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 알 수 없는 말만 남긴 채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일상은 다를 바 없었다.


마물이 나타나고, 그걸 잡고, 보고하고,

마법사들은 연구하느라 집에도 못 들어간다고 하고,

왕성의 알현도, 국무도, 전부 평소와 같았다.


"정말 전쟁이 일어나긴 한다는 거야...?"


오죽하면 여울이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릴 정도로.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아름답고 고요한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날 새벽.


쿵-, 쿵-.

잠을 자던 이들마저 화들짝 놀라서 깰 만큼, 커다란 진동이 울렸다.

대륙 전체가 뒤흔들리는 듯, 이리저리 몸을 타고 오는 진동에 사람들은 가까스로 몸을 가누며

창 밖을, 집 밖을 바라봤다.


"오... 신이시여..."


밖을 바라 본 누군가가 낮게 읇조렸다.

아니, 어쩌면 그의 생 마지막 기도였을지도.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마치 지옥문이 열리듯 쏟아지는 마물들.

집채만한 것도, 사람만한 것도, 하다못해 길고양이만한 것도...

그 크기와 모습도 다양한 마물들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ㅁ... 마물이다!!!!! 마물이 나타났다!!!"


눈 앞에서 신을 찾던 이가 잔인하게 살해당하고,

고요했던 대륙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누군가의 절규, 비명, 애타는 목소리가 푸르게 빛나는 새벽 속에 붉게 울렸다.




"상황이 지금 어떻게 되고 있죠?"


시온이 얇은 잠옷 위에 겨우 숄만 걸친 채

각 대귀족들이 있는 저택과의 통신구에 물었다.


"먼저, 기존과는 달리 마물의 출현 장소가 너무 다양합니다."


"등장하는 마물의 크기도 위력도 전부 다릅니다."


"현재 기사단측에서 대응하고 있습니다만, 턱없이 부족합니다."


"동서남북을 막론하고 여기저기서 출몰하고 있습니다!"


겨우겨우 상황보고만을 위해 켜 둔 통신구로는

희미하게 비명소리가 넘어왔다.


들으면 들을 수록 암담한 상황.

시온이 굳게 다문 입술을 스스로 짓이겨 물었다.


"최대한 많은 사람을 살리세요. 부도, 명예도, 권력도 아닌, 사람 목숨이 가장 중요합니다."




시온의 당부에 대귀족들이 응하고, 통신구가 꺼졌다.

그러나 다시, 시온이 생각난 게 있는 듯, 급하게 다른 좌표를 연결했다.


연결된 통신구 너머에서는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클리안 황태자. 이런 시각에 연락을 하게 되어 유감입니다.

혹시 헤니즈로 지원을 보내줄 수 있겠어요?"


"- 아, 헤니즈의... 시온 전하십니까? 죄송합니다만, 윽-"


"태자?"


유클리안의 목소리 너머 희미하게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

명령을 하달하는 목소리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전하. 송구스럽지만, 현재... 저희... 대륙에.... 마.. 물이..."


유클리안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끊어지나 싶더니, 이내 통신이 끊겼다.


시온의 머릿속에는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온 몸에 휘도는 오싹한 기분을 애써 떨쳐내려 하며,

다른 좌표로 통신구를 연결했다.


그러나 연결된 통신구에서는 제대로 된 답변은 커녕,

웅성거리는 소리만 잔뜩 들려올 뿐이었다.


"네키아 황자?"


대답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다만, 간간히 들려오는 말소리에는 '마물'과 '황자를 찾는다'는 것만이 있을 뿐.




불길한 예감은 어째서 틀리지 않는 걸까.


시메트리아에서 시작된 이상현상과

어느 날 동시다발적으로 퍼진 마물.

그 어느 곳에서도 도움을 구할 수 없고, 도움을 줄 수도 없는.

이 상황을 어찌 해야 한 단 말인가.


시온이 황망히 바라보는 창 밖으로는 이제 해가 뜨고 있었다.

하얗게, 노랗게, 붉게, 세상을 물들이는 햇볕이 들어오고,

로운이 다급히 시온의 침실을 열고 들어서며...


시온의 눈에서 눈물이 한 줄기, 뺨을 타고 흘러내릴 때,

바론의 기사들이 그녀를 끌어갔다.


아아, 지옥이 있다면, 직접 세상의 종말을 본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그 누구의 안위조차도 묻지 못 한 채,

왕이라는 이유로 다급히 몸을 피해야만 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오랜 시간 평화를 이끌었다고 생각했으나,

그로 인해 저항 한 번 하지 못 하고 도망쳐야 하는 구나.


시온은 자괴감으로 스스로를 옥죄어가고 있었다.

무너져내리려는 몸을 붙들어가며 그녀를 호위하는 기사들의 표정 또한,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절망적인 아침이었다.








* 가장 쓰고 싶었던 장면이 다가오네요... 너무 좋습니다...

* 조금 사건이 빨리 진행되는 경향이 없잖아 있는 것 같아요... 수정을 하고 싶은 데 어디부터 손대야 할 지 모르겠음...

취미로 끄적이거나 이용하는 것 (프로필사진 @ agls_b님 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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