던 다른 사람이랑 바람을 피워서 그런 거래. 선발투수였는데 때려치워서 아직도 거기 코치가 돌아오라고 잡는대.” 

“뭔…차라리 도선우가 야구부 애랑 사귀다 걸려서 쫓겨난 거라고 해라. 그렇게 안 생겼던데.”


은수는 심히 비현실적인 전개에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허리를 뒤로 젖히며 물러났다. 팬픽 꽤나 읽었던 그녀답게 몹쓸 상상력까지 덧붙이며. 


“뭐 어떻게 생겼는데.”


소진은 그런 은수가 얄밉다는 듯 눈을 흘기며 물었다. 


“도정우랑 똑 닮았잖아.” 

“아.”


은수의 한 문장에 기어코 납득을 한 소진이 얼빠진 소리를 냈고, 은수는 다시 앞으로 고개를 모으며 말했다. 


“하긴 사람 생긴 걸로 판단하는 거 아니다?”


잠자코 소진과 은수의 대화를 듣던 세린은 가십이 99프로쯤 차지하는 이야기에 김이 팍 식어버려, 굽혔던 허리를 펴며 바로 앉아 부채를 한 번 더 돌려보았다. 21번. 학급 번호를 성씨로 세어도 10번 내외일 것이니 21번은 아마도 선우의 등번호일 것이었다. 제대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세린은 제멋대로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때 복도 쪽 창문이 활짝 열리고, 교실은 단숨에 조용해졌다. 


“부채.”


창문 개방의 주인공은 아량곳 않고 오직 한 사람만을 바라보며 말했다. 교사가 아님을 확인한 아이들은 다시 저들끼리 왁자지껄하게 수다를 이어갔다. 세린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창문 너머로 부채를 건넸다. 에어컨이 틀어진 교실과는 다르게 후덥지근한 복도의 공기가 팔을 감쌌다. 그리곤 절로 닫힐 줄 알았던 창문이 꽤 오래 열려있자, 세린은 의아하게 선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매점 가자.”


은수와 소진의 시선이 소란하게 부딪혔다. 저들끼리 팔을 툭툭 치고 난리가 난 것이다. 세린은 창문을 닫고 서둘러 선우의 뒤를 따랐다.


수업을 마치고 곧장 학교 근처의 영어 학원으로 향하는 내내 세린과 은수는 아침에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했다. 그가 느닷없이 부채를 빌려준 것 하며, 매점으로 데려가 웬 주스까지 넙죽 사준 일, 점심시간에 운동장을 돌던 세린을 발견하곤 웃어 보인 일까지. 하루 종일 과외를 받고 녹초가 되어 학원에 나타난 유정은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선 정말 중요한 하이라이트를 놓친 사람처럼 안타까워하며 초집중을 했다. 학원의 좁은 복도에 일렬로 앉아 수업을 기다리던 세 사람에겐 저마다의 이야기보따리가 차고 넘쳤다. 겨우 10분쯤 되는 시간 동안 다 풀어내릴 수도 없을 만큼. 그랬기에 수업이 끝난 후 학원가 근처의 롯데리아로 향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에어컨 아래를 차지하고 앉은 세 사람은 저마다 손에 소프트콘이나 토네이도 같은 것을 하나씩 쥐고선 근황 품앗이를 이어갔다. 


“얘네 윗집에 발레 하는 애 이사 왔대. 남자애.”


선수를 친 것은 세린이었다.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듣던 은수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어. 내 친구도 발레 하는데. 남자애. 요번에 여기로 이사 왔어.” 

“알고 보니 같은 애 아니야? 이름이 뭐랬더라.”


세린은 유정을 바라보며 물었다. 초코쿠키 맛 토네이도를 떠먹던 유정이 김재,까지 언급을 하자 은수는 재빠르게 원 자를 덧붙였다. 세 사람 모두 예상치 못했다는 듯 황당한 표정으로 서로를 번갈아보았다. 


“김재원이랑 사귀어?” 

“아아니?”


유정은 순간 과하게 부정을 해버린 자신을 보며 께름칙함을 느꼈다. 왜 그렇게까지 과민반응을 한 건지 가장 이해할 수 없던 것은 스스로였기에. 심지어 질문이 꽤나 이상했음에도 반박조차 하지 못했다. 


“세상 좁다. 전주 너무 좁아. 걔가 너네 윗집으로 갈 줄은 몰랐네.”


그러거나 말거나. 은수가 혀를 내두르며 토네이도에 수저를 푹 꽂아 넣었다. 

“둘은 어떻게 아는데?”


이내 감자튀김을 집어먹던 은수에게 유정이 물었다. 


“초등학교 동창. 중학교 땐 걔가 예술중 다닌다고 서울로 올라가서 아예 못 봤어. 그래도 연락은 종종 했거든. 걔 올해 한예종 입학해서 휴학하고 간댔나, 아니면 거기서 다닌댔나. 그건 모르겠다.” 

“러시아를?” 

“걔가 그런 것도 말해?”


은수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이것들 봐라. 척 봐도 그런 표정이었다. 순식간에 민망한 표정을 짓게 된 것은 유정이었다. 세린은 빠르게 오가는 두 사람의 대화를 놓치지 않고 들은 뒤에서야 상황 파악을 끝냈다. 이쪽은 그야말로 도박이라고. 윤제윤과 김유정도 만만찮은 관계지만 이건, 물리적인 거리부터가 남달랐다. 러시아가 좀 멀리 있냔 말이다. 


“걔네 엄마랑 우리 엄마랑 아는 사이더라고.” 

“아하. 이모의 수다도 한몫을 했겠구나.”


은수는 짐작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유정의 설명에 반응했다. 


“걔 어때?”


유정은 은수의 반응을 보고선 괜한 호기심이 생겨 재원에 대한 것을 묻기 시작했다. 


“첫인상이랑 또옥같어. 차분하고 차분하지. 근데…가끔 또라이 같을 때가 있거든. 특히 자기 동생이랑 있을 때. 똑같이 생긴 것들이 똑같이 눈 동그랗게 뜨고 사람 놀리면 진짜 약오르거든 그거. 그래도 애들은 괜찮아.”


유정은 어떤 지점에서 은수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눈치를 채곤 둥그런 웃음을 지었다. 은수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유정의 토네이도는 다 녹아버려 쿠키 맛 음료수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종이컵 겉면에 묻은 물방울을 바지춤에 쓸어낸 유정은 괜스레 비죽거리는 마음을 참아내지도 못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주전부리를 다 털어 넣은 아이들은 저마다의 집으로, 그곳으로 향하는 골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시간이 꽤 늦었음에도 이제야 몸져눕기 시작하는 노을을 자근자근 밟으며 걸어가던 유정은 가방 옆구리에 찔러두었던 휴대폰에서 울린 벨 소리에 퍼뜩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핑크색 롤리팝을 펼치자 수신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윤제윤. 익숙하면서도 멀어진 듯한 이름에 망설이던 유정은 결국 전화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어디야?⌟

“집 가는 중이지. 애들이랑 롯데리아 들렀다가. 왜?” 

⌜엄마가 복숭아 가져다주래. 너 그럼 사거리 쪽이지? 나 너네 동 앞에 있을 거니까, 거기 정자로 와.⌟

“알았어.”


통화를 끝낸 유정은 발걸음을 빨리했다. 지겹게 고막을 때리던 매미소리마저도 순간 샹송 비스름한 것으로 느껴졌다. 1단지를 지나 2단지, 3단지, 이내 5단지 안으로 들어섰고 맨 안쪽에 위치한 정자에 빼꼼히 존재감을 내밀고 있는 제윤의 머리통을 본 유정은 서둘러 그곳으로 달려들어갔다. 


“왜 뛰어와?” 

“…복숭아. 복숭아 먹으려고.”


말도 안 되게 설익은 변명이었음에도 제윤은 코웃음이나 한번 칠뿐, 크게 개의치는 않은 듯했다. 그는 정자에서 일어나 손으로 받쳐안고 있던 소쿠리를 내밀었다. 


“너 좋아하는 물복숭아. 물복숭아인 건 또 어떻게 귀신같이 알아서 그렇게 뛰었냐? 얼른 들어가서 먹어.” 

“한 개 먹고 가.”


유정은 자꾸만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다. 바구니를 건네받고선 깨달았다. 놈의 집엔 복숭아가 넘쳐날 테니 나눠준 것이었을 텐데. 참으로 바보 같은 말이었다 자책을 했다. 그러나 땅바닥에 고개를 떨구고 서있던 유정에겐 예상외의 답변이 들려왔다. 


“그래. 씻어올게. 앉아 있어.”


사실은 묻고 싶은 말이,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아서 그런 것이었는데. 유정은 제윤이 그런 저의 마음을 알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녀의 품에서 가져간 물복숭아 두 개의 질량만큼 허무한 감정이 들었다.


경비실 근처 개수대에서 복숭아를 씻어온 제윤이 유정에게 한 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정자에 나란히 앉아 복숭아를 먹기 시작했다. 먼저 베어 문 제윤의 것에선 과즙이 뿜어져 나왔다. 유정은 그것을 보곤 실없이 웃으며 가방을 뒤졌지만, 그에게 건네줄만한 휴지 같은 것은 찾을 수가 없었다. 제윤은 이따 씻으면 그만이라며 다시 과육을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이윽고 유정도 조심스레 단면을 물었으나, 속수무책으로 터져 나온 과즙을 막지 못했다. 그것을 본 제윤 역시 유정이 그랬듯 웃음을 터뜨리고 만 것이다. 별안간 부끄러워져 턱 주변을 손등으로 대강 처리하던 유정에게로 손이 뻗어졌다. 놀란 유정이 고개를 돌리자 제윤의 손끝과 유정의 입술이 맞닿았다. 유정은 꽤나 놀란 눈치였으나 제윤은 내색하지 않으며 유정이 미처 닦아내지 못한 부분을 훔쳐냈다. 


“바보야? 나 먹는 거 보고도 그래?”


제윤은 유정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조심히 먹었거든. 아. 그만 웃어!”


머지않아 눈을 접어가며 웃는 그를 보며 유정은 입을 비죽거렸다. 하지 말란 건 다 하는, 아주 못된 놈이란 생각을 덧붙이며. 이후로 꽤 오랫동안 정적이 이어졌고, 유정은 어느새 씨앗을 훤히 드러내는 복숭아를 쥐고서 고민했다. 어떤 것을 먼저 말해야 할지. 


“학교 안 나오니까 좋아?”


정적을 먼저 깬 것은 제윤이었다. 


“대신 학원이랑 과외 돌리느라 힘들어 죽겠다.” 

“너 없으니까 심심해. 넌 내가 없는데 안 심심해?” 

“뭐래. 친구도 많은 놈이. 나도 친구 많아서 됐거든.”


그럴 의도는 없었음에도 모난 마음이 말마저 모나게 만들었다. 뾰족한 어투를 잠잠히 해석하던 제윤이 말을 이어갔다. 


“복숭아는 네가 먹고 가랬으면서 왜 또 그래. 심란해?” 

“어.” 

“왜?” 

“너 때문인데.” 

“엉? 나?”


그러니까 괜히 유정이 힘들만한 것을 알면서도 일상의 학업에 대해 묻고, 교우관계를 들춰낸 것은 그녀가 심란해하는 이유를 찾아내기 위한 유도신문이었고 그건 제윤 나름대로 유정과 우정을 이어가는 방법이었다. 유정 역시 사실은 그가 그런 생각으로 묻고 있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음에도 솔직한 반응을 보일 수가 없었다. 제윤은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유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러니 말할 수가 없는 거라고. 유정은 부아가 치미는 것을 느꼈지만, 그래, 놈은 원래 저런 놈이었지, 하며 그에게 할 말을 골라냈다. 


“너 지금 만나는 애. 걔 좋아해? 너 원래는 걔랑 알지도 못했잖아.” 

“그냥, 뭐…” 

“그냥이야? 걔가 사귀재서 그냥 사귀어? 넌 그게 돼?” 

“귀엽긴 해. 그리고 나 좋다는데.” 

“너는. 너는 걔 좋아하냐고.” 

“싫으면 사귀겠냐.”


제윤은 이에 대해 그만 물으라는 듯이 빈정거리는 말투로 대답했다. 꼭 진솔한 감정을 물을 때면 이처럼 회피하곤 하는 그를 알면서도 유정은 그런 질문들을 되풀이하곤 했다. 


“그럼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하면, 그러면 나랑도 그냥 사귈 거야?”


그건 유정 나름의, 제윤과 우정을 이어가는 방법이었다. 유정의 물음에 제윤은 한참이나 말을 아꼈다. 어느새 물기가 마른 복숭아의 단면이 반질거리며 반짝이고 있었다. 


“넌 왜 그런 걸 물어봐? 진짜 그럴 것도 아니면서.” 

“와. 은근슬쩍 대답 안 하는 거 봐.”


그때쯤엔 제윤도 아예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이윽고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얼른 들어가. 안 더워?” 

“별로.”


어떤 여름은 싱거웠다. 그건 대체로 두 가지 경우에 해당했다. 작년이 미치도록 뜨거웠거나, 지금 앉아있는 자리에 그늘이 잘 들어서 별안간 시원한 바람 불어오는 탓이거나. 그들이 앉아 있는 여름은 이상하리만큼 미지근했다. 저녁이 가까워지자 한 꺼풀 꺾인 열기에 식은 공기가 두 사람을 감쌌고, 유정은 하는 수없이 그를 따라 일어섰다. 


“나 좋다는 사람을 만나면 왜 안 되는데?” 

“뭐?”


끝날 줄 알았던 대화는 제윤에 의해 다시 불이 붙었다. 반쯤 먹다 만 복숭아를 꼭 쥐고 있던 제윤이 뒤를 돌아 유정에게 물었다. 어쩐지 원망하는 듯한 눈빛으로 말이다. 제윤은 무어라 말을 이으려다 말았다. 유정은 그가 어떤 이유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짐작했으나 더 따지지 않았다. 저가 물었을 때 제윤이 내뱉을 대답들은 그녀 스스로가 감당할 수 있을 말들이 아닐 거라는 느낌이 들었기에.


그날 밤부터 유정은 묘하게 상처받은 듯하던 그의 태도를 곱씹었다. 이후로 제윤에게선 연락조차 없었다. 늘 시답잖은 장난 문자를 보내곤 하던 것들이 끊기자 이상하리만큼 허전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자함은 늘 이런저런 것들로 가득했는데, 그중 재원이 한몫을 단단히 차지했다. 학원이 끝날 즘 그의 문자가 오기 시작한 것도 일주일. 학원가 골목을 빠져나와 대로변을 지날 즘이면 항상 재원이 어디선가 나타나서 함께 귀가를 하곤 했다. 이따금씩 정원이 함께할 때도 있었다. 


“정원아!”


덕분에 유정은 그의 이름을 부르다 부끄러워질 걱정을 덜어낼 수가 있었다. 괜히 정원을 더 부르고 찾고. 다행히도 정원이 유정을 잘 따랐기에 그녀의 노력은 꽤나 선방하고 있었다. 대로변 인도를 가로지르며 팔을 휘적이면, 정원은 이제 제법 그녀가 익숙해져서 수줍게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안녕.” 

“응. 안녕. 이제 와?”


그래도 결국엔 정원이 그랬던 것처럼 재원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반가워서 나온 웃음이지만 자꾸만 비죽거리게 되어서 그렇게 어색해지고 만 것이다. 재원은 여섯 살 먹은 정원을 가뿐하게 들고 있었다. 또래보다 작고 말랐다지만 그래도 그렇게 가뿐하게 들다니. 유정은 남몰래 감탄하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 밥 먹고 쉬다가 다시 가야 해.” 

“나돈데. 오늘은 독서실 가는 날.” 

“같이 나갈래? 독서실에서는 몇 시에 나와?” 

“독서실에서는…글쎄다. 늦어도 2시에는 나오지 않을까. 잘 모르겠어. 가는 건 같이 가는 거 좋아. 7시 반에 볼까?”

“그래. 독서실 끝나면 연락해. 나도 그때까지 할 것 같아.” 

“알았어.”


유정은 곤란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굳이 거절을 한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재원에게선 편안한 기류가 흘렀다. 상대방을 굳이 긴장시키지 않는 무게감이 그녀에겐 꽤 괜찮은 장점으로 다가왔다. 사랑에도 몇 가지 단계가 있는 법. 관심에서 이해로, 이해에서 헌신으로, 헌신에서 초월까지 가는 사랑들이 있다. 두 사람은 분명 관심을 주고받고 있었다. 이해를 한 겹씩 쌓아가는 과정의 템포 역시 나쁘지 않은 정도였다. 예정대로 두 사람은 7시 반에 만나 각자의 목적지로 향하는 길을 함께 했다. 함께할 수 있는 곳까지 함께하는 사이. 실은 재원이 500미터쯤 에둘러 가는 길을 택했다는 것을 유정은 아주 먼 훗날에서야 알게 됐다. 한창 공부를 하다 뻐근해진 목을 돌린 유정은 문득 시계를 확인했다. 어느새 커다란 바늘이 숫자 2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정리를 하고 나왔을 땐 2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유정은 깜깜한 골목을 멀뚱히 한번, 손에 들린 휴대폰을 한번, 연신 두 가지를 번갈아보며 고민했다. 연락을 해도 될까. 혹시라도 연습이 빨리 끝나서, 이미 집에 들어가 잠에 들었다면? 그건 민폐가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뒤따랐다. 그러나 고민을 하기가 무섭게 적막한 골목으로 익숙한 진동음이 옅게 울려 퍼졌다. 발신자 김재원. 유정은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힌다며 전화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끝났어?⌟ 

“어…끝냈어. 어떻게 알고 전화했대?” 

⌜네가 이쯤에 끝내고 나온다며. 나 너네 독서실 거의 다 와가.⌟


과연 그의 말대로 골목 어귀쯤에 기다란 몸체 하나가 슬렁슬렁 걸어오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에 언뜻 비친 얼굴은 분명 김재원이 맞았다. 유정은 그를 향해 손을 크게 흔들어 보였다. 마찬가지로 유정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던 그는 파란색 메신저 백을 둘러맨 채 뛰어오기 시작했다. 전화를 끊으려던 유정은 당황하여 외쳤다. 


“야, 왜 뛰어! 더운데!” 

“얼른 가려고!”


재원은 휴대폰 스피커에서 입을 떼고 딱 유정에게 들릴 만큼만 소리를 쳤다. 골목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른 것도 아닌데, 유정은 그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는 것만 같아서 웃음을 멈출 수도 없었다. 


“와. 너 그새 땀이 나.” 

“더위를 많이 타서.” 

“그런데 왜 뛰었냐고.” 

“얼른 보려고 뛰었지.” 

“나를?” 

“응. 너를.”


그러니까 왜, 저를 보고 싶었던 것이냐 묻고 싶었지만 유정은 또 한 번 선수를 뺏기고 말았다. 


“나 네가 너무 좋아.”


그리고 그 순간 유정의 눈에 김재원이 아닌 다른 사람의 얼굴이 비친 것은, 장르 불명의 대서사시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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