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 7,900자 / 공백포함 

* 맷피터 약간, 15세 관람가



오늘도 벌써 3번 정도 허공을 크게 가르는 스파이더맨의 웹스윙 소리를 들었다. 공기의 흐름을 느끼는 게 즐거운지 가끔이나마 환호했던 목소리는 완전히 사라졌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와, 웹슈터의 소리를 들으며 이 도시에 아직 네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더 이상은 어려울 것 같아요.' 

'..... 그래.' 

'잘 지내세요.' 

'잘 가.' 


나는 원래 오는 사람을 막는 법이 없으며, 가는 사람을 잡는 법도 없다. 앞이 보이지 않고부턴 더 많은 것에 미련을 두지 않았으므로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그래서 지금 너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느냐고 묻는다면 없다곤 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너를 다시 만나고 싶다거나, 너를 다시 안고 싶다거나 하는 마음은 들지 않는다. 모든 만남에는 이별이 있고, 모든 이별에는 이유가 있으니까.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웹스윙 소리가 들릴 때마다 귀를 기울이며 좋아하던 나는 이제 세상에 없다. 


헬스키친을 벗어나 허드슨 야드 쪽으로 길을 잡았다. 높은 빌딩과 낮은 건물이 섞여있는 그곳은 웹스윙을 하기에 가장 안 좋은 곳 중 하나였으니까. 친구들을 따라 몇 번 갔던 길을 지팡이를 두드리며 천천히 걸어 나간다. 요란한 음악소리가 들리는 카페테리아를 지나고, 옷감을 파는 가게를 지나고, 가죽으로 된 가방을 파는 가게를 지나고, 다시 레코드 점을 지나고, 오래된 보세 옷을 파는 상점을 지나고... 머릿속에 지나온 가게들에 대한 정보를 하나씩 쌓아 올리며 새로운 곳의 지도를 완성해나간다. 지금 나에겐 다른 세상이 필요했다. 


늦은 시간 문 닫은 상점 여러 곳,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고급술과 맥주, 칵테일 향기가 흘러들어온다. 소란스러운 음악과, 부드러운 술냄새를 맡으며 테라스를 막 지나려는 무렵 바에 앉은 손님에게 말을 거는 남자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 드릴까요?"

"보드카 토닉이요?"

"보드카 토닉이라니! 오늘 제 첫 칵테일인데 좀 어려운 걸로 시켜봐요." 


그와 비슷한 톤의 목소리를 가진 그 남자의 목소리엔 내가 아는 그 에게서 전혀 느낄 수 없는 능글맞고 장난스러운 말장난이 섞여있다. 


"글쎄요... 네그로니?" 

"니그로요???" 

"... 아니 그...." 

"농담이에요." 


농담치곤 조금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은 게 아닌가 생각하며 천천히 바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네그로니. 카밀로 네그로니 백작을 위해 1919년에 처음으로 만들어졌고 아메리카노 칵테일에 탄산수 대신 진을 넣었죠." 


조금 떨어진 바에 앉아 남자의 설명과 함께 모든 재료가 셰이커 안에서 섞이는 소리를 감상했다. 


"여기 처음 오지 않으셨어요?" 

"집이 이 근처가 아니어서요." 

"어디 사시는 데요?" 

"그리니치요." 

"좋은데 사시네요." 

"거기 바텐더들은 역사강의는 안 해요."


얼음이 담긴 컵에 칵테일이 담기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니치 바텐더들은 이런 네그로니는 못 만들겠네요." 


그녀의 앞으로 차가운 얼음이 들어간 올드 패션드 글라스에 '네그로니'가 담긴다. 여자는 '피식'소리를 내고 웃으며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려두고 건네진 컵을 들고 자리를 뜬다. 그러는 사이 아주 미세하게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에 전혀 그런 소리가 날 이유가 없는 소리. 


"카드 맡기고 마실 건가 보네요~~. 그래, 아빠 돈인데 뭐가 어떻겠어." 



카드를 들고 돌아서는 그의 손에 '찰그락'거리는 수상한 소리가 들리더니 그의 주머니로 소리가 나는 물건이 사라진다. 손버릇이 아주 나쁜 바텐더인 게 틀림없어 '피식'하는 웃음이 나왔다. 카드 결제를 끝낸 그는 결제 테이블 위에 카드와 영수증을 올려두고 클립으로 잡아두곤 내 앞으로 무심한 듯 터벅터벅 걸어온다. 


"어... 혼자 오셨나요?" 


내 주위를 기웃거리는 듯한 그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더니 바 너머로 몸을 살짝 올려 내 옆의 무언가를 또 살핀다. 


"안내견은 없으세요?" 

"하하, 네. 안내견 없어도 제가 별로 불편하지 않아서요. 문제가 될까요?" 

"아니요. 오히려 개가 있으면 문제가 되죠. 물론 개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지만 여긴 아무래도 시끄럽고 하니까 조금 불편해지실 수 있거든요. 한 잔 드릴까요?" 

"음, 여기서 맥주를 달라고 하면 환영받기 어렵겠죠?" 

"너무하시네요. 제가 명색이 바텐더인데. 제대로 된 거 하나만 시켜주세요." 

"추천 부탁드릴게요."


바를 양손으로 짚고 선 남자는 나를 가만히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다 짧은 한숨을 내쉰다. 


"흐음... 처음 뵙는 것 같은데 이 근처 분이신가요?" 

"헬스키친 쪽에서 왔습니다." 

"오호라. 그 유명한 '악마'가 활동하는 동네 분이시네요! 로브 로이로 드릴게요." 

"네, 좋네요." 


바로 앞에 냅킨을 놓은 그가 바 아래에서 칵테일 잔을 꺼내 그 위로 올려두고 '달그락'소리가 나게 큰 얼음을 그 안으로 담는다. 


"드셔 보셨어요?" 

"어렸을 때, 학교 다닐 때 친구가 해줬었죠." 


커다란 믹싱 글라스로 큰 얼음들이 담아 미지근한 글라스를 차갑게 식힌다. 


"친구분이 바텐더 이셨나 봐요?" 

"아니요. 같은 학생이었는데 지금은 변호사예요." 

"제가 폄하하려고 하는 건 아니지만 제가 만든 건 맛이 다를 거예요." 

"그럼요. 전문가인데." 


남자의 왼손에서 한 바퀴가 돌려지고 오른손으로 내려앉은 스카치위스키가 칵테일 지거에 진한 향기를 풍기며 담긴다. 


"선천적으로 손이 조금은 차가운 편이라 칵테일을 만들면서 온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죠. 흔적을 남기지 않았던 의적 로버트 로이 맥그레거처럼." 

"과연 의적인지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인물이긴 하죠." 


그의 머리 위로 돌아 내려온 허브 와인이 지거에 담겼다가 믹싱 글라스로 옮겨지며 얼음 사이로 깊게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사실 질이 상당히 나쁜 귀족이었다는 얘기도 있는데 민간에서 미화됐다는 건 이유가 있는 거겠죠." 

"예를 들면." 

"정말로 누군가를 구했다던가 하는." 


그의 손에 들려있던 지거와 와인이 내려오더니 씁쓸한 향기를 풍기는 앙고스트라 비터스가 믹싱 글라스 위로 한두 방울 떨어진다. 


"그것도 아니면 악마의 행세를 하고 진짜로 사람을 돕고 있었다던가." 


믹싱 글라스에 깊게 담긴 바 스푼이 큰 덩어리의 얼음들과 술을 곱게 섞어낸다. 


"많은 의미가 담긴 말 같네요." 


칵테일 잔에 담겨있던 얼음이 바 아래의 개수대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곤 믹싱 글라스에 담겨있던 음료가 스트레이너를 지나 차갑게 식은 칵테일 잔으로 '쪼르륵' 소리를 내며 따라 담긴다.


"런던의 더 사보이 소속 바텐더가 무겁고 강렬한 향기의 위스키를 만들며 붙인 이름치곤 너무 화려하죠. 마지막에 얹어지는 체리까지." 


과일 집게에 잡힌 신선한 체리가 막 만들어진 칵테일 잔으로 들어가 폭 가라앉는다. 


"주문하신 로브 로이 나왔습니다." 


그를 떠올리는, 혀끝이 무겁게 움직이고 목 안쪽을 살짝 긁는듯한 높은 톤의 목소리가 반가워 홀린 듯이 들어와 이야기를 듣는 동안 다시 또렷하게 깨닫는다. 이 남자는 그가 아니었고, 나는 지금 엉뚱한 사람의 음성을 들으며 그를 그리고 있다는 걸. 내가 잔을 잡기 전까지 잔 주둥이 부분을 살짝 잡은 그의 손을 더듬거리며 찾아 잔을 가볍게 쥐니 그의 손이 천천히 떨어진다. 혹시라도 나에게도 무슨 장난을 치진 않을까 기다리고 있었지만 남자는 나의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친절하시네요." 

"오, 최근 3달 사이 처음 듣는 말인데요. 오늘 팁으로 대신해도 될 정도예요." 


물론 거짓이다. 바텐더 팁은 일반 술집보다 높을 텐데 입 바른말로 될 리가 없다는 걸 모를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저희 영수증은 점자 처리가 안되니까. 계산하실 때 불러주세요." 

"네." 


꾹 다문 입술 새로 아주 얕은 한숨이 터져 나오는 건 내가 아는 그와 아주 닮은 모양새였다. 친절한 말을 건네는 그의 내면에 착한 심성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명확한데 왜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걸까.



-



주말 저녁치고는 손님도 적고 팁도 적은 한숨만 나오는 날이었다. 주머니에 챙겨 넣은, 아빠 카드로 돌아다니는 아가씨의 에르메스 팔찌와, 술 마시느라 정신 못 차리는 중년남성의 까르띠에 시계가 아니었으면 건질 것이 없었던 하루였으니. 직원용 캐비닛에 바텐더 조끼를 벗어두고 재킷을 다시 걸쳤다. 대충 던져 넣었던 가방을 한쪽으로 메고 나와 바 안쪽에서 맥주 한 병을 꺼내 뚜껑을 돌려 따고 반 병 정도를 순식간에 들이켰다. 


"크아." 

"네이트, 너 맥주 마신 거 급여에서 깐다." 

"아, 진짜 한병 가지고 엄청 빡빡하게 구시네요." 

"맨날 그렇게 한 병씩 해치우니까 하는 말 이잖아." 


멀리서 들려오는 사장의 잔소리를 뒤로하고 손에 들린 맥주를 입에 부어 넣듯 거꾸로 들어 한번에 모두 마셨다. 역시 퇴근길엔 시원한 맥주 한 병이 최고지. 속이 다 후련하네. 


"저 오늘 오버타임 했으니까 그걸로 퉁치세요." 

"5분 지각한 건 어떻게 하시고?" 

"아 쫌." 


뒷걸음질로 가게를 나가며 양손을 들어 보이자 사장이 한쪽으로 웃으며 가운데 손가락을 올렸다. 맥주 한 병 가격치곤 좀 비싸지 않나. 가게 문을 닫고 뒤를 돌아 걸어 나가려는 순간 바 옆의 건물 기둥에 기댄 검은 그림자가 저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린다. 손에 들린 하얀 지팡이까지 바르게 들고 있는 그를 보며 멈칫했다가 무시하고 지나치려는 사이 그 지팡이가 내 앞을 가로막는다.


"다섯 번의 시도, 세 번의 성공. 명품 팔찌와 시계." 


그의 말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떻게 안 거고 언제 알게 된 걸까. 내가 그런 짓을 한다는 건 사장조차 눈치채지 못했는데. 


"바텐더의 수입이 나쁠 리가 없는데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이유가 뭔가요?" 

"....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오른쪽 뒷주머니로 챙긴 팔찌와, 재킷 안쪽으로 넣어둔 시계 말입니다." 


물건을 감춰둔 위치까지 정확했다. 그걸 그렇게 알 수 있다고? 앞도 못 보는 사람이? 증거라도 있냐고 되물으려다가 그게 오히려 의심을 사는 행동이 될까 싶어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고 앞에 드리워진 그의 지팡이를 잡아 치우려는데 이젠 그가 직접 내 앞으로 내려와 직접 앞을 가로막는다. 


"꽤 많은 기회가 있었는데 다른 사람 물건엔 손을 안대더군요. 내 것에도 그렇고." 

"그쪽 물건은 훔쳐봐야 돈도 안되고 지갑을 털면 돌아갈 차비도 없을 것 같아서 안 털었습니다. 됐나요?" 


괜히 사람 신경을 건드려서 듣지 않아도 될 말을 사서 듣는 그에게 말을 쏘아붙이자 그가 작게 소리 내며 웃더니 내 앞에 마주 서서 나를 향해 고개를 살짝 내린다. 짙은 선글라스 너머의 시선이 맞지 않는 눈빛이 가늘게 뜨였다가 다시 방긋 웃는 얼굴이 솔직히 조금 잘생겼다는 생각도 했다. 잘생기고 자시고 이런 짓을 왜 하나 싶은 게 가장 큰 문제였지만. 


"차비는 없지만 차를 한 잔 대접할 수는 있는데요." 

"제가 왜 그쪽이 대접하는 차를 마십니까?" 

"얘기할 사람이 필요해 보여서요."


이상한 사람이다. 나는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을 한적도 없고, 공격적으로만 대하고 있는데 어째서 인지 그는 나에게 웃으며 내 이야기를 들어주겠다고 한다. 물건을 훔친 것에 대한 이야긴가 싶어 팔짱을 끼고 살짝 옆으로 빗겨 서서 그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보이지 않는 탓인지 내가 하는 행동에 관심을 주지 않는 그는 지팡이를 두 손으로 굳게 잡고 서서 여전히 내 앞을 비켜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경찰에 신고라도 하시려고요?" 

"아니요. 안 합니다." 

"어떻게 믿죠?" 

"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을 거고, 이렇게 여기 서서 기다리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일리 있는 말이었다. 이 손님이 가게를 나선건 벌써 2시간도 전이었으니까 할 수 있다면 그전에 했을 거고 자신이 신고했다는 티를 낼 이유도 없겠지. 신고자의 신변보호는 기본이었으니까. 


"왜 이러시는지 한 번 물어나 봅시다." 

"좋은 사람 같은데 왜 나쁜 짓을 할까 하는 것뿐입니다." 

".... 하하. 처음 본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거 아주 위험한 행동인 거 아시죠? 이러다가 제가 그쪽 지갑 털면 어쩌려고요?" 

"지갑을 털면 차비도 안 남을 거라고 말해준 사람인데 설마 그럴 리가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한 손으로 머리를 헝클이듯 쓸어 넘기며 주위를 살폈다. 술집도 문을 닫을 정도의 늦은 시각. 차를 사겠다고 했지만 이 시간에 차를 파는 곳이 있을 리도 만무하거니와 여기서 헬스키친까지 가는 길이 곱지 않다는 건 누구라도 알 수 있다. 그냥 무시하고 혼자 보낼까 하다가 짧은 한숨을 내쉬고 조금은 그에게 휘둘려 보기로 했다. 


"네, 가요. 차는 어렵겠지만 헬스키친 쪽으로 데려다 드릴게요." 

"내 말이 맞죠?" 

"뭐가요?" 

"좋은 사람 같다고 했잖아요."


그의 말에 피식대고 웃음을 흘리자 그 역시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



그의 팔을 잡고 집으로 가는 동안 그는 가는 길이 어색하지 않게 끊임없이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횡단보도가 있을 때마다, 보도블록이 깨져 있을 때마다, 전방에 수상한 사람의 등장으로 길의 방향을 바꿔 걸어야 할 때마다 조용한 목소리로 안내를 하고 자신을 천천히 이끌어준다. 친절함이나 목소리나 모든 것이 참 아는 사람의 그것 같았다. 


"이상하네요." 

"네?"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잖아요." 

"... 그랬나요." 

"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는데 듣는 게 나쁜 건 아니죠." 

"네. 그렇죠. 그런데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건 예의가 없는 것 같은데요" 

"제가요? 하하, 아닐 겁니다. 만약 시선 때문에 그렇게 느낀 거라면 아시다시피 나는 앞이 안 보여서 그런 거니 오해 없었으면 좋겠네요." 


바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탓인지 그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작은 행동만으로도 많은 것을 읽어내고 알아차린다. 귀 기울이고 짧게 대답하는 사이에도 내가 다른 사람을 생각했다는 것을 눈치챌만큼. 천천히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그는 적당히 리액션을 하는 나를 틈틈이 바라보고 다시금 '피식'하는 웃음을 흘린다. 호감이 비치는 솔직한 심장소리가 듣기 좋았다. 외로웠던 지난 몇 달 간이 보상받는 기분이기도 했고. 


"여기에요." 

"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아니에요. 별거 아닌데요 뭐. 여기서 저희 집이 별로 멀지 않기도 하고. 뭐.. 뛰어가면 10분 안에 갈 것 같아요." 

"뛰어가지 말고." 

"음? 네??" 

"잠깐 쉬었다 갈래요?"


멈칫한 듯 자리에 잠시 굳어있던 그가 '흠' 하는 짧은 한숨을 쉬더니 먼저 계단 위로 한걸음 올라선다. 


"몇 층이예요?"



-



헬스키친의 많은 주택들이 그렇지만 그의 집은 그냥 그랬다. 변호사라고 하더니 그렇게 돈이 많은 것 같지도 않고, 앞이 보이지 않는 탓인지 집은 어둑했다. 그리고... 


"저거 설마 전광판이에요?" 

"하하. 네. 저거 때문에 집값이 다른 곳의 절반밖에 안되죠." 

"그러겠네요. 보통 사람이라면 정신병 걸리겠어요." 

"다행히도 저한텐 별 영향이 없고요." 


식탁 위에 선글라스를 내려놓는 그가 자신의 눈을 가리키며 장난스럽게 웃는다. 곱게 차려입은 정장 재킷도 벗어 식탁의자 위에 대충 올려놓은 그가 나를 향해 서서 무슨 말을 할 것처럼 하길래 천천히 그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 그 앞에 마주 섰다. 


"안 보이는 게 무기가 될 수도 있네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뭔가 사람이... 방심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요." 


그의 목선에 손을 올리자 그가 자신의 손을 올려 내 손을 겹쳐 잡는다. 환영의 의사표시가 분명한 그 몸짓에 그의 목선을 살짝 잡아당기며 입술을 마주했다. 그리고 아주 잠깐 마주했다 떨어지는 입술이 잘게 떨리더니 내 뒷목을 잡아끌어 당기며 깊게 빠지듯 진한 키스로 되갚아준다. 


"맞네." 

".... 뭐가요." 

"다른 사람이 있네요."

"그러면."

"네."

"안 할 건가요?" 


초점도 맞지 않을 거리만큼 가까워진 그가, 당장이라도 고갯짓을 하면 입술이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고개를 꺾어 내린 채 나를 향해 의사를 묻는다. 


"아니요. 해야겠어요." 


이유는 없고요. 저도 조금은 외로웠으니까요.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그의 넥타이를 잡아 풀며 더 진한 키스를 남겼다. 자세가 돌려지며 아일랜드 식탁 위로 몸이 걸쳐진다. 


"이름이 어떻게 돼요?" 

"하하. 이름 물어보기 참 좋은 타이밍이네요." 

"아, 빨리요." 

"맷, 매튜 머독. 그쪽은?" 

"네이트, 네이선 드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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