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화


부정못할 진실인 것을 내가 안다는 게 제일 문제였다. 박인결은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를 꾹 눌렀다. 지끈거리는 편두통은 자주 찾아오는 편이라 가방 안에 넣어뒀던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밥을 먹고 자습을 하는 듯 세 사람은 조용히 문제를 풀거나 책을 보거나 가끔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주연은 핸드폰을 보면 주로 영화관 자리를 보고 있었다. 사실 영화야 볼 수 있었는데 하필이면 둘이서 보기로 한 영화가 인기가 너무 좋은 바람에 가까운 영화관에는 이미 자리가 다 차 있었다. 다른 영화라도 볼까 싶었지만 다른 선택지 두 사람 다 마음에 안 들었기에 이 영화로 다른 날짜 예매를 하자고 말을 맞춘 참이었다. 그렇게 안 봐도 지금쯤 예매하면 주말에 한 번은 볼 수 있을 텐데.

“이주 뭘 그렇게 봐?”

“좋은 자리 잡으려고.”

“아 그거 유명하지. 누구랑 보는데?”

이주연은 화면만 뚫어지라 쳐다보더니 떴다면서 바로 두 자리를 예매했다. 중간 자리 가운데가 그렇게 앉고 싶었나. 영화관 어디서 보든 맨 앞자리만 아니면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주연은 그렇지 않은 듯싶었다.

“누구랑 보시냐고요. 이주연 씨?”

“응? 아 박인결이랑. 얘랑 내기했었거든.”

김도원은 얼굴색 하나 안 바뀌고 박인결을 한 반 쳐다보더니 대뜸 이주연에게 물었다.

“언제 보는데 같이 보자. 혜인이랑 기원이랑도 같이 볼까?”

무슨 내기를 했는지를 물어봐야 원래의 김도원인데 질문의 방향이 달랐다. 박인결도 알 정도의 이상행동에 이주연은 당황하기까지 했다. 말하자면 박인결과 둘이서 보기로 했다고 거절할 수도 있겠지만, 이주연 성격에 그렇게 할 리가 없다. 특히나 제 절친한 친구의 물음인데 영화를 두 번 보면 두 번 봤지 저걸 거절할 성격은 못 된다.

“그럴까?”

“지온이는?”

이주연은 박인결을 슬쩍 쳐다봤다. 의식하는 듯한 행동은 기꺼웠다. 올라간 눈매가 잠시 이쪽을 봤다는 것만으로도 슬쩍 웃음이 나는 걸 억지로 가라앉히고 괴고 있던 손으로 입을 아예 가렸다.

“주말이면 안 될 거 같은데. 학원이 많아서.”

“그럼 어쩔 수 없지. 세 명 분은 내가 예약할게. 몇 시?”

나란히 앉는 건 피했지만 이미 영화관에 놈들이랑 같이 간다는 것 자체가 짜증 났다. 민기원이나 김도원이나. 왜 다들 이주연한테 목매다는 건지 아니면 그냥 쟤네가 원래 그런 성격인지 갈피고 못 잡겠다.

“와 진짜 둘이서만 보려고 했던 거야?”

민기원은 여전히 해맑은 얼굴로 만나자마자 이주연을 껴안고 시작했다. 얼굴의 반을 마스크로 가린 녀석은 서혜인이 연예인 병이라고 놀리는 것도 무시하고 이주연의 얼굴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아이고 오늘도 부드럽네. 이주연이 별 말 없는 쪽이 더 짜증 나긴 했지만. 남자애들끼리 붙어서 뭐하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주 오늘 다른 냄새 나는데?”

“섬유유연제 바꿨어. 개코냐?”

“그전 게 더 잘 어울리긴 했는데. 이것도 좋네.”

“마스크도 낀 놈이 왜 이렇게 코를 들이밀어.”

친구 맞나 싶다. 민기원이랑 이주연이 사귄다고 해도 아무도 놀라지 않을 정도로 둘 사이 스킨십은 사실 친구를 넘어섰다. 몇번이나 봤지만 사실 이전에 두 사람에게 시비를 걸던 그 뒷자리 무리들의 눈에서는 둘이 진짜 사귀는 거로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끌어안고 비비고.

“눈에서 레이저 나오는데.”

콜라와 팝콘을 받아온 서혜인은 박인결에게 대뜸 두 가지를 내밀었다. 박인결은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하다 그제야 저와 이주연의 것임을 확인하곤 받았다.

“레이저 안 쐈어.”

“안 쏘기는.”

참 친구도 종류별로 사귄다 싶었다. 어디 하나 안 거슬리는 놈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란히 줄 세워놓으면 성격도 천차만별 여기까지 오는데 고소니 달콤이니 자꾸 고소 고소 거리면 고소할 거라니 이상한 소리를 내놓는 거 보면 취향도 다 달랐다. 심지어 햄버거집을 가도 4명이서 시키는 메뉴가 다 다른 걸 목격한 바 있었다.

“박인결 안 가?”

불린 이름에 뒤늦게 고개를 들자니 이주연이 콜라와 팝콘을 이미 냉큼 가져가고 있었다. 슬슬 영화 시작할 시간이 다 되었다면서 계단을 오르는 녀석의 뒤를 따라 박인결은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근데 이주연.”

“왜? 앞에 잘 보고 걸어라. 여기 단이 높아서 넘어지기 쉬워.”

고개를 한 번 끄덕하고는 발아래를 잘 살펴서 올라갔다.

“뭐 물어보게? 네가 웬일이냐.”

질문을 삼킨 적이 더 많았으니 당연하지만 저런 말을 듣자니 녀석을 째려보게 된다. 박인결은 물어보려던 질문도 도로 쑤셔 넣고 이주연이 들고 있는 팝콘만 챙겨서 계단 위로 올랐다.

“아 장난친 거지. 뭔데 물어봐. 말하기 힘든 거 빼고는 다 알려줄게. 응?”

“계단에서 뭐하냐 너희.”

다치니까 얼른 올라가라는 서혜인의 말에 냉큼 다 오른 이주연은 박인결을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영화관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대답이 없자 이주연은 금방 포기하곤 제 친구들과 오늘 볼 히어로에 대해서 신나게 떠들었다. 능력이 어떻다느니 서사가 이렇게 쌓였다느니 집에 히어로 피규어까지 있는 걸 보면 꽤 좋아하는 것 같았다. 보니까 다른 세 명도 이주연의 말이 옳다. 이번 편이 마지막이 아니지 않냐 라며 호응을 해주고 있었다.

영화를 따로 자리에 본다고 해서 다를 건 없었다. 세 명이서 좀더 앞자리에 이주연과 박인결은 그보다 조금 뒤에 앉았는데 이주연은 콜라와 팝콘을 조금 먹다가도 집중한 것인지 눈에 불을 켜고 영화를 뜯어서 보고 있었다.

서사 진행을 위해서 주인공이 답답한 행동을 할 때에도 이주연은 얼굴을 조금 찡그릴 뿐 집중력을 풀진 않았다. 공부도 이렇게 하듯이 하면 성적이 더 오를 텐데. 히어로 영화야 뭇 그렇듯 고난과 역경을 다시 그 히어로가 이겨내는 이야기로 끝이 났다. 근데 생각보다 감동적이었던 것인지 옆에서 종종 훌쩍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주연도 혹시 우나 빤히 봤는데 녀석은 조용히 주먹만 꽉 쥐고 있었다.

영화가 끝나서 이제 나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옆을 봤더니 쿠키을 기다려야 한다며 빤히 스크린만 보고 있는 게 아닌가. 다들 안 나가는 걸 보니 기다려야 하는 거 같기도 싶었다. 이주연은 가만 욕을 씹으면서 히어로와 히어로를 둘러싼 상황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하기 직전이었다. 결론은 주로 감독은 개X끼라는 것이었다. 한참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또 쿠키 영상이 하나 더 있다며 앉으라길래 박인결은 또 앉았다. 이번에는 아예 핸드폰을 들고 쿠키 해석을 찾아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보통 이걸 덕질이라고 하나?

저와는 조금 먼 이야기를 하기에 박인결은 이주연을 그냥 쳐다만 볼 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쿠키 영상을 다 보고 나서야 이주연은 박인결을 쳐다봤다. 그제야 눈이 마주친 상황에 박인결은 픽 웃기까지 했다.

“왜 웃어.”

“이런 걸 과몰입이라고 하나 싶어서.”

“이게 무슨 과몰입이야. 아니 솔직히 중간에 답답하긴 했는데 애 잡고 그렇게 못되게 굴잖아 인간들이. 내가 이래서 사람들을 싫어해.”

뭘 싫어해. 처음 보는 사람이랑도 곧잘 얘기하는 편이면서. 주절주절 얘기하는 걸 들어주다 보니 밖에서 이미 세 명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단둘이 놀려고 이주연이 내건 자리의 의미는 이미 퇴색되었다. 무엇보다 리액션만 하는 박인결을 슬쩍 흘기더니 나머지 세 명에게로 달려갔다. 이제 보니 저 셋과 왜 친한지 알 것 같다. 아까부터 휴지로 얼굴을 닦고 있는 민기원은 영화관 옆자리 사람들처럼 감동먹은 건지 울고 있었고 서혜인은 그걸 이해 못 한다는 듯이 봤지만, 이주연의 얘기는 잘 듣고 오목조목 히어로의 행동에 관해서 얘기하고 있었다. 참고로 김도원은 간만에 민기원이랑 단둘이서 훌쩍거리며 어떻게 그러냐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냥 거기서 거기인 애들을 모으다 보니 지금까지 온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유일하게 떨어져 있던 건 박인결 혼자뿐이었다.

견고한 벽이 있는 것만 같았다. 사실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막상 이렇게 눈앞에서 확인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기분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친구들끼리 모여 있는 것 정도로는 아무 신경도 안 쓰인다. 박인결이라고 해서 친구가 없었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가운데 이주연이 끼어 있는 건 기분이 나빴다. 

친구 사이의 질투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티 내진 않는 쪽이 나았다. 애초에 이주연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고 미국에서 한국에 왔을 때도 이주연을 보고 싶다는 생각만 했을 뿐이다. 지금이야 넘치듯이 보고 있었으니 별 불만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야 박인결.”

가끔 절 보고 활짝 웃어주기만 하면 이 정도 질투야 그냥 숨겨버릴 수 있었다. 멍했던 시선을 이주연에게 꽂자 이주연은 한번 말해보라며 질문을 해왔다.

“너 그럼 마지막에 거미소년이 머뭇거린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그거?”

한창 그 장면에 관해서 토론 중이었던 것인지 김도원까지 총 네 쌍의 눈이 불을 켜고 박인결에게 달려들었다. 뭐 공감은 못 하지만 표면적으로 봤을 때에는.

“아무래도 똑같은 일을 겪을까 봐 그런 거 아닐까.”

“봐봐 민기원. 네가 과대해석한 거야.”

“야 이게 어떻게 과대해석이야. 자 난 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잖아. 거기서 그 배우의 눈빛은 말이다.”

오목조목 표정 연기를 언제 다 훑은 건지 민기원은 술술 자기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건 너무 얕은 감상이며 내가 생각한 게 맞다고 주장하는 애들을 보면서 박인결은 핸드폰을 확인했다.

“나 가야 돼.”

“아. 시간 늦었지? 나도 간다?”

“연락 해!”

박인결은 자신을 따라오는 이주연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더 얘기하지?”

“그럼 너 집에 혼자 가잖아.”

어렸을 때 들었던 습관이 아직까지 이어진 것도 아닐텐데, 이주연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혼자 가면 무섭잖아. 밤이 그렇게 늦은 것도 아니고 주변에 사람도 많은 걸 이주연이 모르지도 않을텐데. 불쑥불쑥 나타나는 배려에 몇 번이고 숨을 멈췄다 다시 내쉰다.

“그리고 너 쫄보고.”

“쫄보는 너지.”

“그럼 다음에 공포영화 한 번 보던가.”

안 봐도 영화 보는 내내 바들바들 떨 게 뻔했다. 어렸을 때 있었던 취향이 커서 크게 변하지도 않았을 거고. 얼마 전에도 공포게임을 호기롭게 결제하고는 한 스테이지도 못 지나가서 돈만 날리지 않았는가.

“이주연.”

“왜.”

이제 슬슬 덥네. 아직 여름이 오지도 않았는데 더운지 이주연은 반팔티를 팔락거렸다. 그날도 꽤 더운 날이었다. 동네 자체가 그리 더운 동네가 아니었는데도 그날은 유독 더웠다. 하늘에 떠 있는 햇빛이 강렬하게 집을 비추고 있었다.

“넌 나랑 친구야?”

그냥 묻는 것이다. 단순히 제가 원하는 게 친구인지 그 이상의 관계인지 헷갈려서. 이주연은 대답이 없었다. 설마 아니라고 하려고 그러는 건가.

“미친놈아 뭐라는 거야. 너랑 나랑 친구가 아니면 뭔데? 네 고추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아는 불알친구다.”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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