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편의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질풍노도의 중학생... 일단 연우정은 성질은 안 좋아도 같이 다니는 친구들은 있는 은근히 인기 많은 친구고, 김지호는 세상을 왕따시키는 타입이라 친구 없이 조용조용 다녔을 것 같아요. 김지호에게 다가가려다가 내쳐진 연우정의 친구들이 김지호를 음침한 새끼라고 까면 연우정은 김지호를 슬쩍 보고 ‘저 얼굴이면 뭐...’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겠죠.

그러다가 연우정이 김지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운동회 때인데요. 그 조용한 아싸 김지호가 계주의 마지막 주자로 나간다는 거예요. 알고 보니 초등학교 때 달리기 잘하기로 은근히 소문이 났었다나 봐요. 어쩐지 최근에 김지호 주변을 둘러싸고 시끌시끌하더라니. 그래도 작고 마른 애라 큰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경기가 시작되고 하필이면 마지막에서 두 번째 주자가 넘어졌어요. 우리 반은 졌구나, 아이들 모두 침울한 상태인데 김지호가 바통을 이어받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갑니다. 턱을 괴고 있던 연우정이 흥미를 가지고 김지호를 눈으로 좇습니다. 1등은 못해요. 4등으로 골인. 꼴등에서 4등이 되었으니 모두 김지호가 잘했다고는 생각하지만 1등도 아니고 3등 안에 든 것도 아니니 관심은 금방 사라집니다.

하지만 얼굴이 발개져서 숨을 급하게 내쉬는 김지호를 연우정은 오래도록 응시합니다. 연우정은 쟤가 더 절박하고 곤란했으면 좋겠다. 그런 이상한 생각을 하게 돼요. 그 뒤로 자꾸 김지호가 눈에 띄는 거죠. 쉬는 시간이면 엎드려 자거나 급식실 구석에서 혼자 밥을 먹거나 체육 시간이면 혼자 멀리 떨어져 멀거니 허공만 쳐다보고 있는 아이가요.



연우정은 그날 이후로 괜히 말을 걸거나 툭 치고 지나가거나 거슬리게 행동합니다. 지나가는데 손목을 쓱 잡더니 "너 진짜 말랐다."라고 말하며 심기를 건드리거나 누가 봐도 고의로 어깨를 툭 치고 갔으면서 뻔뻔하게 김지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훑고선 성의 없이 "미안."하거나... 김지호는 짜증이 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키도 덩치도 큰 연우정과 굳이 싸우고 싶진 않아 철저히 무시해요. 하지만 그런 무시가 오히려 연우정의 구미를 당깁니다.

연우정은 자신의 짓이 유치하다는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마냥 잘해 주기는 싫은 마음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다고 미움을 받고 싶은 건 아니라 유치한 짓을 관두기는 하지만 눈길은 내내 김지호에게 따라붙고, 김지호는 그 시선을 신경 쓰며 무시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김지호를 무시하는 수학 선생이 김지호에게 문제의 답을 물어봐요. 김지호는 틀린 답을 말하고 바로 창피를 당합니다. 반 아이들이 와하하 웃는 가운데 웃지 않는 사람은 김지호와 연우정뿐이에요. 연우정은 고개를 숙이고 교과서를 노려보고 있는 김지호를 빤히 바라보다가, 수학 선생이 자기 근처로 왔을 때 발을 걸어 버려요. 수학 선생은 대차게 넘어지고, 그제서야 김지호가 뒤를 돌아봅니다. 

눈이 마주쳤어요. 김지호는 상황 파악을 하려는 듯 넘어진 선생과 연우정을 번갈아 봅니다. 연우정은 웃음기가 담긴 눈으로 김지호를 마주하다가 화가 단단히 난 선생에게 불려 앞으로 나가 매로 엉덩이를 세게 맞습니다. 그렇지만 연우정은 소리 한 번 안 내고 다 맞은 다음 돌아서요. 김지호는 연우정에게 눈을 떼지 못합니다. 연우정은 그 시선을 즐기고요.

그날부터 김지호는 연우정을 힐금대기 시작하고, 눈이 마주치면 휙 피하곤 합니다. 연우정은 그런 김지호를 지켜보다 어느 날 급식실에 혼자 앉아 있는 김지호의 앞에 앉아요. 젓가락을 든 김지호의 손이 움찔거리고, 연우정이 뭐라고 말을 걸려고 하는 찰나, 연우정의 친구들이 우르르 그의 옆에 앉더니, "너 왜 거기 앉냐?" "뭐야, 김지호잖아?"하면서 방해를 합니다. 김지호는 짜증이 나서 식판을 들고 다른 곳으로 가 버려요. 연우정은 떠나가는 작은 몸을 보다가 혀를 찹니다.



기회는 늦지 않게 와요. 점심을 먹고 맨날 어딘가로 사라지는 김지호를 찾아 학교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리던 연우정은 미술실 책상 위에 엎드려 있는 작은 몸을 발견합니다. 그는 바로 미술실로 들어가고,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김지호가 뒤를 돌아보고 눈을 동그랗게 떠요. 그 모습이 작은 동물 같고 참 귀엽다고 생각합니다. 연우정은 김지호가 앉아 있는 옆, 바닥에 앉아요. 


"뭐 해?"

"뭐."

"묻잖아."

"눈 없어?"

"말을 험하게 하네. 너 침 흘렸다."

"......"

"거짓말인데."


허겁지겁 입술을 닦는 김지호를 보며 연우정이 한쪽 입꼬리를 비죽이며 웃습니다. 김지호는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아요. 여긴 자신만의 아지트인데, 자신의 아지트를 침범한 연우정이 못마땅하기도 해서 눈길을 주지 않고 정면을 노려봅니다. 그냥 나가면 그만인데 어쩐지 그러기가 쉽지 않아요.

연우정은 자신을 보지 않는 김지호가 못마땅해서 이야깃거리를 찾지만, 그도 그렇게 사교성 있는 성격은 아니라서요. 주변 친구들도 그냥 자기들이 알아서 붙은 거고 연우정은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어요.

문득 김지호가 앉은 책상에 놓인 색종이가 눈에 띕니다. 김지호 것은 아닌 듯하고, 미술 시간에 쓰고 누가 두고 간 모양이에요. 연우정은 긴 팔을 뻗어 색종이를 채 가고, 김지호의 시선이 드디어 다시 돌아옵니다.

연우정은 색종이 한 장을 빼서 가지고 놉니다. 그냥 잘게 잘게 찢는 게 다예요. 연우정의 주의가 자신이 아닌 색종이로 향했다는 것이 어쩐지 초조해진 김지호는 자신 혼자 그를 신경 쓰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자기도 보란 듯이 색종이 한 장을 빼서 학을 접어요. 학을 다 접고 나니 연우정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너 손재주 좋다."

"......"

"그거 나 줘."


흥. 별것도 아닌 걸로 감탄하기는. 김지호는 코웃음을 삼키며 종이학을 연우정에게 줍니다. 연우정은 학을 쥐고 돌려 봐요.


"너 미술 잘해?"

"몰라."

"잘할 것 같은데. 나 이거 어떻게 접는지 가르쳐 줘."


김지호는 연우정의 요구에 망설이다가 학을 접는 걸 가르쳐 줘요. 자신이 연우정보다 뭔가를 더 잘해서 그에게 가르쳐 주어야 하는 상황이 썩 마음에 듭니다. 연우정은 김지호의 표정을 살피며 일부러 학을 더 못 접어요.


"너 진짜 못한다."

"왜. 이번 건 괜찮지 않아?"

"별로야."


그렇게 티격태격하며 학을 접고, 손이 스치기도 하고... 그렇게 점심시간을 보냅니다. 



그 뒤로 연우정은 점심을 먹고 나면 미술실을 찾아요. 그곳엔 항상 김지호가 있습니다. 이제 이곳은 둘의 아지트가 되었어요.

연우정은 평소에도 김지호와 함께 다닐 생각이 있지만, 김지호는 미술실 밖에서 연우정을 철저히 무시해요. 이유를 알 것 같기는 하지만... 뭐, 다른 애들이 김지호에게 눈독 들이고 관심 가지는 것도 싫어서 연우정은 장단을 맞춰 줘요. 

그렇게 서로 가까워지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혼자 다니는 김지호를 딱하게 여긴 한소연이 쉬는 시간마다 김지호에게 말을 붙여요. 김지호는 자기를 괴롭히는 것도 아닌데 적당히 대해 주지만, 한편으로는 불편합니다. 그리고 한소연과 이야기할 때마다 연우정의 따끔한 시선이 느껴져요.


"너 연우정이랑 친해?"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22. 한소연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김지호는 굳어요.


"아니."

"왜? 친한 것 같은데?"

"안 친해."

"진짜? 나 너희 점심시간에 미술실에서 나온 거 봤는데?"


김지호는 둘만의 아지트가 들켰다는 사실에 화가 납니다. 그리고 연우정과 둘이 친한 건 둘만이 알고 싶은 사실이에요. 둘만이 알고 있는 공간, 시간... 그리고 자기랑 친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연우정도 평판이 안 좋아질까 봐 ㅠㅠ 김지호는 급발진합니다.


"그딴 자식이랑 하나도 안 친해!"


한소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김지호의 뒤를 봅니다. 이런. 김지호는 고개를 돌렸다가 무표정한 낯으로 자기를 내려다보는 연우정을 마주합니다. 연우정은 생각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김지호를 보다가 돌아서요.

심장이 두근두근 뛰지만 괜찮아요. 연우정은 이해할 테니까요. 하지만 그다음 날, 점심시간에 연우정은 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기다려 봐도... 쳐다 봐도... 더는 자기를 돌아봐 주지 않아요.

결국 김지호는 크게 용기를 냅니다. 교문 앞에서 연우정을 기다려요. 그런데 연우정은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다가옵니다. 친구가 없으면 말하기 좋을 텐데... 김지호는 손끝을 매만지며 안절부절못하다가 연우정과 눈이 마주칩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용기가 불쑥 솟았어요. 


"연우정."


자신의 이름을 들었을 게 분명한 연우정이, 김지호를 슥 보고 스쳐 지나갑니다.

무시를 당했어요. 연우정한테.

이대로 끝인 걸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거지? 너라면 날 이해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화가 나고 속상하고 슬픈 김지호는 처음 겪는 감정의 파도에 정신을 못 차리다가 소리를 빽 질러요.


"너 왜 나 무시해?"


그 소리에 연우정이 멈춰 뒤돌아 봅니다. 연우정은 무표정해 차갑고 무서운 낯으로 김지호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말해요.


"왜. 그딴 새끼는 너 좀 무시하면 안 돼?"


김지호는 멍해집니다. 다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라면 날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김지호는 가방에 든 작은 플라스틱 통을 꺼내 연우정에게 던져 버려요.

씩씩대며 자기를 노려보는 김지호. 물기 어린 눈. 더없이 절박하고 곤란한 얼굴. 기묘하고 꺼림칙한 환희를 느끼며 연우정은 시선을 내립니다. 가슴에 맞고 바닥으로 떨어진 통 안에는 종이학이 있어요. 미술실을 둘만의 아지트로 삼은 첫날, 연우정이 드디어 제대로 접어 건네준 그 종이학이요.

연우정이 그걸 줍는 순간 김지호는 돌아서 뛰어갑니다. 눈물을 닦으며 다짐해요. 다시는, 다시는 연우정과 아는 척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 집으로 돌아왔는데... 마당에 아버지가 있습니다. 술에 취해 눈이 풀린 아버지요. 김지호는 뒷걸음질치지만 아버지에게 머리채를 붙잡히고 맙니다. 그렇게 찾아온 폭력의 시간 속에서, 눈을 질끈 감고 최대한 몸을 웅크리던 김지호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몸이 자유로워집니다.

눈을 뜨자... 연우정이 아버지의 몸 위에 올라타 아버지를 마구 때리고 있어요. 차갑고 사납게 굳었지만 무섭지는 않은 얼굴. 김지호는 멍하니 바라보다가 연우정의 허리를 끌어안고 떼어 내요.

신음하는 아버지를 피해 김지호는 연우정의 손목을 잡고 달립니다. 둘은 동네의 공터로 와서 숨을 돌려요. 벤치에 연우정을 앉힌 김지호는 그의 얼굴을 보고 울컥합니다. 아버지를 때리다가 맞았는지 입가가 터져 있었어요.


"왜 그랬어?"

"....글쎄."


글쎄. 글쎄. 글쎄.

그런 말로 목숨을 걸고 자기를 지켜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요. 김지호는 울컥해서 연우정의 터진 입꼬리를 매만집니다. 연우정은 그런 김지호를 빤히 보다가 그의 손목을 잡고, 입을 맞춰요. 김지호는 퍼뜩 굳어서 어쩔 줄 몰라 해요. 그러다 입을 맞춘 채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눈을 보자....... 이건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 같아요.

눈을 감습니다. 피 맛이 느껴지는 서툰 첫키스였어요.



그 뒤로 연우정은 자기에게 붙는 친구들을 떨쳐 내고 김지호와 단 둘이 학교에서 잘 지내겠네요. 그리고 매일 김지호를 데려다주겠죠. 호되게 맞은 아버지는 김지호 옆 연우정을 발견하면 움찔움찔하고 김지호를 때리지 못합니다.

그렇게 같은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김지호는 점점 키가 크기 시작합니다. 연우정과 비슷한 정도가 되었을 때, 연우정이 지내고 있는 보육원에서 아주 큰 폭력 사태가 일어나요. 김지호는 그 사실을 뒤늦게 알고, 연우정이 맞고 자랐다는 사실도 그제야 알고, 그를 도와주는 석중원 대표란 사람의 존재도 아주 늦게 압니다.

당연히... 위로해 줘야 마땅한데. 연우정이 그랬던 것처럼 감싸 줘야 마땅한데. 왜 자기는 몰랐을까요. 연우정은 왜 자기한테 말하지 않았을까요. 연우정을 도운 사람이 왜 내가 아니라 저 남자여야 했을까요.

그 일로 김지호는 연우정을 피해 다니다가 또 급발진해서 석 대표를 모욕하고, 그 일로 대판 싸우고 냉전하지만 결국엔 눈물 뚝뚝 흘리면서 "나한텐 너밖에 없는데, 왜 넌 아니야?"하고 일생일대의 아주 솔직한 고백을 하지 않을까요. 그날 둘은 베드인합니다. ㅎㅎ

김지호는 당연하다는 듯이 연우정을 깔고... ㅎㅎ 연우정은 그런 김지호가 가소롭고 귀여우면서도 이왕 이렇게 된 거 끝내주는 첫 경험을 만들어 주고 싶어 깔리겠네요. 김지호는 당연히 연우정이 처음 아닐 거라 생각하고, 연우정은 굳이 정정해 주지 않아서... 첫 경험은 아주 힘들어지겠군요. 김지호는 손을 떨면서 연우정을 아주, 아주 소중하게 여겨 줄 겁니다.



-끝-




기력이 딸려서 이 정도로...

어디까지나 if라서요. 본편의 아이들이 어렸을 때와 성격이 좀 다른 부분도 있고, 타임라인도 좀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BL 작가 선명입니다.

선명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