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와 다름없이 자주 가던 아늑한 개인 카페에 들어가 딸기 쇼트케이크를 시키고, 히나타의 앞엔 오렌지 주스와 자신의 앞엔 아메리카노가 떡하니 놓여 있었다. 아, 평소와 다른 부분을 꼽아보자면, 히나타가 포크를 든 채로 츠키시마의 케이크를 먹기 위해 포크를 먼저 들이밀지 않았던 것일까. 츠키시마는 제 앞에 앉아있는 자의 의아한 행동에 게슴츠레 눈을 뜨며 물었다. 무슨 일로 내 걸 안 뺏아 먹냐. 그에 히나타는 샐쭉 웃음을 지으며 겉엔 물기가 맺혀진 주스잔을 꼭 붙잡았다. 주스잔을 매만지는 손가락이 유리잔과 맞닿아 뽀도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있잖아 케이.”

“어.”

“우리 헤어질까?”



츠키시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순간 저가 잘못 들은 것이리라 생각했다. 츠키시마는 무어라 항변하기 위해 입을 떼었지만 먼저 선수를 치고 이야기를 이어가는 건 히나타였다.



“그, 2년 동안 사귀었잖아. 취업 준비 때문에도 바쁘고, 무엇보다도 넌 내가 귀찮잖아? 나랑 헤어지게 되면 매번 이렇게 시간을 내서 나를 만나러 올 필요도 없고. 또 돈도 덜 나가고…. 네 귀중한 시간도 안 뺏게 되는 거니까.”



뽀드득 거리는 소리가 멈추었다. 덜덜 떨리는 히나타의 두 손이 무릎께로 향했다. 무릎 위에 조막만한 두 손으로 주먹을 만든 채, 고개를 아래로 향했다. 그러니까 헤어지자.


이런 일방적인 통보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참, 헤어짐을 고하는 것도 히나타답다고, 츠키시마는 생각했다. 츠키시마는 정수리만 보이는 히나타를 빤히 쳐다보다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딱히 고개를 들었을 때 히나타의 모습을 볼 용기가 없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그냥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은 먹구름을 보려고 그랬던 것일 뿐이었다.


아무런 대답이 없는 츠키시마를 향해 히나타는 흐흐, 하고 괴기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제 가방을 챙기곤 마치 죄 지은 사람마냥 고개를 숙인 채로 자리를 떴다. 츠키시마는 통유리에 흐리게나마 비춰지는 히나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히나타의 말은 하나도 틀릴 게 없었다. 귀찮고, 시간을 굳이 내서 만나야 하고, 돈을 한 사람의 몫을 더 낼 필요도 없다. 눈치라곤 더럽게 없는 히나타가 이렇게 제 위치를 잘 아는 아이었던가.





* * *




 헤어짐이란 건 당연히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근 30년을 함께 한 노부부도 헤어지는 판국에 그들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고작 몇 년의 기간을 함께 한 사람이라고 찢어지지 못할까. 그래서 츠키시마는 늘 생각하고, 또 되내였다. 어차피 헤어질 사람. 어차피 끝날 관계. 평생 가지 못할 인연. 2년 째 교제를 유지하고 있는 히나타에게도 적용되는 부분이었다.

그런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는 걸 제일 먼저 알게 된 사람은 자신의 친 형, 아키테루였다. 아키테루는 츠키시마의 발언에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휘둥그레진 채로 아무 말 없이 저를 바라보다,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저었다.



“케이, 그건 히나타군에게 굉장히 실례되는 생각이야.”



츠키시마는 보고 있던 책을 덮으며 건조한 시선으로 아키테루를 바라보았다.



“평생 함께 할 것 같은 엄마와 아빠도 헤어지는 걸 봤는데, 그럼 그런 생각이 안 드는 게 이상한 거 아냐?”



아키테루는 돌아온 날카로운 대답에 대해 아무런 답변을 해주지 못했다. 그저 가시가 잔뜩 나있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동생을 안쓰럽게 쳐다볼 뿐이었다. 그 시선을 못 느낀 건 아니었던 츠키시마는 소파에서 일어나 제 방으로 들어갔다. 철컥, 문이 닫히는 소리가 마치 쉬이 열리지 않는 츠키시마의 마음이 자물쇠로 꽁꽁 잠그는 소리와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 * *




헤어짐을 통보받은 지 1주일이 되던 날, 늘상 가던 개인카페에 찾아가 딸기쇼트 케이크와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무의식적으로 오렌지주스 하나… 라고 말하려다, 츠키시마는 고개를 저었다. 헤어졌는데 버릇처럼 오렌지주스를 주문하려는 저의 모습이 조금 웃기기도 했다. 헤어짐에 대한 후유증이라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그였다. 그 정도로 히나타가 제게는 꽤 많이 거슬리고, 귀찮은 존재였던걸까. 점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님? 하고 물어왔다. 츠키시마는 손을 휘휘 저으며 오렌지 주스는 빼고요. 



“주문하신 케이크와 음료 나왔습니다.”



그 말에 츠키시마는 제가 시킨 음료와 케이크를 들고 늘 그랬듯 볕이 잘 드는 자리로 가 자리에 앉았다. 앉자마자 그는 은색 포크를 집어 들어 케이크를 한 입 배어먹었다. 입 안에 부드럽게 퍼지는 생크림도, 상큼한 딸기맛도, 폭신한 시트도 그대로일텐데. 이상하게 맛이 별로 좋지 않았다. 상태가 별로일까? 아니면 주인장이 바뀌었나? 츠키시마는 고개를 들어 카운터쪽을 바라보았다. 케이크를 보관하는 냉장고도 그대로였고, 주문을 받는 사장은 한결같은 미소를 띠며 고객을 응대하고 있었다. 츠키시마는 시선을 돌려 다시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끝 부분만 잘려진 케이크 위에 또 다른 은빛 포크가 드러났다.



ㅡ나도 한 입 줘!

ㅡ싫은데? 먹고 싶으면 너도 시키던가.

ㅡ째째시마!

ㅡ만날 얻어먹으려는 심보가 더 못된 건 알아?



두 사람의 포크가 맞대어져 챙- 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츠키시마는 코웃음을 치며 히나타의 포크질을 막아냈고, 케이크 하나 나눠주지 않는다며 히나타는 입술을 비죽였다. 그러다 팔짱을 끼곤 콧바람을 슝슝 뿜어내는 모습을 보고나서야 츠키시마는 히나타를 향해 케이크 접시를 밀어내주었다. 딱 한 입만 먹어. 단순하기 그지없는 히나타는 언제 삐쳤냐는 듯 표정을 풀곤 입에 케이크를 밀어 넣었다. 세상을 다 가진 미소를 지으며 츠키시마가 제일 좋다는 말은 절대 빼먹지 않았다. 두 사람은 비가 오는 날에도, 눈이 오는 날에도, 햇살이 좋아 볕이 쨍쨍한 날에도. 어떤 날씨에도 함께 이 자리에 앉아, 똑같은 음료를 시키고, 시덥지 않은 농을 건네며 시험공부를 하거나, 담소를 나누었다.


그래, 우리는 그랬구나. 츠키시마는 반하고 더 남아있는 케이크를 잘게 잘라 입 안에 우겨넣었다. 늘 맛만 좋던 케이크의 상태가 별로다. 돌덩이를 씹는 것만 같다. 이제 이 카페는 그만 와야지. 츠키시마는 쥐고 있던 포크를 손에서 놓았다.




* * *




단과대에서 히나타와 츠키시마가 간만에 마주쳤다. 근 2주 만에 보는 히나타였다.


수업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락커룸 앞엔 학생들이 개미떼처럼 바글바글 몰려있었다. 그 정신없는 공간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히나타를 보기 전까진 인파들로 인해 정신이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저와 히나타만 이 공간에 남겨진 것만 느낌을 받았다. 신기하게도 시끄럽게 웅웅 울리던 소음들은 음소거가 되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츠키시마는 찬찬히 히나타를 바라보았다. 뭐 하나 제대로 먹고 다니질 않았던 건지 볼살이 꽤 많이 빠져있었다. 그냥 나이가 들어 젖살이 빠지는 것이겠지, 하면서도 앙상해진 팔목을 생각해보면 또 그렇지 않단 걸 알 수 있었다.


아, 그 순간 츠키시마는 눈을 감았다. 차라리 지금이 겨울이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틈만 나면 바닥이 빙판길로 이루어진 날씨였다면, 도톰한 캐시미어 니트가 너의 말라비틀어진 팔목을 감싸,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않게 만들었을 텐데. 하얀 눈이 내리는 계절이었다면, 목도리에 칭칭 감겨져 퀭해진 너의 안색을 보지 않아도 됐을 텐데. 여름이어서 반팔을 입어 적나라하게 보이는 네 팔목에 괜히 미운 마음이 들었다. 목도리를 감을 필요가 없어 훤히 드러난 너의 창백한 얼굴빛에 화가 났다. 츠키시마는 못을 박기 위해 망치질을 하듯 규칙적으로 웅웅 울리는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른 후, 히나타를 바라보기 위해 다시 눈을 떴다. 


눈을 감은 그 순간이 찰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바글거리는 인파들 사이에서 더는 히나타가 보이지 않았다.





* * *




도서관에 앉아 이어폰을 낀 채 흘러나오는 라디오를 멍하니 듣고 있었다. 히나타는 라디오를 듣는 걸 꽤 좋아했다. 츠키시마는 허접한 대화 나눔을 왜 듣냐고 핀잔을 늘어놓기 바빴지만 히나타는 같이 들어주지 않으면 뽀뽀를 해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내놓곤 했다. 그게 무섭진 않았다. 그냥 귀여웠지. 그래서 츠키시마는 어깨를 으쓱이곤 이어폰을 하나씩 사이좋게 나누어 끼곤 노래가 잔잔히 흘러나오는 걸 잠자코 듣기만 했다. 토크쇼가 이어질 땐 함께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기도 했다. 서로 닮은 점 하나라곤 없는 줄 알았는데, 웃음 포인트 하나는 기가막히게 비슷했다. 츠키시마는 늘 그럴 때 마다 너 같은 바보랑 똑같은 주제로 웃는 게 기분 나빠. 라고 말은 했지만 히나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츠키시마, 근데 왜 웃고 있어? 그 말에 츠키시마는 큼직한 제 손으로 입을 가리곤 했다. 히나타는 손가락으로 그런 츠키시마의 손을 꾹꾹 누르며 해사하게 웃었다. 케이.



[후회하고 있나요?]



라디오 진행자의 멘트가 귀에 선명히 들려왔다. 회상에 젖어있던 저에게 1:1 독대하듯 물어오는 것만 같은 멘트에 츠키시마는 몸을 움찔거렸다.



[후회는 또 다른 후회를 낳죠.]



누가 몰라? 그건 사회 생활 좀 해봤다는 사람들은 다 아는 거야. 츠키시마는 신경질적으로 이어폰을 빼내었다. 투둑, 소리와 함께 책상에 이어폰이 놓였다. 소리가 조금 크게 났던 탓에, 한 공간에 같이 있던 자들의 시선이 츠키시마를 향했다. 츠키시마는 눈을 감았다. 그들의 시선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잡스러운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이어폰을 꼽았다. 아직 그 후회라는 주제가 끝나지 않은 건지, 아까 이어지던 팝송 배경음이 그대로 들려왔다. 츠키시마는 그대로 책상 위에 엎드려 눈을 느릿하게 껌벅였다.



[잡을 수 있지 않을까요?]



잡을 수 있을까. 솔직히 헤어진 지 시간이 꽤 지났고, 저 좋다고 강아지처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오는 아이에게 당장이라도 성큼 다가가 나와 다시, 함께 해보자. 라고 말을 건넬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연락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츠키시마는 코웃음을 쳤다. 구남친이 연락하면 찌질해보이기만 하지, 좋아할 리가 없잖아.  츠키시마는 그대로 두 눈을 감았다. 그 깊고 어두운 시야 속에서 흐릿하게 환히 웃는 히나타가 보였다. 아, 진짜 귀찮다. 츠키시마는 손등으로 눈을 벅벅 문질렀다. 




* * *




히나타와 츠키시마가 다니는 대학엔 일명 러브로드라는 곳이 있다. 

봄이 되고, 새내기들이 들어오면 고운 분홍빛 벚나무에서 꽃이 피어 살랑이는 바람과 함께 흐드러지는 장소로 유명했다. 그래서 4월은 커플이 유독 많이 생기는 달 중 하나였다. 어찌보면 대학 내 암암리의 관례 행사일지도. 그 곳엔 사람이 참 많았는데, 새벽엔 다들 잠을 자러 가는 시간인지라 바글바글하던 인파들이 유일하게 없는 시간대였다. 츠키시마와 히나타는 그 시간만 골라 로드 끝에 놓인 정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히나타는 늘 츠키시마의 허벅지에 머리를 뉘었다.



ㅡ케이.

ㅡ왜.



츠키시마는 히나타의 얼굴에 묻은 벚꽃잎을 떼어주었다. 손길에 간지럽다며 까르르 웃는 히나타의 볼에 손가락을 톡톡 건드렸다. 통통한 볼살을 누르는 게 꼭 찹쌀떡 같아. 그래서 츠키시마의 입가에 옅게 미소가 지어지려 했다. 



ㅡ넌 나 좋아해?



그 말에 츠키시마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졌다. 좋아하냐니.



ㅡ…쓸 데 없는 걸 물어보네.

ㅡ쓸 데 없는 거 아니거든!

ㅡ그건 왜 물어보는데.



히나타는 몸을 일으켜 츠키시마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츠키시마는 턱을 괸 채 히나타를 바라보았다. 똘망똘망하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호기심이 한껏 묻어나는 눈에 기가 눌려 츠키시마가 먼저 시선을 피하려던 때였다.



ㅡ그야 케이의 속을 모르겠으니까.



그 말에 츠키시마는 놀란 표정으로 히나타를 바라보았다. 속을 모르겠다고? 왜? 츠키시마는 얼빠진 표정을 지은 채 입을 꾹 다물었다. 물어보고 싶은데 입이 안 열린다. 왜 그렇게 생각했어? 츠키시마가 물어보려 하자, 히나타의 모습이 벚꽃잎으로 변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광경에 놀란 츠키시마가 그 꽃잎들을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단 한 잎도 잡히지 않았다. 왜. 왜 안 잡혔을까. 츠키시마는 커다란 제 손을 바라보았다. 케이는 바보, 라고 적힌 낙서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름답게 존재를 주장하는 반짝이던 별들도, 벚나무들도, 그리고 자기 자신도 검게 물들었다. 





* * *




아, 츠키시마는 눈을 떴다. 뜨여진 두 눈에 비춰지는 건 아이보리빛 천장이다. 아직 새벽인 건지, 푸르스름한 빛이 커튼 사이로 들어왔다. 선풍기를 틀어놓고 자도 온 몸이 땀이 흥건했다. 하아. 츠키시마는 한숨을 내쉬고 상체를 일으켰다. 찝찝했다. 샤워를 하고 싶어. 츠키시마는 일어났을 때의 버릇 중 하나가, 마른 세수를 하는 것이었다. 평소처럼 얼굴을 쓸어내리는데, 어라. 이상하네. 츠키시마는 손바닥에 묻어난 것을 바라보았다. 축축한 물기. 땀인가. 츠키시마는 고개를 돌려 탁상에 올려진 작은 거울을 바라보았다. 땀이라고 하기엔 눈가가 충혈이 된 듯 붉어져 있었다.



ㅡ츠키시마의 속을 모르겠어.



츠키시마는 거울 속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을 보다, 손을 뻗어 그 거울을 잡았다. 형편 없이 일그러진 인상에 츠키시마는 헛웃음이 났다. 꼴좋네.



“야.”



츠키시마는 똑같은 입모양으로 말하는 거울 속 자신에게 물었다.



“넌 왜 히나타를 좋아했어.”



히나타를 왜 좋아했어?

그냥 히나타가 사귀어주세요, 내가 더 잘 할게요! 내가 노력할 테니까 제발 고백만 받아주세요! 그런 당참을 좋아했어? 귀찮게 옆에서 땍땍거리는 걸 좋아했어? 아니면 놀리는 맛이 있어서 좋아했어? 아니, 애초에 그 애를 좋아하기는 했어? 츠키시마는 돌아오지도 않을 물음을 계속 뱉어냈다. 왜 좋아했어. 왜 좋아했어? 쓸데없다 생각한 감정 소모놀이를 왜 했는데? 그러게. 헤어짐이 당연하다 생각했다면 애초에 사귀지 말았어야 했잖아.



ㅡ오늘 어때? 나 되게 잘 차려입고 나왔지!



생각해보니, 그렇게 노력해오는 아이에게 따뜻한 칭찬 한 마디 해준 적이 있던가?

아니, 단연컨대 없었다. 그저 아이를 놀리기만 했을 뿐, 그 흔해 빠진 예쁘다는, 잘 어울린다는 칭찬 한 마디 해준 적이 없었다. 


좋아한다고 말해준 적은 몇 번이나 될까.

히나타가 10번을 말한다면 자신은 고작 1번. 혹은 소수점이라 생각될 정도로 그 네 글자를 입에 담아 말해준 적이 없었다.


한심하네, 츠키시마 케이. 거울 속의 츠키시마가 물어보는 츠키시마를 향해 비웃는다. 아아, 그래. 마음껏 비웃어. 연인에게 달콤한 한 마디 해주지 못하는 병신이 여기에, 침대 위에서 눈물을 질질 짜고 있으니.






* * *




비가 또 오기 시작했다. 이번엔 장마라고 한다. TV에서 지도가 띄워진 스크린을 보며 기상캐스터가 도쿄는 호우경보 지역이니, 우산을 꼭 챙기고 다니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츠키시마는 입에 노릇하게 구워진 토스트를 앙, 하고 물곤 집을 빠져나왔다. 요새 기상청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 같았는데, 오늘은 그래도 제 일을 완벽히 해낸다는 듯 하늘에선 굵은 빗방울들이 하염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츠키시마는 주황색 우산을 펼치고 문을 나섰다.


사실 어디로 갈지, 행선지도 정하지 않은 채 그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 종점 부근에서 살고 있던 터라, 버스 안엔 아무도 앉아있지 않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버스카드를 찍고 자리에 앉았다. 흩뿌려지는 빗줄기에 바깥 풍경이 눈에 담아지지 않았다. 핸드폰이나 볼까, 하고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려고 했다.



“…….”

“…….”



그 때, 저 멀리서 삑 하고 카드를 찍는 소리에 츠키시마는 고개를 들었다. 아. 온도차가 극명히 나뉜 두 시선이 마주쳤다. 건조함과 싸늘함이 묻어나는 히나타의 시선에 츠키시마는 입을 꾹 다물었다. 찰나의 순간, 그 몇 초 동안 츠키시마는 숨이 턱, 하고 막혀오는 것 같아 손으로 목을 쓸었다. 시선을 먼저 피한 건 츠키시마였다. 갈증이 났다. 창문을 열어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입에 담아버릴까 싶을 정도로, 목이 말랐다.


히나타가 앉은 자리는 제 옆 자리가 아닌, 조금 떨어져 있는 앞자리였다. 츠키시마는 2인석에 앉아 있었다. 히나타는 1인석에 앉았다. 츠키시마는 보고 있던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그의 시선이 히나타의 동글동글한 정수리에 내리꽂아졌다. 곧 버스가 출발한다는 신호로 문이 닫혔고, 몸이 살짝 흔들렸다. 덜컹거리며 버스가 다음 행선지를 향해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스에 사람이 하나 둘 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버스가 멈추고, 다시 출발하고. 사람의 수는 늘어나고. 그렇게 츠키시마의 시야에서 점점 히나타의 모습이 사라져갔다. 조금 더 보려 목을 길게 빼어보아도 히나타는 수많은 인파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음 행선지는 도쿄 사거리, 도쿄 사거리입니다. 안내멘트가 귀에 쏙 들어왔다. 도쿄 사거리는 히나타와 츠키시마가 데이트를 할 때 자주 다니던 행선지 중 하나였다. 누군가 내리겠다는 신호로 벨을 눌렀다. 츠키시마는 무릎에 놓여있던 제 손을 말아 쥐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츠키시마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곳에서 히나타는 내릴 것이다. 신기루처럼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ㅡ잡을 수 있지 않을까요?



츠키시마는 부르튼 아랫입술을 꾹 깨물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버스가 정차했다. 급작스런 정차에 몸의 균형이 흔들릴 뻔 했지만 츠키시마는 두 발에 힘을 꽉 주곤 활짝 열린 문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혹여나 사람이 다 내렸다 판단한 버스기사가 문을 닫아버릴까, 그게 두려워 츠키시마는 난생 처음으로 소리를 내지르며 가로질렀다. 들어주세요. 제가 지금 저기로 나간 거 같은 사람을 붙잡으러 가야해요. 가서 할 말이 있어요. 그 할 말이 너무나도 많은데, 왠지 오늘이 아니고선 다신 기회가 없을 거 같아요. 그러니까 제발. 츠키시마의 머리에 거센 빗방울들이 쏟아져 내렸다. 급하게 나선다고 제 자리 밑에 두었던 우산을 챙겨 나오지 못했다. 히나타를 쏙 빼닮은 주황색 우산. 주인을 잃어버린 우산.



“츠키시마.”



쏟아지는 비 때문인지, 시야가 흐릿했다. 그야 안경을 쓰고 있으니 빗방울이 덕지덕지 안경알에 묻는 건 당연했다. 안경을 벗어봤자 렌즈를 끼지 않았기에 눈 먼 장님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귀는 다르다. 청각은 살아있으니까. 쩍쩍 갈라진 목소리로, 이젠 이름이 아닌 성을 다정히 부르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 머리색을 쏙 빼닮은 샛노란 우산을 쓴 히나타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츠키시마는 히나타를 바라만 보았다. 아무런 행동도, 말도 내뱉지 못했다. 빗물을 너무 많이 들이마셔 고장나버린 저 버스 전광판처럼. 츠키시마도 고장이 나버린 것 같았다. 히나타는 츠키시마에게 다가갔다. 손을 뻗어 노란 우산을 츠키시마의 머리 위에 씌워주었다.



“감기 걸리잖아.”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환한 미소에 츠키시마는 울컥 하고 감정이 치솟아 올랐다. 우습다. 전 애인은 이젠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며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이 너무나도 가짢고, 한 편으론 대견해서. 그래서 제 꼴이 너무나도 우스웠다.



“나는 여기 앞에서 우산 사면되니까, 그거 쓰고 가.”



그럼 안녕.

츠키시마의 손에 우산을 쥐어주던 히나타의 손이 스륵, 하고 빠져나갔다. 뜨뜻한 열로 가득한 손이 멀어져 금새 츠키시마의 손에 냉기가 다시 감돈다. 츠키시마는 닿았던 손등의 감촉을 느끼기 위해 비어있던 손을 올려 그 곳에 대어보았다. 히나타의 온기. 따스하고 다정했던 제 연인의 감촉. 그 모든 게 멀어져가기 시작한다. 히나타의 걸음이 떼어졌다. 철벅, 하고 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너무나도 선명히 들린다. 츠키시마의 손이 움찔거렸다. 멀어져가는 히나타의 축 처진 어깨가 보였다. 츠키시마는 들고 있던 우산을 옆으로 집어던지곤 그 어깨를 붙잡았다.



“케이크가, 맛이 없어졌어.”



차마 얼굴을 볼 용기는 안 나. 그래서 츠키시마는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었다.

라디오도 재미없고, 그냥 모든 게 무료해. 옆에서 시끄럽게 떠들던 네가 없어서 그런가봐. 그러니까 히나타, 내가 다 잘못했어. 구질구질하지만 나랑 다시 사귀어줄 수는 없을까? 딱 이 몇 마디만 너에게 전해주면 되는데, 용기라곤 하나 없는, 볼품없는 네 전 애인은 그러지 못해. 사실 너한테 예쁘다고 말해주고도 싶었어. 가끔 우리 두 사람이 졸업하고 나서, 함께 동거를 하며 행복한 삶을 사는 걸 상상했다고도 말해주고 싶었어. 다른 사람들에겐 늘 말로 헤어짐은 당연한 거라 이야기 하고 다녔지만, 사실 그러지 않았어. 헤어짐은 당연하지 않았어. 너와의 헤어짐은 사실 생각해보지도 못했어. 그래서 너가 나에게 헤어지자고 말했을 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떠나보낸 게 참 후회돼. 네가 늘 치켜 세워주고 멋지다고 동네 방방 자랑을 해대던 너의 전 애인은 이렇게나 찌질하고 형편없어. 그런 나와 다시 만나줄 수는 없을까. 이번엔 내가 조금 더 잘 해보도록 노력할게. 너가 사랑받는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이번엔 내가 다가가 볼게. 그러니까 쇼요. 츠키시마는 지금 내리는 비처럼, 다다다 쏟아 붓고 싶은 그 말들을 하는 대신 히나타의 어깨에 제 고개를 파묻었다. 당장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얼마나 찌질한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이가서, 그래서. 

츠키시마의 입에서 옅은 숨이 연달아 내뱉어진다. 불규칙한 호흡 때문일까, 온 몸이 들썩인다.



“울지마, 츠키시마.”



예쁜 눈 다 망가져. 

히나타의 손이 츠키시마의 등에 향했다. 토닥거리는 손길에 이내 츠키시마의 입에서 엉엉, 하고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꺽꺽 우는 소리에 장단이라도 맞추듯 히나타의 손이 움직였다. 울지마, 괜찮아 츠키시마. 다 괜찮아 츠키시마. 츠키시마는 답지도 않게, 전 애인에게 안겨 펑펑 울었다. 기회를 줘도, 판이 만들어져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벙어리, 가소로운 츠키시마 케이. 


그래서 츠키시마는 히나타의 두 팔뚝을 꽉 붙잡았다. 

케이라고 불러줘. 고고하게 자존심만 높은 츠키시마는 그 짧은 한마디 조차 하지 못했다. 괴성과 가까운 울음 소리만이 맴돌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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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지 못하고, 하고싶은 말을 차마 하지 못하는 츠키시마를 참 좋아해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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