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마지막 구절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드라마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드라마의 마지막화도.

모든 연기가 끝나고 제자리로 돌아갈때, 그 배우들의 표정은 어떠할까. 지금까지 수고했어요, 하고 본인들 자리로 돌아가겠지. 


[우리 정식으로 사귀기로 했다.]


태형이형은 웃음을 머금은채, 최대한 담담하게 얘기했다. 하지만 얼굴엔 미소가 가득이다. 윤기형은 대놓고 내 눈치를 보고있고, 지민형은 머리를 쓸면서 팝콘을 먹었다. 난 소주 세잔을 연달아 마셨다. 그리고 박수를 짝짝 쳐줬다.


[축하한다.]

[.............]

[축하해.]

[.............]


윤기형은 얼굴을 있는채로 찌푸리며 내 어깨를 잡고 몸을 흔든다. 됐어. 후련하다.


"오래가라."

"............."

"오래가."


이젠 정말로 끝이다.

정말로 끝..


***

사랑한적 없다.

그냥 뒤늦게 객기를 부린거였다.

내 맘대로 안되는게 전부 짜증나서, 객기를 부리려고 그 때 술집에 쳐들어간게 틀림없다.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단톡방이 시끄러웠다. 오늘 다 시간되지? 술 마시는거다. 일어나자마자 술을 먹자는 태형이형의 말에 ㅇㅇ, 대충 카톡하고 일을 나갔다. 오늘 왠일로 이렇게 일찍 출근했냐며, 친한 트레이너형이 날 보고 인사했다. 나는 꽤나 컨디션이 좋았다. 해장도 하지 않았다. 이 때쯤 지민형의 얼굴을 본다는 핑계로 커피 한잔 사러갔어야됐는데 그냥 안갔다. 


아는형이 오랜만에 헬스를 다시 끊었다. 석진형이라고 대학교때부터 알던 형. 우리들 결혼식장에서 축가까지 불러준 형이다. 그 정도로 친하다. 석진형은 오자마자 잘 지냈냐고, 지민형은 어디있냐고 물었다. 나는 이혼했다고 했다. 석진형의 표정이 한순간에 구겨졌다. 나는 별일 아니라고 웃어넘겼다. 


머리를 어디서 한 대 얻어맞고 온것같았다. 컨디션이 이상하게 너무 좋았다. 저녁 여섯시가 돼자 슬슬 씻고, 헬스장을 나섰다.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대충 가려다, 집에 들려서 오랜만에 옷을 차려입었다. 거울을 보면서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이제 나가야겠다, 하며 나갔을때.


술집 앞에서 어정쩡한 자세로 기다리고 있는 지민형이 보였다. 나는 인사도 하지 않고 지나쳤다. 지민형이 날 봤는지 뒤에서 내 어깨를 홱 잡았다. 눈썹 한쪽이 찡긋 올라갔다. 왜 아는척 안하냐는 얼굴. 뾰루퉁하고 심술이 잔뜩 난 얼굴.


이제 그냥 전부 귀찮다.

어차피 끝이잖아. 끝..


"너 아는체 안하냐?"

"아.. 뭔 생각하느라."

"다른 애들은 안온거지?"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신경질적인 말투에 지민형이 내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난 저 표정도 싫다. 그냥 좀 지나치면 안되냐. 말 좀 걸지말고 확, 그냥. 나는 지금 존나 삐뚤어져있다. 사춘기가 막 온 중학생처럼. 여기저기다 사실 시비를 걸고 다 때리고 싶다고.


"오랜만에 꾸미고 왔네?"

"그냥.."

"왜."

"초라해보이기 싫어서."


[초라해보이기 싫어서 그랬어.]


언젠가 지민형이 했던말이 떠올랐다. 

내가 앞에서 삼겹살을 구워주고, 먹고있는 지민형의 얼굴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을때. 지민형은 체념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 때 어떤 기분이었더라. 그렇게 말하거나 말거나 먹는 모습만 보며 뿌듯해 했었지. 


내 말에 지민형이 잡았던 어깨를 놓았다. 스르르 떨어지는 지민형의 손.


"나 어제 봤다."

"뭘?"

"어제 너네 둘이.."

"..........."

"아니다."


나는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지민형의 표정을 관찰했다. 찰나에, 지민형의 표정이 창백하게 변했다. 어색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보기 싫어서 술집안에 먼저 들어갔다. 몇 분뒤 태형이형과 윤기형이 나타났다. 멀리서 손을 흔드는데, 나도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웃을 수 밖에 없었다.


***


"자. 좋은 날이다. 노래 부르자. 노래."


윤기형만 신나서 옆에서 진을 치고. 나는 말 없이 술만 퍼마셨다. 태형이 형은 이미 취해서 노래방 테이블에 엎어지고, 지민형도 말없이 술만 퍼마셨다. 나는 윤기형이 안쓰러웠다. 괜히 옆에서 신나는척 탬버린을 흔들어도 대꾸조차 없는 우리들. 태형이형은 취해서 쓰러지기 전까지 혼자 마구 웃다가, 또 혼자 쓰러졌다. 


"정국아. 노래 한곡 부를래?"

"안해. 씨발."


욕을 하자 윤기형이 주먹으로 내 등을 때렸다. 지민형도 마찬가지였다. 형이나 불러. 지민형이 윤기형에게 신경질을 냈다. 윤기형은 같이 부르자며 지민형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어깨동무를 해도 지민형은 대답도 없다. 윤기형은 쩝쩝거리며 노래를 예약했다.


좋은 사람


[오늘은 무슨일 인거니 울었던 얼굴 같은걸]


윤기형의 얼굴이 노래방 불빛에 반짝거렸다. 술집에서부터 시끄럽게 웃던 윤기형의 얼굴은, 어느새 사라져있었다. 진지한 얼굴로 노래를 부르는 윤기형의 얼굴을 보고 꺄르르 웃었다. 윤기형이 느끼한 얼굴로 윙크를 했다. 속없이 웃고있는 나를 지민형이 노려봤다. 


[혹시 넌 기억하고 있을까. 내 친구 학교 앞에 놀러왔던 날 우리들 연인같다 장난쳤을때 넌 웃었고 난 밤 지새웠지~]


윤기형은 삑사리 까지 내며 열창을 했다. 눈을 감고 허리까지 젖히며 노래를 부르는 윤기형을 보며 배를 잡고 웃었다. 지민형은 시끄럽다며 귀를 막았다. 


윤기형은 웃으면서 지민형을 가리켰다.


[니가 웃으면 나도 좋아. 넌 장난이라 해도. 널 기다렸던 날 널 보고 싶던 밤. 내겐 벅찬 행복 가득한데. 나는 혼자여도 괜찮아. 널 볼수만 있다면. 늘 너의 뒤에서 늘 널 바라보는 그게 내가 가진 몫인것만 같아.]


지민형은 윤기형의 손가락을 부러트릴모양인지 손가락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윤기형은 새빨개진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니가 웃으면 나도 좋아.

넌 장난이라 해도.


***


"담배 하나 줘봐."

"안핀다며."


윤기형은 화장실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는 윤기형의 운동화를 발로 툭 쳤다. 윤기형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윤기형을 깨우자마자 담배를 뜯기 시작했다. 한번도 안펴봤는데. 역시나 담배에 불을 붙이자마자, 켁켁거리며 담배꽁초를 아무데나 버려버렸다. 윤기형은 쯧쯧, 거리며 날 쳐다봤다. 윤기형은 긴 손가락으로 담배를 피웠다. 나는 담배도 피지 않으면서 옆에 나란히 쪼그려 앉아 윤기형을 쳐다봤다.


"대체 누구 편이냐. 형은."

"뭔 소리야."

"아니. 지민형이랑 나랑 잘 되는거 바라는거 아니었어? 오늘 아주 좋아서 난리를 치더만."

"편은 무슨. 그냥 난 니네가 잘 되면 좋은거고, 아니면 마는거지."


윤기형은 참 현실적이다. 난 그 말에 할말이 없어서 윤기형의 운동화만 쳐다봤다. 윤기형은 운동화로 담배를 비벼끄고 내 어깨를 두드렸다.


"박지민이 널 좋아하는것같아서 이어주려고 한거야."

"아닌것 같은데."

"그게 걔가 행복해지는 길이니깐."

".............."

"근데 이젠 아닐수도 있지."


윤기형은 비상문을 열고 다시 노래방안으로 들어갔다. 


근데 이젠 아닐수도 있지.


맞아. 이젠 아닐수도 있지.

이제 인정해야되는데.


***


"박지민. 행복해라!"


윤기형은 노래방에서 나오자마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지민형은 윤기형을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보며 태형이 형을 업었다. 태형이 형의 무게에 지민형은 휘청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나는 뛰어가서 태형이형의 어깨 한쪽을 들쳐업었다. 그 때 시선이 느껴졌다. 지민형의 시선. 술에 취하니, 지민형이 하나로 보였다가 두개로 보였다가. 취한티를 내고 싶지 않아서 눈을 부릅 떴다. 또 취해서 실수하지 말아야지.. 이번엔.. 이번엔 정말로.. 


"뭘 쳐다봐. 데려다 줄라고. 혼자 이걸 어떻게 들어."

"아.. 고맙다."


나는 태형이 형의 오른쪽 어깨를 들쳐업고, 지민형은 태형이형의 왼쪽 어깨를 들쳐업고,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아스팔트에 운동화와 구두가 부딪히는 소리만 들렸다. 이따끔씩 차가 지나갈때 쌩쌩거리는 바람소리와. 그리고 지민형의 더운 숨소리. 


"태형이형 집 어디야?"

"앞으로 10분은 걸어가야돼."

"술 한잔 더 할래?"

"............"


걸음이 멈췄다.

나도 그래서 우뚝 걸음을 멈췄다. 

태형이 형은 가운데서 눈을 꼭 감고 자고있고, 우리는 태형이 형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쳐다봤다. 등 뒤까지 삐죽 땀이 났다.


"얘 어디다 버리고 술 한잔 하자고."

"태형이를 어디다 버려."

"아, 몰라. 잘생겼으니깐 어딜 가든 굶어죽지 않고 잘 살겠지."


내 말에 지민형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나는 앞서 지나가는 택시를 불렀다. 지민형이 뒤에서 내 자켓을 꽉 쥐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지갑에서 만원짜리를 대충 꺼낸채 택시기사한테 쥐어줬다. 뭐하는거야, 뒤에서 꼬집어도 나는 태형이형을 택시 뒷자석에 밀어넣고 문을 닫았다. 취해서 아무리 때려도, 꼬집어도 안 아프지롱. 휴.


 나는 그제서야 뒤를 돌아봤다.

셔츠의 긴 소매때문에 손등이 반쯤 덮힌 지민형의 손과, 당황해서 시선이 흔들리고 있는 형의 얼굴을. 나는 아무곳이나 아무렇게든 걸어갈 모양으로 발을 뗐다. 지민형은 천천히 내 뒤를 따라왔다. 운동화가 뒤늦게 아스팔트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어디 갈건데."

"몰라. 나 여기 길."

"지금 장난하냐?"


그럼 아까 거기 술집으로 다시 갈까?


그리고 우뚝 걸음을 멈췄다. 


"너 나한테 할 말 있냐?"

"몰라. 일단 술마시고 얘기해."

"아니. 지금해. 시간낭비하기 싫으니깐."


나는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침을 꿀꺽 삼키고 쳐다도 보지 않았다.

한참동안 서있다, 지민형을 향해 뒤를 돌아봤다.

앞머리가 땀에 젖어있고, 두 손을 맞잡고 있는 지민형의 얼굴을.


"몰라. 나 지금 취했거든? 사실."

"어쩌라고."

"그니깐 지금 하는 말이 개구라일수도 있다고."

"뭔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좆같지."

".............."





나는 이제 형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스팔트 한구석에 핀 민들레를 쳐다보고 얘기한것도 같다.

그 정도로 자신이 없었다.

무슨 자신이냐면, 그냥 뭐든. 다.


"그냥 되게 후련할줄 알았는데 기분이 좆같아. 막."

"............"

"다 때려부수고 싶고.. 근데 내가 너무 병신같고..거지같고..그래."

".........."

"행복해라, 하고 멋있게 보내주고 싶은데. 나도."

"..........."


도중엔 삐죽 눈물이 나왔다.

눈물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지민형은 날 꽉 안아줬다.

형의 향수 냄새와, 담배 냄새가 났다. 


그러니깐 지금 하는 말 다 개구라고.. 개수작인데..


"너를 진짜 좋아했었어."

형은 한숨같이 얘기했다.




"하지만 더이상 네 주변에서 네 눈치를 보고싶지 않아."

"............"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아서.."

"..........."

"하지만 또 내일이면 네 주위를 서성이겠지.."

"..........."

"그래도..너도 좋은 사람 만나, 정국아."


끝말이 이상하잖아.

결론이 겨우 너도 좋은 사람 만나라야? 

말도 안돼.

나는 지민형의 어깨를 짚고 뭐라고 얘기를 했던것 같다. 가지마, 라고 했던가. 

그 때 잠에 빠지는건지, 정신을 잃는건지. 지민형이 멀어지는 것 같았다. 꿈 속이었던것 같다. 왜 이 개같은 타이밍에 또 정신을 잃는건지.

사랑이 아닌것같은데.

아직 사랑은 아닌데.

사랑이 시작되는것 같다고 얘기해야되는데.


가지마, 라고 얘기했는데도. 지민형은 슬픈 눈으로 웃어주기만 했다.


다음날, 혼자 눈을 떴을땐 똑같은 아침이 시작됐다. 

하나도 변한게 없는 여느때와 똑같은 아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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