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로 거기 머물러도, 난 괜찮아.

 

아까부터 줄곧 마지막 말이 귓가를 쟁쟁 울렸다. 고삐를 쥔 손은 속절없이 떨려 왔다. 후시구로는 침착하지 못하고 연거푸 입술을 깨물었다.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는 말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가시처럼 걸렸다. 심지어 그것이 어떤 면에선 제가 바라던 일임에도 그랬다.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떠나는 길이었다. 제 앞날에 무엇이 닥칠지 모르면서도, 이타도리를 자유롭게 할 수만 있다면 뭘 못 하겠냐는 각오로. 그런데 이게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일까. 막상 이타도리의 입에서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듣자, 후시구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타도리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솔직히 정말로 괜찮지는 못할 것이다. 사실상 젠인 가에 저를 빼앗기는 것과 다름없는데 그게 어떻게 이타도리에게 괜찮은 일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스쿠나의 속내를 모르는 이타도리로서는 자기의 감정을 억누른 채 제 신부의 안전을 위해 그런 결정을 내렸을 테다. 자기가 혼자 남게 되는 건 개의치 않고, 오로지 후시구로 메구미만을 위해서.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우선인 사람들의 행태가 판에 짜놓은 듯 비슷한 것과 같이, 자신보다 타인을 우선으로 삼는 사람들의 사고 역시도 신기할 만큼 닮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후시구로도 이타도리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건지 머리로는 알 수 있었다. 후시구로 자신이 이타도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감행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기에, 정확히 그 역의 입장인 이타도리의 심정 역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후시구로는 별안간 고개를 푹 숙였다. 멀미라도 난 것으로 생각했는지, 비탈길을 종종거리며 걷던 젠인 가의 구종이 황급히 괜찮냐고 물었다. 그러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한 손으로 잡고 있던 고삐를 당겨 말을 세웠다. 잠시 쉬었다 가시지요, 라는 말은 사뭇 걱정스럽게 들렸다. 하지만 후시구로는 격렬히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어.”

“그렇지만…….”

무어라 덧붙이려는 듯했던 구종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는 젠인 가의 사람이었고, 그 자신도 젠인의 피가 섞여 있었기에 같은 성을 지닌 이들이 얼마나 까탈스럽고 신경질적인지 알고 있었다. 이 사람도 어쩔 수 없는 젠인인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공연히 머리 위로 벼락같은 꾸짖음을 맞기 전에 얼른 말을 몰았다. 비탈길이라 숨이 차는 김에 쉬어 가서 나쁠 건 없겠지만, 모시는 사람이 바라지 않는다면 그만이다.

 

몇 차례 샘터에서 말의 목을 축일 때를 제외하고 그들은 계속해 걸음을 서둘렀다. 젠인 가가 점점 가까워지는 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후시구로는 판단할 수 없었다. 어차피 닥칠 일이라면 빨리 맞이하는 게 나을 것도 같았지만, 그러나 이타도리 가에서 멀어질수록 더욱 울적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거기 머물러도 난 괜찮아. 해가 머리 위를 지날 무렵이 되어 간단히 요기를 할 때에도, 그 말은 고막에 붙어 끊임없이 후시구로를 괴롭혔다. 준비된 음식에는 거의 입도 대지 못할 만큼. 눈치를 보던 구종은 이런 한뎃길에 말을 세워 송구하다고 사죄를 했다. 한뎃길이라기엔 길에서 좀 떨어져 있었고 삼나무가 사방의 시선을 가리고도 있었으나, 그는 후시구로가 원체 바깥에서의 식사가 익숙지 않은 사람이라 입맛이 없는 모양이라고 오해했던 것이다.

후시구로는 그가 자신을 귀하게 자란 몸이라 짐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을 정정하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그가 젠인 가에 머무르게 된다면 굳이 제 입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들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인데. ……언젠가는.

그 ‘언젠가’를, 후시구로는 망연히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스쿠나가 없는 대신, 이타도리도 없이 지내야 할 나날. 츠미키는…… 츠미키도 이쪽으로 오게 될까? 그것도 자신이 몸을 무사히 보전하게 된다는 전제에서의 가정이지만.

저에게 손을 흔들던 이타도리의 모습이 다시금 눈앞에 떠올랐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씩 웃던 얼굴. 너는 정말로 내가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을까.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을 한없이 상상만 해 봐야 부질없다. 후시구로는 맥없이 몸을 일으켰다. 구종이 서둘러 말의 고삐를 잡았다.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서쪽 하늘에서부터 점차 등잔불 같은 주홍빛이 깃드는 것을 보면서 후시구로는 멍하니 이타도리를 생각했다. 곧 그 눈이 붉게 뜨이고 스쿠나가 나타나겠구나. 해가 자취를 감추면 이타도리의 존재도 어둠 속에 잠긴다. 자신의 육체에 갇힌 채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익숙한 길로 접어들었는지 말은 아까부터 사람이 끌지 않아도 혼자 곧잘 나아갔다. 갈림길이 나와도 주저하지 않고 어느 한쪽으로 접어드는 것을 보면 정말로 젠인 가가 머지않은 모양이었다. 때마침 재 너머로 기와를 얹은 지붕이 언뜻언뜻 보였다. 일몰 직전의 연약한 빛살에 간신히 구분이 가는 정도였으나 그럼에도 기와집의 수가 한두 채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타도리 가에 비견되거나 혹은 그 이상으로 짐작되는 수준의 규모였다.

아까부터 한 곳을 주시하고 있는 후시구로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옆에서 구종이 나지막이 말했다.

“저곳이 젠인 가입니다. 곧 도착할 겁니다.”

산중턱을 빙 돌아가는 길로 들어서니,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건물이 한 채 더 보였다. 기와집이 보이던 위치보다는 좀 더 위쪽, 젠인 가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산등성이 중간에 신사가 있었던 것이다. 본관은 산허리에 안기듯이 세워져 있어 전모를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멀리서도 보이는 큼직한 토리이의 형상에 그곳이 신사라는 것쯤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토리이 위에 무언가가…….

“……?”

후시구로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말잔등의 흔들림이 방해가 되어, 후시구로는 눈살을 찌푸리고 먼 형상을 자세히 보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아니, 하지만 실은 그렇게까지 눈에 힘을 주고 주시할 필요는 없었다.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 떠도 그것은 분명히 보였으니까.

그럼에도 후시구로는 쉽사리 눈을 떼지 못했다. 평소 괴이와 괴이가 아닌 것을 가늠할 때의 버릇대로 그림자의 유무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먼 거리에서 그림자를 확인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는 수 없이, 그 독특한 형상이라도 좀 더 자세히 보려고 고개를 쭉 뺐더니.

“무얼 그리 열심히 보십니까?”

옆에서 마른 목소리가 건너왔다.

“!”

가볍게 놀라 옆을 휙 돌아보자, 무심히 정면을 내다보던 구종이 입을 열었다.

“젠인 가 위의 건물이 뭔지 알아보시겠습니까?”

후시구로는 까닭도 없이 뜨끔하여 저 산등성이의 신사를 한번 돌아보았다. 이어 안내자 쪽으로 슬쩍 시선을 던졌지만, 물은 이는 언제 입을 열었냐는 듯 잠잠히 말을 몰 뿐이었다. 조금 더 기다려 보아도 알아서 설명해 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후시구로는 망설이다 운을 떼었다.

“신사, 로 보이는데…….”

“맞습니다. 이 근방의 유력한 가문 중 저곳의 신세를 지지 않은 곳은 없을 겁니다.”

구종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후시구로는 일순 당황하여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방금 본 것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도 좋을지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전에 스쿠나에 대해 언급했던 걸 상기해 보면, 이 집안 역시 그러한 것들과 연이 깊은 게 틀림없었지만……. 그래도 후시구로는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쉽게 얘기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신의 감각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함부로 입에 올려선 안 된다고, 늘 본능이 속삭였기 때문이었다.

구종은 그 이상 한담을 나눌 의지는 없어 보였다. 하기는 지금까지도 그랬다. 함부로 말을 섞을 위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중요한 건 묻지 않은 것에 대해 먼저 말을 꺼낼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토리이 위를 날아다니는 게 계속 신경이 쓰였지만, 일단은 입을 다물고 있자고 후시구로가 막 결론을 내린 참이었다.

“……보신 건 그것뿐입니까?”

별안간, 구종이 물었다.

흠칫 놀라 바라보았으나 그는 역시나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지나가듯 던졌을 뿐이라는 태도였다. 동작이 지극히 침착했고 목소리 역시 차분했다. 그렇다고 대답하면, 후시구로가 발견하지 못한 건물이 한두 채 더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을 뿐이라는 듯이.

하지만 정말로 그것뿐인가?

혼란스러웠다. 혼란스러웠지만, 한번 걸어 보기로 했다.

“……토리이 위를 맴도는 게 있었어.”

후시구로가 조용히 말했다.

구종은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그저 목만 살짝 까닥였다.

“뭔지 알아보셨습니까?”

“멀어서 형체를 확실히 보지는 못했지만…… 하얗고 비늘이 있었어. 뱀이나 용 같았는데…….”

후시구로가 말끝을 흐린 뒤에도 구종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말발굽이 다져진 길 위를 밟으며 내는 터벅거리는 소리만이 어스름하게 땅거미가 깔린 근방을 울릴 뿐이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마침내 그가 긴 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들은 대로군요. 맞습니다.”

“!..”

“신사의 입구에는 식신이 있지요. 이무기이니 뱀이기도 하고 용이기도 합니다. 예로부터 삿된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지기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건가, 하고 후시구로는 마른침을 삼켰다. 하기는 그동안 봐 왔던 괴이와는 무언가 분위기부터 다른 생김새였다.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는 젠인의 피가 이어졌더라도 신사엔 걸음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 정도의 눈마저도 틔지 못했다면 젠인으로 인정할 수도 없다는 거지요.”

하지만, 하고 구종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분명히 보신 것 같으니 걱정은 한결 더셔도 되겠습니다. 사실, 눈이 제대로 트인 사람은 젠인 중에서도 흔한 것은 아니기에…….”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했는지 구종은 그쯤에서 말을 아꼈다. 그리고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길잡이를 계속했다. 표정을 숨길 필요가 있었던 것일까, 그는 말하는 동안은 물론, 말을 끝마친 뒤에도 후시구로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후시구로 메구미가 지독히도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을.

그가 말하지 않은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 숨기지 못한 것. 후시구로는 당장이라도 그 생략된 것들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을 참느라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식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젠인이어도 젠인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 사람들은 대관절 어떻게 되는 거냐고.

나의 아버지는 눈이 트인 사람이었냐고.

만일, 트여 있지 못했다면, 그게 아버지가 젠인의 이름을 버린 것과 연관이 있냐고.

아니, 애당초, 당신부터가 눈이 트여 있기는 하냐고.

 

그러나 입속에서 세차게 소용돌이치는 말들은 단 한 마디도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물을 만한 때도 아니었고, 물을 만한 상대도 아니었다. 설령 물어본다 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게 뻔했다. 이 모든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해야 하는 상대는 따로 있었으니까.

어둠 속에 묻혀가던 재 너머의 기와집에 하나둘 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후시구로의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 구종(驅從): [명사] 1. 말을 타고 갈 때에 고삐를 잡고 앞에서 끌거나 뒤에서 따르는 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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