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할때는 높고 불편한데다 쓸데없이 예쁘기만 한 하이힐보다 낮은 굽의 정장구두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구두굽 소리가 그리 크지도 않았는데, 저 멀리서 프론트를 지키고 있던 비서가 눈치 빠르게 고개를 들어보이더니 환히 웃는다. 파티션 너머로 빼꼼히 드러난 커다란 눈동자가 꼭 이리저리 잔뜩 경계를 세우다 안도하는 소동물처럼 보여서 웃음이 났다. 그 새 몇 번 봤다고 그녀는 제게 제법 붙임성있게 인사를 한다. 성격 좋은 여자였다.


"안녕하세요, 민영 씨."

"어머,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어휴, 월급쟁이가 잘 지내봤자죠."


희경이 답지않게 앓는 소리를 내자 민영이 싱그럽게 그녀를 따라웃는다. 희경은 곧 남준의 사무실 안쪽이 캄캄한 것을 발견하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저기, 혹시 김 팀장님……. 그때, 민영이 주위를 두어 번 돌아보더니 희경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그녀의 말간 눈동자가 때아닌 장난기로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참, 꽃다발은 마음에 드셨어요?"


그제야 희경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꽃다발이요?"






운명방정식

W. 삐요삐요 (@ComPpiyo)







태형은 물소리가 쏴아아 흐르는 욕실 문을 한 번, 그리고 시끌벅적한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는 텔레비전을 한 번 쳐다본 뒤 무릎을 가슴 쪽으로 더 바싹 당겼다. 살가죽이 도드라진 무릎뼈 위에 턱을 포옥 올려놓자 겨우 안정 아닌 안정이 찾아왔다. 푹신한 소파는 불필요한 출렁거림도 없이 태형의 몸을 부드럽게 끌어안는다. 무릎을 돌려 안은 손에는 어찌나 힘을 줬는지,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왱알대는 광고 소리마저 짜증이 나버린 태형은 조금 신경질적인 움직임으로 음소거 버튼을 눌렀다. 그제야 바라던 침묵이 찾아온다. 


그리고, 파도처럼 생각이 밀려왔다.


태형이 작게 시위라도 하듯 발가락으로 꼬물꼬물 소파 시트를 밀어냈다. 너, 선 보러 간다며. 사람의 머리는 아주 간사해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선별적으로 지웠다가, 다시 떠올리기도 한다던데. 시큰둥하게만 들리던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그제야 천둥처럼 쩌렁쩌렁 되풀이되기 시작했다.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가도 토끼가 마른 뜀박질을 하듯 이불을 몇 번이나 걷어찼다. 으악! 새벽에 괜히 분통이 터져 욱여뒀던 소리를 내질렀다가 놀라 달려온 고모에게 등짝을 된통 맞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다시,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그것도 이렇게 편안한 차림으로, 샤워까지 말끔하게 하고서는. 


이유는 간단했다. 고모가 모처럼 여행을 가신 탓이다. 웬일로 꽃무늬 가득한 원피스를 입고 콧노래까지 흥얼거리시나 싶더니, 이제 곧 비행기 타고 저 멀리 나가버리면 얼굴도 자주 못 볼 것 아니냐며 친구분들과 오래 모은 곗돈을 파하셨단다. 여행이라 해봤자 무슨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지금의 경제력과 건강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경주 정도였고, 그것마저 고작 2박 3일이었다. 하지만 고모는 며칠 전부터 꼭 수학여행이라도 가는 여고생처럼 입만 열면 경주 얘기를 하셨다. 지금 벚꽃이 예쁘다던데! 고모가 사진 많이 찍어올게. 태형이도 그때 경주 한 번 다녀왔지? 벚꽃은 조금 늦은 감이 있을 테지만, 태형은 잠자코 웃었다. 무엇이든 아름다워 보일 것이다, 고모의 눈에는.


여하튼, 그것이 태형이 주말을 갑작스레 남준의 집에서 보내게 된 뜻밖의 연유였다. 그럼 와서 자고갈래요? 영화라도 같이 봐요. 바보같이 거기에 좋다고 넘어가서는, 또 고개만 끄덕끄덕 해버렸다. 아저씨는 늘 선택지를 주신다. 하지만 처음부터 대답은 모두 남준이 쥐고있는 것만 같다. 자신은 그러니까, 밑그림이 그려진 답안을 따라쓰기만 하는 기분이 들었다.


태형은 공처럼 꽁꽁 움츠렸던 몸을 펼치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남준의 집은 넓고 깔끔하다, 생활감이라는 게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저번에 와서 부엌을 쓸 때에도 느꼈지만, 스토브는 기름 한 방울 튄 흔적이 없었고 스테인리스 국자에서는 새 식기의 냄새가 났다. 밥은 잘 챙겨드시는 걸까. 잠만 주무시는 걸까, 그럼 늘 회사에 계시는 걸까. 많이 바쁘신 걸까.


아저씨는 왜, 그렇게 바쁘시면서도 매번…….


태형은 커튼이 활짝 열린 창가로 비치는 까만 밤과, 그 밤 사이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작고, 볼품없고……. 초라하다. 집에서나 입는 허름한 티셔츠에 무릎이 훤히 드러나보이는 반바지를 입고 이렇게 널따란 오피스텔에 앉아있으려니 민망함이 밀려왔다. 아니, 이것은 그저 평범한 김태형인데, 꼭 누군가가 자신을 인형 뽑기 기계에 매달린 집게같은 것으로 난짝 들어다 생뚱맞은 배경에 덩그러니 버려둔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욕실 문이 덜컥 열리더니 미처 환풍구를 타고 날아가지 못한 증기가 문밖으로 안개처럼 세어나왔다. 조금 웅웅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태형 씨, 미안해요. 볼만 한 영화는 찾아봤어요?"


그곳에는 남준이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하고 엉거주춤하게 서있었다. 자신과 비슷하게 목이 늘어난 셔츠와 긴 트레이닝복 같은 파자마. 순간 태형은 웃음이 나서 창문에 비친 제 모습을 다시 한 번 돌아봤다. 두 사람은 어쩐지 닮아보여서. 혹은, 닮아보인다고 생각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저씨, 물 다 떨어져요!"


태형이 도다다 달려가 남준이 머리에 '얹어'뒀다고 해야 할 수건을 받아들고 야무지게 물기를 꼭꼭 닦아냈다. 머리를 대충 말린다고 고모에게 늘 혼쭐이 나기만 했는데, 남준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수건 사이로 태형을 쳐다보며 웃는다.


"미안해요. 태형 씨가 혼자 기다리면 심심할까봐, 마음이 급해서."


그 순간 다시 훅, 하고 소나무 같은 바람이 스친다. 아, 아뇨. 죄송해요. 저도 마음이 급해서. 태형은 그제야 자신이 겁도없이 남자의 머리를 손으로 헤집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파르르 몸을 떨며 뒤로 멀어졌다. 마저 말려주면 안 돼요? 하지만 태형은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고는 뾰로통하게 뺨을 부풀렸다.


그 뒤로 태형이 도톰한 러그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 한 것을 남준이 간신히 붙잡아주고, 버터를 통으로 얹은 팝콘을 한 그릇 가득 튀겨와서야 둘은 소파에 나란히 앉을 수 있었다. 음소거를 해둔 텔레비전 속에서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는데, 잔뜩 열이 올라 싸우는 것으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가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는 모습이 퍽 우스워보였다. 그러다 갑자기 여자가 달려들어서는 진득하게 키스를 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전개였다. 태형이 허겁지겁 채널을 바꿔보지만 이미 귓바퀴에 불이 붙은 듯 했다. 이번에도 조바심이 난 것은 태형 뿐인지, 남준의 목소리에는 한 올의 떨림조차 없다.


"우리 무슨 영화 볼까요?"

"저, 저는, 영화, 이거, 이거요!"

"……음. 정말 이거 보고싶어요?"


하지만 태형이 아무렇게나 선택한 영화에는 떡하니 청소년 관람불가 마크가 찍혀있었고, 포스터는 절반이 훤히 드러난 살점의 향연이었다. 


"뭐, 보호자 지도가 있으면……. 볼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아뇨……. 아니요……. 죄송해요……."


태형은 당장이라도 울 듯한 표정이 돼 허겁지겁 페이지를 내리기 시작했다. 남준이 키득거리며 웃는 소리가 유난히도 얄미웠다. 몇 번 더 버튼을 누르자 채도 낮은 녹음이 어우러진 포스터 한 가운데에 여자아이 하나가 서있는 영화가 눈에 들어왔다. 이, 이거 볼래요! 좋아요. 하지만 남준은 영화가 아니라 자신을 올려다보는 태형의 두 눈만 빤히 들여다보고있을 뿐이었다. 무엇을 수긍한 건지 알 수 없다. 남준이 소파에 앉은 채 또다른 리모컨 같은 것을 조작하자 커튼이 촤르륵 닫히고 거실의 조명이 은은해졌다. 느린 BGM과 함께 영화가 시작됐다. 


태형은 그제야 몸을 조금 편하게 누이고, 자신의 무릎 위에 올라온 팝콘을 한 알 주워먹었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고소함이 싫지 않았다. 느리게 전환되는 장면에 집중하고 있는 태형의 귓가로 남준의 속삭임이 와닿았다.


"태형 씨."

"네, 네에?"


스크린에 빤히 시선을 고정하고있던 태형이 어깨를 화들짝 떨었다. 전체적으로 조금 가라앉은 분위기에, 아직까지 대사 한 줄 없다. 이상한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소송 절차를 진행하려면 슬슬 서명이 필요해요."

"아……. 그거, 그거요. 서류……. 죄송해요, 얼른 드릴게요."

"미안해요. 재촉하려던 건 아닌데……."

"아뇨, 아니에요. 제가 시간을 너무 오래 끌어버린 것 같아요."

"……혹시 불편한 건 아니죠?"


태형이 불시에 입을 꾹 다물었다. 불편함은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묘하게 마음 한 구석이 찝찝한 것도 사실이다. '후견인'이라는 단어 그 어디에도 심경을 거스를 것은 없는데, 괜히……. 태형이 품에 안긴 팝콘 그릇을 만지작거렸다. 저기, 아저씨…….


"조항, 조금만 고쳐주시면 안 돼요?"

"뭘 어떻게 고쳐주면 될까요?"

"……아저씨한테, 제가 받은 것들이요. 갚고 싶어요, 나중에 어른 되면……. 그러니까, 제가, 불편하거나, 그런 게 아니라요……. 그냥, 죄송해요……."

"그렇게 많이 울고도 아직도 나한테 미안할 게 남았어요?"


남준이 머리 위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진지하게 꺼낸 얘긴데……. 가벼운 대꾸에 어쩐지 심통이 난 태형이 눈을 흘기자 남준이 태연히도 아아, 하고 입을 벌린다. 이 정체 모를 행동의 의미를 간파해보려던 태형이 빠르게 팝콘을 서너개 입으로 밀어넣어주자 남준이 만족스러운 듯 웃어보였다. 남자의 입술과 손가락 끝이 간질간질하게 서로를 스쳤다. 오드득 오드득, 팝콘이 입안에서 터지는 소리가 났다. 심장이 간질간질, 함께 진동한다. 남준은 나직하게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태형 씨가 정 그렇게 생각하면 바꿔줄게요."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어차피 조항을 바꾸는 것 정도는 금방 하니까요.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내 일이 아니고 변호사가 할 일이죠."


집에서 팝콘은 처음 튀겨봤는데, 나쁘지 않은 것 같네요. 태형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영화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영화는 캄캄하고, 흐릿했다.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네. 등장인물은 기껏해야 서넛 뿐이었다.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둔 남준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잠깐 확인 좀 받고 올게요. 태형은 전화를 받으러 멀어지는 남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오드득, 입안으로 따끈따끈한 팝콘을 밀어넣었다. 영화 속에서는 빨간 옷을 입은 여자 하나가 건물 옥상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뭐야, 기분 나쁘게……. 그제야 태형은 이 영화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장르일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시선이 자연스레 영화가 아닌 멀어지는 남준의 등을 따라간다. 


"네, 희경 씨. 아닙니다, 고생 많았어요."


태형은 팝콘 그릇을 내려두고 쿠션 하나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천천히 귀를 막았다.


희경 씨.


여자 이름이네.








창밖에는 커다란 보름달이 떠있었다. 어쩐지 방이 유난히 밝더라. 잠눈이 밝은 태형은 빛이 한 점이라도 들어오면 잠을 잘 못 자는 체질이지만, 그렇다고 일어나서 커튼을 칠 용기는 없었다. 침대 아래로 발을 내딛는 순간 웬 하얀 손이 튀어나와 발목을 낚아챌 것만 같은 공상이 차올랐기 때문이었다. 젠장……. 


태형이 뭣도 모르고 포스터만으로 고른 영화의 장르는 무려 호러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찝찝함만 가득한, 잔잔한 공포물. 무서운 영화라면 누가 돈을 줘도 안 보는 성격이었지만, 남준이 도중부터 결말을 꽤 궁금해하는 것 같길래 차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한 번은 소름끼치는 BGM 때문에 울 듯한 표정으로 팝콘 그릇을 내던질 뻔 했는데, 남준은 웃음을 터트리는 대신 가만히 태형의 어깨를 안아줄 뿐이었다. 아직도 남준의 손이 닿았던 어깨가 따끈따끈했다. 토닥토닥, 두근두근. 심장 소리가 곧 남준의 토닥거림을 따라갔다.


"아저씨……. 주무세요?"


태형은 이불을 살짝 걷어올리고 작게 속닥거렸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주무시나봐……. 눈을 뜨고 있으면 방 모퉁이에 누군가가 서있을까봐 겁이났고, 눈을 감으면 끔찍한 환상이 보였다. 태형은 주섬주섬 손을 뻗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불시에 밝은 스크린이 켜지자 눈이 불에 타는 듯 따가웠지만, 눈은 금방 인위적인 밝기에 적응했다. 주섬주섬 할 일 없이 포탈을 켰다, 껐다, 다시 켰다……. 의미없는 새벽녘의 실시간 검색어를 확인하던 태형은 검색 기록에 떠있는 '매형'이라는 단어를 보자 다시 기분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매형은, 누나의 남편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알고는 있었지만, 혹시나 싶어서 그날 집으로 돌아가 다시 찾아봤다. 그 새 단어의 뜻이 바뀌었을 수도 있잖아, 하고 말도 안 되는 변명거리를 만들어내기까지 하면서. 아쉽게도 단어는 그대로였다. 


남준에게 선을 봐야 할 상대가 있다는 사실은 진작 들어 알고 있었지만, 어째서 일이 잘 풀릴 경우 그가 그만의 가정을 꾸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아니, 생각하지 못한들 뭐 어때. 내가 왜, 그런 것까지, 생각을 해야하냐고. 그렇지만 태형은 고집스럽게 누군가의 남편이 될 남준의 모습을 상상했다. 멋진 턱시도에, 말끔하게 넘겨올린 머리, 근사한 웃음을 짓고 있는 아저씨. 그럼 저 멀리서 예쁘고 사랑스러운 신부가 천천히 입장할 것이다. 하객들의 진심 가득한 축복을 받으며, 그럼 꼭 못된 친구들이……. 키스를 하라고 성화일 테고……. 두 사람은…….


이불 아래로 폭, 얼굴을 파묻었다. 이불에서도 시원한 냄새가 났다. 남준의 페로몬이 풍기는 향이었다. 좌로 한 번, 우로 한 번 소심하게 구르자 가뜩이나 말똥말똥하던 정신이 더욱 더 또렷해진다. 이건 꼭 떨어진 신발 밑창 같은 기분이다. 그러니까, 무슨 의미냐면……. 몰랐더라면 차라리 걱정될 것도 없었을 텐데, 괜히 밑창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고나면 걸음걸이가 엉거주춤해지듯. 태형은 이불 아래에 입술을 숨기고 웅얼거리듯 눈치를 살폈다.


"아저씨……. 주무시는 거 맞죠?"


급기야 태형은 이불을 허리 아래까지 걷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반듯하게 누워있는 남준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각도였다.


"주무시는 거 맞죠?"


같은 질문을 던졌으나 고른 숨소리가 대답 대신 돌아왔다. 심장이라는 것은 도무지 줏대가 없다. 예전에 교과서 모퉁이의 자투리 쯤에서 읽은적이 있다, 사람의 심장박동은 주변에서 들려오는 규칙적인 소리를 반사적으로 따라가려는 습성이 있다고. 태형은 가만히 셔츠를 비집고 심장께를 손바닥으로 문질러봤다. 작게 주먹을 쥐고 가슴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이따금 남준이 '평범한' 알파였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날, 지하철에서 남준이 자신의 히트를 눈치채지 못했다면……. 열 때문에 기억이 온전하지는 않았지만, 허벅다리 안쪽을 더듬던 낯선 손을 어렴풋하게나마 떠올리면 금방 속이 매스꺼워졌다. 확실한 건 단 하나 뿐이었다. 만약 김남준과 김태형이라는 점이 그대로 쭈욱, 평행선을 그어나갔다면, 둘은 지금쯤 각자의 백지 위에 아주 다른 그림을 그려나가고 있겠지. 그 그림이 어떤 모양을 하고있을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우선은 모르는 척 하고싶었다, 사람의 뇌는 간사하니까. 한 번 쯤은 속아 넘어가줄 법도 해서.


하지만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 분은……. 아저씨는 그 분의 페로몬을 맡으실 수 있어요? 나는……. 나는, 다른데. 아저씨는 내 페로몬을 맡을 수 있는데. 아저씨는……. 


내 페로몬만 맡으실 수 있는데.


남준에게 팝콘을 먹여주느라 슬쩍 스쳤던 입술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손가락이 예민한 부위인 탓일까, 아직도 손끝에 도톰한 피부가 선명히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입술'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 만으로 뺨이 화끈거렸다, 꼭 속에서 불덩어리가 터지기라도 하듯. 머릿속에 훤한 노을빛 하늘이 펼쳐졌다. 어차피 그날은 그냥 실수였을 뿐이고, 아저씨는 기억도 못하실 텐데……. 괜히 숨이 가빠진다. 유치한 마음은 별 것 아닌 사소한 접촉 위에 애써 변명을 덧붙이고, 이유를 만들어낸다. 가장 괴로운 것은 스스로의 행동이 얼마나 유치한지를 알면서도 도저히 이 날뛰는 생각의 갈래를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때는 온 세상이 그토록 조용했는데, 왜 그리도 미친듯 심장이 뛰었을까. 태형이 슬그머니 허리를 숙였다. 남준의 페로몬이 천천히 진득해진다. 몸이 고꾸라지지 않도록 한쪽 팔로 단단히 균형을 잡고,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그 새 조금 길어버린 머리카락이 뺨과 이마 위로 쏟아졌다. 나는, 정말, 다른데…….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히트는 아무 문제 없이 지나갔다. 잠깐 미열에 시달린 게 전부였고, 평소처럼 의식을 잃지도 않았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온 몸이 홧홧해지기 시작했다.


심장이 미친듯이 내달리고 있었다. 태형은 코와 코가 짓눌리지 않도록 슬그머니 고개를 틀었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움직임이었다. 두근두근, 심장 뛰는 소리가 지구를 쩌렁쩌렁 울리는 기분이 들었다. 신기하다. 이렇게 큰 소리가 아저씨에게는 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어쩌면, 나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아저씨의 오메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를 거라고. 부드럽게 입술이 맞닿았다. 눈을 질끈 감고는 가만히 숨을 참았다. 


그러면 시간이 단 1초라도 멈출까봐.











언제 잠들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눈을 뜨자 세상은 낯설만큼 밝았고, 집안에는 고소한 냄새가 가득했다. 까무룩 늦잠을 자버린 게 부끄러워진 태형은 급하게 몸을 일으키다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휘청거렸다. 아, 일어났어요? 태형은 현기증을 가라앉히기위해 멀뚱멀뚱 침대에 앉은 채로 남준의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고개만 돌렸다. 어디 가세요? 편안하게 일요일 아침을 보낼 차림새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남준은 넌지시 말을 돌렸다.


"잘 됐네요. 토스트……. 보고 얼추 따라해보기는 했는데, 맛은 그냥 그래요. 아, 차라리 도시락 시켜줄까요?"

"오늘 일요일인데……."

"……조금 급한 일이 생겨서요."

"혹시 어, 어제 통화하신 것 때문에요?"


태형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남준이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매만지다말고 의아한 눈빛으로 자신을 돌아보는게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튀어나간 말이 괜한 참견처럼 느껴지지나 않을까 싶어 풀이 죽었다. 의기소침해져 푹 숙인 시야 사이로 남준의 걸음걸이가 다가왔다. 그가 자신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리는 게 느껴졌다.


"가지 말까요?"

"네, 네?"

"태형 씨가 가지말라고 하면 안 갈게요."

"그치만……."


근원 모를 어리광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도 다정하게 끝이 올라간 남자의 입꼬리를 보자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었다. 그제야 태형은 놀림을 당한 듯한 기분이 들어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지, 꼭 자신이 형편없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실제로 어린아이인데도, 그러니까, 그건 모순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아니기를 바라기라도 한 것 처럼…….


"……여기, 비뚤어졌어요."


태형은 어쩔 수 없이 가만히 손을 뻗어 뒤로 접힌 넥타이의 매듭을 조심스럽게 매만질 뿐이었다. 남준이 태형의 눈높이에 맞춰 슬그머니 허리를 낮추자 소나무향이 물씬 가까워졌다.


"금방 돌아올게요. 두어 시간이면 돼요."


더 누워있어도 된다는 만류를 마다하고 태형은 엉기적 엉기적 현관까지 남준을 마중나갔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 순간, 남준이 문을 닫으려다말고 태형을 힐끗 쳐다보며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입꼬리는 웃고 있었는데, 눈가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씁쓸함이 어려있는 것 같았다. 남준이 무거운 현관문을 밀어 닫자 자동으로 잠금장치가 걸리는 소리가 났다. 그때, 다시 삐비빅, 삐비빅,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문앞에 오도카니 서있던 태형은 문을 닫고 나갔던 남준이 헐레벌떡 들어오는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두고 가셨어요?"

"아뇨…….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불시에 남준의 커다란 손이 와닿는다. 더벅한 정수리를 좌우로 쓰다듬는 손길이 이루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다정했다.


"다녀올게요."


그는 단지 제게 그 인사를 돌려주기위해 돌아온 것이었다. 두 번째로 현관문이 닫힌 뒤에야 태형은 손바닥 위로 뺨을 파묻었다. 지난밤의 낯간지러운 기억과 남준의 오목한 보조개,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노이즈처럼 의식을 침범한다. 이런 걸 현타라고 하나…….


낯선 집에 혼자 남겨지게된 태형은 황망하리만치 넓은 식탁 위의 따뜻한 토스트를 내려다봤다. 모서리는 서툴게 잘려나가 있었고, 여기저기 그으른 자국이 남아있는 게 여간 웃긴 게 아니었다. 막 눈을 뜬 터라 크게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온기가 남아있을때 토스트를 해치우고싶어진 태형은 허겁지겁 손을 씻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두 시간……. 그동안 뭘 하지. 아직 졸음이 쏟아졌지만 생각해보니 혼자 주인도 없는 침대에 누워 자버리는 건 이상하다. 태형이 우물우물 토스트의 가장자리를 베어물었다. 살짝 탄내가 나긴 했지만 달달하고 바삭바삭한 것이, 꽤 괜찮았다. 그때, 느리게 토스트를 씹어넘기던 태형의 휴대폰 액정 위로 익숙한 이름이 반짝였다. 


민석의 문자였다. 


[마음을 바꿨어.]


손에 들고있던 토스트가 접시 위로 툭, 떨어졌다. 뒤이어 진동이 드륵드륵, 몇 번이나 더 울렸다. 


[도와줄게. 지난 번 만났던 놀이터에서 만나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혹시나 겁에 질린 민석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할까 싶어 조바심이 난 태형은 허겁지겁 욕실로 달려들어가 찬물을 끼얹었다. 그 사이 태형이 식탁 위에 엎어둔 휴대폰이 몇 번 더 울렸다.


[혼자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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