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色실



w. 마음에 닿았네







열흘, 혹은 보름, 그 이상.


이연은 그동안 출근하듯이 방문했고, 어느새 그가 오는 것이 당연한 일과가 되어 버린 이랑은 이연이 올 시간이 되어가자 가게 문을 평소보다 자주 쳐다보게 되었다. 꽃을 다듬다가도 흘긋, 꽃을 꽂아두고 자리에 놓을 때도 흘긋, 꽃 포장을 하다가도 흘긋. 선명한 붉은 실이 눈에 보이자 기다리지 않은 척, 손에 쥐고 있던 일에 집중했다. 가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다가오는 발걸음이 이연이 아니었다. 시야 끝에 걸쳐진 신발 또한 이연의 것이 아니었다.


“제가 와서 실망한 눈치네요.”

“.....이무기...., 네가 왜....”

“이연은 오늘 안 올 거예요.”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낸 남자는 이전 만남에서는 보이지 않던 이연에 대한 애정에 이유를 알 수 없이 감정이 격해졌고 가게 문을 바라보는 랑의 바람을 다시 뭉개버렸다.


“여기 오려고, 이연이 관심 가질 먹이를 던져줬어요.”


오늘도 미끼를 안 물면 어떡하나 했는데 전 여기 있네요. 너덜너덜해진 영혼에 작은 꽃이 예쁘게 피어있다. 도대체 그 작은 희망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신기했다. 미워서 자신을 괴롭히는 것도 모자라, 좋아해서 자신을 괴롭히는 것도 참 의아한 일이었다. 이연이 어린 여우를 단단히 길들여 버린 것이 싫었다.


“경계하지 말아요. 그때 말했잖아요, 만나러 오겠다고.”


무기를 꺼내려던 랑을 저지했다. 이무기는 이연이 매번 앉던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꼰 다리 위에 제 두 손을 포개어 올려놓은 그는 tv를 감상하듯 이랑을 주시했다. 묻지 않고 가만히, 조각상처럼 앉았다.


“-그냥, 그러고 있겠다고?”

“네.”


이무기는 간악한 요괴라고 익히 들어왔던 이랑은 그가 저에게 보여 주는 행동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하던 일을 마무리하던 이랑은 지금 상황이 맞는 상황인가 싶었다. 이연의 적과 같은 공간에서 남들이 보면 꽤 다정해 보이는 투 샷을 보이니 말이다.


“-부담스러운데, 고개 좀 돌리지?”

“내가 보고 싶어서 보는 거라, 싫은데요.”


평화적인 공간을 무력으로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기에 그 시선을 견뎌냈다. 설마 퇴근 시간까지 이러고 있으려나 싶어서 가게 문을 닫아 버릴까, 고민하는 귓가에 노랫소리가 닿았다. 이무기가 노래를 흥얼거렸다. 청아한 목소리가 랑의 기억의 바다에서 파도 소리와 함께 흰 거품에 쓸려왔다. 당황함을 감추지 못한 랑의 표정에 이무기가 환하게 웃었다.


“딱 한 번이긴 했지만, 당신과 있었던 감미로운 순간이어서인지 아직도 선명해요.”


멍청한 물음만 랑의 입안을 돌아다녔다. 어떻게, 이무기가, 아는 거지, 그 노래를, 요괴가, 이제 막 태어났다는. 그 마음을 듣고 있던 이무기는 랑의 표현이 무정해서 싫었지만, 자신으로 인해 마음이 어지럽혀지는 것이 퍽이나 좋았다.


“-만난 적이 있다는 거네...”

“네, 그러니 어서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요.”


몸을 앞으로 살짝 굽힌 이무기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서 랑을 올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방문의 목적을 달성한 것에 이무기는 또 만나자는 말과 함께 가버렸다. 몸의 긴장이 풀리며 긴 호흡을 뱉은 이랑은 핸드폰을 들어 이연에게 연락을 하려고 머뭇거리기를 20분. 화면을 끄며 앞의 테이블에 고개를 묻었다.



 

랑이 이무기를 기억해 내는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네요.”


비에 젖어서 들어온 유리가 감기 걸릴라, 마른 수건을 덮어주고서 따뜻한 차를 내주었다. 창밖에는 우산을 미처 챙기지 못한 사람들이 빗속을 뚫고 뛰어가거나 가게의 차양 아래에서 잠시 비를 피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개의치 않고 비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다. 소나기인가 싶은 빗줄기는 굵고 세찼기에 오늘 장사는 이만 접어야겠다 싶었다.


“구름이 잔뜩 꼈다 싶었어요.”

“맑아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비구름이었나 보다.”

“꼭 그때 같네요.”

“언제 말하는 거야?”

“기억 안 나세요? 제가 배달 갔다가 고객 변심으로 이랑 님이 다시 가셨잖아요.”


배송을 다시 간 경우는 극히 드물어서 잘 기억나지 않았다. 오리무중인 시선을 받은 유리가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한 추가 정보를 주었다.


“그때 비가 갑자기 쏟아져서 제가 모시러 가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는데-”


이랑의 기억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어린 남자아이가 혼자 있던 으리으리한 저택. 배송을 마치자마자 굵은 빗방울이 쏟아졌고, 어둡고 휑한 저택에 아이를 홀로 남겨둘 수 없어 머뭇거리는 사이 아이가 붙든 옷자락에 유리가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던 비 오던 날이었다. 이무기에 대한 단서를 얻은 랑은 한동안 분주했다. 남지아가 먼저 생각났고 이연이 다음으로 떠올랐지만, 확신이 없어 저만 조용히 알고 있기로 했다. 유리에게 당분간 온라인과 예약 주문을 최소한으로 받게 했다.


마지막 확신의 조각을 얻기 위해 정성껏 포장한 꽃다발을 들고 직접 배달을 갔다. 방송국의 보안을 통과하고 사장실이 있는 층으로 직행한 이랑은 지나쳐 가는 한 남자의 모습으로 둔갑했다. 사장실에 가까이 갈수록 잊고 있던 냄새가 났다. 후각을 자극하는 희미한 썩은 시체 냄새에 사장의 얼굴을 확인해야 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사장님을 뵈러 왔는데요.”

“현재 외출 중이십니다. 약속하고 오셨나요?”

“어디로 갔어요?”


비서의 눈을 쳐다보며 묻는 랑의 동공이 금색으로 빛났다. 비서가 홀린 듯 사장의 일정에 대해 알려 주었다. 곧 돌아올 시간이라는 말에 주차장이라도 가서 확인하기 위해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로비로 들어오는 정장 무리를 발견했다. 가장 앞에 선 중년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랑은 제 추측에 확신을 얻었다.


“이랑?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취재하고 복귀한 지아와 마주친 랑은 그녀를 만나서 잘 되었다 싶었다. 배달 중이야? 제가 들고 있던 것을 냉큼 지아의 품으로 넘겨주었다. 주머니에 있던 카드는 손에 넘겨주었다.


“이연이 주는 선물. 이런 건 부탁하지 말라고 좀 전해.”


어색하게 툴툴대는 랑이 의아한 한편, 꽃을 보낸 이연의 행동이 더 수상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이전에 집에 초대받은 선물로 가져온 풀떼기보다는 예뻐서 기분은 좋아졌다. 이연의 의중을 생각해 보던 때 뒤에 있던 신입이 이랑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에요, 형.”

“-아는 사이야?”


떨떠름하게 답하는 이랑에게 신입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 지아에게 휴식을 요청했고 지아는 이랑의 표정을 살폈다. 살가운 사이는 아닌 듯하여 중간에서 제지를 해보려 했다.


“피디 님, 저 잠시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좀 빌릴게.”


이랑이 선뜻 답해오는 것에 지아는 그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허리 정도밖에 오지 않았던 앳된 아이를 기억하는 이랑이 기억 속의 아이가, 눈앞의 남자가 이무기라는 사실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남자가 아메리카노 두 잔을 손에 들고 다가왔다. 핸드폰 화면을 끄며 생각했다. 그 아이가 이렇게 컸나.


“그 아이가 이무기였나.”


잔을 받으며 제 속마음을 읽는 것에 놀라자, 남자가 랑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가 아니고요?”

“생각 마음대로 읽지 마.”


한쪽은 싱글벙글했고, 한쪽은 심란했다. 이연한테 거짓말한 게 되어버렸고, 이무기와 어떤 인연인지도 의문이었고, 왜 인지도, 그 실이 붉은 것도 의문이었다.


“고작 한 번이었는데, 그걸 기억하고 있네.”


하늘이 쪼개질 것처럼 울리는 천둥 번개. 창을 뚫고 들어올 것 같은 굵은 비가 땅에 곤두박질치는 소리. 방치된 그랜드 피아노를 치는 당신. 그걸 바라보던 나. 주변의 소리와 상반되는 분위기의 맑고 고운 음색. 빗소리도 천둥 번개도 나뭇잎이 부대끼는 소리도 가장 적은 음량으로 낮춰지고 오직 피아노 소리만이 들리는 그 순간.


“음, 그런 걸 표현하자면, 꽤 낭만적이었다, 이겠죠?”





천둥 번개가 치는 창 앞에서 연주하는 당신이 얼마나 예뻤는지.





“기억이 나와는 다르네.”


그 노래를 잊을 수 없었던 이무기는 하루에 여러 번 음을 되뇌었다. 랑이 알아봐 주길 바라며 흥얼거린 날 이무기는 랑이 자신을 만나러 오는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오늘 당신을 만나게 되어서 기뻐요.”


이무기가 랑의 손을 잡아당기며 팔목 윗부분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잡아당겨 씹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선홍빛의 피가 흐르면 참 예쁠 텐데, 핏기가 가시는 피부색과 랑의 당황하는 표정은 이 유흥의 덤이었다. 책의 많은 구절을 읽었다. 이해할 수 없었던 안 예쁜 구석이 없다는 표현이 지금, 랑을 보면서 이무기는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이 말한 대로 기억해 준 것도, 이렇게 찾아온 것도. 

급히 건물을 빠져나가는 사장을 보지 않았다면, 사장과 이랑의 마음을 읽지 않았다면 기분 좋게 남았을 이 공간과 이 순간의 장면이 변질되었다.

 

앙큼하게도, 이랑이 자청하여 자신을 미끼로 삼았다.

비록, 이무기가 눈앞의 먹이에 홀려 보기 좋게 걸려든 거지만.

 

붙잡은 손에 힘이 실렸다. 랑이 한쪽 눈살을 찌푸리며 고통을 일순 호소했다. 잡은 부위가 하얗게 질려가는 것에 랑이 팔을 비틀었다. 이무기는 제 입으로 걸어 들어온 먹이를 놓을 생각이 없었다. 랑의 손끝에 얼얼한 감각이 퍼졌다.


“제가 왜 화가 났는지 알죠?” 

“각오하고 네 요구에 응해준 거야.”

“그러면 얌전히 있어야죠.”


윽, 뼈를 으스러뜨릴 듯이 쥐는 힘에 랑이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당신을 구하러 올 왕자님도 공주님도 지금은 없는데. 호기롭게 다가온 여우와 어떻게 놀아줘야 하나 고민했다.


“보는 눈 많잖아?”

“납치해버리면 어쩌려고?”

“네가 맡은 역할에 충실해야지 않겠어?”


이곳은 방송국 로비였고, 그는 갓 입사한 신입 사원이었다. 이무기는 자신을 모르는 눈앞의 어린 여우가 가소로웠다. 제힘이면 납치극 따윈 식은 죽 먹기인데, 이 공간이 안전하다고 여기는 것에 절로 비웃음이 삐져나왔다.


“그때, 이연이 당신을 베고 간 날 어떻게든 사로잡았어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목줄을 채워야 하나.


“도망칠 힘도 없는 아기 여우가 끊어질 듯한 심장에 무슨 요술을 부렸는지 초인적인 힘을 내며 내달렸다는 소리에 어찌나 화가 나던지.”

“......너...... ”


그 당시의 일을 생경하게 기억하고 있던 랑이 이무기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랑의 손목에 시뻘건 자국이 남았다. 그것이 신호가 된 듯 테이블 위의 음료 잔이 넘어지고 마주 보고 있던 두 인영은 사라졌다. 다 먹지 못한 음료가 흘러 땅으로 뚝뚝 떨어졌다.


 



“내가 부탁했잖아요.”


가여워하길 바라는 억양으로 짐짓 처연하게 눈매와 입꼬리를 끌어내린 얼굴에 노기를 드러냈다. 멱살을 쥔 억센 손이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강하게 랑을 끌어당겼다. 송곳니를 드러내며 쉬익, 소리를 내는 위협적인 뱀처럼 랑의 귓가에 속삭였다.


“알려 주지 말라고.”


밀착한 그들은 순간 이동하듯 빠르게 움직였다. 건물 밖에서 건물 안으로, 사람이 가득한 곳에서 사람이 없는 곳으로 움직이는 그들은 마치 춤을 추는 듯했다. 왈츠를 추듯 몸을 맞대며 한 바퀴를 빙글, 두 바퀴를 빙그르르 돌았다. 랑이 내려찍으려던 도끼는 이무기의 힘에 막혔고 어느 한쪽으로 쉽게 치우치지 못했다. 힘의 반동으로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


“아.... 반쪽 구미호가 아니네요.”


이무기가 이랑의 금색으로 빛나는 두 눈동자를 보며 쉽게 제압할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고작 육백 살을 산 어린 여우라도 구미호라면 말이 달라졌다. 그래서 방향을 바꾸었다.

궁금해서 그러는데-


“이연을 위해서예요, 그 여자를 위해서예요?”

“너 엿 먹이려고 하는 짓이지.”


격정적인 움직임, 서로의 숨을 삼킬 듯한 거리, 머리, 손목, 어깨, 골반, 다리. 신체 부위의 접촉은 손에 쥔 무기만 아니었으면, 서로 우위를 차지하려는 듯이 노려보는 눈빛이 아니었다면 노골적인 터치로 보였을 거고 그들이 정열적인 탱고를 추는 거라고 착각했을 거였다. 오래는 못 끌어. 이랑의 마음의 소리에 이무기가 그를 몰아붙이며 한가지 가설을 세웠다.


“본판이 반쪽짜리는 어쩔 수가 없나 봐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도 달리 말하면 모지리 아닌가?”


이랑의 목에 희미한 검은 줄이 생겼다. 그의 목에 걸린 장식이 없는 헐렁한 검은 목걸이와 다르게 달라붙는 형태로 나타났지만, 그 작은 변화를 이무기는 눈치채지 못했다.


“우리가 참 닮았다는 소리죠?”

“너무 일찍 성장하느라 제대로 배운 게 없나 본데, 여우와 뱀이 어떻게 닮아?”


여우는 다리가 있고, 뱀은 없는데? 이랑이 제 목을 파고드는 검은 줄에서 파생되는 고통을 느끼면서 힘을 끌어 올려 이무기를 밀어붙였다. 순간적인 힘에 땅과 마주 보며 엎어진 그의 등을 짓누르며 랑이 힘겹게 숨을 뱉으며 조롱했다.


“이렇게 기어다니는 게 보기 좋은 거 같은데?”


두 눈을 뜨고 있는 것이 한계에 다다를 때였다. 숨통이 조이며 검은 줄이 점점 선명해지려 했다. 목 아래의 근육들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 제멋대로 수축하며 몸속의 수분이 말라가는 것에 사지가 덜덜 떨렸다. 이랑의 힘의 변화를 눈치챈 이무기가 기이하게 꺾은 팔로 이랑의 중심을 무너뜨렸다. 으아악-!! 도끼를 낚아챈 이무기가 그대로 이랑의 다리를 내려찍었다.


“그 말, 꽤 상처가 된 것 같아요.”


싸늘한 표정으로 이랑의 피가 묻은 무기를 손에 쥐고 다른 한 손으로 내려친 다리를 잡아끌었다. 무자비한 힘에 끌려가면서 일어나는 등과 바닥의 마찰보다 구미호의 힘에 반동으로 일어나는 페널티 효과보다 직접 내려친 다리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헤집는 이무기에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았다. 으윽! 반사적으로 붙잡힌 다리로 손을 뻗었다. 몸을 낮춘 이무기가 뻗친 손을 마주 잡아당기면서도 상처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미친 새끼. 이랑의 욕지거리에도 웃었다.


“형제가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이에요?”


고통에 몸부림치는 표정이 너무 마음에 쏙 들었다. 질문을 들은 게 분명한데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제 손놀림에 반응해 주니 기뻤다. 그래도 이무기는 듣고 싶은 질문의 답은 있었다.


“그런 형제를 사랑하는 건 어떤 느낌이에요?”


간직해 온 비밀을 들킨 듯 이랑의 두 눈을 커졌다. 척수를 타고 올라가 뇌에 고통을 전달한 감각 위를 덮는 충격에 이무기의 입을 찢어버리든가 혀를 뽑아버리고 싶었다. 인간들 말로는 그런 걸 배덕하다고 하던데.


“너 같은 요괴는 평생 모를 감정이겠지.”


랑이 힘을 짜냈다. 제 눈에 보이는 붉은 실에 손을 갖다 대었다. 이무기의 심장이 강하게 두근거렸다. 불길한 기분에 상처를 헤집던 손을 천천히 떼고 눈앞의 여우를 가만히 응시했다. 무언가를 쥔 듯한 손동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무기는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걸 쥘 수도 있어요?”


이랑이 동요했다. 이제는 사라진 전승을 찾으며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믿어야 하나 의심했던 이무기는 지금, 이랑의 모습에 확신했다. 그날 들었던 작은 조각들이 모였다.


“당신과 나는 운명이지 않아요?”

“그렇게 따지면, 이연과도 운명인 셈이지.”

“우리 둘이 있는데 이연 얘기는 빼죠?”

“네 집착의 상대는 내가 아니잖아.”


실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힘의 한계. 이무기가 원하는 것은 이연의 목숨. 산신의 지위인 것도. 그리고 이연의 반려가 그의 대상인 것도. 서늘한 온도가 손을 감싸는 게 다정하다고 느껴지는 스스로가 머리가 잘 못 된 거 같았다.


“목표가 하나이지는 않아요, 당신을 만날 줄 몰랐으니까.”

“징그러운 소릴 아무렇지 않게 하네, 천성이 뱀이라 그런가.”

“네, 그래서 이렇게 옭아매고 싶어요.”


이무기의 두 손이 랑의 목으로 옮겨갔다. 차가운 체온이 식은땀을 흘리는 이랑의 체온을 감쌌다. 그대로 목을 옥죌 듯한 긴장감이 둘 사이를 감돌았다. 목울대가 크게 울렸다. 랑이 제 손에 든 실에 손톱을 세웠다. 심장에서 미약한 고통을 느낀 이무기가 두 손을 조여 잡으며 턱뼈 아래를 엄지로 압박했다.


“누가 먼저 죽는지 해볼까요?”


피가 머리로 몰리는 느낌과 아픔, 숨을 맘대로 쉴 수 없는 갑갑함이 함께 찾아왔다. 멀리서 감은장이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랑아, 함부로 실을 만져서는 안 되고, 그것을 끊어내서도 안 돼, 너의 혼에 상처가 새겨질 것이고 그것은 후의 삶에서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될 것이다.


산소가 부족했다.

타인의 실이 아닌 자신과 연결된 실을 잘라낸다면 어떤 후회가 따를지 짐작할 수 없었다.

 


이무기는 즐거웠다. 저가 예뻐하는 것이, 아름다움으로 승격하는 순간이었다. 이 모습으로 처음 마주했던 밤, 저를 담았던 동그란 두 밤이 빛을 잃어가던 것도 아름다웠지만, 어떻게든 발버둥을 치려고 빛을 꺼트리지 않는 이 두 밤도 혀로 핥아주고 입 맞춰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을 순식간에 하늘 위로 붕 뜨게 만드는 감정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릴 수 없어 이무기는 그저 예뻐하며 어루만졌다.

 

위에서 아래로, 중력의 힘으로 그의 목을 두 손을 겹쳐 잡으며 젖혀 들어간 고개 위로 조용히 입술을 내렸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눈가의 근육의 움직임에 짙은 호선이 퍼졌다. 바르작거리는 고개를 단단히 붙들고 제가 쥔 것을 보지 못하게 시야를 가렸다. 이무기는 이대로 그 눈알을 파내어 입안에 굴리고 싶었다. 심장이 요동치는 것이 이랑이 쥔 것에서 오는 불안감과 긴장감인 건지, 이랑을 바라볼 때마다 느껴지는 공기의 강렬한 진동 때문인 건지 알 수 없었다.

이성보다 본능이었다.


어느새 얼굴 한쪽을 감싸 쥔 손의 손가락으로 입을 벌려 안을 헤집었다. 윽, 어, 커억. 그의 모든 근육에서 심장이 박힌 듯 두근거렸다. 여린 살이 주는 보드라운 감촉과 느릿한 속도로 입안을 채우는 더운 공기에 어떤 희열이 스며들었다. 이무기의 입술은 눈가에서 광대, 볼을 타고 내려와 입술 근처를 배회했다. 하나의 단어가 이무기의 머릿속을 관통했다.


사랑스럽다.



이랑은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놀며 손과 입으로 얼굴을 희롱하는 이무기에 소름이 돋았다. 목구멍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이 자신의 것인지, 이무기의 것인지, 아니면 어떤 이물질이 섞여 있는 것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어떻게든 떼어내기 위해 실을 포기해야 했다. 이무기는 벌어진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핏물을 냈고 턱에 가볍게 입 맞추며 잇자국을 냈으며 목 아래, 빗장뼈 위의 여린 피부에 콰득, 제 송곳니를 박아 넣었다. 악!! 단발마의 비명과 함께 쌕쌕거리는 밭은 숨소리가 이무기의 머리털을 쭈뼛 세워냈다. 피부에서 느껴지는 이무기의 짙은 웃음에 이랑은 다시 몸을 떨어야 했다.

이무기는 계획을 일부 수정하기로 했다.


“제안을 하나-”


달콤한 솜사탕을 입에 한입 물었듯 단 냄새를 풍길 법한 말투로 꺼낸 말은 불청객에 의해 토막이 나고 말았다. 이랑에게서 떨어질 수밖에 없던 이무기가 불청객을 노려봤다.

 

“켄넬이라도 들고 왔어야 했는데, 쯧, 아쉽네.”

“서로 오붓한 시간 보내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갑자기 형제애가 솟구쳤나 봐요?”


말을 곱씹던 이연은 제가 이곳으로 달려오면서 본 장면에서 든 의구심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 했다.


“어, 그러니까, 잠시 타임이야.”


이연이 손쉽게 등을 돌렸다. 저의 무엇을 믿고 이리 쉽게 등을 내주는지 이 또한 신선해서 이무기는 이연이 하는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연이 랑의 턱을 잡고 좌우로 돌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윽. 저를 날려버린 힘은 어디에다 두고 맥없이 당한 건지. 젠장. 욕지거리가 이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입술과 얼굴, 목에 난 잇자국에선 물비린내가 물씬 풍겼다. 그 역한 냄새에 이연의 눈빛이 한층 가라앉았다.


“아파, 이연!”


랑의 외침에 이연은 어느새 힘줄이 도드라지게 선 제 손등을 보며 힘을 풀었다. 목에 저주처럼 새겨진 옅은 색의 검은 줄은 또 무엇인지. 거기다 다리의 상처는 꽤 심각해 보였다. 물비린내와 함께 랑의 피 냄새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하아. 이연의 언짢은 한숨에 이랑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눈치를 살짝 보던 이랑은 이연이 화가 많이 났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손길이 조심스러워 툴툴댔다.


“그 표정 뭐야, 걱정이라도 해?”

“그럼, 좋아할까.”

“후- ...괜찮아.”


견딜만한 거겠지. 예상과는 다른 답변에 이랑이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저를 걱정하는 형을 보는 게 얼마 만인지. 이무기와 맞서는 이연의 커다란 등을 보며 이랑의 입꼬리가 이연 모르게 씰룩거렸다.


“나한테 집착하는 줄 알았는데, 마음이 변했어?”

“매력을 좀 더 어필해 주시죠?”

“시간 낭비는 질색이라...”


한쪽은 연정, 한쪽은 알 수 없음. 눈앞에서 직관한 그들의 관계에 이무기는 불쾌했다. 저에게 보여주지 않는 이랑의 웃음이 이연에게 향하고 있었다. 자신이 산신이었다면 저 여우의 웃음은 지금 자신의 것이었을까.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이 이무기를 자꾸만 꾀어냈다. 이무기는 그것에 귀를 기울이며 밤보다 짙은 어두운 그림자 아래로, 아래로 스며들고 있었다.


“남의 동생 잡아먹으려고 했나 봐?”

“......흐음, 그건 다음에 해보려고요.”


구애. 적어도 이연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방법이 괴이했지만, 명백한 애정 표현이었다.


“흥이 식었어요.”

“얌전히 돌아가, 어슬렁거리지 말고.”


불청객은 이무기의 유희(遊戱)를 막아서고 있었다. 이무기는 자신의 시야를 가리는 이연에게 짜증이 났고, 그 뒤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독이는 이랑에게도 화가 났다. 방금까지 제 손에 있던 온기가 어땠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밤의 풍경을 잃어버린 이무기에게 남은 것은 궤짝 속의 어둠과 역병이 득실거렸던 동굴 속의 비명과 흙인지, 돌인지, 제 몸인지 모를 서늘한 덩어리였다.


“화가 나.”


서늘한 음성이 바람을 타고 공중으로 흩어졌다. 



미워. 

두 번째 단어에선 냉기가 느껴졌다. 



죽이고 싶어. 

세 번째 단어는 수십 개의 발걸음과 함께 땅으로 떨어졌다. 



저주해. 

이무기의 형형한 빛을 내는 눈빛과 함께 네 번째 단어가 고막을 울렸다.



“죽여.”


다섯 번째 단어는 암시에 걸린 사람들이 문구용 칼, 연필, 나뭇가지, 돌멩이, 쇠 파이프와 같은 무기를 들고 이연과 이랑에게로 달려들었다. 이연은 이랑을 지키면서 사람들을 제압해 나가기 시작했고 이랑은 짐이 되기 싫어 아픈 다리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 인간을 때려눕혔다.


“참, 사이가 좋네요.”



증오해. 

이무기의 언어는 대상 없이 공간을 메웠다. 


이무기로부터 파생된 갈피를 잃은 검은 실이 허공에서 징그럽게 출렁거렸다. 마치 크라켄을 등에 업은 것처럼 흐느적거리는 모습에 랑이 뒷걸음질 쳤다. 악한 감정이 악연의 실이 되어서 기생할 목표물을 찾고 있었다. 그중 일부가 두려움의 파편에 반응하여 랑에게로 달려들었다.




진정해. 통제해.

속으로 강하게 외치는 이랑이 팔을 뻗어 검을 소환했다. 30센치의 단도에 오색실이 딸기술 매듭으로 방울과 함께 매여 있었다. 제 앞의 20미터의 거리에 선을 그어내고서 그대로 땅에 꽂았다. 인간의 고통에 찬 비명과 절규에 가까운 분노, 타인과 세상을 향한 증오에 한쪽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것은 실존하는 것이 아니어서 베어낼 수 없었고, 설령 베어낸다고 하더라도 사라지지 않았다. 딸랑. 이랑이 그어낸 선으로 인간이 다가가자, 소환되고서도 잠잠했던 방울이 울렸다. 랑이 도끼를 소환하여 인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휘날렸다. 인간의 머리를 향해 날아가는 도끼를 이연이 사인검으로 받아쳤다.


“이연, 잘 막아요.”


이무기가 거리를 좁히며 암시를 건 인간 한 명을 달려들게 했다. 딸랑. 이랑이 정확하게 인간을 향해 도끼를 부메랑처럼 날렸다. 그걸 막은 건 이연이었다. 이무기는 이번엔 다른 인간이 든 무기를 던지게 했다. 방울 소리는 울리지 않았고, 랑은 그것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제 몸을 보호하기만 했다.


“이랑.”


방울이 울리지 않는 거리에 멈춰 선 이무기가 이름을 불렀다. 반응이 없었다. 이무기가 거리를 좁히자, 방울이 다시 울리며 이랑은 무기를 다시 고쳐 잡으며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주시했다. 그러나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남은 인간들을 모조리 이연에게 달려들게 했다.


“이랑이 인간을 해치게 둘 건 아니죠? 당신도 인간을 해치진 못하겠지만.”

“너, 이 새끼-”


이랑의 세상은 암막이 내려진 캄캄한 상태였다. 자신이 무엇을 벨지 몰라 몸이 벌벌 떨렸다. 실이 제 몸을 감아내는 기분에 심호흡을 천천히, 깊게 해보지만 쉽지 않았다. 정신이 마비되는 감각에 그 후에 제가 만들 상황이 현재를 덮쳐왔다. 방울 소리와 함께 다가오던 기척이 있던 곳을 주시했다.


그때였다.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기척에 도끼를 쥔 팔을 가슴 쪽으로 당겨 접었다가 강하게 뻗었다. 방향은 정확했다. 설령 피한다고 하더라도 표적이 이랑 본인이었기에 적을 놓칠 리가 없었다. 무기를 피한 것에 이랑이 염동력으로 도끼를 허공에 멈춰 세워 자신을 향해 다시 날렸다.


“유리 씨!!!!!”


0.3초의 시간이었다.

 저 소리가 거짓이면 어떡하지. 이 기척을 죽이지 않으면 내 몸을 장악할지도 모르는데.





0.2초 

만약 사실이라면, 내가 너를 죽이고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0.1초

이랑은 한 발 앞으로 제 다리를 뻗으며 날아오는 도끼의 날을 붙잡았다. 




그와 동시에 랑의 품으로 여린 몸 하나가 쏙 들어와 등을 감싸 안았다. 그 여린 손에 이랑도 제 얼굴 앞에 닿아오는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멀쩡한 팔로 꼭 안았다. 따스한 온기, 심장 박동 소리, 유리의 냄새에 랑이 울먹이며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전신을 장악하고 있는 죄책감과 두려움으로 외쳤다.



“미쳤어!!! 내가 널 베었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어!!!”

“안 했잖아!! 안 베었잖아요!!!”



이랑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유리도 같이 외쳤다. 반으로 갈라질 뻔했던 이랑의 손바닥이 강한 통증으로 욱신거리면서 하염없이 피를 흘려냈다. 정신이 한계에 다다랐다. 이랑은 눈꺼풀이 자꾸만 무거워지며 모든 것을 차단하려는 정신을 붙들려고 애썼다. 머릿속에선 끊임없는 비명과 저주가 저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이랑 님! 응? 괜찮은 거죠? 네? 이랑 님-!!”

“소리, 치지마.... 듣고, ...있어....윽....흐...”


거짓말. 아까부터 계속 이랑의 이름을 불렀던 유리는 제 가슴에서 느껴지는 이랑의 심장 소리가 아니었다면, 자신의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숨이 아니었다면 이랑이 죽은 건 아닌가 싶었다. 몇 번을 불렀을까. 여러 번의 부름 끝에 겨우 들은 답에도 유리는 안도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듣고 있는 이무기가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랑이 보이지도 않으면서 눈을 부릅떴다. 유리는 이무기에게 송곳니를 드러내며 이랑을 더욱 끌어안았다.




“잠들어요.”

이무기가 이랑의 두 눈을 제 손으로 덮으며 말했다.




“깊이. 아무 생각 말고.”






────────────────

감사합니다.



맘닿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