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가 이 자리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어느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누가 보더라도 보잘것없고, 한심하고, 안쓰럽다 못해 비참하기까지 한, 그런 남자의 이야기이다.

이 남자의 탄생은 나름 유복했다. 고아도 아니었고, 편부모 가정도 아니었다.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평범하다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남자였다. 한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난 그는 장차 집안에 기둥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한껏 가진 채로 기대를 받으며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가 하던 사업은 국가 제정의 위기 속에서도 오히려 한껏 무르익은 일이었고, 그렇기에 그는 그 무엇이든 간에 하고 싶은 걸 제약없이 할 수 있는 그런 가정환경이었다.

남자가 태어나고 나서 처음으로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은 피아노였다. 시작은 남자의 어머니의 권유였다. 피아노는 그 당시 그 나이 때 애들이 보통 흔히 할 법한 예체능 분야 중 하나였다. 딱히 피아니스트를 노리는 게 아니더라도, 아이들의 정서발달이나 교양에 좋다는 소문이 치맛바람을 타고 나돌아 이곳 저곳에서 피아노 학원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곤 했고, 그의 어머니도 그런 소문을 귀담아듣고 다른 가정처럼 그를 피아노 학원에 보낸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피아노는 의외로 그와 잘 어울렸다. 피아노 학원에서 잘 치는 아이들만 모아 교회에서 작은 콩쿨을 열기도 했었는데, 남자는 거기에 참여했을 정도로 나름 재능 있다고 주위에서 평가받았다.

그 또한 피아노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어린 한 때, 꿈이 무엇이냐고 묻는 주위의 물음에 그는 작곡가라고 대답했다. 내가 원하는 곡을 머릿속으로 그 음과 선율을 상상하고, 그것을 악보에 옮겨 적으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펼쳐보고 싶어했다. 직접 연주하는 것보다 직접 무언가를 창작하여 만들어보고 싶어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 나이를 먹으면서 작곡가가 되겠다던 꿈은 접었지만, 그가 가진 음악에 대한 감수성은 나이를 먹고도 쭉 갖고 갈 정도로 영향을 끼쳤다.

그럼 왜, 작곡가가 되겠다던 꿈을 접게 되어버린 걸까? 나이를 먹으면서 피아노 연주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 시작해서다. 피아노 연습을 하면서 즐거움보단 고통이 더했다. 물론 그 고통은 온연히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실력을 단기간에 상승시키고 싶어했던 피아노 선생의 날선 몰아붙임은 어린 그에게 있어서 감당할 수 있는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남자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한 게 아니었으니까. 결국 그의 나이가 10대 초중반을 향해 가던 때, 체르니 40을 한창 연습하다 그만 지쳐버린 그는 피아노 선생님 앞에서 피아노 덮개를 쾅 하고 닫으며 말했다.

“더 이상 피아노 안 칠거야!”

그와 동시에 하나의 문이 닫혔다.

작곡가가 되겠다던 그 길로 향하는 문은 그렇게 허무하게 피아노 덮개 닫듯이 닫혀 버렸다. 허황된 꿈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남자는 노력과 연습을 포기했다.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남자의 인생을 바꿀 수 있었던 그 피아노는 결국 바꾸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자는 실망하지 않았다. 난 아직 어리고, 그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거니까. 눈치 보지 않아도 되고,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저지를 수 있는 특권을 그는 마음껏 누린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의 삶이 타인에게는 답답함과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킬 지 몰라도, 개구리가 행복하다면 그만 아닐까? 그건 누군가에게 참견받을 문제가 전혀 아니다. 그냥 그렇게 살도록 냅둔다고 한들 그를 둘러싼 세상이 갑자기 적대적으로 바뀌는 게 아니다.

하지만 우물 안 개구리가 그렇게 살게만 뒀다면 좋았을 텐데.

남자의 인생을 흔들어 둔 사건은 그의 나이 13살 때에 한 번 벌어졌다.

한창 친구들과 장난치며 뛰어놀기 바쁜 남자의 학교에 어느 날 한 전학생이 나타났다. 전학생은 대도시에서 넘어온 여학생이었다. 남자가 사는 동네는 시골 촌구석에 박힌 동네였기에, 그 예쁘장한 여학생은 얼마 안 돼 그 학년 학생들에게 관심을 받았다. 처음 보는 특이한 물건들과 당차고, 어찌 보면 과격해 보이는 그 전학생에 행동에 모든 학생들이 영향을 받아갔다. 눈치 없던 남자도 그 중에 하나였다. 남자의 평소 하던 눈치 없는 행동이 졸지에 그 전학생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 것이다. 다른 또래의 친구들 같았으면 그냥 원래 저런 친구구나 하고 넘어갈 법할 그런 행동들은 전학생의 시선에서 보았을 땐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점점 쌓이는 와중에도 남자는 아무 것도 몰랐다. 그게 그런 사고를 불러 일으킬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언제나와 같던 하교길의 어느 날. 전학생은 촐랑촐랑 걸어가던 남자의 팔을 붙잡고는 냅다 사과하라는 말을 꺼냈다. 무슨 일로 전학생의 기분을 상하게 한 줄도 몰랐던 남자는 무성의하게 미안하다라고 말을 하고 빠져나가려 했지만, 그 전학생의 패거리 몇 명이 남자를 둘러싸고 말했다.

“뭘 잘못했는지 모르냐, 씨발새끼야?”

남자가 또래 친구들에게 처음 들은 그 욕설은 남자에게 충격을 주었다. 남자가 그 말에 놀라 어버버하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학생은 남자를 향해 쏘아붙혔다.
“니가 XXX 하는 바람에 XXXX 됐잖아, 씨발!”

“사과하라고!”

무작정 사과하라는 말에 사과했지만, 전학생은 성에 차지 않은 듯 진심을 다해서 사과하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위압적이고 고압적인 태도에 반항할 법도 했지만, 남자는 반항하는 방법 조차 몰랐다. 반항하기엔 이런 경험 자체가 없었던 그였기에, 그가 할 수 있는 건 울음 뿐이었다. 눈물겨운 남자의 사죄에도 불구하고 사과하라는 그 패거리의 말은 남자가 학원 갈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끝이 났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날부터 그 패거리는 남자가 하교할 때마다 그를 붙들고 사과하라고 괴롭혔다. 그럴 때마다 남자는 무엇을 사과해야 하는 건지 조차 모른 채로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 하교길을 지나가는 다른 아이들의 눈초리를 받아가며, 수치스럽고 한심한 행태를 타인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반항조차 하지 못하는, 마치 거세라도 당한 소 마냥 남자는 그렇게 혼자만 이유를 모르는 괴롭힘을 당했다. 지금까지도 왜 사과를 해야만 했는지, 남자는 모른다. 무슨 일을 한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유를 모른다고 괴롭힘이 끝나지는 않는다.

그것이 지나고 지나 한 달, 두 달이 넘어갈 때였다. 괴롭힘을 참지 못한 그는 결국 선생님에게 ‘치사하게’ 고자질했다. 시간이 그렇게나 지나고서야 겨우 용기를 내어 말한 것이다.

자살할 때쯤 되니까 말을 꺼냈네. 너는 시발 자존심이라도 없는 거냐?

니가 욕을 먹는 게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학교 선생한테 말하든 부모한테 말하든 안될거 같으면 경찰서에 신고를 하든 뭐라도 했어야 하는 게 정상 아니냐? 니는 잘못 없다메? 아니 지가 욕처먹는게 억울하면 빨리 얘기해서 해결하던지 해야지 그 괴롭힘을 받아가면서 어케 참았냐 빙신이?

결국 남자와 전학생은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서로 사과하고 그렇게 끝이 났다. 전학생도 이제 질린 듯 남자에게 관심을 끊고는 다시 친구들과 히히덕대며 지냈지만, 남자는 그렇지 못했다.

아무 이유 없이 괴롭힘당했다고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오히려 여자아이들에 대한 공포심마저 스멀스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공포심? 진심으로 얘기하는 거냐? 그냥 여자 못 만나는 지금의 비루한 현실에 끼워맞추려고 꺼내는 얘기 아니냐?

니가 여자 못 사귀는 게 진심으로 저런 트라우마가 될 법한 이야기 때문이라고 하고 싶은 거냐? 아니, 너는 그냥 존나 빻은 돼지 새끼일 뿐이야. 자존심 까내릴 줄만 알면서 수치심이라곤 단 하나도 없지. 자존감이 좆도 없다 이거야.

합리화하는 건 어째 옛날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냐 너는? 인생을 합리화 덩어리로 살고 싶은 거야? 니가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도 결국 합리화라는 걸 너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잖아. 변화를 바라고 있는 거야? 변화를 바라고 있는 거라면 골방에 처박혀서 니가 가장 불쌍한 인간이라고 자위하고 있을 시간에 밖에 나가서 세상을 보라고. 세상은 니 불행 따위에 전혀 관심없어. 왜냐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세상은 잘만 돌아가거든.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이런 경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자기 친구들이랑 히히덕거리며 잘만 지냈다. 초등학교 때의 트라우마라고 해봐야 거기서 거기지. 당장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킬 만큼의 경험은 남자 입장에서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이다.

남자가 나이를 먹으면서 중학교에 들어갈 때 상황이 변했다.

중학생. 청소년기에 접어든다는 것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괜한 자존심을 지키려고 허세를 부리기 시작하고, 다툼이 벌어지며, 그러는 사이에 자아가 정립되기 시작하는 시간이 바로 청소년기다. 남자의 자아 정립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바닥’의 자아가 정립되었다. 허세 부리는 법도, 쌘 척 하는 법도 몰랐던 남자는 순식간에 또래보다 덩치 큰 몇몇 다른 남자들의 좋은 놀이감이 되었다. 그 예시로 ‘원펀’이라는 놀이가 있다. 놀이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사람 두 명이서 서로 상완을 내어주면서 어느 한 쪽이 항복할 때까지 주먹으로 치는 놀이다. 서로가 대등하다면 서로의 맷집 대결을 하는 데에 그치겠지만, 체급 차이가 나면서 원펀을 한다면 약한 쪽에선 압도적으로 ‘발릴’ 수밖에 없는 놀이이다. 저지르는 입장에서는 본인의 학교 내에서의 지위를 공고이 할 수 있는 놀이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바닥으로 더더욱 떨어지는 놀이라고 할 수 있다.

남자의 소심함은 이런 ‘원펀’을 즐기는 또래 아이들에게 아주 좋은 타겟이 되었다. 일단 자기 팔을 내어주면서 선공을 내어준다. 사람을 때리는 법을 좋아하지 않는 남자는 그저 툭, 하고 가볍게 칠 뿐이다. 이제 남자의 차례다. 상대방은 온 힘을 다해 주먹으로 팔을 가격한다. 그 무식한 힘에 밀려나가다 못해 남자는 의자를 등진 채로 꽈당 하고 넘어진다. 하지만 놀이는 끝나지 않는다. 아까 당한 만큼 되갚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상대방 눈치 보느라 또 기회를 놓친다. 상대방은 다시 온 힘을 다해 팔을 때린다. 그리고 이 놀이는 쉬는 시간 끝나는 종이 울릴 때까지 계속된다.

남자가 원펀으로 원치도 않게 맷집이 점점 늘 무렵, 남자의 팔에는 ‘길 가다 정말 우연찮게 넘어져서 생긴 멍자국’이 하나 둘 씩 늘기 시작했다.

한 번 그렇게 서로의 지위와 계급을 정하고 나서부터는 청산유수다. 아랫것은 위에 분들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하기 싫은 청소를 맡아야 하고, 과자를 일주일에 세 번씩 바쳐야 하고, 바치치 않는다면 두드려 맞으면 된다. 이토록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서열 정리가 어디 있을까.

그러니까 왜 이 트라우마에서 못 벗어나냐니까? 중고등학교 다니면서 학폭 안 당해본 사람이 없을까봐? 차라리 죽을 만큼 괴롭히고 그랬다면 신고라도 했겠는데 저건 또 니 자존심 때문에 실컷 쳐맞고 울면서도 신고 안 했잖아. 니가 감수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니가 감수하고 넘어간다고 했으면 트라우마라고 할 게 못된다니까?

그리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눈치보는 법을, 굉장히 값비싼 경험으로 얻어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사회 생활을 꼭 이렇게 극단적인 경험으로 배웠어만 했을까?

씨발. 하여간 온갖 불행한 일들은 너 혼자 다 겪었지 그치? 니 성격이 좆병신이니까 좆병신 취급 당하면서 산 건데 뭔 불만이 그렇게 많으세요? 쿨찐새끼. 아가리라도 좀 털어서 줘패는 새끼들한테 뭐라 말이라도 해봤어야지. 당하기만 하고 사니까 아무도 널 불쌍하다고 생각하다는 사람이 없는 거야, 병신아.

사람에게 있어 청소년기 때의 활동과 경험이 곧 성인이 되어서도 쭉 이어진다는 말이 있다. 불의에 맞서 한번이라도 저항해본 사람이라면, 최소한의 본인의 자존심을 지키고 어떻게든 꾸며가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지만, 그마저도 힘과 눈치 앞에서 해보지도 못하고 살아간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자기 주도적으로 삶을 이끌어나갈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이 주도적일 수는 없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사람마다 경험한 것이 다르고 살아온 삶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차이는 누가 그리 쉽게 매꿀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무리 매꿀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말이야, 나이 어느정도 먹고 나면 자연스럽게 자기 나름대로 자리를 잡을 수 있기 마련이야. 근데 넌 뭐냐? 나이를 그렇게 먹고 나서도 사실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고 있잖아.

주위 사람들을 보라고. 누군가는 취업에 성공했고, 누군가는 자기 꿈을 향해 노력하고 있는 거 너도 보고 있잖아. 저 사람들처럼 되고 싶은 게 아니야? 그냥 세상 탓하면서 살고 싶은 거야? 니 인생이 좆되가는 이유를 너한테서 찾는 게 아닌 거야?

대체 왜 이 글을 쓰는 건지 이유를 알 수가 없네. 넌 그냥 애새끼야. 누군가도 인정해주지 않으니까 세상이 날 버린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지? 진실을 말하자면 세상은 널 품은 적도 없었어. 너 같은 불평쟁이가 서 있을 세상은 없다고. 세상은 너 같은 불만쟁이를 품을 정도로 아량있지 않아.

진지하게,

왜 자살 안하냐?

…물론 행복하지 않은 건 아니다. 청소년기때 이런 절망적인 일 뿐들이었다면 남자는 진작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남자에게도 친구가 있었다. 그냥 단순한 또래 친구들이 아닌, 서로를 ‘크루’라고 부르며 끼리끼리 지내던 그런 친구들이 말이다.

뭔가 한끄풀씩 엇나간 사람은 자기와 비슷하게 엇나간 사람과 친해지기 마련이다. 남자의 곁에도 그런 친구들이 있었다. 락 음악을 좋아하는 멍청이, 키는 작지만 절대 지기 싫어하는 멍청이, 악마같은 멍청이, 바보 같은 멍청이, 게임에 빠져 사는 멍청이, 그리고 기타 등등.

한 집에 모여 되도 안되는 발성과 목소리로 마이크에 대고 라디오 방송을 찍겠답시고 설치던 친구들 끼리의 기억은 버릴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이다.

그리고 그게 니가 가진 ‘친구’라는 개념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지.

그 때 이후로 네가 사귄 인간관계가 있긴 하니? 넓어봐야 인터넷 친구가 전부잖아. 취미만을 겨우 공유하며 그게 전부인 인간관계. 대학교? 대학교 올라가서 친구를 어떻게 사귀냐고 말했던 건 너잖아?

봐. 이 모든 게 니가 저지른 거야. 왜 자꾸 과거에서 그 물음을 찾으려고 하냐니까? 과거를 들여다본다고 답이 나오는 게 아니야. 모든 게 너에서 나오고 있다는 걸 정리해가면서도 모르겠어?

넌 정말 멍청이구나. 이 이야기도 그 멍청이의 넋누리에 불과하고. 이 멍청아. 빡대가리 새끼야.


남자의 그런 중학교 시기를 넘어서고, 고등학교로 올라가고 나서는 그래도 사정이 덜했다. 적어도 무식하게 때려박는 애들보다는 어른스러운 또래들이 늘어났으니까. 그동안의 경험으로 나름 자기 처신은 할 줄 알게 된 남자는 적어도 타인에 눈엣가시에 나는 행동은 하지 않기로 정했다. 하지만 남자는 그것이 너무 과했다. 해야 할 때에 마땅히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자기 스스로 자기 날개를 꺾어버린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일단 뭔가 하기 전에 눈치부터 보고 행동했다. 다른 사람들도 같이 하겠다 싶은 건 눈알을 굴리다가 하면서도, 이건 뭔가 아닌 것 같다 싶으면 곧바로 발을 빼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3년이 지났고, 대학교에 들어가고, 군대를 다니고, 전역하고, 그렇게 남자는 목숨을 연명하며 살고 있다.

인간의 행복은 21세를 기점으로 그 정점을 찍고, 그 이후부터는 계속해서 내리막길만을 걷는다는 말이 있다. 일평생 행복을 향해 사는데도 불구하고, 그 행복에 근처에도 가지 못한 상태로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남자는 21세에 겪는다던 그 ‘정점의 행복’을 겪어보긴 한 걸까? 글만 읽어 본다면 그냥 하소연에 불과하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생각할 것이다. 남자가 자기 스스로의 인생을 돌아보면 행복했던 순간이 아예 없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아니면 단순히 이 글에서 불행했던 기억만 부각시켜서 적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아니.

그게 전부다.

앞에서 말했잖아. 이 새끼는 자기연민이 너무 심하다고. 지보다 불쌍한 인간이 더 있을까 하는 생각이란 말이야. 분명히 행복한 기억이 있을 건데 그건 저어기 멀리 떠내려보내고 지 인생에서 트라우마 남았던 기억만 꺼내놓고는 이게 전부였던 것마냥 말하고 있잖아.

니가 불행하다고 생각된 건 전적으로 니 마인드 자체의 문제야. 트라우마에 얽메여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는 게 니 문제라고.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게 니 행동에 걸림돌이 안 될수야 없겠지. 그럼 그 걸림돌에 항상 걸려 넘어질거야? 걸림돌을 곡괭이를 써서 파내던지, 삽으로 파내던지 해서 줄여나갈 능력이 넌 충분히 되잖아. 근데 왜 못하고 있는 건데?

왜냐면 그걸 다 할 능력이 안 되거든.

남자를 보면 알 수 있다. 남자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뚱뚱한 체형, 못생긴 얼굴. 스스로를 가꿀 노력조차 하지 않은 모습 그 자체다. 옷을 잘 입는 것도, 성격이 좋은 것도 아니다. 사람을 철저하게 봐가며 사귀고, 두루두루 사귀는 걸 못한다.

흔히 얘기하는 ‘찐따’의 스테레오타입에 이렇게 딱 맞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아싸도 아니다. 찐따다. 남자에게는 찐따라는 칭호도 아깝다. 본인이 찐따면서 비슷한 찐따를 하대하고 있으니까. 자존감이 너무나도 낮아서 이 남자는 타인을 까내리며 살지 않으면 안 되는 병이라도 생긴 듯 타인을 까내리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누가 좋다고 사람을 사귀고 싶어할까?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서 이 모든 게 전염병 탓을 하는 사람을 누가 좋아할까?

울 줄만 알면서 타인의 눈물은 우습게 아는 이 남자를 대체 누가 좋아해 줄 수 있을까?

그래서 문득 남자는 결심했다.

지금까지 그동안 이런 삶을 살았다면, 이제야말로 변해야 할 때다. 단 한번이라도 스스로를 대면하고, 본인이 용기를 가지고 행동해야 할 때다. 용기 없는 지난 날은 이제 안녕이다.

세상은 변했다. 그 누구도 그의 어리광을 받아줄 수 없다. 아니, 지금까지 그 어리광을 받아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남자가 문제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기회는 있는 법이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있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 따위는 없다.

딱 한 번만 스스로의 자존심을 갖고, 용감하게 뛰어든다면, 그 다음부터는 누가 도와주지 않아도 스스로 모든 걸 할 수 있을 것이다. 뭐든지 처음이 어려운 법이니까.

그래서 남자는 그러기로 했다. (혼자) 비참하고, (혼자) 슬프다고 느껴지는 인생일 지 몰라도, 단 한번의 용기만 있다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남자는 용기 있게,


18층의 



창문에서



뛰어내린다.



그가 가진 용기란 것은 결국 이 정도의 가치밖에 지니지 못했다.

최후의 순간에 남자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비겁하게 자기의 몸을 내던져버리라고 생각한 뇌를 원망했을까. 아니면 이번이야말로 용기 있게 삶을 포기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을까.


죽은 뇌는 말이 없다.

죽은 남자도 말이 없다.

그러나 죽은 이야기꾼은 잠들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아니 남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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