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니 후두둑 창문을 거칠게 때리는 빗소리가 들렸다. 

“하암.”

유하는 기지개를 켜고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밖을 나가보니 거실은 휑했다. 주방 역시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한결이…. 오늘은 일찍 먼저 나갔네.

유하는 어젯밤 시험을 공부를 하느라 새벽 3시쯤에 잤다. 시험은 오후라서 늦게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11시였다.

“이제 밥 먹고 나갈 준비해야겠다.”

그러고 보니 어제 한결의 얼굴을 아주 잠깐 5분 정도밖에 못 본 것 같았다. 서로 너무 바쁘다보니 키스고 뭐고 그런 건 없었다. 가벼운 스킨십 조차도.

요즘 한결은 뭐에 홀린 듯 나가면 밤늦게 들어왔다.

어떤 때는 유하를 보러 잠깐 들렀다가 바로 본가로 들어가기도 했다.

이…이런 게 독수공방이라는 걸까.

아주 조금은 한결의 손길이 그리웠다.

어깨를 손으로 감싸 안았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허전했다.

핸드폰 화면을 쳐다보았다.

한결에게서 톡이 하나 들어와 있었다.

[일찍 강의가 있어서 먼저 나갈게요. 쉬고 천천히 와요.]

유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미간을 찌푸렸다.

흐음…. 하트 표시도 없잖아. 원래는 두세 개씩 꼭 보내더니. 애정이 식은 거야.

답 안 보낼 거야. 하나도 한결 같지가 않아. 초심이 흔들리고 있어.

“하아.”

유하는 머리카락을 마구 쥐어뜯었다.

나…지금 뭐 하니? 집착하네. 미쳤다. 이러다가 미저리 되는 게 아닐까?

유하는 지금 한결의 매력에 푹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함정에 빠진 것처럼 머릿속에 한결의 잘생긴 얼굴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한결이가…. 보고 싶다. 어디서 이 녀석을 볼 수 있지?

그때 천둥 번개가 쳤다.

우르르쾅쾅!

거실 안이 순식간에 환해졌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유하의 눈이 기쁨으로 반짝 빛났다.

그래! 이렇게 날씨가 사나운 날은 같이 자기로 했잖아. 한결이 혼자 자기 힘들다고 했어.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주먹을 꼭 쥐었다.

두근두근.

유하는 밤에 한결과 같이 잘 것을 생각하자 얼굴이 빨개졌다.

막상… 하려고 하니 왜 이렇게 민망하지. 

달력을 보니 다행히 내일은 주말이었다. 수업이 없는 날이었다.

그래도…우리 이제 보통 사이가 아닌데 할 건 해야지.

하아. 조금 두렵고 무섭다. 어휴.

쏴아아아.

유하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래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일단 전화를 해보자.

[한결아, 너 오늘 언제 들어와.]

[왜요? 저 시험 끝나면 회사로 갔다가 저녁에 들어갈게요.]

[어…. 그냥. 난…좀. 궁금해서. 일찍 들어와.]

[네.]

유하는 미소를 지으며 헤벌쭉 웃었다.

오늘은 일찍 들어오는 것 같았다. 늦게 들어오는 날 한결은 먼저 자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새삼스레 고개를 들어 거울을 쳐다보았다.

“요즘 시험 공부하느라 피부가 좀 까칠해졌어. 오는 길에 마스크팩을 하나 사야겠어. 남자도 꾸미는 시대야.”우르르쾅쾅.

천둥번개가 소리가 이번은 아주 컸다.

어휴. 속이 다 뻥 뚫리네. 소리 듣기 너무 좋다.

원래 비 오는 소리를 좋아하는 유하였다. 촉촉이 젖은 유리창에 빗물이 시원하게 흘렀다.

오늘은 하…한결이가 분명히 좋아서 바보처럼 헤벌쭉 웃겠지. 힛. 

한결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유하도 행복했다.

유하는 시계를 보고 생각에 너무 빠져 있었구나 싶어 화들짝 놀라며 욕실로 들어갔다.


*


시험 치기 전에 휴게실에서 동훈과 잠시 잡담을 나누었다. 눈밑에 다크서클이 진한 소현이 두 사람을 보자 반갑게 인사하며 다가왔다.

“선배 안녕하세요. 시험 준비 잘 되어가나요?”

“응. 뭐 그럭저럭.”

유하가 대답했다.

“뭐…. 대충. 과제 때문에 나는 2일을 밤샘 작업했어.”

동훈이 피곤한지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결이는요? 좀 전에 같이 시험 쳤는데….”

“응. 아마 본가나 회사 갔겠지. 요즘 집안 문제로 많이 바빠. 난 오늘 실물도 못 봤어.”

유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소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네? 한집 사는데 그렇게 바빠요?”

“응.”

유하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따로 자요?”

“어?”

유하가 소현의 돌직구 질문에 허를 찔린 듯 움찔했다.

얘가 무…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연히 따로 자지. 아직 그런 사이는 아니야. 아마도 그렇게 되겠지만.

동훈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얼굴을 붉혔다.

당황한 유하는 애써 침착하게 답했다.

“야, 소현아. 당연히 따로 자지. 그걸 말이라고 해?”

“질문이 좀 이상하죠. 헤헤.”

소현이 무안해하며 혀를 쏙 내밀며 머리를 긁적였다.

“한결이는 얼굴 괜찮아 보였어?”

“네. 뭐 그 녀석 좀 피곤해 보였지만 더 피곤에 쩔은 애들이 많다 보니 뭐 그냥 그랬어요.”

유하는 소현의 말에 안심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한결의 안부를 물을 날이 올 줄이야. 

“한결이 1학년 과 탑으로 들어왔잖아요. 중간도 굉장히 잘 쳤다고 하던데. 기말도 아마 특별한 일 없는 한 1등 하지 않을까 싶어요. 성적에도 욕심 많아요.”

“어? 한결이가 1등 이였어?”

유하는 놀라서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역시…바…바보가 아니였어. 한나 누나의 말이 사실이었나 봐. 한결이 그럼 나한테는 바보처럼 연기를 한 걸까?

동훈이 부럽다는 듯 유하를 힐끔 보았다.

“유하야, 너 땡 잡았네. 크큭. 한결이 못 하는 게 없어. 꽉 붙잡아야겠다.”

“어.”

유하는 내심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한결이 애정 공세를 해 올 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사랑이 많이 식었다. 

노…놓치고 싶지 않아. 한눈팔게 두고 싶지 않아. 

갑자기 소유욕이 마구 끓어올랐다.

도대체가 알 수 없는 게 유하는 한결이 자신의 어떤 매력에 꽂혔는지 알 길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특이 취향이란 걸까? 이상한 거 좋아하는.

유하는 애써 불안한 마음을 달래려 뺨을 긁었다.

후회가 되었다. 

한결이 좋다고 마구 달려들 때 은근슬쩍 넘어갈 걸. 나는 정말 바보 멍청이야. 어휴.

유하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때 소현의 코에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렀다.

“소현아, 너 코피!”

동훈이 서둘러 소현에게 휴지를 내밀었다.

소현은 휴지로 코를 막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화장실로 뛰어갔다.

“소현이도 보기와 다르게 성적에 욕심 많나 봐.”

“그게….”

동훈이 유하의 눈치를 잠깐 살폈다가 말했다.

“소현이가 1학년에서 2등으로 들어왔데. 은근히 한결이한테 라이벌 의식 있는 것 같더라.”

“뭐?”

유하는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한결이 상대라면 힘들겠다. 한결은 은근히 완벽주의자라서 미술 과제도 공들여서 열심히 했다. 당연히 유하가 보기에도 결과물이 좋았다. 물론 시간도 많이 들이고 고급 미술 재료를 사용해서 그런지도 몰랐다.


*


유하는 시험을 치고 집으로 서둘러 돌아왔다.

시험은 망쳤다. 하루 이틀 시험을 망친 것도 아니고 이제는 포기 상태가 되어버렸다. 다행히 이 과목은 과제 비중이 컸기에 나름 안심했다. 

가방에서 화장품 가게에서 산 마스크팩을 꺼냈다. 화장품 아주머니가 얼마나 장사수완이 좋던지 향수도 하나 사고 말았다. 

자세히는 잘 모르지만 이성을 유혹하는 페로몬향이 난다고 했다. 

나중에 자기 전에 뿌려야지.

일단 씻고 얼굴에 팩을 붙였다.

어머니나 동생이 얼굴에 팩을 붙이고 피부 관리하는 걸 많이 봐 왔지만 직접 돈을 주고 사서 하는 건 처음이었다.

하얀 종이를 얼굴에 붙이니깐 신기하게도 착 달라붙었다.

주의 사항에 웃으면 오히려 주름이 지니깐 웃으면 안 된다고 했다.

다행히 밖은 여전히 비바람이 몰아치고 잊을만 하면 천둥 번개가 팡팡 터졌다.

오늘은 분명했다. 강한결이 달려들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준비하는 거 자체가 뭔가 모르게 부끄러웠다.

유하는 티비를 틀었다.

볼 게 없어서 채널을 돌리다 예능 채널을 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깊이 빠져들어서 어느새 웃고 있었다.

“크크큭.”

아무리 웃음 참으려고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어느새 웃고 말았다.

어휴. 이러면 오히려 주름만 진다고 했는데. 참자. 참아야 해.

“캬하하항.”

유하는 결국 배를 잡고 웃고야 말았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웃겨. 미치겠네.

철컥.

현관문이 열리고 한결이 들어왔다.

“선배! 뭐 해요?”

유하가 깜짝 놀라서 얼굴을 돌렸다. 

“왁. 깜짝이야. 얼굴에 무슨 가면 같은 걸 썼어요!”

한결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 이거?”

유하는 얼굴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거 팩이야. 요즘 시험 준비한다고 피부가 좀 까칠해진 것 같아서….”

입술이 떨렸다.

“아…. 팩도 하고 그랬어요? 처음 보는데…. 누구 잘 보일 사람이라도 있어요.”

한결이 눈을 흘기며 제비처럼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야….”

유하가 머뭇거리며 말을 얼버무렸다.

내가 잘 보일 사람이 너밖에 더 있어. 근데 이건 정말 닭살 멘트라서 난 죽어도 못해.

“어떤 놈팡이예요?”

한결이 장난스레 눈을 마주 보며 유하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야잇. 바보. 너! 너밖에 내가 더 있어.”

유하는 오글거리는 말을 내뱉고 수치스러워서 팔뚝에 닭살이 오돌토돌 돋았다.

악…. 강한결한테 옮은 게 분명해. 내가 이런 말을 하다니. 죽고 싶어.

“넹?”

유하의 말에 놀란 한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광대가 높이 솟았다. 입꼬리가 금세 귀에 걸렸다.

바보다. 한결이 오랜만에 바보가 되었다.

유하는 한결의 환한 미소에 텐션이 한껏 업 됐다.

근데 피곤해 보이네. 안색이 안 좋아. 어젯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잔 게 아닐까?

한결은 유하를 품으로 바짝 당겨서 꽉 끌어안았다.

어깨에 얼굴을 마구 부볐다.

“너무 귀여워요.”

두근두근.

한결의 심장 소리가 유하의 가슴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한결이 유하를 마주보며 말했다.

“예쁜 얼굴 보고 싶어요.”  

유하는 마스크팩을 뗐다. 아직도 촉촉한 마스크팩이었다. 불현듯 엄마와 동생이 마스크팩을 다 떼고 목이나 팔에 남은 에센스를 마구 문질렀던 게 생각났다.

한결의 품에서 잠시 벗어났다.

“잠깐만. 이게 남은 게 아까워서.”

유하는 목과 팔에 마스크팩을 꽉 짜서 남은 에센스를 발랐다. 목과 팔이 번들거렸다. 달콤한 향이 났다.

한결이 유하의 목덜미 냄새를 킁킁 맡았다.

“선배한테서 좋은 냄새 나요.”

우르르콰쾅.

때마침 천둥 번개가 쳤다.

“오늘…. 너 내 방에서 자냐?”

유하가 몹시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 물었다. 다 쓴 마스크팩을 손에 쥐고 주물럭거렸다.

이게 뭐라고 너무 쪽팔려서 죽고 싶다.

“네?”

한결은 처음에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멍하니 유하를 바라보았다.

“!!!!!”

한결이 애매모호하게 웃었다.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유하는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서 터져버릴 것 같았다.

몸이 덜덜 떨리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 너 복근 잘 있는지 궁금해.”

수줍어서 들릴 듯 말 듯 조그맣게 말했다. 

이…이 정도면 눈치챘겠지. 어휴, 부끄러워. 미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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