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은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숙제로 받은 것처럼 아주 약간 어두운 얼굴이었다. 기실 오늘도 평소와 다를 게 없는 날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의 하루는 대략 비슷해,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은 일과의 연속이었는데 그것을 구분짓는 것이라곤 업무의 세부내용뿐이었다. 그리고 그 일상에는, 점심시간을 아주 조금 지나서 방문하는 이의 존재가 껴있었다. 이름은 소옥희, 저를 소희라 부르지 않으면 대답도 하지 않는 고집불통 아가씨.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람 자체는 악의도 없고 통통 튀는 활발함이 보기 좋았다. 그런 사람이 재미도 없는 유진을 굳이 굳이 방문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늘 중요한 건 그 연유가 아니라 결과인 법이다. 그의 등장과 동시에 지체되기 시작한 업무에 조급증을 느끼며 유권을 호출하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악의 없는 작은 아가씨는 유권과 꽤 죽이 잘 맞는 것처럼 보여 안심했으나 이렇게 매일을 방해받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미안하지만 유진은 그리 한가하지 않았다….


대책을 궁리하던 유진은 결국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유권을 호출했다. 작전 회의라는 게 괜히 필요한 게 아니지. 명분은 같이 점심을 먹자는 것이었다. 겸사겸사, 점심도 먹고 대처 방법도 찾으면 좋지 않나.


회사 근처 일식집에서 유권을 만난 그는 두어가지 메뉴를 주문한 뒤, 다짜고짜 본론을 꺼냈다. 이젠 미사여구가 중요한 사이는 아니라 생각하기도 했고….


"유권씨. 옥희씨를 어쩌면 좋을까요?"


"뭐… 뭘 어떡해. 어떻게 하려고?"


"이상한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곧 오시잖아요. 유권 씨도 매일 불려 나오는 거 번거롭고, 저도 일해야 하니까... 그렇다고 '오지 마세요!' 말하기엔… 마음이 좀 불편해서."


"아니 뭐… 그냥 오지 말라고 하면 안 돼? 일이 바쁘다, 직장에서 만나는 거 좀 그렇다. 당신 그거 이미지 때문에 거절 못 하는 거 다 아는데, 그거 병 된다. 병."


쯧, 유권이 혀를 차며 대꾸하는 사이 주문한 메뉴가 나오자 젓가락을 든 유진이 그게 말이나 되냐는 얼굴로,


"유권 씨는 옥희 씨한테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


나온 음식을 잠시 노려보던 유권이 잠깐의 침묵 끝에 입을 연다.


"자기가 그동안 방해됐던 거냐고 꺼이꺼이 울다가 뛰쳐나갈 거 같긴 하네…"


"그렇죠? 울 것 같죠?"


그러면 회사 간의 관계까지 불이 번져서 둘 다 망할지도 모른다는, 조금은 비약적인 미래를 덧붙인 유진이 가벼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젓자, 늘 그러하듯 마지못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알았다, 알았어! 그럼 뭐 어쩌자고?"


"같이 머리 좀 굴려보자고요."


"뭐… 같이 있기 불편한 상황을 만든다거나?"


"들어오면… 무언가 큰일이 난다는 걸 인식하면?"


"그렇지. …심각하게 싸울까?"


그럴까, 생각하던 유진이 고개를 젓는다. 그러다가 파혼한다고 소문나면 어떡하냐는 것이 이유였다. 누가 컨셉을 이렇게 피곤한 것으로 정했는지. 하기야, 과거의 유진은 이런 사태는 상상도 못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다 알면 그게 사람인가, 신이지. 이것저것 방법을 찾아본답시고 어렸을 적 기억도 들춰보았으나 크게 쓸만한 것은 없는 듯 했다. 겁을 줄 수도 없고.


"뭐…. 할까?"


"…제가 생각하는 종류인가요?"


"…회사에서 하기 좀 그런 거 생각하고 있어?"


"…."


나이프는 애꿎은 튀김을 찌른다. 이걸 대답하는 것도 민망하고, 그러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


"그러네요…."


"뭐 좀… 이미지랑 맞고… 적당히 매일 할 거 같고…"


생각한 것이 어긋났다는 의심이 들자 당혹감이 밀려온다. 말하기 민망한 것을 생각했는데, 저쪽은 그게 아닌가 본 데.


"그걸 회사에서 매일요?"


"왜 맨날 하잖아."


"저희 맨날은 안 했잖아요. 다른 거 말하는 중 아니에요?"


"무슨 소리야, 보여준다고 내가 회사 데려다줄 때마다 한 번씩 해주는데…"


서로의 당혹스러움에 다시 한번 그 강도가 심화되는 가운데, 유권이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신한 진은 앞선 자신의 말들을 모두 부인한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제가 실언을 했네요. 그래요. 그거."


"내… 내… 내 말은 키스 말이야. 키스."


"예… 그럼요."


"걔가 들어올 타이밍에 맞춰서 뭐 좀, 찌… 찐하게 하면… 걔도 눈치가 있는데!"


추측하건대 둘의 얼굴은 꽤 봐줄 만큼 혈색이 돌지 않았을까. 적어도 본인들은 그 얼굴을 가리려고 노력했겠지만, 그게 마음대로 될 리는 없었다. 그리 나쁜 사이처럼 보이지는 않으니 그것으로 되었다마는 부끄러운 것은 어쩔 수가 없는지 유권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진다."


"그, 그렇죠. 옥희 씨도 눈앞에서 노골적인 애정 행각을 보고 싶지는 않을 것 아니에요."


"그, 그렇지."


"다른 생각이 났는데, 우선 회사 들어가서 마저 이야기할까요?"


하긴, 언제까지고 이곳에 앉아서 행동을 유보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키스에서 끝내지 말고, 다음 과정이 있는 것처럼 연출하면 좀 놀라지 않을까요?"


사무실에 들어가 문을 닫자마자 진이 꺼낸 말에 놀라는 것은 언제나 유권이었다. 어떻게 보면 남들이 모르는 엉뚱함의 피해자라고 할 것이 있다면 오직 유권이 유일했다.


"하기라도 하자는 거야?!"


"다, 다음에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느낌만 주자는 거죠!"


크흠, 크흠 괜히 목을 가다듬던 유권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괜히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미쳤지, 미쳤어. 뭔진 몰라도 누군가는 분명 미쳤다.


"어쨌든 제가 책상 위에 걸터앉고, 유권 씨가 문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서 있으면…"


"왜 이렇게 상세해?"


재차 헛기침하던 유권이 상세함에 의문을 표하자 당연히 완벽해지려면 계획이 상세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반문한다. 그러냐, 마저 말해라. 그것이 유권이 취한 포지션이었다.


"키스 대신에 제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로 문 쪽을 보면…"


"지, 지, 지금?"


골몰하던 유진은 잠시만요, 말하고는 본인의 자켓을 바닥에 툭 던져두고 사무실 의자를 살짝 뒤로 밀더니 책상에 걸터앉는다. 이런 상황이 아니면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이지만, 유권과 함께한 대부분의 시간에 취했던 행동들도 그것과 비슷했으니 별로 상관없었다. 앉은 채로 한쪽 구두는 벗어서 떨구고, 한쪽은 벗겨질 듯 말듯 아슬하게 발끝에 걸쳤다. 그것을 지켜보던 유권이 기가 차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웃으며 얼굴을 붉힌 것은 뭐… 그가 크게 신경을 기울일 부분은 아니었다. 유권은 평소에도 수줍음이 많은 편이었으니. 대략적인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되자 그가 유권에게 손짓했다.


"이렇게?"


어정쩡하게 요구사항을 이행하던 유권이 민망하게 되묻자 그는 되려 마음에 들지 않는 연기를 본 감독처럼 미간을 좁혔다.


"아뇨, 음… 제 허벅지에 손 올려볼래요? 네, 그렇게요. 스커트 아래에 조금만 걸쳐서. 네. 나머지 손은 어쩔 거예요?"


"어…. 뭐… 그, 글쎄…"


진은 또 엄한 감독과 비슷한 얼굴을 한다. 뭐 어쩌라고, 유권이 겨우 그런 말을 참는 줄도 모르고. 이것도 좀, 저것도 좀, 시도해보던 진은 모르겠지만 유권의 눈에 들어온 시계는 어느새 옥희가 올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슬슬 불안한 데다 이런 실랑이를 하느니 그냥 딱 한 번 눈 감고 들이대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이 시간에 올 만한 것은 옥희밖에 없지 않나. 다급해진 유권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그냥 당신 가만히 있어."


그리고 채 유진이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유권은 한쪽 손으로는 책상을 짚고 그를 뒤로 눕힌 채 상체를 굽혔다. 


숨결이 닿는 거리.


입술 대신 시선만이 오간다. 그 침묵을 아무도 침범하지 않자, 긴장은 짐짓 다른 형태를 띠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침범에 대비하는 방어적인 모습이 아닌…


…연인이라면 느낄 것이라고 해둘까. 아마 유진의 이성이 5그램만 부족했더라면, 홀린 듯 입을 맞추려는 순간 아무도 노크하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는 영영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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