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검난무 히게키리X히자마루 (겐지형제)

* 사망 네타 주의 / 화이트 혼마루 

*후회와 반성의 히게키리


====================================================================


초겨울을 앞둔 아침 공기가 두 뺨 위로 차갑게 내려앉았다. 천정에 드리워진 문살의 그림자가 번져서 흐릿했다. 멀어졌던 감각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습관처럼 그림자의 개수를 세었다. 늘 10을 넘기지 않던 숫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며 어느 새 마지막 그림자의 차례가 되었다. 장지문은 열리지 않았다.

유난히 긴 복도를 지나 식당으로 향했다. 식(食)은 사람의 육신이 가져다 준 즐거움이자 족쇄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히게키리를 부엌에서 나오던 미츠타다가 반겼다.

“히게키리 왔어? 안 그래도 마중가려던 참이었는데.”

“하하, 늦어서 미안해.”

구석자리에 앉는 그에게 미츠타다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고는 부엌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 히게키리의 앞에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아침 식사가 펼쳐졌다.

“…건너편에 앉아 있을까? 혼자 먹기 그렇잖아.”

“괜찮아. 신경 쓰지 말고 할 일 해.”

트레이를 내려놓은 미츠타다가 탁자 건너편에 앉으며 말했다. 그의 호의는 고마웠지만 사람 숫자에 따라 음식 맛이 바뀌는 것도 아니었다. 거절당한 것이 민망한 걸까, 미츠타다는 작게 어깨를 움츠렸지만 곧 빙긋 웃어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뜻한 밥,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생선, 야채 절임과 두부. 소박하고 든든한 아침 식사 메뉴였다. 잘 먹겠습니다, 작게 인사를 마친 그는 천천히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

젓가락 끝에서 두부가 부스러졌다. 간장 종지가 멀어서 식사 도중에 몸을 일으켜야 했다. 말없이 먹은 탓일까, 평소보다 빨리 가벼워진 접시와 달리 위장은 묵직했다. 역시나 손끝에서 한 뼘 먼 찻주전자를 끌어 당겨 빈 잔을 채웠다. 뜨거운 열기가 물씬한 찻잔을 무심코 잡았다가 얼른 손을 놓았다.

빈 그릇을 정리해서 부엌으로 가져다주자 설거지를 하고 있던 미츠타다가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았다. 짧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방으로 돌아섰지만 복도는 올 때보다 더 길어진 것 같았다. 무거워진 위장이 마치 가슴께에 돌을 매달아놓은 것 같았다.

방으로 돌아와서 쉬면 조금 나아질 거라 생각했지만 한 시진이 흘러도, 하루중 그림자가 가장 짧은 시각을 지나도 몸은 그저 무거울 따름이었다. 오랜 원정과 전투의 피로가 한꺼번에 쏟아진 걸까, 테이블에 엎드려 문종이 너머 흐릿한 햇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꺼풀이 내려갔지만 어깨가 시려서 잠이 들 수 없었다.

“히게키리. 안에 있나?”

“……응. 들어 와.”

그렇게 잠든 것도 깬 것도 아닌 채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히게키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매무새를 가다듬는 사이 장지문이 열리고 손님들이 들어왔다. 세 도검의 모습에 히게키리의 눈썹이 가볍게 움직였다.

“미카즈키. 톤보기리와 호타루마루까지, 어쩐 일이야.”

이미 그들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면서도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세 도검도 마찬가지였던 듯 말없이 그의 앞에 단정한 자세로 앉았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미카즈키였다.

“히자마루를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 부대장인 나의 불찰이었다.”

뒤이어 톤보기리와 호타루마루도 고개를 숙였다. 예상대로의 전개였지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나마 어린 톤보기리라면 몰라, 미카즈키와 호타루마루라면 도검의 운명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터였다. 정중하게 사과하는 그들을 향해 히게키리의 말이 이어졌다.

“사과할 필요 없어.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지만 전장에서 살고 죽는 것이 도검의 본분. 주인을 지키고 동료를 지키는 최후라면 동생도 후회는 없을 거야. 신경 써 주는 것은 고맙지만, 죄책감을 갖지는 않았으면 해.”

“히게키리…”

여기서 그들을 나무란다고 해서 이미 일어난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자신들은 도검의 츠쿠모가미가 사람의 육신을 얻어 현현한 존재, 사니와의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부러진 칼을 용광로에 담궈 똑같은 칼을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형태가 있는 것은 언젠가 부서지기 마련, 그 날이 동생에게는 조금 빨랐던 것뿐이야. …그렇지 않나, 미카즈키?”

“……그렇게 서두를 것은 없었는데 말이지.”

미카즈키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엇갈린 마음은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인사를 마친 셋은 히자마루의 흔적이 잔뜩 남은 방을 뒤로 했다.

 


히자마루가 꺾인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 사이 케비이시의 공격을 받은 도검남사들의 상처는 회복되었고, 극심한 기력 소모로 쓰러졌던 사니와도 의식이 돌아왔다. 누가 먼저라도 할 것 없이 연신 흘러나오던 한숨의 숫자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전장을 살아가며 한 번쯤은 겪을, 아니 이제까지도 수없이 겪어 왔던 일이었다. 끝나지 않을 싸움 앞에서는 슬픔에 머무를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히게키리의 생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깊고 어두운 물에 빠졌다 건져내어지는 것처럼 눈을 뜨고, 여러 모로 불편한 식사를 마치고, 방에서 느긋하고 지루한 휴식을 취하다 가끔 하염없이 길고 밋밋한 복도를 지나 수련을 하러 갔다. 다정하고 신뢰할 수 있는 동료들은 자신을 금방이라도 곪아 터질 것 같은 상처처럼 다루었고, 역시나 맛있고 위장이 무거워지는 식사를 한 다음 방으로 돌아왔다.

천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오며 대부분의 일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동생을 아끼는 마음은 있었지만, 역시 오랜 세월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내려놓은 부분도 있었다. 이름이든 존재든 누군가가 기억해 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생각했다. 잃어버리는 것에는 익숙할 대로 익숙했다.

차라리 전투가 있었으면 나았을까, 그렇게 기다렸던 휴식은 느릿느릿 기어갔고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너무나도 아무 일이 없어서, 히게키리는 동생이 멀리 원정을 간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형님!”하고 장지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을까, 어깨가 식어서 굳을 때까지 기다려봤지만 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왓!”

“꺅!”

툇마루에 앉아서 멍하니 정원을 보던 히게키리의 등 뒤에서 괴성이 들려왔다. 정원에서 동백꽃 잎을 닦고 있던 미다레가 비명을 질렀지만 정작 히게키리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야, 츠루마루. 깜짝 놀랐잖아.”

“아니, 전혀 놀라지 않은 것 같은데…”

새하얀 도검이 재미없다는 듯 입을 비죽거리고는 그의 곁에 나란히 앉았다. 츠루마루가 말을 이었다.

“요즘 식당에 잘 안 보이더라? 밥 제대로 먹고 있지?”

“음… 기분 내키면?”

어차피 전투도 없는 나날들, 몇 끼 먹지 않는다고 어떻게 될 정도로 유약한 몸은 아니었다. 가볍게 대답하는 그에게 츠루마루가 과장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허- 싸움의 기본은 배를 채우는 것부터잖아. 겐지의 무사도는 어디로 갔나?”

“무사도라는 것은 식사 하나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게 아니야.”

혼마루 최연장자에 해당하는 두 도검의 철없는 입씨름을 듣고 있던 미다레가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그 모습에 따라 입꼬리를 올리자 뺨의 근육이 찌르르 떨려왔다. 혀를 씹은 것도 아닌데 무슨 일이지, 뺨을 만져보았지만 상처가 난 것도 아니었다.

“왜 그래?”

“음… 뺨이 조금 당기는 거 같아서.”

갑자기 얼굴을 만지는 히게키리에게 츠루마루가 물었다. 대답하는 사이에 떨림은 멈추었지만 위화감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곰곰이 상황을 되짚어보던 히게키리는 곧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웃었군.”

“…….”

그러고 보니 요즘 스스로의 얼굴이 어땠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원래부터 감정을 격하게 드러내는 편도 아니었고, 전투도 없었으니 그저 평화롭고 온화한… 그런 얼굴이었겠지. 화를 내거나 슬퍼하거나 즐거워했다면 동료들이 다른 반응을 보였을 것이 틀림없었다.

“할 일 없어서 심심하지? 그럼 대련장에 가서 애들 좀 봐 줘. 휴가가 끝나면 바로 전선 복귀해야 하잖아.”

“…그래, 어디 선배가 상대가 되어줄까.”

특별히 해야 할 일도 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를 향해 츠루마루가 활짝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이 조금 눈부셔서, 히게키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따라 웃었다. 왼 뺨이 찌르르 떨려 왔다.

 

대련장에는 긴 휴가의 끝을 앞두고 몸을 풀러 온 도검남사들로 가득했다. 지금은 사람의 육신을 얻고 현현했다 하여도, 결국 본질은 모두 도검. 전장으로 돌아가는 것이 은근히 반가운 남사들이었다.

“히게키리!”

오랜만에 모습을 나타낸 히게키리의 모습에 수련을 하고 있던 도검남사들이 반갑게 인사했다. 이마노츠루기가 쪼르르 다가와 말했다.

“히게키리,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푹 쉬었어요?”

“응, 조금 오래 쉬고 왔지?”

느긋하게 대답하는 그의 모습에 건너편에 있던 이와토오시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이마노츠루기의 말이 이어졌다.

“오늘은 무슨 일이에요?”

“츠루마루가 후배들 상대 좀 해 달라고 그래서.”

“와! 그럼 나랑 같이 놀아요!”

꼬마 텐구가 눈을 빛내며 히게키리의 팔에 매달렸다. 빈손을 뻗어 반짝이는 은빛 머리칼을 쓰다듬자 기분 좋은 듯 눈을 가늘게 뜨고 헤헤 웃었다. …겹쳐지는 흐릿한 그림자에 명치부근이 뻐근해졌다.

“…히게키리?”

“아무 것도 아니야. 자, 뭐 하고 놀까?”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것을 느낀 히게키리는 가볍게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화제를 바꾸었다.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만 생각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둘이서 시작한 수련 겸 놀이는 어느 새 한 손으로는 모자라는 수만큼 불어났다. 한참을 뛰어다니던 소년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이, 히게키리 앞에 두 자루의 도검남사가 섰다.

“헤헤- 오늘은 안 봐 줄 거야.”

“가, 갑니다…!”

여유 있게 손잡이를 돌리는 우라시마 코테츠에게 고코타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마주했다. 뭔가 조금 바뀌었다 싶더니, 고코타이를 따라다니는 호랑이가 꽤나 커졌다. 휴가기간 동안 수행을 다녀 온 모양이었다. 아군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실력을 검정하려 드는 것은 도검으로서의 본능이었다. 히게키리가 외쳤다.

“양자(兩者) 진중하게, 시작!”

“이야앗!”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고코타이였다. 기동성이 좋은 단검인 고코타이에 비해 와키자시인 우라시마는 상대적으로 동작이 둔해 보였다. 강점을 살린 초반 공세에 우라시마는 방어 태세에 접어들었다.

“…으랴앗!”

단검과 비교하여 내구성이 높은 와키자시지만, 그 중 우라시마 코테츠는 특히 방어에 특화된 검이었다. 고코타이의 맹공을 버텨내며 차분히 기회를 기다린 우라시마가 마침내 돌아온 찬스를 놓치지 않고 반격을 가했다.

“앗!”

“…거기까지!”

우라시마 코테츠의 목검이 고코타이의 목덜미에 멈추며 히게키리가 종료 선언을 했다. 양쪽 다 자신의 강점을 살린 전술이 돋보이는 훌륭한 대련이었다. 기분 좋게 웃는 우라시마와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고코타이를 앞에 두고 히게키리의 총평이 이어졌다.

“고코타이는 기동성을 살린 초반 공세가 훌륭해. 다음에는 상대와의 거리감을 생각해서 완급을 두면 더 입체적인 공격을 할 수 있을 거야.”

“…네!”

“우라시마는 상대의 공격에 성급하게 응수하지 않고 기다려서 찬스를 만든 것이 좋았어. 하지만 이 전술은 공격력이 높은 태도나 창에게는 적용하기 어려우니 상대에 맞춰서 운용하도록 해.”

“알았어!”

두 도검도 대련의 결과에 만족한 듯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단검들의 대련을 봐 주던 츠루마루가 히게키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둘 다 자신의 강점을 잘 살린 전투였어. 수고 많았어.”

“아…”

지도를 마무리하는 히게키리의 말에 고코타이와 우라시마 코테츠의 표정이 굳어졌다. 대련장에 들어왔을 때 느꼈던 흐릿한 기시감이 선명하게 다가오며, 상황과 말이 퍼즐조각처럼 맞춰졌다. 고코타이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물기로 부풀어 올랐다.

“아… 죄, 죄송해요…”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가렸지만 이미 바닥을 친 분위기를 되살릴 수는 없었다. 그 둘이 지금 누구를 떠올리고, 누구를 겹쳐 보고 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허파 속에 차가운 바람이 한 줄기 흘러갔다. 명치가 저릿저릿 아팠다.

“…아니야, 동생의 말을 잘 기억하고 열심히 훈련해 줘서 고마워.”

“……히게키리.”

가까이 다가온 츠루마루가 낮게 이름을 불렀지만 그의 귀에는 닿지 않는 것 같았다. 머뭇거리는 두 도검을 먼저 돌려보낸 츠루마루가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히게키리.”

“……츠루마루.”

이번에는 목소리가 닿은 듯 히게키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등자열매색 눈동자에 비치는 것이 현실인지 추억인지 알 수 없어서 츠루마루는 선뜻 말을 잇지 못했다.

“…저녁은 나중에 먹을게. 방에 가서 쉬고 싶어.”

“……알았어.”

말을 마친 그가 등을 돌리고 대련장 밖으로 사라졌다. 혼자 있는 것보다 다른 도검들과 어울리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부른 건데, 낭패였다. 엎질러 진 물을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굴러간 결과에 츠루마루는 머리를 긁적이며 크게 한숨을 내 쉬었다.

 

흐린 그림자처럼만 남아있던 그의 흔적이, 그 순간을 경계로 나날이 선명해져갔다. 아침이 와도 열리지 않는 장지문이 싫어서 하루 종일 방 밖으로 나가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혼자 마시는 차가 너무 써서 차를 마시게 않게 되었다. 츠루마루와 미츠타다가 데리러 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식탁 앞에는 앉았지만 음식에서 무슨 맛이 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무엇을 해도 빈자리만 보였다.


“그동안 다들 푹 쉬었지? 내일부터 다시 잘 부탁할게.”

“맡겨 둬, 대장.”

사니와의 말에 야겐 토시로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정부가 준 한 달의 휴가는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마디가 불거질 만큼 앙상했던 사니와의 손에도 혈색이 돌아오고, 도검남사들의 기력은 충만했다.

“내일 출진은 에도의 신바시다. 제 1 부대 구성을 발표하겠다. 대장은 오테기네.”

“에, 행렬의 맨 앞에 서면 되는 거야?”

근시 츠루마루의 발표에 오테기네가 되물었다. 자신이 대장이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츠루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7 지역에선 창의 역할이 중요하니까. 이어서 부대원은 이시키리마루,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 히게키리.”

“아아, 모두를 서포트하면 되는 거지?”

미츠타다가 대답했다. 이어서 제 2 부대와 원정부대, 내번 담당자의 발표가 이어졌다. 오랜 휴식 뒤의 업무 발표라 사니와도 근시도 좀 더 신경써서 배치한 티가 났다.

“히게키리.”

작전 회의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히게키리를 사니와가 불러 세웠다. 주인의 부름에 발걸음을 멈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출진, 괜찮겠어?”

무엇이 괜찮은지에 대해 묻는지는 명확했다. 히게키리 스스로도 자신의 상태가 평소와 같지 않다는 것은 인식하고 있었다. 주인의 배려는 고마웠지만 그는 도검이었다.

“물론이야. 맡겨 둬.”

“조심해서 다녀 와.”

사니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히게키리는 고개를 끄덕여 주인을 안심시키고는 멈추었던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뺨을 스치는 바람에서조차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적과 아군이 뿜어내는 열기에 차갑게 식어있던 심장이 잃어버린 속도를 찾아갔다. 일본도 특유의 묵직한 금속성이 귓가를 때리고 피비린내가 비강을 채우며 전신의 감각에 날이 섰다. 이것이 전장이었다. 여기야말로 히게키리가 천년이란 세월을 보낸 곳이고, 또 앞으로 살아갈 곳이었다.

“어서 와. 수고 많았어.”

게이트가 열리고 혼마루로 복귀한 제 1 부대를 사니와가 맞이했다. 결과 보고서를 체크한 츠루마루가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와- 이건 진짜 놀랍군. 부상자 없음, 장비 파괴수 2, 옥강 1200에 여행복까지 확보했어.”

“강적들이 많은 지역으로 알고 있는데, 정말 굉장하네.”

제 7지역, 에도는 역사수정주의자들의 공세가 특히 격렬한 구역으로, 장비 파괴나 경상을 입는 정도의 피해는 다반사로 일어났다. 부상자가 없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굉장한 결과였지만 자원까지 최대로 확보한 제 1 부대에게 사니와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의 호마레는, 히게키리. 보스전에서 회심의 일격이 돋보이는군.”

“히게키리, 수고했어.”

사니와의 말과 함께 부대원들이 작게 박수를 쳐 주었고, 히게키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 답례를 했다. 히게키리에게는 오늘 활약의 보상으로 내일 하루 다시 휴식이 주어졌다.

 

방 안의 가라앉은 공기가 장지문이 열리며 느릿느릿 흔들렸다. 아침에 펴 둔 채 나간 이부자리가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검을 걸고 테이블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렴풋이 걸려있던 미소가 지워지고 밋밋한 가면 같은 표정만이 남았다.

전장에서의 활약도, 주인의 칭찬도 분명 기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왜 이렇게 모든 것이 멀어 보일까. 마치 두꺼운 유리벽이 눈앞을 가로 막고 있는 것처럼, 무디고 흐리게만 느껴졌다.

돌아와도 아무도 맞이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좋은 일이 생겨도 함께 기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방은 온기라고는 하나 없이 너저분했다. 나란히 겹쳐진 찻잔 위에는 먼지만 뽀얗게 내려앉았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마음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몸속에 겨울바람이 부는 것처럼 시렸다.

그 때, 썩은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악취의 원인을 찾아 방을 둘러보던 히게키리의 시선이 도코노마에서 멈추었다. 작은 화분 위에는 말라비틀어진 줄기가 쓰러져있었다. 한 때는 분명 탐스러웠을 노란 꽃뭉치가 산산조각 나서 갈색으로 물들어있었다. 이제까지 몰랐던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 형님의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야. 곧 국화가 필 것 같은데, 그 때는 화분으로 가져올게. ]

어디선가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을에 접어들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가을이 다 지나고 나서야, 그가 자신의 곁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주변의 풍경이 부풀어 오르며 물방울이 뺨 위를 굴러갔다. 이제야, 이제서야 완전히 깨달았다. 동생이 자신의 곁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무뎌진 줄 알았던 것은 사실은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썩어서 악취를 풍기고 있던 것은 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었다. 이제까지 몰랐던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온 몸이 떨렸다. 추워서 견딜 수 없는데 뺨을 적시는 눈물만이 뜨거웠다. 동생을, 히자마루를 보고 싶었다. 히게키리는 혼자였다.


조아라에서는 '카즈메'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잡식계 사회인덕

노란새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