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좋아. 그러니까 다시 정리해보자. 네 28년 인생에서 처음으로 반하게 된 사람이 촉촉하게 반짝이는 브라운 아이즈에, 끝내주게 섹시한 목소리에, 커피를 잘 내리고 미소 짓는 모습이 예쁜- 애 딸린 유부남이라고?”

“…마지막을 그렇게까지 강조할 필요는 없잖아.”

“오, 루크. 사람이 살면서 28년 동안 첫사랑이 없을 확률이 더 클까, 아니면 첫사랑이 연상의 기혼 남성이자 아기 아빠일 확률이 더 클까? 어느 쪽이 더 크든 넌 둘 다 해당 되는 거니까, 이 우주에서 아주 아주 유니크한 케이스가 되는 거야. 축하해 루크. 뭐든지 특별하다는 건 좋은 거지.”

“그만 좀 놀려, 레아!”


결국 와아앙 우는 소리를 내며 쿠션에 얼굴을 파묻는 자신의 쌍둥이 형제를 보며 레아는 혀를 끌끌 찼다. 어릴 때부터 저보다 울음보가 쉽게 터지던 녀석이긴 했지만, 학부를 졸업하고 프로로 활동하기 시작한 후부터는 꽤 의젓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레아는 소파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는 잡지를 힐끗 쳐다봤다. 검은 수트를 차려 입고 흰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루크의 사진 아래로 이번 달 특집 기사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피아니스트 아나킨 스카이워커와 프리마 돈나 파드메 아미달라의 아들, 루크 스카이워커. 작곡계의 새로운 희망. 다가오는 x월 xx일, 쌍둥이 남매이자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인 레아 아미달라의 콘서트에서 신곡 발표를 예고해…]


누가 저 화보 속의 예민한 표정의 작곡가랑, 머리는 까치집이 돼서 소파에 구겨져서 울고 있는 남자애를 같은 사람으로 보겠어. 여전히 훌쩍, 킁, 흑, 같은 소리를 내고 있는 루크를 보고선 레아는 어휴 화상아, 핀잔을 주며 벽에 걸린 시계를 한 번 확인했다. 곧 있으면 나가야 하는 시간이었다. 야, 루크 스카이워커. 레아가 맨발로 저를 툭툭 발로 건드는데도 첫사랑-과 동시에 일어난 듯한 첫 실연-의 아픔에 젖어있는 루크는 쿠션에서 얼굴을 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발로 차이면 발로 차이는 대로 톡, 하고 소파에 쓰러져 누워버린 작곡계의 새로운 희망을 보며 레아는 잠시 콘서트에서 제 형제의 신곡을 연주하는 걸 재고해보았다. 야야, 거기 불쌍한 애. 일어나 봐. 나 좀 있다 연습실 가야 하니까 그 전에 얘기나 더 풀어 봐. 무슨 멍청한 짓을 하고 왔다고?




2.

며칠 전, 루크 스카이워커는 긴장한 채로 케노비 감독의 작업실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루크의 아버지인 아나킨의 대학 동문이자 영상 음악계에서 잘나가는 감독으로 활동 중인 오비완 케노비는 제 조카나 다름없는 젊은 작곡가에게 따뜻한 차를 한 잔 내어주며 운을 뗐다.


“루크. 난 네가 클래식 말고도 여러 장르에 도전하는 걸 긍정적으로 보고 있단다. 그럴만한 능력도 있다고 봐. 그래서 이번 영화의 음악팀을 꾸릴 때도 널 부른 거고.”


루크가 갓 태어난 아기였을 때부터 그를 봐온 데다, 루크가 처음 피아노를 시작한 3살 때부터 레슨을 봐주고 음대 작곡과 입시며 졸업 작품까지 도와준 오비완은 루크를 아주 잘 알았고, 루크의 음악관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루크 자신도 음악에 있어서만은, 비르투오소로 불리지만 너무나 바빠서 제게 음악 지도를 해주지 못하는 아버지보다 오비완을 더 편하게 느꼈고 더 신뢰했다. 


“네 음악은 좋아. 테마도 잘 잡아내고, 구성도 진부하지 않아. 나이에 비해서 해석도 깊고. 다행히 네 아빠를 닮지 않아 성실하다는 것도 큰 장점이란다. 하지만….”


오비완은 한숨을 쉬면서 태블릿의 화면을 켰다. 액정에 오비완의 동그란 손가락이 부딪히자 톡, 톡, 톡, 경쾌한 소리가 났다.


“네가 작곡해야 하는 부분의 대본을 다시 보자. 주인공이 짝사랑하는 상대와 함께 있는 장면이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힘들어하면서도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는, 섬세한 감정을 짚어줘야 해. …이제 네가 쓴 곡을 들어보자꾸나.”


다시 화면을 몇 번 두드려 음악-루크가 벌써 여섯 번째 갈아엎은 버전이었다-을 재생시킨 케노비 음악감독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금색 수염을 몇 번 쓸었다. 


“이건….”


오비완은 어떻게 표현해야하면 좋을까, 싶어 잠시 말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건… 짝사랑의 멜로디라기보단, 마치… 평생동안 아끼고 사랑한 상대가 갑자기 악의 세력에 물들어 우주를 말아먹으려고 하길래, 어쩔 수 없이 그 상대의 팔다리를 자르고 용암에다 집어 던진 사람이 널 사랑했다고 고백하면서 울부짖는 것 같아.”

“…네?”

“이 부분의 화음은 악의 세력에 물든 그 나쁜 놈이 눈이 샛노래져서는 당신이 싫다고 욕하는 걸 표현한 것처럼 들리고 말이야.”


감독님의 흉흉한 설명에 루크는 다소 경악한 표정으로 파란 눈을 크게 떴다. 설명이 왜 그렇게 무섭고 자세한 거예요, 오비완. 혹시 예전에 누구 한 명 용암에 던져본 적 있으세요…? 


“너희 아빠랑 같이 학교 다닐 때 아나킨을 음대 건물 옥상에서 집어던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긴 하지. 하도 말을 안 들어서.”


온화한 어조로 우아하게 대학 후배를 씹은 오비완은 태블릿을 톡톡 두드려 음악을 껐다. 순식간에 찾아온 정적에 루크는 테이블 위에서 시무룩하게 손가락을 두드렸다. 허공에서 건반을 짚듯이.


“여하튼 요점은… 너는 다른 건 다 잘하지만, 사랑을 쓰는 데엔 서툴다는 거야.”


사랑에 대한 음악은 쓰지 못한다. 장르로는 클래식부터 재즈, 노래까지 폭넓게 소화하고 분위기로는 어두운 것이든 밝고 가벼운 것이든 모자람 하나 없이 풍부한 음색을 내면서, 유독 사랑에 대해서는 해석이 평면적이고 얄팍하다. 루크가 새파란 학부 새내기 시절부터 심심하면 들어왔던 평인데도 새삼 약점을 지적 받은 것에 자신감이 팍 죽었다. 공교롭게도 루크 스카이워커는 지금까지 사랑을 해본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부모님의 외모를 물려받은 얼굴을 가진데다 다정한 천성 덕에 고백을 받아본 적은 많았지만 그 고백이 연애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없었다. 그 누구에게도 강렬한 감정은 커녕 가벼운 흥미조차 느끼지 못했기에.


“이대로는 안 될테니 며칠 쉬는 게 좋겠다. 작업 일정은 내가 연출부랑 조정해볼 테니까, 조금 머리를 식히도록 해.”


차라리 다른 고약한 감독들이나 교수님처럼 타박을 하거나 윽박을 지르면 나을 텐데, 오비완 케노비는 이 업계에서 보기 드문 인내심과 배려심을 가진 인격자였다. 


“죄송해요, 오비완. 믿고 맡겨주신 건데.”


풀이 죽은 루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오비완은 싱긋 웃었다.


“혹시 모르잖니. 쉬는 동안 사랑이 뭔지 배우게 되는 계기라도 생길지.”


28년 동안 연애 감정을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어떻게 갑자기 기적처럼 그런 일이 생기겠어요. 속마음을 숨기며 루크는 미소와 함께 미지근해진 차를 한 모금 삼켰다. 차 맛이 썼다.




3.

그렇게 작업실을 빠져나온 루크는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며칠 동안 무리해서 철야에 철야를 거듭했던 터라 온몸이 쑤시고, 새로운 선율이 생각날 때까지 건반을 두드려댄 덕에 손가락은 마디마디가 죄다 삐걱거렸다. 뭣보다 지독하게 피곤했다. 곡이 제대로만 나왔어도 이렇게까지 컨디션이 나빠지진 않았을 텐데. 한숨을 푹푹 쉬며 루크는 발을 질질 끌 듯이 걸으며 피곤한 푸른 눈을 부볐다. 눈 부셔. 작업실에서 태블릿, 랩톱, 건반, 작업 노트, 다시 태블릿, 랩톱, 건반, 그리고 작업 노트…만 보다가 밖으로 나왔더니 대낮의 태양이 너무나 공격적으로 느껴졌다. 오비완의 작업실을 나서기 전 정신을 좀 차리려고 연거푸 찬물 세수를 했는데도 눈앞이 침침했다.

…피곤해. 집까지 걸어갈 힘도 없어. 제 아파트까지 가려면 고작 15분만 더 걸으면 됐지만, 자신감도 체력도 바닥을 치는 지금은 거기까지 도달할 기력이 없었다. 어떡하지. 레아에게 욕 좀 먹더라도 차 끌고 데리러 오라고 할까? 하지만 생각해보니 레아는 본격적으로 연습에 들어가기 전 남자친구인 한과 놀고 오겠다며 호수 지방으로 여행을 떠난 터였다. 정말 되는 일이 없었다. 이럴 땐 솔직히 다 때려치우고 대나무숲 같은데 누워서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고 생각하며 루크는 무거운 어깨를 콩콩 두드렸다. 그때였다. 지친 루크 스카이워커의 눈에 초록색 간판이 눈에 띈 게.


[Cafe Grogu]


굉장히 이상한 이름의 카페였다. 집 가는 길에 이런 데가 있었나? 루크가 고개를 갸우뚱, 하자 굳어있던 뼈에서 우드득- 하는 공포스러운 소리가 났다. …이대로 가다간 몸이 하나도 남아나질 않겠네. 몸이 완전히 굳은 데다 걸을 힘조차 없으니 카페에서 잠시 앉았다가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성 싶었다. 컨디션 회복에는 뜨거운 커피가 좋으려나, 아니면 차가운 게 정신이 들어서 좋으려나. 어느 쪽이든 시럽 없이 진한 커피가 좋겠다고 생각하며 루크는 비척비척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4.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호와는 달리 카페 안은 깔끔하고 아늑했다. 벽과 바닥에는 초록과 베이지를 주로 쓰고, 목재로 된 테이블과 화분들을 적절히 배치해둔 공간은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데가 있었다. 대부분이 자연색인 가운데 카운터 너머에 있는 기계들만이 어두운 은색으로 반짝이며 인공적인 느낌을 줬다. 인테리어가 마음에 드네. 루크는 카운터 앞에 서서 두리번두리번 공간을 살폈다. 커피 맛만 괜찮다면 새로운 단골 카페를 만들어도 좋을 것 같았다.


“주문하시겠어요?”


굵직하고 나지막한 목소리. 평생을 음악을 해온 탓에 루크는 새로운 사람과 마주치게 될 때면 목소리를 가장 예민하게 듣는 버릇이 있었다.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낮은 음색이 듣기 좋았다. 보컬이 있는 노래를 쓸 땐 습관적으로 맑은 음색만 상상하고 썼었는데, 다음 곡에선 이런 질감을 생각하면서 써볼까. 직업병같은 생각을 하며 루크는 주문을 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좋아. 역시 뜨거운 커피가 좋겠다.


“네. 그러니까-”


그리고 카운터 앞에 선 남자를 마주한 순간, 루크는 자신이 뭐라고 말하려 했는지 까먹고 완전히 정지했다. 맙소사. 오비완, 당신은 음악 감독이 아니라 예언자였나요? 혹시 미래 같은 거 보세요? 루크 스카이워커는 귓가에서 챠라랑- 하고 윈드차임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들어왔던 모든 사랑 노래가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재생됐다. 눈앞에 선 남자는 너무나도 완벽했다. 보드라워 보이는 브루넷, 깔끔하게 잘 정리된 수염, 사연 있어 보이는 촉촉한 갈색 눈. 피곤해서 흐리멍덩해졌던 시야가 순식간에 또렷해졌다. 세상에. 지금까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자신의 이상형을 완벽하게 배우게 되는 순간이었다.


“뜨, 뜨거운 아메리카노에다가 브라운 아이즈, 아니, 브라운 시럽, 아니 아니, 이것도 아니라- 커피에다 얼음을 샷 추가 해주세요.”

“…?”


난생 처음 느껴보는 감정의 파괴력은 강했다. 평소답지 않게 완전히 멍청한 발언을 토해낸 루크는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좋은 인상을 줘도 모자랄 판에 안녕하세요 전 다짜고짜 이상한 주문을 하는 이상한 사람입니다, 라고 자기소개를 한 거나 다름없었다. 감독님. 저희 아빠 말고 절 음대 건물 옥상에서 던져주세요. 저 지금 바닥으로 꺼져서 숨어버리고 싶어요. 루크가 행성의 내핵까지 파고 들어가 사라지는 상상을 하는 동안, 카운터 너머의 남자는 의아하다는 얼굴로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 뜨겁게, 샷 추가하면 될까요.”


바보같이 말했는데도 어떻게 알아들은 거지? 너무 멋있어. 이런 거에도 가슴이 뛰어. 어떡하지?


“네, 네… 그거면 돼요. 그거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건네며 루크는 핑핑 도는 머리를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기억해내, 루크 스카이워커. 대학 친구들이 365일 중 366일 동안 말하던 연애 얘기들을 기억해내! 플러팅은 어떻게 하는 거지? 레아랑 한이 서로한테 고백했을 때 뭐라고 말했다고 했더라? 데이트는? 언제 신청하면 되는 거야? 아니, 우선 그 전에 서로를 알아가야지. 통성명. 통성명은 어떻게 하는 거였지?

갑작스레 시작된 첫사랑의 여파에 루크 스카이워커가-연애 무경험자답게-무한의 우주와 같은 상상에 갇혀있는 동안 결제가 끝난 카드를 루크의 손에 쥐어준 남자, 딘 자린은-딘의 손이 스쳤을 때 루크는 잠시 정신을 잃을 뻔했다-별 감흥 없이 속으로 얼굴은 잘생겼는데 특이한 손님이군, 하고 말았다. 그렇게 루크는 여전히 카운터 앞에 굳어있고, 딘은 카페에 처음 방문한 손님이 그러거나 말거나 익숙하게 샷을 내리고 있을 때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경쾌한 목소리들이 가게를 울렸다.


“아버님, 그로구 하원했습니다. 내일 아침에 뵐게요!”

“빠뚜-!”

“그로구. 우리 아가, 잘 놀다 왔어?”


주문을 받던 때부터 커피를 내리는 내내 담담한 무표정을 유지하던 딘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넋을 놓고 브라운 아이즈의 바리스타를 바라보던 루크는 이상형의 미소가 눈이 부셔서 기절할 것 같다고 느끼다가- 몇 초 후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잠깐만. 지금 뭐라고 했지? 아버님? 지금 아버님이라고 불린 거야?


“오늘은 유치원에서 뭐했어? 아빠한테 말해줘야지.”


카운터 밖으로 걸어 나와 귀가 커다란 초록색 아이를 꼭 껴안고 푸스스 웃는 남자의 모습은 부정맥을 유발할 정도로 아름답고 잘생겼지만 루크는 그 모습을 행복하게 감상할 수가 없었다. 루크는 프로페셔널한 남자가 벌써 카운터 옆 쪽에다 자신이 주문한 커피가 올려진 트레이를 세팅해두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동공으로 꿀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부자상봉을 지켜보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다는 기분이 뭔지 느끼게 됐는데, 그 상대가 유치원생 자녀까지 있는 유부남이라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째서 이런 일이 나에게. 이건 너무 억울하잖아. 28년 동안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랑의 신에게 미움이라도 받게 된 건가? 

딘 자린이 뽀압뽀압 소리를 내는 수다쟁이인 아들을 껴안고 카운터 안쪽으로 돌아가는 동안 루크 스카이워커는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뭔지 절절하게 느끼며 생각했다. 오비완… 제가 아까 한 말은 취소할게요. 건물 옥상에서 던지지 말고, 그냥 용암 있는 곳에서 던져주세요. 지금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기분이니까. 눈앞이 아득했다. 내내 미루다 뒤늦게 시작된 첫사랑이 이렇게 초장부터 험난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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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tabile Amoroso: 노래하듯이 사랑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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