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and Iseult)는 중세 기사도 로맨스(Chivalric romance)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로, 12세기부터 여러가지 버전으로 구전되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콘월 지방의 기사인 트리스탄과 아일랜드의 공주인 이졸데(Isolde 혹은 Yseult 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간의 비극적인 사랑에 관해 그리고 있으며, 워낙 오래된 작품이라 전승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두 연인이 죽음이라는 결과를 맞이한다는 결론은 비슷합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1870년. Hugues Merle 작품.아일랜드와 콘월 지방의 영국 내 위치.


가장 흔히 알려진 전승의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자면, 콘월의 왕인 마크(King Mark)를 섬기던 용맹한 기사 트리스탄(각주 1)은 아일랜드의 모홀트(Morholt)라는 기사와 결투를 벌이다 그를 죽이게 됩니다. 이 싸움에서 독이 배어있는 칼에 상처를 입은 트리스탄은 이러한 상처를 고칠 수 있다고 알려진 아일랜드의 공주 이졸데를 찾아갑니다. 금발의 이졸데라고도 불리운 아름다운 공주는 뛰어난 치료사이기도 했습니다.

현대로 보면 일종의 의사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녀는 트리스탄이 자신의 약혼자이기도 한 모홀트를 죽인 사람인 것을 알았으나, 그에 내색하지 않고 그를 치료해줍니다. 현대의 의사들이 환자의 성멸, 신분, 국적, 인종 등을 가리지 않고 성심껏 치료한다는 의무를 지키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데, 이졸데 역시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트리스탄을 치료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금발의 이졸데. 1911년. Gaston Bussière 작품.


무사히 상처를 치료 받고 건강을 회복한 트리스탄은 콘월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이 때 이미 약간 둘 사이에 마음이 생겼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약혼자를 죽인 원수일지도 모르지만, 중세 시대의 약혼이란 가문 간의 약속이었으니 모홀트와의 사이에 별 다른 감정이 없었다면 직접 간호하며 돌본 트리스탄에게 마음이 싹 텄을 가능성도 있을테니까요.


어쨌든 트리스탄의 귀환으로 둘은 헤어지게 되었는데, 예기치 못한 이유로 둘은 다시 만나게 됩니다. 바로 콘월의 왕인 마크가 이졸데와 약혼을 하게 된 것이었죠. 그리고 자신의 약혼녀를 데려오는 중요한 임무를 자신이 믿고 아끼는 트리스탄에게 맡기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졸데와 마크가 사랑에 빠질 수 있도록 만든 사랑의 묘약(Love potion)을, 이졸데와 트리스탄이 마시고 서로에게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1912년. John Duncan 작품. - 아일랜드에서 콘월로 돌아오는 배 위에서 사랑의 묘약을 마시고 사랑에 빠지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이러한 불가항력적 사랑은 그리스-로마 신화 속 파리스와 헬레네의 사랑과 닮아 있죠.


트리스탄은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로서 자신의 주군인 마크 왕을 배신할 수 없었기에(공주인 이졸데 역시 정략혼인의 중요성을 알기에 사랑의 도피를 해버릴 순 없었겠죠), 이 사랑을 숨기고 그녀를 마크 왕에게 보냅니다. 그러나 둘의 사랑이 사라진 것이 아니기에, 마크 왕 몰래 밀회를 계속 갖게됩니다. 이러한 묘한 삼각 관계는 아일랜드 전설 중 하나인 디어뮈드와 그라니아, 그리고 핀막쿨 왕의 이야기와도 닮아 있습니다(각주 2). 지역이 가깝다 보니 약간씩 전승 내용이 영향을 받았지 않았을까 싶네요. 

두 얘기는 결론도 비슷하여 결국엔 젊은 연인들의 사랑이 남편이자 주군에게 들키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은밀한 관계 역시 마크 왕에게 발각되어버리죠.

트리스탄과 이졸데, 그리고 마크 왕. 1902년. Edmund Leighton 작품. - 두 연인의 밀회를 발견한 마크왕의 의심의 찬 표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후의 얘기는 전승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대체적으로는 이졸데는 마크 왕의 곁에 남고 트리스탄이 콘월 지방을 떠나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중세 기사도 문학에서는 기사와 귀부인 사이의 플라토닉한 애정 관계를 강조하다 보니 둘의 사랑의 순수함을 강조하는 의미로 이런 식의 헤어짐을 겪는 것 같습니다.


방랑기사가 된 트리스탄은 현재 프랑스 북부 지방의 브르타뉴(Bretagne) 지방으로 건너가, 호엘(Hoel 혹은 Howel) 왕을 모시게 되었고 그의 딸이자 금발의 이졸데와 동명이인인 '흰 손의 이졸데(Isolde, the White Hand)'라는 여성과 결혼하게 됩니다.

여기서 각자의 삶을 살았다면, 큰 비극으로 이어지진 않았겠으나 트리스탄에게는 또 한 번의 위기가 닥치게 됩니다. 길에서 6명의 무뢰배를 만나 곤경에 처한 여인을 위해 싸우다가(중세 기사도 문학다운 전개입니다), 적들의 칼에 배인 독에 또(!) 당하게 되어 죽을 위기에 처한 것이었죠.

이 신비한 독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독을 치료할 수 있는 자는 치료사로 유명한 금발의 이졸데 뿐이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녀를 부르기 위해 콘월 지방으로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트리스탄은 자신이 본의 아니게 배신하고 떠난 그녀가 와줄지 확신이 서지 않아 마음이 약해졌는지, 이졸데가 자신을 치료하러 와주면 '하얀 돛'을, 그녀가 오지 않는다면 '검은 돛'을 달고 와달라고 부탁하게 됩니다.

이 부분은 그리스-로마 신화 속 '파리스와 님프 오이노네 이야기'와 '테세우스의 아버지인 아이게우스 왕의 죽음'에 관한 비극적 전개가 섞여있는 것 같습니다.

파리스와 오이노네. 트로이 전쟁 당시 파리스가 독화살을 맞았을 때, 그 독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자 전부인인 오이노네는 파리스의 치료 부탁을 거절합니다. 결국 다시 그에 대한 사랑으로 뒤늦게 달려왔지만, 파리스는 숨을 거두게 되고 오이노네 역시 슬픔에 빠져 죽게 됩니다.테세우스가 미노타우르스를 무찌르고 돌아올 때, 아들의 무사귀환이 걱정되었던 아버지 아이게우스 왕은 테세우스가 무사하면 하얀 돛, 죽었다면 검은 돛을 달고 돌아오라고 당부하죠. 그러나 돛 색깔을 바꾸는 것을 깜빡한 테세우스의 실수로 인해 절망에 빠져 자살하게 됩니다.


이졸데는 자신을 두고 떠났던 트리스탄이 원망스러웠지만, 아직 남아 있던 사랑과 치료사로서의 의무감 때문인지 결국 브르타뉴를 향한 배에 몸을 실게 됩니다. 그러나 하얀 돛을 달고 오는 배를 본 '흰 손의 이졸데'는 질투심에 타오르게 됩니다. 남편이 오매불망 그리는 첫사랑이 온다는 생각에 불쾌한 기분이 들었을만도 하죠. 그래서 그녀는 아주 치명적인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돛의 색을 물어보는 트리스탄에게 '검은 돛을 단 배가 돌아오고 있다.'고 속삭인 것이지요.

그 말을 들은 트리스탄은 슬픔과 체념으로 기운을 잃어서인지 이졸데가 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리고 죽어버린 트리스탄을 발견한 이졸데 역시 슬픔에 빠져 그의 몸 위에 쓰러져 사망하게 됩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죽음. 1910년. Rogelio de Egusquiza 작품.


이 이야기는 전형적인 중세 기사도 문학 +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의 조합으로 오페라나 영화 등으로 다시 만들어져 상당히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 외적인 요소에 집중해보면 중세 시대 형태의 의사라 할 수 있는 '치료사'가 등장하는 이야기기도 합니다. 

스토리라인은 매우 다르지만, 의사와 군인(기사는 군인의 역할도 하니까요)의 사랑을 소재로 사용했던 이 드라마와도 아주 약간은 비슷한 느낌이 듭니다.


공주라는 지위를 가진 이졸데가 어떻게 의술을 익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직까지 중세 시대 마녀 사냥 등이 기승을 부리기 전의 시기여서, 드루이드 라든가 약초 지식이 뛰어난 여성들에게 전해내려오던 여러가지 민간 의학 지식을 접한 사람을 묘사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트리스탄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독에 대해서도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그리스-로마 신화 속의 '히드라 독'처럼 일종의 신화나 전설적인 요소일 수도 있지만, 중세 시대의 위생 상태 등을 고려해보면 지저분한 상태의 검이나 기타 무기에 당한 상처를 통해 세균 감염이 일어나 파상풍(각주 3)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졸데에게 현대와 같은 치료 약제나 면역 글로불인은 없더라도, 상처 부위의 감염 관리나, 화자가 겪을 수 있는 고열이나 탈수 상태 관리에 능했다면, 검에 의해 부상을 입은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에 능하다는 인상을 주었을 수도 있겠죠.

트리스탄과 이졸데. 1916년 경.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작품.


중세 시대를 살아가던 두 연인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현대에 살았다면 트리스탄에게도 생존 및 이졸데와의 재회라는 기회가 생겨났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흰 손의 이졸데'와 '마크 왕'이 받았을 마음의 상처는 어찌해야할지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각주 

1. 트리스탄은 마크 왕의 조카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아더왕 이야기에 나오는 기사 중 한 명으로 전해지기도 하며, 1400년대에 토마스 맬러리(Thomas Malory)에 의해 씌여진 [아서왕의 죽음]이라는 작품에서는 기사 란슬롯의 맞수처럼 그려지기도 합니다.

2. 핀막쿨 왕을 모시던 기사 디어뮈드는, 왕과 결혼하기로 되어있던 미녀 그라니아와 사랑에 빠져 사랑의 도피를 하는 등의 시련을 겪었고, 결국 핀막쿨 왕에게 어느 정도 용서 받아 기사단으로 돌아왔으나, 디어뮈드가 크게 다쳤을 때 핀막쿨 왕이 치료해주지 않아 사망하게 됩니다.

디어뮈드와 그라니아 이야기를 묘사한 동상.

3. Clostridium tetani라는 균에 의해 감염되어 발생하는 감염 질환으로, 세균이 만들어내는 독소에 의해 신경에 이상을 유발하여 근육 경련, 호흡 마비 등을 일으키는 질환입니다. 적절한 치료를 하지 않으면 사망에 이를 수도 있는 병이죠. 항생제인 메트로니다졸과 파상풍 면역 글로불린 치료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파상풍 예방 접종을 맞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야기 읽는 의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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