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계는 참 별천지다. 개성이 독특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지민은 밀착 오디션을 보러온 배우 지망생들의 뛰어난 얼굴과 신체조건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연예계는 망해버린 그리스 신화 시절의 신들과 흡사하다. 신들은 유독 아름다운 얼굴과 조각 같은 몸매로 묘사가 되니까. 게다가 다른 종교에 비해 솔직한 인간의 감정을 가졌다. 분노, 질투, 사랑, 증오는 기본이고 욕망으로 인해 제 핏줄도 아무렇지 않게 죽였다. 인간이 가진 추악한 오점들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가만 보자, 그렇다면 가장 아름답다는 아프로디테는 어디 있으려나. 지민의 검은 눈동자가 180도로 돌아갔다. 제 눈은 사물을 객관적인 꿰뚫는 카메라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공간 구석구석 향하던 지민의 시선은 특출나게 아름답고 키가 유독 크며 남들보다 특히 몸매의 굴곡이 더 뛰어난 사람을 찾아 멈췄다.

긴소매 사이에 혼자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온 사람이 있다. 하긴 오늘은 4월치고는 온도가 비정상적으로 올라가 있긴 하다.

객관적이고 또 주관적인 시선을 사로잡은 사람은 독일에서 온 누드모델, 전 정국이었다.

지민은 허망함에 입맛을 다셨다. 역시나 판타지 범벅인 그리스 신화는 별로다. 협잡물이 따로 없다. 무모한 허구 그 자체의 이야기였다.

 

“자, 대본 드릴게요!”

 

자본의 힘은 대단하여 재이는 금방 JAY 프로덕션을 설립했다. 돈 안 되는 지민의 독립 영화 촬영을 함께했던 영화과 후배들을 주축으로 학연과 지연을 모두 이용해 스텝들도 구했다. 재이의 빠른 추진력으로 오디션도 착착 진행 중이었다.

시나리오를 맡은 재이와 연출을 맡은 지민은 정해진 자리에 앉았다. 정국이 제일 먼저 오디션장으로 들어오며 스타트를 끊었다.

주어진 지문은 영화 테오(Teo) 속 테오가 연우- 테오의 소꿉친구이자 첫사랑- 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테오가 보고 싶어 몰래 한국으로 도착한 여자친구 사라가 써프라이즈 해주는 장면이었다.

 

[자기 정말 너무한다. 몇 달 만에 만난 여자친구를 보고 안아주지도 않고.]

 

여성의 목소리가 필요하여 재이가 사라의 지문을 읽었다. 전문 연기자가 아니다 보니 책을 읽는 듯한 대사에 지민이 웃음 참는 소리를 냈다. 씰룩씰룩하다가 입술에서 웃음이 새기도 했다.

 

[어…? 여긴 웬일이야?]

 

지민의 방해에 집중이 흐트러질 뻔도 한데 테오역에 심취한 목소리가 들렸다. 놀란 듯한 대사는 고막 안으로 안개처럼 스며들었다. 귀를 사로잡는 목소리에 지민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자연스럽게 정국의 얼굴을 관찰했다. 갑작스러운 약혼자의 등장에 당황한 얼굴을 그대로 연기 하고 있었다.

 

[웬일이긴. 내 약혼자 보고 싶어서 12시간을 날라왔는데. 나 환영 안 해줄 거야?]

[어. 환영해. 잘 왔어.]

[말만 칫. 옆은 누구? 매니지먼트사 직원?]

 

다음 대사가 관건이었다. 재이와 지민은 모두 정국의 얼굴에 집중했다.

 

[매니저 아니고. 인사해. 여긴 사라. 그리고 여긴 연우. 내가…. 어릴 적부터 오랫동안 기다렸던…. 친구.]

 

친구라는 단어를 말하는 목소리엔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이 담겨있었다. 재이는 정국의 연기에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재이의 긍정적인 반응을 살피곤 겉으로 티 내진 않았지만, 속으로는 인정했다. 뭐, 좀 하네.

다음 씬은 연우에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테오의 독백 장면이었다. 정국은 물을 먼저 마셨다. 500ℓ의 반 정도 되는 물을 꿀꺽꿀꺽 마시고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천천히 외기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주어진 시간이었던 5분 동안 그 대사를 모두 외워서 대본을 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연우는 그 시절의 전부였다. 어린 날을 떠올리는 매개체를 볼 때마다 연우가 생각났다. 솜사탕을 발견하면 내 앞에서 처음 먹어보는 솜사탕이 맛있다며 짓던 그 눈웃음이 생각났고, 드라마를 볼 때 마다 헤어짐으로 인해 우는 장면이 나오면 내가 입양되었을 때 자길 두고 떠나지 말라며 울던 그 얼굴이 떠올라 견딜 수 없었다. 이 감정은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웠다. 단지 그 시절의 미화된 기억이라고만 치부하기엔 너무 생생했고, 20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이 아리고 두근거렸다. 그 앨 향한 복잡한 감정을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었다.]

 

독백이 끝난 후엔 고요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듣는 이로써 이야기 안으로 완벽하게 빨려 들어간 상태였다.

 

“야, 진짜 잘 읽는다. 나 눈물 나는 줄.”

 

재이가 지민에게 소곤댔다. 아무렇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미세한 목소리의 떨림으로 혼란스러워하는 테오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했다. 청자의 공감을 끌기에 완벽한 것 같았다. 하지만 곧 다시 원래 나레이션의 역할이란 그런 거라며 지민은 정국의 실력을 저평가하기로 했다. 딱히 어려운 연기도 아니고.

 

“나레이션을 너무 잘해서, 연우랑 대화하는 씬도 한번 들어보고 싶거든요?”

 

계획에 없이 재이가 정국에게 다른 대사를 읽어보라며 시켰다. 지민은 시나리오를 넘기며 정국의 연기를 기다렸다.

 

“연우 역 대사는 박 감독님이 읽어주시나요?”

“예?”

 

갑작스러운 부름에 캡모자를 깊게 눌러쓴 지민의 고개가 올라갔다. 황당함에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요?”

“네. 감독님 목소리로 읽어주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똘망똘망한 눈으로 말해오는 정국에게 반박할 수 있는 말이 딱히 생각나지 않아 재이를 쳐다보니, 해보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민망함에 지민은 시나리오를 괜히 뒤적였다. 그냥 몇 줄 책 읽듯이 읽으면 되는 건가. 잠깐 연기를 공부하긴 했지만 늘 감독의 자리에 있었기에 어색했다. 하지만 괜히 영화감독이 영화감독이겠나. 서당 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그래요. 못할 것도 없지.”

 

자신감을 가지고 지민은 연우의 지문으로 연기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따지자면 읽고 있었다.

 

[어떻게 안 본 지 20년이 넘은 친구한테 이렇게 잘해줄 수 있냐. 여전히 넌 정말 좋은 친구야.]

 

반대로 지민의 어색한 연기에 재이가 풉, 하고 비웃었다. 아까와는 반대되는 상황이었다. 발을 밟아줄까 싶다가 조용히 정국의 연기를 감상하기로 했다.

 

[친구…? 우리가 정말 친구라고 생각해?]

 

테오를 연기하는 정국의 목소리가 다시 슬슬 떨려왔다. 눈동자는 길을 잃은 어린아이의 그것과도 같았다.

 

[너는 나를 보면서 무슨 생각해? 그냥 어릴 적 보육원에서 만났다가 재회한 친구. 그게 다야? 그 이상이 될 순 없는 거야?]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저런 대사를 하니 지민은 정말로 연우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가슴이 먹먹해져 물풍선 터지듯이 따뜻한 무언가가 심장 안에 퍼졌다. 다음 대사를 읽어야 하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정국을 쳐다보고 있으니 재이가 옆구리를 쿡 찔러왔다.

 

“대사 해야지. 어? 이거.”

 

뾰족한 무르팍에 찔려 퍼뜩 정신을 차린 지민이 우왕좌왕 시나리오를 다시 잡았다. 그리고 다시 발연기를 드러냈다.

 

[어? 무슨 말이야?]

 

감정을 깨트릴법한 지민의 연기에도 불구하고, 동그란 정국의 눈에 벌써 물이 차올랐다. 안 그래도 빛나는 눈동자가 다이아몬드의 반짝임을 냈다. 투명한 눈물이 한 방울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정국은 좌절감에 고개를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입술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난 솔직히 너 좋아해. 어릴 때 감정도 친구 아니고 좋아하는 감정이었어. 그리고 지금도 난 여전히 그대로야. 나…. 나 너 사랑해. 그러니까…. 친구라고만 말하지 말아줘 제발.]

 

울음을 참으며 말하는 정국의 얼굴이 아름답게 일그러졌다.

여운과 같은 적막이 흘렀다. 간절해 보이는 정국에게 꼭 대답을 해줘야 할 것만 같이 초조해졌다.

하지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상하게 멀미가 나며 속이 메스꺼웠다. 사랑한다니. 제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사랑한다고 말하다니. 왠지 정국에게 사랑 고백을 받은 느낌이었다.

다시 또 생각해보면 불쾌했다. 저런 진지하고 솔직한 표정으로 사랑한다고 말한 게 연기라니. 아무리 천생 배우라고 해도 감쪽같이 속일 수 있는 연기는 기만으로 느껴졌다. 누구라도 넘어갈 것이다.

재이는 미술팀 스태프와 함께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재이가 영화 테오(Teo) 시나리오 쓸 때, 정국의 사진을 보며 썼다더니 정말 맞춤복을 입은 듯이 완벽했다.

분위기는 좋게 흘러갔다. 아무래도 만장일치인 것 같았다. 지민은 한숨을 쉬었다. 이상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긴장 서린 근심이 지민의 작은 머리를 지배했다.

소품 들어갑니다. 오디션장의 문이 열리고 젊음과 반항의 상징인 새빨간 일렉 기타가 나타났다. 소품팀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극 중 기타리스트인 테오역을 위해 손에 익혀야 하는 필수품이기도 했다. 전자 기타의 화려한 반짝임에 어떤 스태프는 휘파람을 불었다.

 

“정국 씨. 기타 쳐봤어요? 못 쳐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코드만 배워서 손가락으로 짚는 척만 하면 되니까.”

“조금 칠 줄 알아요. 저 락 좋아하거든요.”

 

반가운 악기를 만나서 기분이 좋은지 기타를 건네받으며 미소를 띤 정국은 코드를 하나씩 잡기 시작했다. 생머리를 흩날리며 기타 바디를 굵은 허벅지 위에 올렸다. 집중한 채 길고 유려한 손가락을 놀렸다. 오른손 검지가 움직일 때마다 팔의 핏줄도 바짝 섰다. 뚱땅뚱땅 대충 치는 것이 아니고 제법 소리다운 소리를 낼 줄 알았다. 목소리만 들리던 강당에 멋들어진 악기의 소리가 반사되어 퍼졌다. 록 밴드 기타리스트를 연기하는 완벽한 배우의 모습이었다.

기타까지 칠 줄은 예상도 못 했는데…. 오디션을 진행하면서 느낀 감정은 오히려 너무 완벽해서 이상하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지민은 이 상황이 자신의 오디션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꼭 자신의 태도를 테스트하는 느낌이었다.

지민은 다시 재이에게 소곤댔다.

 

“너 시나리오 쓸 때 일부러 기타리스트로 썼지. 전정국 기타 칠 줄 아는 거 알아서. 솔직히 말해. 쟤 덕질하냐?”

“아냐. 전혀 몰랐어. 그리고 덕질은 이미 하고 있어.”

 

재이의 눈동자는 하트로 변해있는 상황이었다. 하트로 변해버린 검은 동공 속에서 마치 깊은 호숫가처럼 잔잔하게 미소 짓고 있는 정국의 얼굴이 비쳤다.

 

 

*

 

 

상대인 연우 역 오디션이 시작되고, 그 역할은 갓 잡지 모델로 데뷔한 신예인 하지수에게 돌아갔다. 이제 막 성인이 된 것 같은 얇은 소년의 선을 가진 모델이었다. 웃을 때 눈이 사라지는 느낌이 좋다며 제작자이자 각본가인 재이가 선택했다. 배우가 최종 꿈이라고 말하는 열정적인 미소년이었다.

스태프들은 밖에 있는 정국을 불러 연우의 옆에 서게 했다. 극 중 가장 한 프레임에 많이 담기기도 하고 또 애틋하게 사랑하는 사이를 연기해야 하기에 케미를 확인해보겠다는 목적이었다.

 

“잘 어울리네.”

 

외양으로 보기에 둘은 썩 잘 어울렸다. 잘생긴 청년과 선이 가는 소년의 조합이었다. 정국과 하지수는 고개를 꾸벅이며 서로 안면을 텄다. 악수하기로 했는지 두 손이 맞잡을 땐 뒤에 앉은 미술감독이 감탄의 소리를 냈다. 지민은 뒤돌아서 왜 까마귀 소리를 내느냐고 물었는데, 미술감독은 그림이 좋다고 대답했다. 여자도 없고 남자들끼리만 서 있는데 대체 무슨 그림이 좋은 건지 지민은 갸우뚱거렸다.

그때, 정국과 하지수가 무슨 재밌는 일이 있는 것처럼 작게 미소를 띠며 대화를 했다. 재이는 바로 포착하며 물었다.

 

“무슨 재밌는 얘기를 해요? 우리도 알려줘요. 같이 웃을래요.”

“아…. 그게….”

 

하지수가 말해도 되냐며 정국에게 눈짓을 하곤 쑥스럽게 대답했다.

 

“정국 씨가 혹시 저한테 감독님이랑 형제냐고….”

“예에?”

 

정국의 뜬금없는 말에 지민의 미간이 구겨졌다. 재이는 지민이 쓰고 있는 캡모자를 홱 낚아챘다. 아, 왜 이래. 눌린 머리가 창피해진 지민은 두 손을 바로 머리로 가져가며 가렸다. 위로 띄울 목적으로 아무렇지 않게 머리를 넘겼다. 넘어간 머리는 반동으로 인해 다시 앞으로 돌아왔다. 머리를 감자마자 모자 쓴 게 잘못이었다. 머리카락이 두피에 딱 달라붙은 느낌이었다.

 

“왜 그 말 하는지 알겠네. 닮아서 물어봤어요?”

 

재이는 목을 쭉 빼곤 지민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 고개를 돌려 하지수의 얼굴을 바라봤다.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표시를 하니 제 의견을 인정받아 다행이라 생각한 정국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네. 두 분 닮았어요.”

“맞네.”

 

무심코 던진 한마디에 오디션장이 술렁거렸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스태프들, 앉아서 구경하는 스태프들 모두 지민을 주시하고 있었다. 머쓱해진 지민은 괜히 귀찮은 듯 거칠게 머리를 털어댔다. 캡모자에 가려졌던 시원한 샴푸 냄새가 공기 중으로 쏟아졌다.

 

“얼굴선이랑 눈매가 비슷하네요. 관찰력이 좋으시네. 정국 씨.”

“감사합니다.”

“박 감독이 카메라 던지고 연우 역할 해도 잘 맞긴 하겠다. 워낙 동안이잖아. 연기를 못해서 문제긴 하지만.”

 

정국은 재이의 말에 동감한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고, 하지수는 감독님과 비교가 되어서 영광이라고 화답했다. 꾸며진 미소 안의 생각을 전혀 알 수 없어 지민은 괜히 난감해졌다.

 

“무…. 무슨 소리야! 하지수 씨는 예쁘장하게 생겼고 나는….”

 

그래서 발끈했다. 잘생긴 모델과 배우 지망생들이 모인 자리였다. 자신은 얼굴 평가를 받을 필요가 없는 감독이었다. 외모 칭찬은 놀림당하는 것과도 같았다. 괜히 저와 비교당한 하지수에게 미안했다. 그는 청초한 느낌으로 밀고 나가고 있는 현재 진행형 모델이 아니던가. 심지어 자신은 겉모습에 신경을 안 쓴 지 오래였다.

 

“나야 남자답지.”


예쁘장하게 생긴 지민의 모순적인 발언이었다. 빨대를 대고 쭉쭉 빨아 마시던 재이가 마시던 걸 뱉었다. 아메리카노가 방향을 역류한 것처럼 부글부글 끓었다. 게다가 그 순간, 지민은 정국의 한쪽 입꼬리만 슬그머니 올라가는 것을 목격했다. 기분 탓이 아니고 정말로 미세한 비소였다.

손을 털며 입술에 묻은 잔여물을 닦아대던 재이가 투덜거렸다.

 

“박 감독 요즘 수염을 안 깎아서 그렇지, 수염 다 깎고 머리 단정하게 해놓으면 지금보다 훨씬 괜찮아요.”

 

예쁘고 가난한 감독이라 충무로에서 유명하다며 구구절절 설명을 덧붙이니 민망해진 지민은 재이에게 가까이 다가가 이를 꽉 깨문 채 말했다.

 

“뭐야…. 징그럽게.”

 

협박에 가까운 분위기를 주려고 했으나 지민의 통통한 입술이 아래위로 움직여 부드러운 속삭임처럼 느껴졌다.

 

“뭐긴 뭐야.”

 

티격태격 싸우는 모습은 오히려 사이좋은 친구 사이임을 드러냈다. 성질나 죽겠는데 초면인 사람들 앞에서 발끈할 수 없으니 말을 돌렸다.

 

“됐다. 됐어.”

 

다시 캡모자를 꾹 눌러쓰고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볼펜을 아무렇지 않게 돌려댔다. 정면에 있는 장신의 미남자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것도 모르고.

 

 

*

 

 

테오의 약혼자 역인 사라 역 오디션이 시작되었다. 3년 전 망한 걸그룹의 멤버였던 고은주가 참석한 것을 확인한 지민의 얼굴이 환해졌다. 자신의 군대 생활에 한 줄기 빛이었던 그녀의 등장에 감격했다. 지금까지 남자들만 우르르 들어와서 애절하게 서로 사랑한다느니, 우정이 아니라느니 이런 궁상맞은 연기를 지켜보다가 애교스러운 목소리의 고은주를 만나니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메마른 땅의 젖과 꿀이었다.

 

“진호야. 뭐하냐. 방석 안 가지고 와?”

“네?”

“의자 딱딱해. 은주 씨 엉덩이 배긴다고.”

“아, 네.”

 

괜히 소품팀 막내에게 일을 시키기도 했다. 예쁜 사람한테만 잘해준다고 뒤에서 투덜대도 어쩔 수 없었다. 그건 사실이니까.

고은주는 장기인 노래도 불렀다. 그러다가 하얗게 먼지가 폴폴 날리는 오디션장이 건조한지 고은주가 캑캑거렸다. 목이 메말랐다고 했다.

 

“아이고, 어떻게 해. 커피 드릴까요?”

 

지민은 스태프가 잔뜩 사다 놓은 커피를 하나 주려고 했다. 하지만 고은주가 예쁘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감독님. 친절은 감사한데…. 제가 카페인에 약해서…. 디카페인만 마시거든요.”

“그러시구나.”

 

아까 방석을 가져다준 막내가 어디로 갔더라. 고개를 두리번두리번하던 지민은 스태프를 발견하지 못했다. 행동파인 지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 끄는 시끄러운 소리에 재이가 뭐하냐고 눈으로 물어봤지만 잠깐 기다리라고 한 후에 자리에서 이탈했다. 오디션장에서 나와 대기실 문을 벌컥 열어보니 정국과 하지수와 소품팀 막내가 밝은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래도 또래끼리라 말이 통하나 싶었다.

 

“진호 너 거깄었구나.”

“네. 감독님.”

 

지민의 우렁찬 목소리에 진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민은 주머니에서 카드 지갑을 꺼내며 진우에게 카드를 전달했다. 그것도 개인 카드였다.

 

“너 요 앞에 커피숍 좀 빨리 다녀와.”

“커피요? 아까 사왔잖아요.”

“고은주 씨 주게. 카페인이 몸에 안 받으신대. 아이스 아메리카노 디카페인으로 사 와.”

“아. 넵.”

 

지민은 고은주 이름 세글자를 운운하는 자신의 얼굴이 밝게 상기 된 줄도 모르고 소품팀 막내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소품팀 막내는 빠르게 대기실에서 뛰어나갔고 지민은 커피를 가져다줄 생각에 뿌듯한 얼굴을 했다. 휘파람을 불며 생각 없이 대기실을 쭉 훑어보다가 언제부터인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눈 큰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세요.”

 

사람 민망하게.

지민은 목소리를 최대한 깔았다. 말투가 조금 거칠어졌다. 까만 눈에 비친 자신의 들뜬 모습이 괜히 하찮아서 성대에 힘을 줘버렸다. 이래서 정국과 눈을 마주치면 불편했다. 일렁이는 눈빛을 보다 보면 속마음을 간파당하는 느낌이기도 했고, 이해할 수 없는 이국의 언어 같기도 했다.

 

“그냥요.”

 

말을 끝내고 씩 웃는데 이유 없이 화가 났다. 입꼬리를 한껏 위로 당기며 미소를 짓는 얼굴이 인정하기 싫지만 예뻤다. 그래서 더 분했다.

 

 

*

 

 

 오디션이 끝났고  빠르게 배역은 확정되었다. 이변은 없었다. 재이가 예상하고 상상한 데로 캐스팅이 되었다. 거대 영화투자사를 끼고 제작하는 영화가 아니다 보니 진행은 모두 재이와 지민의 빠른 선택에 달려있었다. 재이는 오늘 오디션으로 캐스팅된 배우들에 관해 공부하겠다며 랩탑을 켜고 지민의 옆에 앉았다.

 

“아, 정국 씨한테 영업 비밀이 뭐냐고 그걸 안 물어봤네. 나중에 물어보지 뭐.”

 

구글에서 알파벳으로 JEON JUNG KOOK을 치더니 계속 혼잣말을 해댔다. 독일에서는 JK라고 불린대. 응응. 대충 대답해주며 듣는 척 마는 척 대답했다. 야. 완전 웃겨. 독일어로 JK 발음이 욧까야. 욧까? 엿까라는건가? 아니 좆까? 좆을 안 까서? 중요 부위는 늘 가린댔잖아. 푸학. 지민이 반응을 해주지 않음에도 재이 혼자 말을 하고 혼자 웃어댔다. 도를 지나친 것만 같은 발언에 지민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야. 성희롱하지 마.”

 

단호하게 으름장 놓듯이 말을 하니 재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따졌다.

 

“웬일로 편을 들어주냐? 정국 씨한테만 쌀쌀하더니.”

“네가 선을 넘어서 그렇지. 요즘 세상에 너 그러다가 고소당하고 벌금 먹어.”

“그냥 발음 때문에 장난친 거야. 거슬렸다면 미안.”

 

짧게 사과를 한 재이는 구글 이미지를 눌러서 정국의 화보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에서 정제되지 않은 감탄사가 끊임없이 나왔다. 지민은 안보는 '척'하며 슬금슬금 눈을 돌려 힐끔거렸다.

확실히 생각보다 외설적이지 않긴 했다. 독일 특유의 명암 대비를 강하게 주는 건조한 흑백 사진 기술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몸매 실루엣이 강조된 것이 멋스럽고 강렬했다. 젊은 시절 최대치의 몸을 남기고 싶다고 하더니. 확실히 남자의 몸은 절정을 말하고 있었다.

잘 빠진 다리를 강조하는 화보에서는 캘빈 클라인의 딱 붙는 사각팬티와 하얀 셔츠만 입은 채 턱을 들고 내려다보고 있었고, 야성미가 있는 가슴 근육을 강조하는 화보에서는 딱 청바지 버클만 연 채 노려보고 있었다. 강조하고 싶은 몸은 모두 보여주고 가릴 곳은 모두 가렸다. 딱 벗을 듯 말 듯 한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었다.

상상력을 끌어내는 사진들이 대부분이었다. 뒷장을 넘겼을 때 이 남자는 어떤 모습일까 분명 독자들은 기대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만지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도 다분했다. 사람의 심리를 제대로 이용할 줄 아는 모델이었다.

생각보다 똑똑하게 본업을 하는 것 같아 괜히 무안해졌다. 누드모델이라고 너무 단정해버린 게 아니었을까. 특수한 직업 때문에 실력을 낮게 평가하는 게 아닌가 싶어 자신의 태도를 되돌아볼까 싶었다.

 

“와. 이거 뭐야? 대박이네.”

 

재이가 미친 듯이 클릭하기 시작했다. 뭔가 싶어서 고개를 내밀었더니 파파라치 컷을 보이는 사진들 우수수 떴다.

 

“누구. 전 정국?”

“어. 대박. 독일에도 미국처럼 극성 파파라치가 있나 본데?”

 

재이는 천천히 스크롤을 내렸다. 사진은 흔한 타블로이드지에 실릴법한 몰래 찍은 사진들이었다. 지민은 안보는 '척'했지만, 또다시 몰래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었다. 이상하게 눈길이 갔다. 존재감이 대단했다.

파파라치 사진들 대부분은 정국이 수영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호텔을 들어가고 있거나, 또는 호텔에서 나오고 있거나,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사생활이 찍혀있었다. 재밌는 점은 다양한 사진 속 정국의 상대방이 한 명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정국은 상대의 허리에 손을 얹거나 포옹하고, 식당에서 음식을 떠먹여 주거나 또 키스하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찍혀있었다.

처음엔 애정행각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조하고 무심한 정국의 얼굴이 신기했다. 지민은 이젠 몰래 보지 않고 대놓고 훑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뒤통수만 찍히던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지민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뭐야. 이거 껴안은 사람 남자 아냐?”

“어. 와…. 다양하게 만나네? 역시 검은 머리 외국인.”

 

다양한 인종이 사는 나라인 독일에서 왔으니 당연히 여러 국적의 여자를 만났을 거로 생각했지만 이건 달랐다. 데이트 상대는 대부분이 여자였지만 남자도 있었다.

감탄사를 내뱉던 재이는 한 사진에서 멈췄다. 정국은 남자인 데이트 상대에게 차 문을 열어주고 있었다.

 

“되게 자상하다. 남의 눈치 안보고 남자랑도 부담 없이 데이트 하나 봐. ”

 

재이의 감격이 섞인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상대에게 조수석 문을 열어주는 사진 때문에 머릿속에서 심히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게…. 지금 일반적으로 흔히 할 수 있는 행동인가? 정상성에 들 수 있는 장면인가? 남자한테 굳이 차 문을 열어줄 필요가 있던가. 저 사람은 손이 없어? 건장해 보이는데. 다정하게 보이고 싶어서 환장했나 보지?

 

“개방적이야. 남녀 구분 안 하고 데이트 다 하는 거 보니.”

 

지민은 평범한 남자끼리는 절대로 연출하지 않는 사진을 보고 기분이 잡쳐버렸다. 자꾸 정국 앞에서 엇나갔는데 그 해답을 찾은 기분이었다.

 

“…안 들어.”

“응?”

“진짜. 너무 마음에 안 들어.”

 

손바닥 뒤집듯이 지민은 바로 의견을 바꿨다. 아까까진 괜히 먼저 단정하고 오해하지 말자고 했지만, 굳이 예의를 차려줄 필요가 없는 것 같았다. 곧 동성애 코드가 들어가는 영화를 찍지만, 영화가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신념이 영화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지민은 평범한 사람처럼 자신과 다른 성을 만나 연애하는 것이 보편적인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자와 아무렇지 않게 데이트하는 정국이 부담스러웠다.

해답은 간단했다. 지금까지 어린애처럼 삐딱하게 구는 행동은 자신과 너무나도 다른 정국을 감지한 방어체제에서 나온 것이었다. 흔히 말하는 거부반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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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키드 가이 키워드

정국 : 외국인/교포공, 자상공, 능글공, 직진공

지민 : 헤테로수, 까칠수, 무심수, 후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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