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해의 집으로 향할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이어졌다. 정운이 살짝 앞장섰고, 수해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곳저곳을 살피며 여유롭게 뒤따랐다. 이곳에 집을 얻은 이유가 있냐고 수해가 묻자, 병원 개업하려면 아이들이 많이 오가는 쪽이 좋지 않을까 해서 그랬다고 대답하다가, 정운이 뒤늦게 아차 싶은 표정을 했다.

   “개업 준비 중이거든요. 정형외과 전문의입니다. 이건 새로 만든 명함이에요.”

   정운은 대표원장 직함이 찍힌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을 받아 든 수해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개업은 어디다 하실 예정이세요?”

   “저기 바로 앞 대로변 상가에요. 벌써 계약해서 장비 들여놓고 있어요. 다음 달 중순쯤 오픈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수해는 왜인지 모르게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화환 하나 보내드릴까요?”

   “아이고, 그래 주시면 너무 고맙죠.”

   그는 명함을 코트 안주머니에 소중하게 넣었다.

   “인대, 관절 통증 있으시면 물리치료 받으러 오세요. 아 물론, 제가 군에 있었기 때문에 외상도 잘 봅니다. 웬만한 거친 상처는 익숙하죠. 근데 그런 상처는 웬만하면 안 만들어가지고 오시는 게 제일 좋죠.”

   흠, 하고 무언가를 고민하던 수해가 사실은 일 때문에 자주 다친다고 털어놓았다. 주로 뒷조사를 많이 하긴 하는데, 탐정 자격증을 따기 이전부터 해온 일이 있어서 마냥 잠복하고 사진만 찍는 건 아니라고 했다. 조금 거친 일을 많이 맡던 흥신소에서 어릴 때 일을 배웠다나. 다른 몸만 쓰는 애들에 비해 자기는 전략을 짜서 진행하기 때문에 남들보다 성과가 좋았고, 능력을 인정받으며 단기간에 좋은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고 했다. 그 좋은 위치라는 게 직급을 이야기하는 건지, 서열을 이야기하는 건지 확실치는 않았지만… 몇 해 전, 탐정 자격증이 합법화된 이후로 자격증을 따서 개업했다. 그는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은 이 직업을 하기 위해 태어났고 다른 일은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저절로 깨달았다. 그가 탐정 사무소에서 빠르게 성과를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만 놀지는 않는다는 거죠.”

   다소 도전적인 어투였다. 그는 이 말을 하고서 정운을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조금 겁도 주고, 부딪히기도 하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면 무엇이든.

   “목적 자체가 불법이거나 범죄인 일은 받지 않습니다. 누구를 죽여달라던가, 원한 산 사람을 밤길에 어떻게 해달라던가… 그건 조금 더 어두운 레벨에다 부탁을 해야죠. 누가 나를 괴롭히는데, 법적으로는 방도가 없거나 애매하다. 나의 괴로움을 들어줄 사람이 없다… 이런 경우에, 제가 조금 도움을 주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굴고 싶은데… ‘민사’ 적으로 해결하고 싶을 때? 아, 이런 건 탐정 업무에 속하는 건 아닙니다. 그냥 이전부터 하다 보니… 입소문이 나서 계속해요.”

   “하시는 일을 정말 좋아하시는군요.”

   잠시 생각하던 수해가 진지하게 동의했다.

   “좋아요. 좋아해요. 일 때문에 정상적인 인간관계는 못 가지지만. 이 일은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느껴요. 때로는 도전 같기도 하고요.”

   “힘든 점은 없습니까.”

   “힘들죠. 거의 모든 게 힘들죠. 근무 시간도 힘들고, 수주받는 거 관리하는 것도 힘들고…”

   그는 말을 끝까지 마치지 않았다. 정운은 그가 말을 더 이어 나가길 기다렸으나 수해는 더 말하지 않았다. 어느새 정운이 사는 빌라 앞에 도착했다. 공동현관 진입부터 계단까지, 온통 사람 사는 흔적으로 가득했다. 층마다 삶을 일구고 사는 사람들의 흔적을 수해는 유심히 지켜보았다. 정운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정집 특유의 냄새가 훅 끼쳤다. 딱히 악취도 아니면서 향기도 아닌. 집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삶의 냄새. 없앤다고 없앨 수 없는 그런 흔적이다. 

   수해의 코트를 받아 걸어놓는 동안 수해는 소파에 앉아 거실을 둘러보았다. 키가 작거나 중간 크기의 화분이 작은 장식물들과 함께 놓여 있었다. 정운은 쑥스러운지, 조금 좁지만 혼자 살기엔 딱 적당하다고 중얼거렸다. 잠시 둘러보던 수해를 두고 방으로 들어간 정운이 갈아입을 만한 옷을 건넸다. 수해가 자연스레 옷을 받아들며, 샤워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얼마 후, 욕실에서 수해가 따뜻한 김을 뿜으며 나왔다.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터니 머리카락 끝에 맺혔던 작은 물방울들이 흩어졌다. 갈아입은 티셔츠를 살짝 잡아당기며 수해가 웃었다.

   “옷 고마워요.“

   정운이 앉은 소파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수해가 계속해서 수건으로 머리를 말렸다. 티비에서는 심야 먹방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었다.

   “이렇게 있으니까 진짜 집에 온 것 같네. 물론 내 집은 아니지만.”

   눈을 감고 물기를 탈탈 터는 수해에게 정운이 드라이기를 가져다주었다.

   “아, 땡큐.”

   위잉 하고 돌아가는 드라이기 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정운은 괜스레 티비 방송에 관심이 있는 척을 했다. 집에 온 것 같다, 라는 말이 주는 무게가 있었다. 의미를 담지 않으려 애를 써도, 자기 옆에 천연덕스럽게 앉아 제 집처럼 머리를 말리는 이 낯선 사람은 어느새 함께 사는 가족처럼 굴고 있었다. 드라이기 전원을 끄고 머리 모양을 정리하던 수해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정운 씨는, 군에 있었으니까 공동생활에 익숙하겠어요. 남자 놈들끼리 같이 씻고 뭐 옷도 입으라고 던져주고.”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그런데 그땐 전혀 이런 감각이 아니었단 말이지. 그때랑 지금은 뭔가 다르다는 걸 이야기 해줘야 하나. 수해와 있으면 끝도 없이 시간이 갔다. 전에는 무료하게 견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진다고 해야 할까. 잠깐 있었나 싶더니 훅 지나가 있고. 그것을 인지할 새도 없이 계속해서 다른 일들이 이어졌다. 계속 함께 있었는데도, 어느새 이렇게 오랫동안 같이 있었지? 싶은 감각. 그러면서도 둘 다 집에 갈 생각을 안 했다. 그 점이 정운은 조금 재미있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 친구가 집에 놀러 오면, 진짜 가야 될 때가 올 때까지 뻔뻔하게 죽치고 눌러 앉아있는 감각. 이 느낌 때문에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했었나? 이제야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불을 끄고 누운 침대는, 둘이 살짝 가깝게 붙어 누우면 딱 맞았다. 어둠 속에서 수해의 두 눈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조용히 숨을 죽인 채 서로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어두운 저편, 그리 멀지 않은 몇 센치의 간격 너머 어딘가에 누워 있을 상대를 감각해본다. 넘어올까, 넘어오지 않을까. 왜 이런 것을 궁금해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정운은 궁금했다. 수해가 이 경계를 넘어오려 할까. 내 집으로 넘어와 내가 준 옷을 입고 내가 쓰는 바디워시를 쓴 것처럼. 넘어온다면 언제쯤이 될까. 묘한 기대감에 금방 잠이 오지 않아 눈을 깜빡였다. 나른한 목소리가 수해의 눈이 있는 곳 어딘가쯤에서 들려왔다. 

   “정운 씨는… 이런 것도 익숙해요? 한 침대에서 붙어 자는 거? 아니면… 경계심이 없는 편인가.”

   “경계를… 해야 하나요.”

   “…”

   대답은 없고, 조용하게 들이쉬고 내쉬는 숨소리만이 들렸다. 한참 대답이 없어 자는가 싶더니, 졸음에 취해 늘어진 목소리가 들린다.

   “정운 씨는… 원래 사람들한테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줘요? 다른 사람들한테도?“

   ”딱히…“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나긋나긋이 대답하는데, 잠결에 손을 움직였는지 정운의 손끝에 수해의 손이 닿았다. 숨을 죽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어둠 속에서 잠이 든 수해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온다. 아주 작은 면적으로 맞닿은 수해의 감각을 느껴보다,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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