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장, 이상하네.”


고든은 뒷목에 손을 얹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뭐가 이상한데?”


앞에 앉은 블록이 고든에게 물었지만, 그는 주변을 살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답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혼잣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이상한 날이었지만, 이 낯선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단어를 고르고 또 골랐다. 똑같은 사람들과 똑같은 장소 그리고 동료 경찰들의 손에 끌려오는 범죄자들. 평소와 다를 거라고는 하나도 없었음에도 오늘따라 묘한 이질감에 이상하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냥,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 들어서요.”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한 척 대답했지만, 그 기분 나쁜 이질감을 떨칠 수는 없었다. 그런 기분을 잠시나마 풀어주기라도 할 것처럼 전화벨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블록은 현란한 손짓을 하며 받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고든이 복잡한 그의 신호를 읽지 못한 것처럼 느껴지자 다급한 목소리로 그가 외쳤다.


“오늘 데이트가 있다고 했잖아. 받지 마. 다른 사람에게 넘기라고.”


고든이 입꼬리를 올리며 짓궂은 얼굴로 전화를 받아 들자 블록은 대놓고 들으라는 듯이 욕을 내뱉었다.


“네, GCPD의 짐 고든입니다”


“젠장, 고든!”


요란한 전화벨소리의 뒤에 이어진 건 요란한 목소리였다. 울다 지쳤는지 불안정한 숨소리 때문에 단어와 문장을 제대로 알아듣기 어려웠으며, 잔뜩 목이 쉰 목소리가 고든의 귀를 찢어놓을 것처럼 날카로웠다. 그가 제대로 알아들은 거라고는 ‘도와주세요.’와 ‘실종’ 그리고 ‘고담시립극장 말뿐이었다. 더 이상 수화기를 들고 있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판단한 고든은 습관대로 혀끝까지 밀려온 ‘천천히 말씀해주세요.’ 가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도록 입을 닫았다. ‘누군가가 죽을지도 몰라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찢어질 듯한 목소리를 뒤로한 채 당장 가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고담시립극장. 가죠.”


“젠장, 고담시립극장? 젠장. 전화 받지 말랬잖아.”


그곳만은 가고 싶지 않다고 언성을 높이자 고든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왜 가기 싫은데요?”


“뻔하지. 이번에도 누가 사라졌다며 죽을지도 모른다고 그래?”


“어떻게 알았어요?”


“그 사건이라면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가 알 걸? 그 사건이라면 진절머리가 난다고. 마침 저기 오네.”


블록은 손가락을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오는 니그마를 불렀다.


“에드, 에드!”


소리를 듣고 그는 싱긋 웃으며 빠르게 계단을 내려왔는데. 한 손에는 파일 철을 안고 있었으며, 반대편 손으로는 ‘?’모양이 그려진 머그잔을 들고 있었다.


경찰서 안에서는 오래전부터 과거의 사건에 대해 궁금한 것이 생기면 사람들은 늘 니그마에게 물어보라는 말이 있었다. 그가 모르는 사건은 극히 드물었으며 물어보면 사건 파일을 넘겨본 것처럼 세세한 부분까지, 혹은 사건 파일에도 적혀 있지 않은 부분까지도 놓치지 않고 대답을 해주었다. 하지만 한번 시작하면 멈출 줄 모른다는 것이 그의 단점이었기에 누구도 그에게 사건에 관해 묻는 것을 꺼렸다. 가끔 신입이 들어오는 날이면 그에게 사건에 관해 묻는 이른바 ‘신고식’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좋은 오후입니다. 문제 하나 내도 될까요?”


“그보다 3번가에 위치한 고담시립극장의 실종사건에 대해 알아?”


니그마는 블록의 질문에 입꼬리를 힘껏 끌어올리고는 안경을 가볍게 올렸다.


“유명한 사건이죠. 3년 전부터 꾸준하게 실종 접수가 진행되고 있는 사건입니다. 그중 어떤 사건에 대해 찾으시죠.”


“전부! 아마 짐은 그걸 들을 시간이 충분해 보이거든.”


그의 시선이 고든을 향하자 어색하게 웃었다. 신고식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미 충분히 그의 ‘명성’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블록을 쳐다보자 그는 대충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하비 선배!”


젠장. 니그마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욕을 내뱉었지만, 아마 들었어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고든은 시선을 다시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중요한 정보는 가면서 듣지?”



*

극장까지는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었다. 걸어서도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고, 차로 가는데도 왜 이렇게 멀게만 느껴지는 건지.


“문제 하나 내도 될까요?”


“오, 사건에 관해 이야기한다고 하지 않았어?”


“맞아요! ‘고담시립극장 실종사건’의 가장 큰 오류는 실종사건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왜 오류지?”


“물론 시작은 실종사건이었지만 끝엔 대부분 시신이 나왔으니 실종이 아니죠.”


니그마는 고든의 귀를 가만히 쉬게 두지 않았다. 연신 즐거운 얼굴로 정확한 날짜까지 읊어가며 사건에 대해 말해주고 있었다.


“첫 사건은 3년 전 9월 첫 날 일어났어요. 9월의 공연을 앞두고 주인공 역할 맡은 사람이 실종되었죠. 대타가 대신 공연에 참여했고, 그 대타는 지금 고담 시를 대표하는 배우가 되어있어요. 그 날 고담 신문에는 이렇게 실렸죠. ‘대타 배우 스미스의 위기대처 능력으로 공연을 살리다.’ 재미있는 제목 아니에요? 아! 고담 시 전역을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없던 실종자는 고담 항 근처 창고에서 발견되었어요. 싸늘한 시체로요. 용의자는 세 명. 연출자, 상대 배우, 그리고 대타 배우였어요. 하지만 공연 관계자 전부 알리바이가 있었고,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죠. 다음 실종자는 1월에 있던 공연이었죠.”


극장의 모습이 멀리서 보이자 고든은 두 번의 감사 인사를 올렸다. 첫 번째로 믿지도 않는 신에게, 두 번째로 평소 좋아하지 않는 극장에게. 기분 나쁜 극장이 감사하게 여겨질 줄이야. 고담시립극장은 허름한 낡은 극장을 신축시켜 겉모습은 반지르르하고 화려하게 지었다. 리가 이곳에서 공연을 보는 것을 좋아해서 종종 오고는 하지만 고든은 좋아하는 장소는 아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불쾌해졌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드릴까요?”


극장 앞에 차를 세우고 내리자 니그마가 웃으며 고든의 옆에 붙어 섰다.


“이곳에 극장이 세워지기 전에 이곳은 정신병이 있는 범죄자를 가둬두는 곳이었어요. 지금의 아캄과 같은 곳이었죠. 그 수가 감당되지 않자 이곳에서 사형했어요. 늘 같은 일상이 지루했는지 그들을 ‘고문’을 하여 죽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만, 사실인지는 확인된 바가 없죠. 재미있는 이야기죠?”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자신이 왜 이 건물을 보기만 해도 소름 끼치고 싫어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리고 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부 중앙에 금으로 보이는 사슴 머리가 덩그러니 걸려 있었는데, 고든은 올 때마다 그 사슴 머리가 금으로 되어있음에도 사실적으로 보여 기분이 나쁘다고 생각했었다.


“고든, 재미있는 문제 하나 낼까요?”


뒤따라오던 니그마가 검지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늘 그렇듯 대답은 중요하지 않았다.


“노루가 다니는 길을 뭐라고 할까요?”


“에드, 지금 그럴 시간이.”


“정답! 노르웨이요.”


“하, 하. 그래 재미있군. 그래서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고?”


“오! 네. 3년 사이에 실종자 수가 31명이지만 범인은 아직 단 한 명도 잡히지 않았어요. 지금까지 용의자로 거론된 사람만 해도.”


“충분히 들은 거 같군. 범죄 수법은?”


“전부 달라요. 시신을 묶은 매듭의 방법, 유기한 방법 그리고 자주 쓰는 손까지도요. 만약 동일범이라면 똑똑한 사람일 거예요.”


어색한 미소를 얼굴 가득 띄우며 고든은 안내데스크로 걸어갔다. 안내 데스크 옆에는 공연 안내에 대한 포스터가 걸려 있었고 노란 포스터 위에 붉은 글씨로 크게 ‘취소’라고 적혀 있었다. 그 옆에는 작은 팜플렛이 배치되어있었는데, 살펴보려던 고든은 그 위에 놓여있는 카드 한 장을 들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카드로 클럽 A, 뒷면엔 글씨가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2. 의심의 끝에서 진실을 이야기하는 자는 누구일까. 당신은 속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카드를 뒤집어도 보고 하다가 재킷 안쪽 주머니에 넣으며 오늘 극을 올릴 예정이었던 공연 팜플렛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무대에 오를 배우들의 얼굴이 인쇄되어 있었는데, 그 아래는 작게 이름이 적혀 있었다.


[노라 쿠퍼(조연)

이사벨라 시먼스(주연)

조지 반스(주연)

마이클 헨더슨(조연)

에이미 밀러(조연)]


벽에 걸려있는 포스터와 달리 주연배우가 맨 위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 조금 이상했지만, 경력 차이라고 생각했다.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팜플렛을 들어 뒤집었다.


“오늘 공연은 취소되었습니다.”


바로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숨기기라도 하는 듯이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깔끔하게 머리를 올려 묶은 여자는 안내데스크로 걸어 들어가 자리에 앉아 잔뜩 인쇄된 서류를 체크하고 있었다. 공연에 대해 문의가 오는 것이 흔한 건지, 아니면 취소되는 일이 흔한 건지 태연한 모습이었다.


“GCPD입니다. 실종사건에 대한 신고를 받고 왔는데요.”


재킷 안쪽에서 꺼내 든 신분증에 자리에 앉아 있던 그녀가 고개를 힐끔 들어? 정확히는 눈동자만을 움직여? 신분증을 확인했다. 알 수 없는 민망한 시선에 고든은 어깨를 으쓱하며 신분증을 재킷 안 쪽 제 자리를 찾아 집어넣었다.


말 없이 손 끝으로 가리킨 곳을 보고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건넸다. 사람이 실종되었다는데 놀라는 기색 하나 없다니. 고든은 옆에 있어야 할 니그마가 보이지 않자 한 바퀴를 돌며 그를 찾았다.


“오, 젠장. 에드! 함부로 만지지 마.”


언제 저기까지 간 건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것 같은 어느 ‘짐승’의 동상을 니그마는 손끝으로 찔러보고 있었다.


“저 동물은 무슨 동물일까요.”


“에드!”


“정답, 해치예요. 고대 중국의 상상 동물이죠.”


“와, 신기하군. 이쪽으로 가지.”


무미건조한 대답을 하고는 안내원이 가리킨 문 쪽으로 걸어갔다. 니그마는 들뜬 얼굴로 문에 붙여진 작은 푯말을 가리켰다.

“이것 보세요! 관계자 외 출입금지래요.”


[관계자 외 출입금지.] 하얀 플라스틱에 빨간 글씨로 적혀 있었지만, 오래되었는지 글씨가 흐릿하게 보였다. 그 플라스틱 푯말 주변에는 접착제를 여러 번 발랐는지 누런 자국도 보였다. 아마 신축된 직후에 붙여 놓은 푯말은 몇 번이고 중력의 법칙에 따라 땅으로 떨어졌으며, 지금은 접착제의 힘을 빌려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고 있었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 저희는 관계자일까요? 아닐까요?”


니그마는 이것이 중요한 문제라도 되는 듯이 안경 너머에 있는 눈동자에 가득 흥미로움을 담고 있었다.


 “경찰이 관계자가 아닌 곳도 있나.”


“그럼 정답은 관계자라는 거네요.”


고든이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자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고든이 못 들었을 리 없었지만, 그는 못 들은 척하고 싶었다. 그의 말에 하나하나 대답을 해주면 끝이 없을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지금보다 더 피곤해질 걸 잘 알고 있었다. 어쩌다 니그마와 이곳에 같이 오게 된 건지, 고든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문 안쪽에는 긴 복도가 이어졌으며 문마다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아마 출연진의 대기실일 것으로 생각하며 가까이에 있는 ‘이사벨라’라고 적힌 문에 노크하려는 순간 안쪽에 있는 문 너머 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으로 걸어가려고 하는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고든의 귀를 두드렸다.


“아, 수수께끼 카드 받으실래요?”


수수께끼 카드. 고든은 장난칠 기분이 아니었다.


“에드.”


그의 이름을 머물기 무섭게 니그마는 입꼬리를 최대로 끌어올리며 코앞까지 카드를 내밀었다.


“자리에 놓여 있길래 가져왔어요.”


“내 자리에?”


“네.”


그걸 왜 이제 말해, 소리칠 기운도 없었다. 그를 노려보는 것만으로 그 말을 전했다 생각하고는 카드를 받아들였다. 검정 종이봉투로 되어있어서 내용물을 전혀 확인할 수 없었다. 대충 봉투를 찢고 안을 들여다보자, 작은 카드 한 장이 들어있었다. 스페이드 J 카드 뒷면에는 종이를 오려 붙인 듯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타자기로 친 듯한 글씨는 잉크가 완전히 마르기도 전에 붙였는지 종이에 약간의 잉크가 번져 있었다.


[1. 딸그락, 완전 범죄의 열쇠.]


인상을 쓰며 그 카드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봉투에서 나온 금속 물체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될 것 같은 작은 열쇠를 들어 올리고는 살펴보다가 일단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다시 손안에 든 카드를 빤히 쳐다보며 그 문장을 몇 번이고 입안 가득 담았다가 내뱉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은 일명 ‘수수께끼의 천재’와 함께 있지 않은가. 그 카드를 니그마에게 건넸다.


“네 생각은? 뭘 말하는지 알겠어?”


그는 환하게 웃으며 그 카드를 받아들였다. 그의 웃음을 보고 있으면 어딘가 꺼림칙한 느낌을 받았지만, 지금의 고든에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저 열쇠로 여는 곳에 완전범죄를 풀 수 있는 단서가 있다는 거 아닐까요? 그리고 1이라 적힌 거 보니 2도 있을 거 같아요.”


“2라면 이미 있지.”


주머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건넸다. 적힌 문구를 소리 내서 읽은 니그마가 싱긋 웃었다.


“카드를 모아봐요.”


“됐어. 카드놀이 하자고 여기에 온 거 아니니까. 누가 이런 장난을 하는 건지.”


미궁으로 빠지는 순간이었다. 누군가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고든은 어깨를 으쓱 이고는 재킷 안쪽에 카드를 집어넣으며 소리 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기 전 고든은 니그마에게 대기하라는 손짓을 하고 총을 꺼내 든 뒤 문을 열었다.


문 너머의 사람들은 고든이 왔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공연관계자로 보이는 사람들? 몇몇 얼굴은 익숙했다.? 이 무대 뒤에 모여서 이미 결론이 나온 문제를 가지고 아직도 싸우고 있는 듯 보였다. 공연을 취소하면 안 된다는 입장과 이미 환불까지 마쳤다는 입장, 두 입장은 곧 끊어질 듯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총을 집어넣고는 고든은 재킷 안쪽에서 신분증을 꺼내 펼쳤다.


“GCPD입니다.”


그 말에 모든 사람이 입을 닫고 표정을 굳힌 채로 고든을 쳐다봤다.


“어떻게 알고 오셨죠?”


“신고 전화를 받았어요. 실종사건이 있다고 해서요.”


사람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눈치를 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며 어딘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고든은 이런 분위기가 익숙하기라도 하는 듯 태연하게 그들에게 다가갔다.


“누가 실종되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누가 신고했어?”


그 자리에 있던 여자가 낮은 음색으로 물었다. 당찼지만 어딘가 떨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싸늘해졌고, 사람들은 그녀의 눈치를 보며 제자리로 흩어져 할 일을 찾으려고 했다.


“연출이에요.”


연출이라고 밝힌 ‘줄리아’라는 사람은 웃음기 하나 없이 고든을 올려다보다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를 했다.


“왜 신고를 하면 안 된다는 듯이 말한 거죠?”


“소란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요. 스캔들은 우리 쪽에서 심각한 문제가 되기도 하고요. 아마 인턴이 주연배우가 그냥 공연하기 싫어서 도망친 거 가지고 신고를 했나 보네요. 행방은 매니저가 찾고 있으니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되니, 이만 돌아가시죠.”


곧 찾을 거라는 그녀의 말과 달리 사람들은 이사벨라를 찾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관계자 한 사람을 놓치지 않고 모두에게 의견을 들었다. 이런 감각이 TV 드라마에 나오는 형사처럼 느껴져서 고든은 조금 설레기까지 했지만, 그것을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다.


고든은 개별적으로 관계자들을 하나하나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알아낸 것은 많지는 않았다. 모든 이야기가 놀라울 정도로 같았으며, 그중에서도 ‘조지 반스’의 말을 인용해보면.


“이사벨라와 줄리아 사이는 평소엔 나쁘지 않았어요. 좋은 언니 동생 사이로 보였죠. 줄리아는 이번에 새로 교체된 연출자인데 기존 연출자의 해석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의견을 내놓았어요. 그게 이사벨라와 차이가 드러나서 말썽이 있었죠. 그게 절정에 치솟았을 때는 점심시간이었어요. 공연을 앞두고 다 같이 식사를 하고 있었죠. 점점 언성이 높아지더니 화가 난 이사벨라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 대기실로 뛰어갔어요. 매니저가 그 뒤를 따라갔다가 곧바로 돌아왔는데, 문이 잠겨있어서 그녀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고 했죠. 식사를 급하게 마무리 짓고 들어가기 전 리허설을 하려는데 이사벨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죠.”


반스를 비롯하여 그들은 두려움에 떨며 연달아 벌어지는 사건에 무슨 일이 생길 것 같다고 증언했으며, 몇몇은 이미 살해당했을지 모른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용의자를 좁히기 위해 원한관계나 범인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냐는 질문엔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스미스요? 그게 누구죠?”


“유령이요.”


그 이상은 그들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지 입을 닫고는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곤란한 질문이라도 들은 것처럼 대화 주제를 넘기거나 그만 이야기하고 싶다며 대기실 밖으로 쫓아내었다. 지친 고든은 복도 끝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젠장.”


“오페라의 유령 같은 걸까요?”


니그마가 혼잣말을 하듯 물었고, 고든은 그를 쳐다보며 인상을 썼다.


“뭐?”


“이사벨라는 원한 관계없고, 착한 사람이라고 하잖아요. 게다가 모두 같은 자리에서 식사 후에 다 같이 연습을 나갔다고 하니. 모두가 알리바이가 있는 상황이잖아요. 그리고 다들 ‘유령’이라고 입 모아 말하고 있는데요.”


“에드, 넌 유령의 존재를 믿어?”


한심하다는 말투에도 니그마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유령 같은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거죠. 누구 하나 제대로 증명해내 보인 적 없는 초과학적인 존재잖아요. 즉 수수께끼인 존재.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거예요.”


고든은 니그마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기로 했다. 그러다 멈칫하고는 뒤돌아 그에게 손을 휘두르며 이야기를 했다.


“그거. 그 사람, 누구지? 그래, 스미스의 사람은 누구야?”


“제가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대타 배우 스미스의 위기대처 능력으로 공연을 살리다.’ 의 스미스예요. 저 뒤에 자살했거든요. 수많은 스포트라이트가 부담스럽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했어요. 그 유령이 된 스미스가 이곳을 떠돌아다니면서 누군가를 죽이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었죠. 확인된 바는 없지만요.”


순간적으로 고든은 그에 대한 평가를 다시 내리고 싶었다. 분명 귀찮은 사람은 맞았지만, 걸어 다니고 말하는 사전이 있다면 그 이름은 ‘에드 니그마’ 일 거라고. 여러모로 쓸모 있는 사람이었다.


“수수께끼 카드 발견.”


니그마는 고든의 구두 밑창에 있는 카드를 뜯어내었다. 하트 Q 카드가 엉망이 된 채였는데, 구두와 밀접해 있던 뒷면에는 조금 너덜너덜한 종이가 여전히 붙어있었다. 니그마는 고든에게 넘기기 전에 카드를 소리 내서 읽었다.


[3. 하늘에서 운석이 내려온다. 우렁찬 소리 뒤에 모든 것이 파괴된 처참한 광경]


“처참한 광경?”


고든이 그 카드를 뺏으며 이리저리 살펴보자 니그마는 안경과 함께 입꼬리를 다시 힘껏 올렸다. 그 표정이 억지스럽기까지 했지만, 그의 얼굴을 확인할 여유조차 없었다.


“사람들 의견 말고도 구석구석을 살펴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유령’이 이상한 곳에서 나올지도 모르죠. 아니면 카드라든지. 음 예를 들면 무대? 그쪽은 아직 안 봤잖아요.”


그와 동시에 ‘쾅’하는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무대 뒤를 지나 앞으로 나가자 한 여자가 쓰러져 있었고 그녀의 주변으론 붉은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커다란 소리에 반응하여 무대로 모여들고 있었는데, 그녀를 보고 비명을 지르기도 했고, 입을 막은 채 그대로 주저앉은 사람도 있었다. 고든은 고개를 들어 무대 위쪽을 살펴보다가 다시 그녀에게 걸어갔다.


“누구죠?”


“이사벨라예요.”


떨리는 목소리로 연출자인 줄리아가 말했다. '이사벨라'라는 이름이 들려오자 일제히 고개를 들어 고든 쪽을 쳐다봤다. 고든은 피로 얼룩지는 무대와 그 가운데 있는 시신을 쳐다보다 문득 자신의 뒤에 니그마가 있다는 것에 안심했다. 그의 존재가 안심될 정도라니. 혀를 작게 차며 전화를 걸어 지원 요청을 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경찰들이 들어와 사진을 찍고 시신을 수습했다.


용의 선상에 수많은 사람이 있었는데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에드. 사인이 뭐야?”


“이것은 뜨거운 정열이에요. 하지만 정열이 흘러넘치면 결국 죽고 말아요. 이것은 무엇일까요?”


“에드.”


“정답은 피예요. 추락사는 아니에요. 떨어지기 직전에 죽었어요. 저 위에서 떨어지는 충격으로 목이 꺾었고, 뼈가 살을 찢고 나와서 피가 나온 거죠. 뼈가 부러지면서 동맥을 끊었어요.”


“으, 그렇게 설명 안 해도 다 알아들어.”


잔뜩 찡그린 얼굴이 재미있다는 듯이 니그마는 싱긋 웃으며 피 묻은 장갑을 벗었다. 고무 재질의 장갑이 착 소리와 함께 벗겨졌으며 그는 고무 덩어리에 불과해진 장갑을 뭉쳤다.


“용의자는 좁혔어요?”


“아니. 다 알리바이가 있고, 기계장치가 설치된 것도 아니더군.”


“아! 수수께끼 카드.”


“어디서 났어?”


“피해자 재킷 안쪽에서요. 약간 젖기는 했지만, 글씨는 선명하게 보입니다.”


[4. 주위를 살펴라, 이상한 건 단 하나]


“이상한 게 하나라고?”


고든은 고개를 저으며 카드를 주머니에 넣으려다 카드들을 꺼내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그러니까 의심해라, 이상한 것을. 그러면 완전범죄의 끝이 있다는 건가.”


이상한 점을 꼽아보라고 하면 열 손가락이 부족할 정도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그들이 ‘유령’을 용의자라고 생각한다는 것부터가 이상했으니까. 알 수 없는 말만 적혀 있는 카드를 재킷 안쪽에 집어넣었다.


지원이 도착해서 구석구석을 살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계속해서 제자리를 걷고 있었으며 공연관계자들은 계속된 수사에 돌아가지 못하고 앉아있느라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재미있는 문제 하나 내도 될까요?”


어디에 갔던 건지 니그마가 얼굴 가득 웃음기를 머금은 채 돌아왔다.


“그 문제는 다음에 몰아서 듣지.”


“……그녀의 방에 금고가 하나 있더라고요. 그 금고에 작은 열쇠 구멍이 있던데.”


니그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든은 ‘이사벨라’의 방으로 향했다. 이 방에 처음 오는 것도 아니었다. 민망할 정도로 이곳엔 수없이 들락거렸고 사소한 단서라도 찾겠다고 구석구석을 살펴봤었다. 그런데도 작은 금고 하나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니. 고든은 자신을 스스로 한심하게 여기며 방으로 들어가 금고를 찾았다. 금고는 소파 아래 있었던 것을 꺼내 놓은 듯 소파 앞에 놓여 있었다. 작은 금고를 테이블 위에 올리고는 열쇠를 꺼내 금고를 열었다. 항상 열쇠로 자물쇠를 여는 소리는 왜 이리 경쾌한지. 니그마는 그 소리를 좋아했다. 듣기만 해도 수수께끼가 풀리는 느낌이었으니까.


그 작은 금고 안에는 카드 한 장과 또 다른 열쇠가 들어있었다. 스페이드 에이스 카드 뒤에는 암호와 같은 알파벳과 숫자가 적혀 있었다.


[E-21]


고든의 뒤에서 니그마가 검지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문제. E-21은 무슨 숫자일까요?”


“뭐?”


“3년 전 고담시립극장 첫 번째 실종사건의 시신이 발견된 고담 항에 위치한 창고 번호예요.”


그 즉시 밖으로 나가기 위해 그 방을 뛰쳐나갔다. 복도 끝에 있던 문을 여닫자 문에 붙어 있던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푯말이 떨어졌지만,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로비로 나가자 경쾌하다 못해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는데, 작게 따라 부르기까지 했다. 사람이 죽었는데 노래를 듣는다니. 고든은 잠시 멈춰서 안내원을 힐끔 쳐다보고는 건물 밖으로 나갔다.



*

오늘은 이상한 하루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이상했다. 온종일 이상한 곳에 있어서 그랬는지 슬슬 이상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의 옆에 탄 니그마가 연신 옆에서 떠들어댔지만 고든은 수상한 카드를 생각하느라 그의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았다.


“문제, 호랑이가 차에 타라고 하면 무엇일까요?”


고담 항으로 가는 길은 꽤 멀었다. 어쩌면 끝나지 않을 저 수수께끼 문제들을 계속 들어야 할 것만 같아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생각해보니 아까 그 여자 이상하지 않아?”


“누구요?”


“안내데스크에 앉아 있던 사람. 사람이 죽어서 실려 나갔는데 노래를 크게 듣고 있다니.”


“독일어로 Leid(상심, 고통)이라는 단어에서 i와 e의 순서만 바꾸면 Lied(노래, 가곡)라는 단어가 돼요. 인간은 고통을 노래로 승화시키기도 하죠. 신기한 존재예요.”


니그마는 작게 흥얼거리다가 멈추고는 검지를 다시 들어 올렸다.


“정답! 타이거.”


고담 항이 보이자 아까와 같이 감사하다는 인사를 신에게 보냈다. 차에서 내리는 동시에 총을 꺼내 들고 경계하며 걸어나갔다.


카드에 적혀 있던 숫자에 따라 빨간 컨테이너 앞에 섰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넣고 돌리자 찰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니그마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천천히 문손잡이를 돌리며 문을 잡아당기자 바닥에 카드 한 장이 떨어졌다. 카드를 뒤로한 채 문을 여는 동시에 총구를 들이밀었지만 텅 빈 창고 안을 가득 채운 쾌쾌한 공기만이 고든을 반길 뿐이었다.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피며 그 카드를 주워들었다.


한 손엔 총을 들고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로 그는 조커라는 선명한 글자와 광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위에 매직으로 적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재미?]


그 카드를 뒤집자 뒷면에는 다른 카드와 마찬가지로 타자기로 글씨를 쓴 종이가 붙여져 있었다.


[0. 믿음, 배신 그사이를 걷는 건 위태로우며, 배신의 끝에 도달하면 잔인한 고통만이 남는다]


“믿음, 배신?”


고든은 다시 조커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고든, 완전 범죄란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그보다 이거.”


그가 싱긋 웃으며 안경을 올리자 고든은 카드를 쳐다보다 문득 어떤 생각들이 자신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고개를 돌려 그의 안경 너머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아마 범인은 모든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창고에 오게 한 것도, 금고를 뒤늦게 찾을 거라는 것도, 유령의 존재에 대해서. 나아가 고든이 이 전화를 받았을 거라는 것도, 고담시립극장 사건을 맡을 거라는 것도.


......어쩌면 자신과 이곳에 오게 된다는 것도.



공백포함 12,377자(공백미포 9,546자)

연성교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자면.

[노라 쿠퍼(조연)

이사벨라 시먼스(주연)

조지 반스(주연)

마이클 헨더슨(조연)

에이미 밀러(조연)]

의 앞자리를 따면 NIGMA라는 단어가 됩니다. 영어를 표기할까 하다가 별로 중요하진 않아서 표기는 안했습니다.


글 내에 수수께끼들은 바로 직후에 일어날 상황들에 대해서만 언급한 거라 크게 의미 없습니다. 수수께끼만드는 거 너무 어렵네요8ㅅ8 카드에 대한 의미부여를 저 나름대로 했는데 밝히지 않을래요... 말도 안되니까요.


추신. 니그마 너무 좋네...

17세 여고생, 트위터 합니다. 맞팔하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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