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지수는 진짜 안 가? 왜 안 가지…."

"………그거 나한테 삐져서 그래."

"에?"

"있어. 앞이나 보세요. 운전자님."


대수롭지 않다는 듯 영인은 손을 내저으며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월요일인 근로자의 날을 맞이하여 영인의 휴일에 맞춰 2박 3일로 서산에 놀러가기로 했다. 하지만 연휴에 영인에게 대차게 삐진 지수는 바쁘다며 거절했다. 

하여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애처럼 군다며 마음 같아선 지수를 엄청 씹고 싶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뭔지 궁금해할 희수를 잘 알기에 영인은 그냥 조용히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다음주 금토일 황금연휴 중간에 수업이라니. 애들도 싫겠다."

"그래서 6일 출석률이 낮을 것 같긴 해. 샘들도 별로 안 나오시고."


운전까지 하고 1일에 오후긴 해도 출근해야 하는 희수를 생각하면 어린이날을 끼고 가는 게 나을 듯했지만 희수는 6일에는 토요일 수업을 나가야 했다. 어차피 똑같이 올라와서 출근해야 한다면 그냥 아침 일찍 출발할 수 있을 때 놀러 가잔 희수의 말에 영인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너는 왜 나가는 거야."

"다 쉴 순 없잖아! 그날 쉬고 싶어하는 사람 많아서."


가족이나 아이가 있는 경우엔…. 말을 잇는 희수에 영인은 뭐라 말을 하려다가 관두었다. 착하다고 뭐라고 할 필요가 있나. 착하고 이타적인 건 좋은 건데. 


"정말…. 너무 무리는 말고."

"응. 고마워. 아. 휴게소 가고 싶음 말해!"

"얼마나 걸리지?"

"안 막히면 1시간 반인데. 연휴라 조금 막히지 싶어."

"그럼 한 번 들리자."

"아. 여기 참 엄청 큰 휴게소 있어. 거기 가볼래?"

"좋지. 진짜 휴게소 음식은 오랜만에 먹겠네."

"아직 베스트 드라이버는 요원한가 봐?"

"오만하네. 금방이야. 딱 기다려."


'면허학원도 등록 안 했으면서?' 폼만 그럴 듯하게 선글라스를 낀 채 한 손으로 운전하는 척하는 영인을 지켜보던 희수는 조수석 창문을 지익 내렸다. 몰아치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린 영인은 뭐냐며 짜증스럽게 돌아보았다. 


"왜 좋잖아. 공기."

"고속도로 공기가 뭐가 좋아? 논밭밖에 없구만."

"평야 보면 마음이 시원해지잖아."

"그런가…. 뭐 좋긴 좋네."

"멀리 차 타고 가는 거 오랜만이야."

"그래?"

"응. 부모님 댁 갈 땐 비행기 타니까~ 나 여행 막 자주 가는 편도 아니고."

"본가가 제주돈데, 뭐. 귀성이 여행이지."

"그래서 그런가 봐. 그래도 오랜만에 나오니까 좋다. 날씨도 되게 좋고."


영인은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곤 기쁜 듯 웃고 있는 희수와 그뒤로 펼쳐진 논밭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피식 웃고선 다시 조수석 의자에 푸욱 몸을 묻었다. 


"그러게 좋네. 날씨."



12.2. 


희수가 얘기한 휴게소는 전국 휴게소 매출 2위라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로 거대했다. 큰 휴게소라 함은 뭐 대충 호두과자 파는 집과 델리만쥬 파는 집이 따로 있는 건가 예상한 영인은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나름 신난 듯 도도도 뛰어가는 뒷모습이 귀여웠다. 나름 나들이라고 평소에 잘 안 입는 치마도 입고, 빨면 드라이 맡겨야 한다고 잘 안 입던 비싼 줄무늬 티셔츠까지 꺼내 입은 영인은 봄날의 풍경과 꽤 잘 어울렸다. 


"야. 무슨 휴게소가 이렇게 커? 백화점이네."

"신기해? 되게 신났네. 영인이."

"와. 아울렛도 있대."

"아 정말? 나 아울렛은 안 가 봤어."

"가 볼래? 기다리는 사람은 최유민밖에 없잖아."

"있는 게 문제인 거 아니야…?"


그새 휴게소에 대한 정보를 너무위키에서 찾아본 영인은 괜찮다고 히이 웃었다. 유민에게 주려고 산 구움과자 선물 세트는 어차피 한 2시간쯤 해동해야 한다며 큰 눈을 빛내며 웃는 영인에 희수는 그럼 뭐 한번 볼까? 하며 모르는 척 져 줄 수밖에 없었다.

오징어 튀김과 핫바를 하나씩 물고 두 사람은 아울렛을 구경했다. 아울렛은 매장이 그리 많지는 않았으나 서울이 아님을 실감하게 할 정도로 널찍했다. 인파를 좋아하지 않는 희수와 한술 더 떠서 그냥 사람(?)을 싫어하는 영인이었기에 매우 쾌적했다. 

뭐 딱히 살 게 정해져 있지는 않아서 나란히 걸어다니며 그냥 이것저것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스포츠 매장 앞에 선 희수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와. 운동화 싸다!"

"그러게. 귀여운데."

"응. 귀여워…."

"신어 보지 그래?"

"에. 나 뭐 살 생각 없었는데…?!"

"원래 그런 거지. 너 몇이야? 35? 40?"

"아니. 운동화는 45!!"

"저기요. 요거 245 있어요?"


운동화를 들어 올리며 점원에게 사이즈를 요청한 영인은 신발 귀엽다면서 만지작거리다가 덧붙였다. 


"생각보다 크네. 한 235쯤 될 줄 알았는데."

"보, 보통 아닌가?"

"엥. 왕발이라고 놀린 것도 아닌데. 왜?"


약간 당황하며 얼굴을 붉히는 희수에 영인은 눈썹을 올리며 의아해했다. '생각보다 크다'는 말에 헬스장에서 있던 일이 떠올랐다고는 말하지 못하는 희수는 어색하게 웃고선 다른 신발을 보는 척했다. 

다행히 점원이 빨리 신발을 가지고 왔다. 희수는 점원의 건네 준 신발을 구겨지지 않게 조심스레 신었다.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한 모양이 신으니 더 귀여웠다. 신발만 봤을 때보다 더 마음에 들어서 신이 난 희수는 양쪽을 다 신곤 영인을 보며 짠 하고 자랑을 했다. 영인의 눈에도 신발은 귀여워 보였는지 "귀엽다. 귀여워." 하며 웃었다. 


"잘 어울리네. 지금 입은 원피스에도 어울리고."

"그런가?"

"응. 다른 색도 있긴 하네. 이것도 귀엽네…. 근데 너랑은 그게 더 잘 어울려."

"되게 가볍고 편해!"

"푸핫. 그래 보여."


영인은 잠깐 고민하더니 주머니에서 카드지갑을 꺼내며 말했다.


"내가 사줄 테니까. 사."

"에? 아니야. 아니야. 나 돈 있어."

"누가 너 보고 거지래? 차비야. 차비."

"으아. 안 그래도 돼! 아까 기름도 넣어 줬잖아."


희수는 다급히 카드지갑을 붙들었다. 그러나 영인은 자신의 카드지갑을 잡고 있는 희수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내곤 꼭 쥐었다. 희수는 닿은 손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아 흠칫 놀랐다. 


"운.전.비."

"영인아아!"

"요거 주세요~"

"아, 공영인. 저기 잠시만요."

"아 조희수. 점원님 귀찮으시게!"


이걸로 해 주세요. 카드를 내미는 모습이 영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친절한 미소라 희수는 어이가 없었다. 정체 모를 여자들의 싸움에 끼기 싫었는지 얌전히 카드와 신발박스를 들고 계산대로 향하는 점원을 향해 희수가 말했다.


"저기, 이거 요 색으로 245도 주실 수 있어요?"

"엥? 그 색깔이 더 좋아?"

"아니."


희수는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영인에게 삿대질을 했다. 갑작스레 디밀어진 손끝에 영인이 뭐냐는 듯 눈썹을 구기며 특유의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자 희수는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신어 보는 거야. 영인아."



12.3.


"무슨 이 나이 먹고 우정 신발이야."

"왜애! 잘 어울려. 핑크색 색감이 예뻐."

"아. 네. 크림색 씨."

"동글동글. 두 색도 잘 어울리지."

"뭐 그건 그렇지만서도."


허리를 굽혀서 신발을 보다가 동의를 구하려는 듯 꼬부기같이 웃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희수에 영인은 잠깐 움찔했다. 그리곤 희수의 손에 들린, 두 사람이 신고 온 단화와 운동화가 담긴 쇼핑백을 뺏어 들었다.


"가자. 저기서 서해대교 잘 보인대. 커피 사서 보러 가자."

"응. 진짜 귀엽다. 휴게소에서 충동구매하게 될 줄은 몰랐어."

"크. 어지간히 맘에 들었나 봐."

"응. 너도 맘에 들어? 나 때문에 억지로 산 건 아니지…?"

"어."


영인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희수의 일말의 불안마저 종식시키겠다는 듯 지체 없는 즉답이었다. 그래도 희수는 눈을 빤히 보며 되물었다. 


"진짜루 마음에 들어?"

"응. 진짜루."


그니까 빨리 커피 마시러 가자. 나 더 움직이려면 카페인 수혈해야 돼. 영인은 고갯짓을 하며 보챘다.




"서울이 아니라 평양에서 오는 거였나? 아유 노오쓰코리안? 8시 반에 출발해 놓고 12시에 도착하다니. 무슨 일이야!"

"에구. 유민아. 미안해."

"희수 네 잘못 아니지. 뭐. 어차피 다 저거 잘못일 텐데."

"야. 어이없네. 운전한 것도 얘고 한눈 판 건 둘이 같이 한 건데. 왜 나만 갖고 그래?"


아니나 다를까. 늦어도 10시반에는 도착했을 두 사람이 점심 시간이 다 되도록 [좀 늦을듯]이라는 톡만 남기고 도착하지 않아 답답하다 못해 속이 뻥 터져 버린 유민은 길길이 날뛰며 화를 냈다. 영인은 늦어서 미안하다며 준비한 구움과자 세트를 떠안겨 주었다. 유민은 그제야 좀 화가 누그러졌는지 흥 하며 과자상자를 꼭 끌어안고 물었다.


"그래서 뭐 하느라 늦으셨습니까들?"

"그냥 뭐 가볍게 관광?"

"휴게소 들렸는데, 거기 구경할 게 많아서…."

"아. 어딘지 알겠다."

"소곡주도 사 왔으니까 마시자고."

"으엑. 나는 그거 싫어. 여기 있어봐, 무슨 농협 신협서 웬 그리 약주들을 주는지. 맥주 마셔 맥주!!"

"아. 그렇구나?! 그럼 이건 어쩌지…?"

"서울 갖고 가서 집에서 먹지. 뭐."

"그럴까?" 


소곡주를 들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에 유민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안경을 벗고 눈을 슥슥 비볐다. 유민의 행동에 희수는 눈에 뭐 들어갔냐며 등을 쓸며 다정하게 걱정을 했고, 영인은 "그냥 건조한가 보지." 하며 정없는 소리를 해 댔다. 

서운할 법도 한데 유민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시 안경을 쓰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영인은 짜증난다는 듯이 오만상을 찌푸렸고 희수는 아까 유민이 그랬던 것처럼 토끼눈이 돼서는 상황을 살폈다. 


"잘 지내네. 둘이!!"

"아."

"아…! 응!"

"뭐 내가 너랑도 살았는데. 얘랑 못 살 이유가 어딨어."

"나같이 위대하고 인내심 많은 룸메이트를 통해서 진정한 동거인으로서 거듭났다는 이야기를, 우리 영인이가 아주 깜찍하게 하네?"

"으엑."

"영인이가 많이 배려해 줘서. 잘 살고 있어!"

"맨날 혼내면서. 채찍과 당근이야?"

"내가 언제 혼냈어!"


그렇게 말하고도 짚이는 바가 없지 않아서 희수는 슬쩍 영인의 눈을 피했다. 유민은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음흉하게 웃었다. 


"뭐야 뭐야. 나 촉 되게 좋아. 뭐야 뭐야. 노부부야. 뭐야 뭐야."

"허튼 소리 하지 말고 밥이나 줘. 배고파."

"누구 때문에 늦은 건데 파렴치하기는!!"

"바아아압."

"아유. 미안. 유민아. 뭐 도와 줄까?"

"뭐야 뭐야. 왜 희수가 미안해해?"

"바아아아아압!!"

"……식충이 같애."


질색하며 중얼거리는 희수에 유민은 천하의 앤젤 조희수가 남욕도, 그것도 앞담화도 하네 생각하며 부끄럽다고 철딱서니 없는 알람만 내뱉고 있는 영인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그리곤 잘 왔다며 희수를 꼬옥 안아 주었다. 희수 역시 보고 싶었다며 유민을 꼬옥 마주 안았다. 영인 혼자 "놀고 있네. 놀고들 있어." 하며 투덜거릴 뿐, 아름다운 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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