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魄과 흑黑


날이 궂었다. 꼭 비가 올 것처럼 아주 흐린 하늘이었는데, 정작 내리지는 않았다. 마치 눈물을 참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넘칠 듯 출렁이는 먹구름만 가득했다.

정적과 웅성거림이 기묘하게 섞인 공간 한 가운데에서, 주희는 곧은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주변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모조리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검은 블라우스에 검은 치마. 검은 재킷에 검은 넥타이. 검은 구두와 검은 카디건. 검은 장갑에 검은 단화. 하여간에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검은색들을 몽땅 모아놓은 것 같았다.

왜 사람을 애도하는 색은 검은색일까? 세상에 색깔은 많잖아. 푸른색, 붉은색, 노란색, 은색이나 금색. 예전에 어디서 보기로는 죽음이나 절망을, 영원과 신비를 상징해서 그렇게 입는다고 했던 것도 같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던가? 서양 쪽에서는 빅토리아 여왕 대에 검은 옷으로 애도하는 풍습이 정착했다고 했지. 그런 건 다 기본소양으로 가정교사에게 배웠던 내용들이었다. 이 상황에서까지 기억나는 것을 보면 오죽 독하게 공부했나 싶기도 했다. 사실 지금에 와선 중요하지도 않지만.

주희의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전부 굳은 얼굴이거나 훌쩍거리거나 발개진 눈을 하고서 걸어 다녔다. 얼굴의 장막을 걷어버린 사람들의 표정은 새롭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회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이곳에서만큼은 지쳐보였고, 슬퍼보였으며, 기운이 빠져 보였다. 그 모습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때였다.

“아… 흐윽……, 허어엉……!”

내장을 쥐어짜는 것 같은 힘겨운 울음소리가 벽 너머에서 들려왔다. 억누르려다 말고 터지는 울음소리가 오히려 듣는 사람을 슬프게 만들었다.

“어떡, 어떻게 해… 흐어엉……!”

잠깐 그 소리를 듣던 주희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머리카락이 스르륵 둥근 어깨를 타고서 시야 앞으로 드리워졌다. 검고 짙은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렸다. 입은 꾹 다물려 아무 말도 새지 않았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자 다 닳아빠진 나뭇조각이 닿아온다. 주희는 그것을 묵묵히 문지르기만 했다.

한참을 그렇게 울음소리를 듣다가, 듣다가. 주희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빈소 안을 들여다보니 헌화를 하려다 말고 흰 국화를 꾹 움켜쥔 채 서서 서럽게 우는 희수가 보였다. 손에 힘을 너무 줘서 국화는 꺾이기 일보직전이었고, 몸을 구부정하게 서서는 아주 눈물을 한 바가지는 쏟아내고 있다. 주희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슬프게 우는 모습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꽥 소리쳤다.

“바보 같은 계집애가, 뭘 이렇게 서럽게 울어!”

그러나 그 목소리에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희수는 미동도 없이 똑같은 자세로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다. 상주 자리에 나란히 선 사내들은 그런 희수의 모습에 덩달아 눈시울이 붉어져가고 있었다.

“오빠들도 말이야, 이렇게 한가운데 서서 우는 사람을 멀거니 세워놓기만 해? 한 곳에 앉혀두고 달래거나 차라도 좀 주고 진정시키란 말이야! 그동안 회사 경영 예절 같은 거 죽도록 배웠으면서 왜 적용을 못 해!”

이제 주희는 그 사내들을 향해 일갈했다. 그러나 사내들 역시 눈물이 그렁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거나 눈을 감을 뿐, 행동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주희는 척척 다가가 희수 옆에 서 있는 가련의 팔을 탁 때렸다. 이제 주희의 목소리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야, 안가련. 이럴 땐 너라도 김희수 챙겨야지, …뭐해? 평소에 그렇게 약 올리고 유들거릴 땐 언제고!”

가련은 새빨개진 눈망울을 깜빡거리고만 있었다. 눈물을 참으려고 애쓰는 모양이었다. 그가 그렇게 움직일 때마다 눈가의 점이 꿈틀거렸다.

주희는 빈소 안을 빙글빙글 맴돌다가, 화를 냈다가, 멱살을 잡았다가, 때렸다가. 그리고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호흡을 내뱉으면서는 빈소를 빠져나와 조금 전까지 앉아 있었던 복도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등 뒤로 서러운 울음소리가 이어지고 있었고, 주희의 낯에는 조금 더 기운이 빠져 있었다.

“이제 원은 푸셨사옵니까?”

고개를 돌리자 붉고 흰 옷감으로 지은 화사한 복장의 여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주희는 미간을 좁혔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

“뭘 이렇게 자꾸 재촉해요. 그렇게 저를 빨리 데려가야 직성이 풀리시겠어요? …그리고 애초에, 저승사자가 맞긴 한 건가요?”

무슨 저승사자가 검은 옷도 안 입고, 복장규율 이런 건 없나봐. 전설의 고향 같은 프로그램 보면 다 검은 옷에 검은 갓이던데. 하긴 제 입으로 저승사자란 말은 안 하긴 했다. 그렇게 상념에 빠져 있자니 여인이 아무 말 없이 다가와 손을 뻗는다.

“속상하시옵니까?”

순식간이었다. 반항하거나 대꾸할 틈도 없이, 희고 서늘한 손이 뺨을 감싼다. 온기나 냉기가 느껴질 턱이 없는데, 왜 그런 감각이 드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 여자는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거야, 같이 가기만 하면 된다고 했으면서.

“아니요.”

속상하기는. 속상하면 어쩌겠느냔 말이야. 다시 일어나 빈소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입구를 가로막고 서서 안을 보니 영정사진 속 살짝 굳은 미소가 마주친다. 저 사진, 진짜 낯부끄럽게! 뭐 저런 사진을 써? 여권사진은 보정도 하나도 안 되어 있는 건데! …뭐어, 그래도 예쁘긴 하네.

그렇게 상념에 빠져 서 있는 저를 희수와 가련이 비틀거리며 스쳐지나간다. 몸이 아무 저항감 없이 흩어졌다가 뭉쳐졌다. 이것들은 진짜, 친구한테 인사도 안하고. 나쁜 것들. 죽죽 울기만 하면 밥이 나와, 쌀이 나와? 말이라도 한 마디 건네지. 주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저들끼리 훌쩍거리는 오라비들이 보이고, 사그라들다 툭 끊어지는 향이, 그 끝에서 피어오르는 연한 회색빛의 연기가… 그리고 흰 꽃들에 둘러싸인 제 얼굴이. 그것들이 한데 뭉쳐 아프게 가슴을 찌르려 들어서, 주희는 몇 걸음을 주춤거리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 그 풍경들을 뒤로하고 마주친 여인의 얼굴이 유독 희고 슬프게 빛나는 것 같았다. 웃고 있는데, 분명. 웃는 얼굴인데. 주희는 숨이 탁 막히는 것 같아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런데 왜 제게 그렇게 극존칭을 쓰시는 거예요?”

물론 내가 대통령 딸이니까 귀한 사람이기는 한데, 응. 요새는 신분제고 뭐고 그런 것도 없는 마당에, 아버지도 아니고 내가 저런 호칭을 받을 지위인가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그냥 존칭도 아니고 조선시대에 임금이나 종친에게나 썼을법한 아주 극존칭이다.

“아씨가 아니시옵니까. 당연한 일이지요.”

아씨, 라는 호칭마저 어색하다. 아가씨라는 호칭은 많이 들었다. 운전기사 아저씨부터 집에서 일해주시는 가정부 아주머니도 그렇게 불렀으니까. 거기서 ‘가’라는 글자가 하나 빠졌을 뿐인데, 막 고색창연한 대갓집의 귀한 외동딸, 막내딸? 그런 느낌이고. 저 여자가 입은 옷차림이 한복인 것과도 관련이 있으려나. 여자의 머리에 꽂힌 비녀 장식이 일렁거리듯이 흔들렸다.

“아씨라니. 그건 또 무슨.”

“아씨.”

여자는 성큼 다가왔다. 그러나 발걸음에 무게가 실리지 않은 것처럼 사뿐사뿐 걷는 탓에 몸가짐은 흔들리기는커녕 우아해 보였다. 그리고 여자는 숨결이 느껴질 거리까지 와서 싱긋 웃었다. 막 귀한 사람들일수록 잘 웃지 않을 텐데. 여자는 아주 고귀한 신분까지는 아니었을까? 그러나 웃는 얼굴이 천박하다거나 헤프게 보이지는 않았고 오히려 우아해 보이니 이상한 노릇이다.

그리고, 그리고. 정체도 모르는 여자에게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걸 보니 기가 막히다 못해 통탄스럽다! 죽고 나서 유령이 되어서까지 여자에게 끌린단 말이야? 이게 말이 돼? 아무리 내가 여자를 좋아한다지만… 말도 안 되잖아. 다 죽고 난 몸인데도 동한다니 이게 무슨 조화야! 그렇게 주희가 마음속 깊이 제 자신을 물어뜯고 있는 와중에 여자는 말을 이었다.

“아씨께서 가시는 길이 외롭지 않으실까 염려되어, 소인이 이렇듯 마중을 나왔사옵니다.”

가시는 길이 외로울까 걱정돼서? 마중? 주희는 그 말을 곱씹다가 한 마디를 보탰다.

“…저를, 아세요?”

그러자 여자는 조금 굳은 눈매로 멈칫거리다 이내 사르르 웃음 짓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 턱을 쓰다듬는 손길이 어딘가 모르게 떨리는 것 같아 주희는 침을 삼켰다.

“…아니요, 모릅니다.”

그 대답에 어쩐지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럼 왜 저를 마중 나왔다고,”

“모르니까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 죽은 사람 알아서 뭐하게요?”

“알아두면 언제고 쓸모가 있는 법이옵니다.”

“이상해요! 도대체 저에 대해 알아두었다가 어디에 쓸 요량인건데요?”

“그냥 그렇사옵니다. 소인이 궁금하다는 것으로 해두지요.”

여자는 발걸음을 사부작사부작 옮겼다. 주희는 무심결에 그 부드러운 걸음을 따랐다. 여자의 치맛자락이 나풀거리는 모양이 시야를 훔쳤다.

“당신도 나와 같은 처지인 것인가요?”

“비슷하옵니다만, 조금 다릅니다. 죽은 영혼이라는 것만은 같지요.”

죽음. 그 단어가 섬뜩하게 마음을 찌른다. 제 영정사진을 보고, 그 앞에서 엉엉 우는 두 친구를 보고, 오라비들을 보고, 제 이름이 달린 빈소를 볼 적까지도 실감나지 않았던 단어.

주희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여자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함께 멈추어 섰다.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정말로 죽었어. 여자의 입으로 그 단어를 듣는 순간에야 현실감이 들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어… 지금까지는 묻지 않았던 ‘앞으로’를 물었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는 말해줄 수 있는 건가요?”

“모든 영혼은 죽으면 선택의 문으로 갑니다.”

여자의 목소리는 조곤조곤했고 사람 하나는 금방이라도 홀릴 수 있을 것처럼 간질거렸다. 선택의 문으로 가서 다시 태어날지 그대로 소멸할지 뭐 그런 걸 결정한다는 모양이었다. 주희는 저를 내려다보았다. 짙은 회색의 정장을 갖춰 입은 모습이었다. 죽기 직전 입었던 옷. 그리고 여자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저 여자도 저게 죽기 직전의 모습이라는 소리일 텐데. 아무리 최신으로 쳐도 조선시대다. 틀림없이. 그럼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쭉 영혼으로 살았다는 뜻일까?

“다시 태어나면 어떻게 되나요?”

“환생이옵니다. 모든 기억을 잃고 새로운 몸을 입어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지요.”

그리고 그 부분에서 주희는 다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자꾸 걷다 섰다 하는 꼴이 짜증날 법도 한데 여자는 아무 반응도 없이 주희를 바라보았다. 영혼이라 숨을 쉬지도 않을 텐데, 이상하지. 갑자기 숨이 가쁘다. 호흡이 벅찬 기분이 든다. 왜?

“당신, 은. 왜… 환생하지 않았어요?”

“…….”

여자의 입 꼬리가 조금 내려갔다. 주희는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뒤이어 물었다.

“죽기 직전의 모습으로 영혼이 되는 거잖아, 그럼 당신은 한참 예전, 조선시대에나 죽은 게 아니에요? 왜, 아직까지. 이렇게 긴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 선택도 내리질 않았어요?”

초면에 묻기에 무례한 질문임을 안다. 예의범절을 지키며 내심을 숨겨왔던 현실에선 도저히 먼저 꺼내지 않을 질문인 것을 안다. 그러나 여자의 옅은 눈동자와 떨리는 속눈썹, 말려 올라간 입 꼬리와 휙 휘어진 눈매 같은 것들이 모조리 심장을 찔러 대서.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려서. 도대체 묻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정말로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상하게도.

“알려줘요.”

“…아씨.”

“당신, 사실은. 날 알고 있지요?”

그래서 아씨라고 부르는 거잖아. 세상 누가 모르는 사람을 그런 얼굴로 봐? 맞잖아. 여자는 읊조리듯이 중얼거렸다.

“그런, 얼굴이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데 다 숨기는 표정이잖아요. 웃으면 다 감춰질 줄 아나본데, 모르는 사람은 똑같이 웃는 줄 알지 몰라도, 나한텐 다 보여요.”

다다다 거기까지 외치고서 주희는 멈칫했다. 왜? 왜 다 보여. 그리고 여자는 조금 절박하기까지 한 얼굴로 성큼 주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묻는다는 것이,

“…소인의 이름을 아시옵니까?”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는 다시 떨리는 입매로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맞지요. 제가 가르쳐드리지 않았으니 모르시겠지요. 이름은, 네. 맞사옵니다. 소인이 멍청한 실수를 할 뻔 했습니다. 여자는 얼마간 더 중얼거리더니 다시 걸음을 옮겼다. 주희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 그 꼿꼿한 모습을 보다가 천천히 그 걸음을 뒤따랐다. 그렇게 걷는 동안 둘 사이에는 아무 말도 얹히지 않았다. 주희는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무엇이 말씀이시옵니까?”

“방금은, 내가 너무 사적인 질문을 한 것 같아서요.”

“사적인 질문이요. 소인은 그런 질문을 받은 기억이 없사옵니다.”

언제 그런 표정들을 했냐는 듯 쿡쿡 웃는 옆얼굴이 어쩐지 얄밉다. 그러나 잘못한 것은 저이므로 주희는 끄응, 하고 잰걸음을 옮겼다.

“그럼 됐고요.”

“…소인도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뭔데요?”

“부적은 효험이 있었사옵니까?”

부적? 무슨 부적…. 그러나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어떤 기억이 머리를 찔러왔다. 이상하게도 전혀 겪어본 적 없는 풍경이었는데, 꼭 내 것인 것처럼. 그냥 무섭도록 익숙한 기억이었다.

 

조금 전까지 눈앞에 있던 여자의 모습.

한 손으로 받치며 내미는 나무 패찰, 고개를 숙인채 눈만 들어 맞춰오는 시선. 그리고 간지럽고 웃음기 어린 목소리. 

‘소인이 어려울 때 사용한 좋은 부적이옵니다. 여기에 빌면 대부분의 소원이 이뤄집지요. 고민을 해소하시는 데 보탬이 되기를 바라겠사옵니다.’

그리고 손아귀에 쥐어지던 것.

동그랗고 납작한, 손에 쥐어져 있던 탓에 미약한 온기를 품은 나뭇조각.

 

주희는 떨리는 손길로 제 주머니를 뒤적였다. 언제부턴가 주변에 있었다. 첫 기억은 나지도 않는다. 그냥 매만지면 조금씩 기분이 풀리는 것 같아 부적처럼 가지고 다니는 것이었다. 아까 빈소 앞에서도 만졌던 것이었는데. 손에 잡혀 꺼내고 보니 너무도 닳아 반들반들하고 작아진 나뭇조각이 볼품없다. 주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당신….”

그리고 다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휘어진 눈매와 희고 긴 손가락, 서늘한 낯빛과 부드러운 웃음을 띤 입매. 화려한 옷차림에 긴 장식이 달린 비녀까지. 그 모든 것이 눈 깊은 곳에 각인이 될 정도로 샅샅이 바라보았다. 그리고서 옅은 색의 눈동자를 마주했을 때. 주희는 탄식처럼 입을 열었다.

“……강, 행수.”

그리고, 꽃이 피듯 새하얗게 번지는 웃음이 눈앞을 가득 메웠다.

“예, 아씨님. 찾으셨사옵니까.”

“유린.”

“예.”

부드러운 몸짓으로 고개를 숙여 보이는 그 모습에, 주희는 어쩐지 울컥 눈물이 샘솟았다. 제가 죽은 뒤의 풍경을 볼 때조차 나지 않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심장이 부서질 것처럼 뛰었다.

*

비가 내렸다. 세찬 빗방울이 잎사귀를 두들기고 웅덩이에 파동을 만들어냈다. 끈적이듯 쏟아지는 여름 장마 아래서 주희는 울었다. 눈물이 흐를수록 예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때마다 눈물과 함께 화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머저리도 아니고! 천하제일의 상재를 쥐었다는 사람이 왜 이렇게 미련하게 기다려요. 내가 그러면 좋아할 줄 알았어? 환생이든 뭐든 빨리 해버리고 새 삶 살지, 왜!”

“아주 처음에는 소인이 먼저 아씨를 두고 죽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더는 기다릴 일 없게 해드리고 싶었사옵니다.”

“매번 그랬어요?”

“네?”

“당신이 그 시대에 죽고 나서, 내가 계속 다시 태어날 동안.”

계속 다시 마중 나와 줬어요?

“흐음, 글쎄요. 소인이 어찌 했을 것 같으시옵니까?”

“이럴 때까지 유들유들 굴 거예요? 정말!”

“아씨님.”

“왜요, 강 행수!”

그리고 유린은 조용히 주희를 끌어안았다. 별다른 말은 없었다.

“송구하옵니다.”

대답하기 어렵다는 나름의 말뜻이었다. 주희는 이를 깨물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유린의 품에 파묻혀 고개를 숙였다.

“바보야, 응? 강 행수. 진짜로. 내가 뭐라고 그렇게 긴 시간을 보내. 일 년 십 년도 아니고. 진짜 기가 막혀서!”

“나름으로는 재미있었사옵니다.”

“도대체 뭐가요!”

“그야, 제 앞에서는 고고하시고 아름답기만 하신 아씨님의 내밀하고 사사로운 모습들을 원 없이 보게 되니 어찌 만족스럽지 않을 수가…”

“잠, 잠깐, 잠깐! 잠깐!”

주희는 후다닥 유린에게서 떨어졌다. 어느새 눈물이 쏙 들어간 얼굴을 보며 유린이 쿡쿡 웃었다.

“어, 어디까지 봤어요?”

“글쎄요, 소인도 어디까지를 말씀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사온데, 예시를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이, 이이…!”

유린은 부들거리는 주희에게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주희는 한참 씩씩거리다가 그 손을 확 잡아채어 깍지를 꼈다.

“기분이 상하셨사옵니까?”

“손 잡아준 것 보면 몰라요?”

“기분을 풀어드리려거든 어느 것을 보러 가야 할까요.”

유린이 남은 손을 뻗어 주희의 머리칼을 귓바퀴 너머로 넘겨주었다. 이제 저희에겐 시간이 많사옵니다. 선택의 문을 통과하기 전까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속삭임이 귀를 간질인다.

“같, 같이 놀러가던가요!”

주희의 톡 쏘는 외침에 유린은 다시 쿡쿡 웃었다. 이제 낯에 슬픈 기색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소인이 좋은 곳을 봐두었사옵니다.”

주희는 빈손을 다시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시선을 살짝 돌려 유린을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무슨 일이냐는 듯 상냥하게 고개를 기울여 온다. 손끝에 닿은 딱딱하고 반들거리는 나뭇조각을 몇 번 더 문질렀다. 마주친 시선을 피하지 않자 부드러운 물음이 다가온다.

“가실까요?”

“흥.”

그렇게 가늘어지는 빗줄기 사이로, 유린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걸음걸음마다 흩어져 굴러가기 시작했다.*

@nynypu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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