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 이어집니다.

여름은 여름인 모양이었다. 비가 그쳐 깨끗해졌던 하늘은 어느새 다시 먹구름이 몰려왔고, 눅눅한 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한바탕 비를 쏟아내었다. 빗소리는 고요한 밤이 되자 더 요란하게 들렸다. 오래간만에 겪는 불면의 밤이었다. 센토는 비가 오는 날이면 곧잘 악몽에 시달리고는 했다. 그렇게 잠을 설치다 깨면 더는 잠들지 못했다. 비만 내리면 유독 온몸이 차갑게 식는 듯했고 제일 처음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보통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의 첫 순간. 센토에게는 그게 열다섯의 어느 날이었다. 2년 넘도록 자신의 파편을 찾으려 애를 쓰는 동안 비 오는 날 꿨던 악몽은 점점 흐려졌다. 옆에는 따스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에게도 집이라고 부를 만한 곳이 생겼다. 새벽녘 빗소리에 갑작스레 깨 몸을 떠는 센토에게 따뜻한 우유를 데워주던 마스터도, 내심 걱정하는 마음에서 옆에 등을 대고 있어 주었던 미소라도 이제 비 오는 날에도 안심하고 잠들었다.

이전 같은 악몽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붙잡혀 있거나 도망치는 악몽이었던 것과 다르게 이번에는 센토가 하염없이 누군가를 부르는 꿈이었다. 악몽이라기보다 슬픈 꿈에 가까웠다. 센토는 자신이 누구를 애타게 부르는지도 모르면서 가슴이 먹먹해져 괜히 가슴께를 손으로 꾸욱 눌렀다. 몇 번 반복하던 그는 다시금 잠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원주율을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되뇌다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졌다. 쉬이 잠이 들 것 같지 않아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흐트러진 이불을 정리하고 센토는 조심스레 카페 나시타로 올라갔다.

마스터는 생각보다 잠귀가 밝다. 센토는 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거의 소리를 내지 않으며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차 티백을 뜯어내 물을 붓고 머그잔을 쥐었다. 빗소리가 시끄러워 다행이었다. 센토는 카페 나시타 창문 앞에 붙어 앉아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따뜻한 머그잔을 쥐고 한참 동안 창문 너머를 보았다. 창문에 부딪히는 빗방울이 꼭 눈물 같았다. 울어본 지 아주 오래되었는데도 왜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센토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반죠의 눈을 떠올렸다. 대부분 센토를 선명하게 바라보는 그 눈은, 가끔 유리 같다고 생각을 한다. 거기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견디지 못할 때도 있을 만큼. 어제 반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던 것은 그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 눈이 뜻밖에도 깊은 상처를 받은 것처럼 보여서? 맑게 빛나는 그 두 눈이 자신을 바라볼 때 눈물을 담고 있었나. 평소에는 선명하게 떠오를 그 얼굴이, 그 눈에 담긴 모든 것이 이번만큼은 비 내린 창문처럼 뿌옇다. 떠오르는 건 그의 쓸쓸한 등이었다.

 

반죠와 불면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카스미가 심하게 아프기 전만 해도 반죠는 어디든 머리를 누우면 단번에 잠들 수 있었다. 카스미의 몸이 급격하게 안 좋아진 뒤로부터 반죠는 병실에서 얕은 잠을 자곤 했다. 카스미가 조금이라도 고통스러워하면 기민하게 알아차리기 위해서였다. 그 습관은 카스미가 떠나고도 변하지 않았다. 요 몇 년은 자신도 모르게 자다가 깨곤 했다. 일어나면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는 일도 있었다. 그런 날은 아마 카스미 꿈을 꿨나보다, 추측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반죠도 잠들지 못하는 밤을 이해하곤 했다.

여전히 반죠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실도 있었다. 카스미가 떠나도 반죠의 삶은 이어졌다. 반죠는 그 사실이 제일 믿기지 않았다. 카스미는 반죠의 손을 붙잡고 몇 번이고, 반죠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좋아하는 것을 많이 만들라고 했지만 카스미의 장례식장에서 반죠는 그런 일 따위 다시 생기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모든 것에 벽을 세웠고, 그것이 옳다고 믿었다. 그런데 요즘은 어려운 문제를 풀어가는 것도, 나시타에서 간식을 먹으며 센토, 미소라와 시답잖은 이야기를 떠드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센토가 채점하고 처참하지만 나아지는 성적을 칭찬해주는 것도, 미소라가 놀리면서도 먹을 것을 하나 더 내어주는 것도, 마스터가 끝내주게 맛없는 커피를 내어주는 것도 그랬다. 반죠는 가끔 새벽에 깨긴 했지만, 다시 잠드는 날이 많아졌다.


“한동안은 괜찮았는데.”


반죠는 새벽에 눈을 떴다. 빗소리가 시끄러웠다. 저렴한 집세로 인해 집은 종종 빗물이 들이치기도 했고, 무엇보다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곧바로 들렸다. 반죠는 눈을 감고 누워있다가 10분을 채 못 버티고 이불을 걷었다. 눈이 어둠에 적응될 때까지 끔뻑거리던 그는 창문 사이로 비가 들이치지는 않을까, 무릎걸음으로 창문을 향해 다가갔다. 다행히 세차게 내리는 것에 비해 빗물이 들이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반죠는 창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창틀에 기대 얇은 커튼을 젖혀 바깥을 바라보았다. 툭, 툭 창문 위로 빗방울이 부딪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너머로 센토가 있는 나시타의 건물 방향을 가늠해보았다. 창문 위로 반죠의 손가락이 뽀드득 소리를 내며 서툰 화살표를 그렸다.

사실은 그렇게 나오고 싶지 않았다. 여러 번 생각한 결론은 그것이었다. 화가 나서 쏟아붓고 뛰쳐나왔지만, 반죠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방황하던 반죠는 결국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헤매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반죠가 센토에게 뱉어낸 말은 날카로웠고, 그 말은 자신을 해치고 말았다. 반죠는 자신이 줄곧 들어왔던, 근원도 모를 질 나쁜 소문은 아무래도 괜찮았다. 익숙해서 그런 말에 화가 나지도 않았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어도 넘어갈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센토와 관련되면 그러질 못했다.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퍼트리고 다니는 놈들을 손봐준 일을 센토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센토가 그 소문 자체를 모르길 바라서였다. 우습지만 센토의 기사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괜한 짓을 하지 말라는 센토의 말은 반죠에게 날카로운 상처를 남겼으나, 그 말을 하는 센토야말로 센토 자신에게 상처를 내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센토에게 화가 났다. 화가 난 나머지 비겁하게 물었다. 나는 ‘그런’ 소리를 들어도 되냐고. 웃기는 일이었다. 반죠는 이미 자신을 ‘그런’ 소리를 들어도 되는 사람으로 판단하고 있으면서, 센토가 센토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게 싫어서 몰아붙였다는 것이 모순적이었다.

반죠는 아마 센토가 그들이 말한 대로 어딘가 나쁜 구석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센토에게 먼저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반죠는 본능적으로 그게 자신의 욕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카스미는 여기까지 다 알고 있었을까? 반죠가 좋아하는 것을 만들어나갈 거라는 사실을. 반죠는 창문에 입김을 불었다. 손가락으로 글씨를 끄적였다. 키류 센토, 서툴게 쓴 이름을 황급히 지웠다. 비는 여전히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반죠는 이름을 지우고도 오래도록 창문 앞에서 얇은 커튼 너머의 비 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다음날 눈을 뜬 반죠는 간만의 불면으로 피로했으나 정신만은 또렷했다. 시리게 차가운 물로 얼굴을 적시고 빳빳하게 다려놓은 교복 와이셔츠를 입었다. 아침 대신으로 프로틴을 탄 우유를 한 컵 마시고 반죠는 문밖으로 나섰다.

어젯밤 그렇게 비를 퍼부은 것이 거짓말이라는 듯 하늘은 놀랍도록 새파랬다. 구름이 전부 걷히지 않았지만, 비를 더 뿌릴 것 같지는 않았다. 새파란 하늘에 구름이 웅장하게 자리 잡았다. 반죠는 보폭을 크게 성큼성큼 걸었다. 반죠의 워커가 물웅덩이를 밟을 때마다 물이 튀었다.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빗물이 고인 웅덩이를 물끄러미 보았다. 물웅덩이는 하늘을 그대로 비추었다. 누군가 사진의 화질을 높인 듯 선명하게 느껴지는 하늘은 어제 했던 고민이 모두 무상한 것처럼 느껴지도록 했다.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았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으나 센토와 떨어져 있는 동안 정말 오랜만에 외롭다고 느꼈다.

반죠는 카스미를 잃은 이후로 단 한 번도 외롭지 않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정도만 다를 뿐이지 카스미를 가슴에 묻은 이상 그 정도의 외로움은 평생 가지고 가야할 것이라 믿었다. 외로움을 안고 사는 반죠였기 때문에, 아이들 사이에서 겉돌던 반죠가 옥상에서 센토를 만났을 때 직감했을지도 모르겠다. 친구와 어울릴 시간에도 옥상에 혼자 올라와 있던 센토가 혹시 반죠 자신만큼 외로웠던 것은 아닐까. 그제야 반죠는 센토가 옥상에 있던 이유를 추측해보았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심상치 않았던 소문도 떠올랐다. 다시 회상하면 그의 등이 지나치게 올곧았던 것도 같다.

그 등과 마주친 이후로도 반죠는 외로웠다. 다만 여전히 외로웠어도 견딜 만했다. 어떤 꼬리표도 붙지 않는 반죠 류우가의 본모습을 키류 센토가 바라봐 주었다. 그의 앞에서라면 반죠가 커다란 상실을 겪었다 해도 다시금 삶을 채워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대가를 바라지도 않고, 반죠를 특별 취급하지도 않는, 그저 그곳에 존재하는 순수한 호의. 그것은 반죠의 생채기 난 마음에 따스하게 내리쬐었던 빛이었다.

내가 잘못했어.

반죠는 입 밖으로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신호등의 불빛이 푸르게 바뀌었다. 반죠가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내딛자 신호등의 파란 불빛은 점멸하기 시작했다. 점점 빠르게 반짝이는 신호등에 맞춰 반죠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외로운 사람인 걸 은연중에 알고 있었으면서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센토를 몰아붙인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센토의 얼굴을 보고 말하고 싶었다.

반죠는 학교 정문 즈음에서는 거의 달리고 있었다. 등교하던 학생 몇몇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반죠를 힐끗 보았다. 반죠는 이를 꽉 깨물었다. 어떻게 말을 할지, 어떤 방식으로 마음을 전해야 할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머릿속은 정리되지 않은 말로 정신없었다. 그래도 무언가를 전해야겠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반죠가 내딛는 발걸음마다 웅덩이에서 물이 찰박찰박 튀었다. 바짓단에는 빗물이 튀었지만 아무래도 괜찮았다.

반죠는 학교 앞에 멈춰 섰다. 간만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허리를 굽히고 숨을 고르다가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어느덧 한없이 파랬다. 반죠는 처음 만났던 옥상을 떠올렸다. 사라질 것만 같던 그 등을, 오늘만큼은 반드시 잡겠다는 반죠의 걸음걸이가 결연했다.

반죠는 실내화로 갈아신고 평소에 센토와 보충 수업을 하는 교실까지 계단을 두 칸씩 올랐다. 허벅지가 뻐근해 왔지만, 이 정도의 둔통은 오히려 반가웠다. 교실에 다다를수록 반죠의 표정은 밝아졌다.


“반죠!”


그때 선생이 복도에서 반죠를 불렀다. 반죠는 명백히 선생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지금은 센토 쪽이 급했다. 그는 잠시 멈추어 손을 대충 휘저었다.


“다음에요! 지금은 센토한테...!”

“그게! ...이제 보충수업을 받지 않아도 좋을 것 같구나.”


박차고 뛰어 올라가려던 반죠의 발이 멈추었다. 선생의 말에 반죠는 멍하니 그를 내려다보았다. 센토가 자신을 포기한 줄로만 알았다. 그 생각이 가장 처음으로 들었다. 반죠는 순간적으로 정지한 채 계단 난간을 붙잡았다. 선생의 말소리가 현실감 없게 느껴졌다. 반죠가 선생이 서 있는 곳을 향해 터덜터덜 한 칸, 두 칸 계단을 내려왔다.


“방금 뭐라고요?”

“그... 센토가 학생들과 갈등이 있었어.”

“갈등?”


반죠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센토가 그만둔 이유가 반죠를 포기해서가 아닐 수도 있었다. 말을 꺼내는 본인도 민망한지 선생이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아가며 말을 이었다.


“그, 아마 1~2학년 녀석들이었나 본데, 센토가 있는 데서 조금 말을 안 좋게 했나 보지.”

“센토에 대해서요?”

“아니, 애들이 말하기로는 너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고 하더라. 그런데 센토가 갑자기 혼내기 시작하더니 그게 과해져서, 지나가던 한 선생이 중재시킨 모양이야.”


반죠는 여태껏 아무 이야기도 없었던 센토가 야속했다. 그제야 반죠는 센토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마는 것이다. 아마 자신이 아무 말도 없이, 어떻게든 웃어넘기려고 했을 때 센토도 이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으리라고.


“센토 그 녀석, 모범생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거 같구나. 그런 이유로 보충수업은 인제 그만 해도......”

“먼저 보충수업 받으라고 한 건 선생님이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멋대로 모범생 취급하다가 이제는 문제아 취급이에요?!”


반죠는 주먹을 꾸욱 말아쥐었다. 센토가 보고 싶었다. 키류 센토는 여전히 키류 센토일 것이다. 선생에게 모범생 취급을 받던 센토도, 반죠를 위해 화낸 센토도 반죠에게는 동일한 센토였다.


“난 계속할 거라고요!”


통보하듯 선생에게 소리치고 반죠는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조금 전보다 빠른 속도로 반죠는 센토가 있을 곳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가 어디에 있든 찾아내야 했다. 찾아내서, 반드시 할 이야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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